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하나가 되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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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화 하나가 되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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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화 하나가 되다 (3)
2022.04.10.
소무는 딸의 손을 잡고 한중의 거리를 산책했다.
행정병들이 수소문해준 끝에 한중에 음악의 대가가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사람의 영혼을 홀릴 정도로 조예가 깊다고 하지만, 제자를 함부로 받지 않는다고 한다. 긴장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곳인가?’
깔끔하게 정리되어있는 작은 화원과 연못. 그리고 관리가 잘 된 전각이 보였다. 현화당(炫花堂)이란 현판이 눈에 띄었다.
예술을 추구하는 사람은 본디 일반인보다 감성이 풍부하다고 한다. 그것이 지나쳐 괴팍한 성격이라 오해받는 대가들이 있다. 경거망동할 수 없었다.
한참을 문 앞에 서서 묵묵히 기다리자 화원의 뒤쪽에서 집사로 짐작되는 인물이 다가왔다. 단아한 차림의 젊은 여성이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아이의 음악 스승을 찾고 있습니다.”
집사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죄송하오나 선생께서는 이제 제자를 받지 않습니다. 돌아가 주십시오.”
소소의 얼굴에 실망의 기색이 떠올랐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주인이 손님을 받지 않겠다는데 방도가 없었다. 행정병들이 알려준 또 다른 적임자를 찾아봐야 했다.
“알겠습니다.”
소소의 손을 붙잡고 등을 돌릴 찰나였다. 돌연 전각의 안에서 맑고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여보내십시오.”
목소리에서조차 아름다운 음률이 느껴지는 듯했다.
‘과연 명불허전이로군.’
집사가 문을 열어주자 목소리의 주인이 보였다. 가부좌를 틀고 앉은 여인은 검은 무명옷에 면사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옷 위로 드러난 아름다운 곡선과 칠현금에 올려진 백옥 같은 손에선 기품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소무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들어가자, 소소야.”
아이들은 감정에 솔직하다. 어느새 소소의 표정은 무척 밝아져 있었다.
“네, 아버지~!”
부녀가 기립하고 있자, 돌연 여인의 손가락이 서서히 움직이면서 칠현금을 당기기 시작했다.
그녀가 뿜어내는 선율은 영혼이 흔들릴 것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다. 패도적이면서, 기개가 넘치고, 때로는 황홀함까지 느껴졌다.
반각이 지난 후 여인의 손이 정지했다.
“무엇을 느끼었느냐?”
소소는 보조개를 피어 올리며 해맑게 웃었다. 음악을 들으니 마음이 동한 모양이었다.
“처음엔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어요! 그리고 산을 달리고…… 그리고…… 파도가 느껴졌어요!”
파도를 본 적이 없는 아이였다. 소무에게 설명만 들었을 뿐. 그것을 칠현금의 선율에서 느낀 것이다.
“정확하다. 제법 감각이 있는 아이구나.”
분위기는 좋게 흘러가는 듯했다. 하지만 소무는 마냥 웃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여인의 선율에서 중후한 내공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음공을 익힌 자로군. 게다가 자신의 기세까지 완벽히 갈무리하고 있다. 무림에서도 이 정도의 고수는 몇 없을 터인데……. 누구지?’
확인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안광을 빛내어 면사포 속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단아하면서도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모의 소유자. 그러나 그 얼굴을 확인한 소무는 동공이 부릅떠졌다. 어찌나 놀랐는지 헛기침을 할 뻔했다.
다급히 소소의 주위로 기(氣)의 장막을 펼치며 물었다.
“옥화신녀(玉化神女)?”
면사포를 쓴 여인도 화들짝 놀라는 모습이었다. 당황하는 기색과 함께 자신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기를 잠시 후.
“거, 검성?”
목소리에서는 두려움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녀는 정마전쟁의 주역이자 마교의 핵심인물 중 하나였던 옥화신녀 연설화였다. 전쟁이 끝난 후 실종된 것으로 알려진 극마의 고수였다.
소무는 반사적으로 허리춤의 검을 뽑으려다 겨우 멈추었다. 아이가 보는 앞에서 스승이 될 뻔한 자를 살해할 수는 없는 일.
그가 망설이는 것을 확인한 연설화는 안도하며 평정심을 되찾았다.
실소를 머금은 소무가 어이없다는 말투로 말했다.
“놀랍군. 그동안 정체를 숨기고 고상한 모습으로 칠현금이나 튕기고 있었다니.”
연설화의 시선이 소무의 위아래를 훑었다. 그러고는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그러는 그쪽도, 정체를 숨기고 관군 노릇이나 하고 있던 거 아닌가?”
예상 밖의 반응이었다. 오히려 큰소리를 치니 기가 막혔다.
“무수히 많은 정파인들을 죽여놓고 태연하게 백성들의 틈에 숨어있다니. 여기서 또 무슨 꿍꿍이지?”
“누가 할 소리? 그동안 검성한테 살해당한 마교인들이 수천 명인데.”
한마디도 지지 않고 있었다. 정마전쟁이 한창일 때는 자신만 보면 도망치던 인물이 말이다.
“이곳에서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거야?”
“마교 출신이라고 꼭 무슨 짓을 꾸며야 한다고 생각해? 속이 시커먼 자들은 정파 쪽이 더 많잖아.”
정파와 마교가 서로의 이념에 대해 입씨름해봐야 끝이 없는 일이었다.
“마교의 잔당들이 아직도 남아있나?”
“마교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 이름이야. 영교의 기습으로 대부분이 죽거나 흡수당한 거 알 텐데? 나도 겨우 도망쳐 나왔어.”
옥화신녀가 겨우란 단어를 사용할 정도로 영교의 힘이 강하다는 것은 예상 밖이었다.
‘어쩌면 휘나라를 강탈했다던 영교에 대해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은 아니었다.
그때였다.
“아버지, 뭐해요?”
소소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다.
기막(氣膜)을 둘러 소리가 안 들리게 해놨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둘이서 입만 뻥긋거리고 있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었다.
소무는 기막을 걷어냄과 동시에 말했다.
“소소야, 여기는 아닌 것 같아. 다른 스승을 찾아가 보자.”
과거일지라도 무림을 공포에 떨게 했던 옥화신녀에게 딸을 맡길 수는 없었다. 소소의 손을 잡으려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설마 소소가 손길을 피할 줄이야……. 게다가 딸의 큰 눈망울에서는 물기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왜요……?”
울먹이는 목소리를 듣자 가슴이 짠해졌다. 하지만 어찌하겠는가.
‘소소야, 이 여자는 무림의 마녀였다고…….’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그때 연설화가 소무를 더욱 당황스럽게 만들고야 말았다.
“이리 와서 앉아 보아라, 아가야. 자질이 괜찮으니 한번 배워보자꾸나.”
“네~ 스승님! 헤헤.”
다짜고짜 스승님이라고 부르다니. 아이를 어떻게 홀린 것인지, 어이가 없어서 말도 나오지를 않았다.
소소는 냉큼 달려가 연설화와 마주 보고 앉았다.
“무슨 악기가 배우고 싶어?”
“퉁소요!”
“마침 잘되었구나. 나한테도 퉁소를 함께 연주할 친구가 필요했단다.”
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소무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다급히 연설화에게 전음을 보냈다.
- 무슨 수작이야?
그녀는 태연하게 진열장에서 퉁소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눈을 흘겨 소무를 쓱 바라보고 있었다.
- 별일이 다 있네. 천하의 검성이 딸에게 꼼짝도 못 하다니. 아이 엄마는?
-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어서 돌려보내.
연설화는 퉁소 하나를 아이에게 건네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름이 소소? 누굴 닮았길래 이렇게 예뻐? 분명 아버지는 아닐 텐데.”
소소는 연설화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면사포에 숨은 단아한 인상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저는 엄마 없어요. 히히. 스승님도 예뻐요!
“누구와는 다르게 사람 볼 줄 아는구나. 우리, 아버지는 먼저 돌려보낼까?”
“네 좋아요~.”
말을 마친 소소는 벌떡 일어서서 소리쳤다.
“아버지, 먼저 가요!”
소무는 멍한 표정을 지으며 꿈쩍도 할 수 없었다. 그러자 연설화가 거들고 나섰다.
“아버님은 먼저 돌아가 주시겠어요?”
이렇게 홀로 축객령을 받을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 소소가 괜찮으니 어서 가라고 손짓까지 보내고 있었다.
- 만약 허튼수작을 부린다면 각오해야 할 거야.
- 나는 예전의 옥화신녀가 아니야. 과거 우리가 좋은 관계는 아니었지만, 지금은 그럴 이유가 없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연설화의 뻔뻔함에 결국 두 손을 들고야 말았다.
- 내 딸을 제자로 삼으려는 진짜 의도가 뭐야?
- 이 아이는 천우강호지곡(天遇江湖之曲)을 한 번에 듣고 해석했어. 무슨 말인지 알아? 무공으로 따지자면 천하제일의 자질을 갖추고 있다는 말이야. 거기에 아이의 순수함과 충만한 내공까지 느껴지니, 이보다 음을 연주하기에 좋은 조건이 없어.
음악의 조예만은 강호에서 옥화신녀를 따라갈 자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가 직접 딸아이의 자질이 훌륭하다고 칭찬하니 기분이 나쁠 리가 없었다. 소무는 흐뭇함을 감추며 점잖게 물었다.
-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지?
- 이 아이의 자질이라면…… 진일심소곡을 함께 연주해볼 수 있을 것 같아. 내 평생의 염원이었어. 나한테 한번 맡겨줘…….
진일심소곡(眞一心笑曲). 이것은 칠현금과 퉁소로 함께 연주하는 전설적인 합주곡의 이름이다.
어지간한 실력으로는 흉내조차 낼 수 없으며, 마음이 하나가 되어야만 연주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세간에서는 신선들이 흘리고 간 악보이며, 무엇인가의 비밀이 감춰져 있다는 소문도 돌고 있었다.
소무는 연설화의 말투에서 진심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음악에는 정파와 마교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지. 어쩌면 좋은 스승이 되어줄지도 모르겠군…….’
그의 얼굴에서 적대감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 너를 믿을 수 있을 때까지 내가 언제든 지켜볼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 해지기 전에는 돌려보낼 거지?
- 오래 연주한다고 좋은 음이 나오는 것은 아니야. 하루에 두 시진이면 돼. 그리고…… 음공을 좀 알려줘도 되지? 진일심소곡을 연주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어.
- 음공을?
- 이 곡의 호흡법을 따라가려면 반드시 사자후를 익혀야 해.
사자후(獅子吼). 거센 기성을 그것에 빗대어 말하기도 하지만, 무공에서 의미하는 사자후는 얘기가 완전히 다르다. 이것은 가공할 진기를 끌어올려 목소리로 발출하는 최강의 음공(音功)이다.
고함은 음파에 실려 폭발하듯 먼 곳으로 퍼져나가, 듣는 이들의 기혈을 들끓게 하여 내상을 입히고, 고막을 파괴한다.
게다가 이 사자의 포효를 듣는 사람들은 겁에 질리며, 최고의 수준에 이르면 수많은 인파를 동시에 격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자아이가 사자후라니?
황당함이 끝이 없었다. 어차피 중후한 내공이 없으면 수련조차 못 하는 무공이었다.
- 사자후를 수련하려면 최소한 내공이 이 갑자는 넘어야 할 텐데?
현경의 고수가 혈도를 모두 뚫어놓고 매일 같이 운기조식을 도와주었다. 그렇기에 어린 나이임에도 상당한 내공을 쌓았지만, 이 정도로 사자후는 어림도 없었다.
- 이미 어느 정도 수준은 되어 보이는데,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할게.
- 공력을 나눠주기라도 하겠다는 말인가?
- 진일심소곡을 한 번이라도 연주할 수 있다면 난 모든 걸 포기할 수 있어.
일반인들이 대가들의 세계를 쉽게 이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연설화에게 있어서 소소는 절세비급과도 같은 존재였다.
- 음공까지만이야. 마공은 안 돼.
- 고마워…….
마교의 인물한테 처음으로 들어본 단어였다. 왠지 모르게 어색했다.
현화당을 걸어 나오는 소무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서로가 강호를 떠나고 세월이 흘렀으니 지난날의 은원도 부질이 없는 것이겠지.’
조금 전 마주쳤던 여집사가 고개를 숙여 보였다. 존재감이 없었기에 무심코 넘어갔지만, 그녀 또한 얼핏 기억이 있었다.
‘동생 연초희로군.’
무공 수준은 별로이지만, 서예와 미술의 조예가 뛰어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