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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화 하나가 되다 (1) (67/250)


67화 하나가 되다 (1)
2022.04.08.



“날 속였어!”

장양 장군이 한중으로 회군하고 있다고 하여 냉큼 달려온 소소였다.

랑아대의 막사 안에 홀로 대자로 누워서는 연신 사마강을 원망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놀다가 올 걸 하는 후회가 막심했다.

사실 의병대의 정보는 틀림이 없었다. 단지 소소의 경공이 군단의 회군속도를 앞질렀을 뿐.

“하아~ 심심해.”

막사를 굴러다니던 소소는 돌연 자신의 개인 상자를 열었다. 그러더니 지난번에 소무가 사다 준 퉁소를 집어 들었다. 의병대의 유정 대협이 불던 아름다운 음률을 잊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부는 거였지?”

퉁소의 구멍으로 앵두 같은 입술이 파고들며 바람을 불기 시작했다. 당연히 소리가 나올 리가 없었다. 계속해서 시도해봤지만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심술이 났다.

“씨잉…….”

어떻게든 소리를 내야겠다고 생각할 찰나였다.

끼이이익-!

막사의 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아버지와 삼촌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전쟁터에서 돌아왔기에 하나같이 거지 같은 몰골들이었다.

소소는 미간을 좁힌 채 허리춤에 양손을 얹고 성큼성큼 다가갔다. 쪼그려 앉은 소무는 당황하며 물었다.

“딸, 화났어?”

“흥, 훈련이 지금 끝났어요?”

열흘 이상이나 신병 훈련을 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역시나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다니. 소소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말했다.

“일이 좀 있었어. 우리 착한 소소, 아버지 이해해줄 거지?”

“아니요?”

“정말로?”

소소도 찔리는 부분이 있었다. 몰래 따라 나갔다는 걸 알리고 싶지 않았다.

“음. 아버지 하는 거 봐서요!”

삐죽 튀어나온 입으로 마지못해 대답하는 모습이 사뭇 귀여워 보였다. 소무는 냉큼 딸을 안아 들고는 엉덩이를 두들기며 말했다.

“후후. 우리 소소 이제 다 컸구나.”

“아버지, 이거 어떻게 부는 건지 알아요?”

퉁소였다. 일평생 검 한 자루만 품고 살아온 그에게 악기를 익힐 여유는 없었다.

그래도 한번 시도해 봐야 했다. 천하의 검성이 퉁소 하나 못 분다는 것은 자신이 생각해도 웃기는 일이었다.

소소를 내려놓고 손을 내밀었다.

“물론이지. 어디 한번 줘봐.”

딸아이가 기대에 가득 찬 얼굴로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실패하면 돌이킬 수 없는 어두운 역사로 남게 될 터. 긴장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심호흡을 내쉬고는 자세를 잡고 천천히 불어보기 시작했다.

마음속으로는 한참 퉁소를 불고 있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차라리 검으로 산을 가르라고 하면 무엇을 택할지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난해했다.

소무는 점차 다급해졌다. 어느새 아이의 눈에 물기가 차오르며,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두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기를 잠시 후. 드디어 퉁소가 반응하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드디어 한 자락의 작은 음률이 만들어졌다. 기쁨에 찬 소무의 눈빛이 아이를 향했다.

“더해줘요.”

최악의 상황은 피했으니 더 이상 모험을 할 필요는 없었다.

“이건 어린이용이라서 아버지한테는 잘 안 맞아. 퉁소 배우고 싶어?”

“웅, 배우고 싶어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소소를 보니 고민이 되었다. 마침 딸아이를 힘만 센 천하장사로 키우는 것에 대해 걱정이 되었던 터였다. 어떻게 해서든 기회를 만들어 줘야 했다.

“그럼 아버지가 좋은 퉁소 선생을 찾아줄게.”

“히히. 고맙습니다~”

어찌나 기쁜지 소무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으며 좋아했다.

결심을 굳힌 이상 최고의 스승에게 맡기고 싶었다. 무림인 중에 음악에 능한 자들을 몇 알고 있지만, 강호를 떠난 이상 그들에게 부탁할 수는 없었다.

‘한중에서 찾아야 한다. 무조건 전투가 개시되기 전에 찾아야 한다.’

적들이 몰려오면 같이 싸우겠다고 성벽 위로 올라올 게 확실했다. 그전에 아이의 흥미를 다른 곳으로 돌려놓을 좋은 기회였다.

지친 몸을 씻고 관복을 챙겨입은 소무는 우선 군사회의실로 향했다.

몇몇 부장들이 먼저 나와 자리하고 있었다. 치열했던 전투가 끝나서 그런지 모두의 얼굴이 한층 밝아져 있었다. 그런데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들이 심상치 않았다.

“내 이번에 자네를 다시 봤네.”

“항우의 기세도 자네만 못했을 걸세.”

“고생 많았네. 아군이라 아주 든든해.”

다섯 명의 장수를 참살한 것도 모자라, 몸을 돌보지 않고 전열을 지켜냈으니 명실상부 일등공신이었다.

소무 또한 창무교위의 신분으로서 부장급의 위치였다. 고참 부장들의 질투가 있을 법도 하건만, 그런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후임 장수를 향한 진심 어린 칭찬과 격려가 느껴졌다.

“제 공이 어찌 부장님들만 하겠습니까? 우리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함께 최선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위진철 부장이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검병대에서 자네를 발굴한 내가 자랑스럽군. 이참에 송나라 최고의 장수가 한번 되어보시게.”

그때 장양과 양연정 부관이 함께 군사회의실로 모습을 드러냈다. 부장들이 기립하며 그들을 맞았다.

“모두 고생하셨네. 다들 지쳤을 텐데 짧게 마무리하고 끝내지.”

“예, 장군.”

상석에 앉은 장양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우리에게 최소한 보름 이상의 여유가 생겼네. 이번 전투로 인해 피난민들이 제법 몰려들었는데, 상황이 어떠한가?”

진립 부장이 답했다.

“이곳에 오기 전 군순포에 들려 상황을 점검해봤습니다. 미리 준비해놓은 대피소에 아직 여유가 있고, 구휼미도 충분하여 당분간은 문제없을 듯합니다.”

“다행이군. 수성전에 돌입하면 장기전이 될 수도 있으니, 백문휘 부장은 최대한 많은 물자를 미리 확보해두시게.”

“알겠습니다, 장군.”

“한 가지 걱정되는 부분은 한중이 불안에 휩싸일 수 있다는 것이네. 오래 버티려면 모두가 평상시와 다름없는 활동을 유지해야 하네.”

양연정 부관이 물었다.

“묘안이 있으신지요?”

장양은 머뭇거림 없이 의견을 말했다.

“관군의 주최하에 축국대회를 열었으면 하네.”

축국(蹴鞠). 가죽으로 만든 공을 발로 차서 점수를 따내 승리하는 단체 운동이다.

열두 명이 한 조를 이루며, 허공에 설치된 상대 진영의 구멍에 공을 밀어 넣으면 이기는 것이다. 나라에서 가장 발달한 단체 놀이문화 중 하나였다.

그러나 전쟁을 앞두고 다소 어울리지 않는 발상이기도 했다.

“괜찮겠습니까?”

“긴장감을 유지하는 것도 좋지만, 그것이 과하면 독이 되는 법이지. 오히려 이럴 때일수록 모두가 동요하지 않고 평정심을 가질 수 있도록 장려해주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잠시 고민하던 부장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묘책이십니다. 병사들의 사기가 더욱 증진될 것입니다.”

“연병장에서 진행하여 백성들도 관전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장양이 표정이 밝아졌다.

“아주 좋은 생각일세. 백성들은 물론 상인들도 원하는 자가 있다면 장사를 허가해주겠네. 아주 괜찮은 축제가 될 수 있을 걸세.”

위진철 부장이 흐뭇한 표정으로 물었다.

“조 편성은 어떻게 할지요? 참가자가 너무 많으면 경기가 끝이 안 날 겁니다.”

“음. 부장들이 각 조의 조장으로 하고, 재량껏 조원들을 모집해보는 게 좋겠군. 참여자는 백성이든 관군이든 제한이 없네. 단, 랑아대는 각 조에서 한 명 이하만 참가 가능한 것으로 하세.”

한중의 최정예 병사들인 랑아대로 한 조를 이룬다면, 아무도 당해낼 수 없을 게 분명했다. 재미를 위해서라도 각 조에 최소한으로 분배하는 것이 맞았다.

진립 부장이 생필신의 모청을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모청 대장님도 참가하시겠습니까?”

“허리가 굽은 노인네가 어찌 뛸 수 있겠습니까. 혹시라도 다치는 자가 나온다면 돌봐주겠습니다.”

모두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부관님까지 포함하여 조장은 총 일곱 명입니다. 짝을 이루려면 한 조가 부족하지 않겠습니까?”

장양은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일광 백부장을 추가하여 한 조를 구성해보시게. 그럼 총 여덟 조가 되겠군. 우승한 조의 일원에게는 상금으로 은자 다섯 냥씩을 지급하겠네.”

은자 다섯 냥이면 적지 않은 돈이었다. 병졸들의 반년 급료가 훌쩍 넘는 금액이기도 했다. 모처럼 열리는 축제에 부장들도 가슴이 설레는지 얼굴에 홍조가 떠올랐다.

군사회의가 이렇게 밝은 분위기로 끝난 적은 없었다. 부장들은 서둘러 후다닥 사라졌다. 가장 뛰어난 병사들을 먼저 선점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소무는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묵묵히 걸어가고 있었다. 축국대회에 흥미는 있었지만, 의욕은 없었다.

어느 정도 맞수가 있어야 승리욕이 불타오르는 법이다. 다른 이들의 즐거움을 검성의 신체적 우월함으로 강탈해봐야 무슨 즐거움이 있겠는가.

어느새 뒤따라 나온 장양이 그에게 넌지시 말했다.

“나도 소싯적에 축국을 좋아했네. 이게 생각처럼 만만한 게 아닐세. 아무리 개인의 실력이 뛰어나도 조원끼리 몸과 마음이 맞지 않는다면 한계가 있는 법일세. 자네조차도 말이지.”

“조언 고맙습니다.”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자네의 조는 결승 근처도 못 갈 걸세. 이번엔 나의 호위무사도 참여할 것이니.”

소무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살왕이……? 의외로군.’

그가 참전한다면 대충 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어느 조입니까?”

“곽철 부장이 보급병들을 소집할 것이네. 그곳의 전력이 부족하니 함께 뛰어줄 걸세.”

“그럼 저도 한번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그나저나 자네 안색이 어두운 게, 무슨 고민이 있나 보군.”

소무는 옅은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비밀도 아니었으니.

“소소에게 퉁소 스승을 찾아주기로 했는데, 막상 알아보려니 막막하군요.”

장양의 얼굴에 인자한 미소가 떠올랐다.

“허허. 퉁소의 음률만큼 마음에 평온함과 여유로움을 주는 악기도 찾기가 힘들지. 축국대회가 끝나면 행정관에게 최고의 대가를 찾아보라고 지시해놓겠네.”

규율을 철칙처럼 지키는 장군이 이런 말을 하다니. 다소 의아한 일이었다.

“어찌 개인적인 일에 병사들을 동원하겠습니까?”

“우리 군단을 위한 일일세. 전쟁을 앞두고 한중의 제일 맹장이 거리를 방황하는 것보다는 행정병을 보내는 게 이득이 아니겠는가.”

“고맙습니다.”

“고마워할 필요 없네. 장담하건대 자네를 위한 일이라면 병사들이 서로 발 벗고 나설 걸세. 허허허.”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거닐던 둘은 각자의 방향으로 헤어졌다.

잠시 방향을 고민하던 소무가 당도한 곳은 신병들의 막사였다. 오랜만에 와보는 장소였기에 감회가 새로웠다.

눈앞으로 경계를 서고 있는 열한 명의 신병이 보였다. 병사들은 화들짝 놀라며 기립했다.

“소, 소무 대장님!?”

“이, 이곳엔 어떻게……?”

신병들의 사이에서 가장 큰 화두는 랑아대의 대장이었다. 이번 협곡전투에서 그의 무위를 처음으로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병사들에게 있어서 그는 살아있는 전설이자 영웅이었다.

소무는 긴장하는 한 병사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지금 휴식 시간인가?”

“예, 그렇습니다!”

병사들은 기합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소무의 시선이 신병 막사를 훑었다. 자신을 발견한 병사들이 멀찍이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병사들의 휴식을 방해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눈앞에 경계를 서고 있는 병사들이면 인원도 얼추 맞을 터.

“축국대회가 열린다고 하더군. 너희들, 나와 함께 뛰어보지 않겠나?”

병사들은 서로의 눈을 마주쳤다. 랑아대의 대장과 함께 축국이라니. 이보다 더한 영광이 없었다. 신병들의 사이에서 두고두고 자랑거리가 될 만한 일이었다.

병사들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두 손 들고 환영했다.

“아, 알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소무의 제안을 받은 신병들은 전의가 불타올랐다.

“시간이 없으니 연습 좀 해둬. 위진철 부장님한테 훈련 빼주라고 얘기해둘 테니.”

* * *

군순포(軍巡鋪)의 본부.

포수들은 최근 밀려드는 피난민들의 처리 문제와 치안 유지로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이들은 피로가 많이 누적되어있는 상황이었다. 본부의 상석에는 대장 황개칠이 땀을 흘리며 의자에 드러누워 있었다.

그러기를 잠시 후. 돌연 군순포의 간부들이 동시에 벌떡 일어서며 기립했다. 본부로 낯익은 인물이 입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일광 형님!?”

“형님, 어서 오십시오!”

성큼성큼 입장한 일광은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개칠아! 드디어 군순포의 위용을 천하에 보여줄 때가 왔다!”

일광의 넓은 어깨 위에는 참새 한 마리도 앉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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