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한중 방어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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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화 한중 방어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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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화 한중 방어전 (4)
2022.04.15.
휘나라의 장수는 거대한 돌덩이에 꽁꽁 묶인 채로 투석기에 고정되었다.
“당겨!”
소무의 지시에 따라 십여 명의 병사들이 함께 밧줄을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사실 힘은 소무 혼자서 다 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양팔의 근육이 불끈 꿈틀대며, 밧줄이 사정없이 당겨졌다.
끼이이이익-!!!
투석기에 장전된 장수가 목숨을 구걸했다.
“멈추어라! 이런 식으로 적군의 장수를 죽이는 법이 어디에 있단 말이냐!”
“어이가 없군. 이것이 너희들의 방식이 아니었던가?”
“살려다오. 살려만 준다면 무슨 일이든 다 하겠다.”
백문휘 부장을 참수한 장본인이었다. 이렇게나마 그의 넋을 달래주어야 했다.
“본진으로 돌려보내 줄 테니 가서 안부나 전해.”
“자, 잠깐만 기다려!”
중형 투석기에서 쏘아 올린 돌덩이도 땅속으로 반장 이상을 파고든다. 하물며 초대형 투석기인 대선포의 위력은 화경의 고수라 할지라도 막아낼 수가 없을 것이다.
“발사!!!”
병사들이 동시에 밧줄을 놓자 대선포의 지레가 움직이며 굉음을 뿜어냈다.
콰앙-!!!
하늘 높이 날아오른 휘나라의 장수는 성벽을 넘어 적진을 향해 멀어져갔다.
“끄아아아악!!!”
그가 뿜어내는 처절한 비명이 메아리가 되어 한중의 성 밖을 뒤흔들었다. 전장에서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자가 없었다.
잠시 후 성 밖에서 둔탁한 굉음이 들려왔다.
꽈아앙-!!!
시끄러운 비명도 더는 들리지 않았다. 결과는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일을 마친 소무는 성내에 설치된 임시 지휘소로 이동했다. 전투가 한차례 끝났으니 한동안은 조용할 것이었다. 구경거리를 마친 다른 장수들도 하나둘씩 이동하고 있었다.
일다경이 지난 후 모든 장수가 한자리에 모였다. 의료부대를 책임지고 있는 모청은 부상자들을 돌보느라 참석하지 않았다.
전투는 대승을 거뒀지만 모든 이들의 표정이 어두웠다. 텅 비어버린 한 자리의 공백 때문이었다. 백문휘 부장이 앉아야 할 자리의 허전함이 너무나도 크게 다가왔다.
상석에 앉은 장양은 눈을 감고 있었다. 그가 애써 심경을 다스리고 있음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부하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는 입장도 말이다.
한참이 지난 후 그의 눈이 서서히 떠지며 장수들을 향했다.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야율환의 수급을 적루의 깃대에 걸어 올려두게.”
부관 양연정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장군.”
“한동안은 공격이 없을 테니, 병사들이 충분히 쉴 수 있도록 하게. 특별한 움직임이 있기 전까진 비상경계 태세에서 이교대 체제를 유지하겠네.”
장수들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 장군!”
“자네들도…… 병사들을 독려해주고 좀 쉬어두시게.”
말을 마친 장양은 회의를 끝내고 지휘소를 나갔다. 오늘따라 그의 뒷모습이 무척이나 쓸쓸해 보였다. 유능한 부하를 잃은 장군의 모습은 마치 자식을 잃은 부모와도 같았다.
양연정 부관이 남아있는 장수들을 향해 말했다.
“더는 누구의 죽음도 허락하지 않겠네. 또다시 장군의 가슴에 말뚝을 박고 싶지 않으면, 모두 강해지도록 하시게.”
말을 마친 양연정도 지휘소를 나갔다.
그의 말은 틀림이 없었다. 군단에 누가 되지 않으려면 누구보다 강해져야 한다. 다른 장수들도 각오를 다지며 하나둘씩 일어섰다.
홀로 남겨진 소무는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참혹한 전투에는 언제나 희생이 뒤따른다. 하지만 그들의 죽음이 어찌 정당하다 할 수 있겠는가……. 희생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방법을 찾아야 한다.’
곰곰이 생각해볼 문제였다.
그는 성벽 위로 올라서서 상황을 살펴보았다. 굴러다니는 시체 중 구할 이상이 휘나라의 병사들이었다. 이번 돌격으로 적들은 이만 명이 넘도록 떼죽음을 당했다.
해자를 건너기 전에 화살과 투석기에 맞아 죽은 병사들이 가장 많았다. 휘나라가 또다시 이러한 피해를 감수하며 저돌적인 공격을 감행할 확률은 극히 낮았다.
한참을 살피고 있는데, 낯익은 인물들이 근처로 다가왔다. 일광과 청해였다.
“모두 어찌 되었어?”
“우리 쪽은 허접들만 와서 한 명도 안 죽었어. 몇 놈 다치긴 했는데 생명엔 지장이 없어.”
“저희 쪽도 대장님이 제때 와주셔서 모두 무사해요.”
랑아대에는 사망자가 나오지 않았다니 반가운 소식이었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결과였다. 최상급 일류고수를 죽이는 게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살라타이의 포위와 화경급의 고수들만 조심한다면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수고들 했어. 대원들을 반으로 나누어서 교대로 쉬게 해줘.”
일광과 청해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소무의 시선이 다시 근처에 있는 현정을 향했다. 화산파 출신의 그는 랑아대에서 한 손에 꼽을 정도로 강한 대원이었다.
“현정.”
현정이 재빨리 다가와 기립했다.
“예, 대장님.”
“나 대신 중앙의 대원들을 맡아줘. 마찬가지로 교대로 충분히 휴식하고.”
“네, 알겠습니다.”
장수인 만큼 소무는 성벽의 일부분이 아닌 군단 전체를 살펴야 했다.
일을 마친 그는 한중의 성내로 이동했다. 그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의료부대였다. 군영까지는 거리가 꽤 되었기 때문에 군순포의 장원에 의료 막사가 설치되어있었다.
거리의 모습은 평소와 같았지만, 모두의 표정은 제각각이었다. 다들 방어가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소식에 긴장이 탁 풀린 듯한 모습이었다.
“감사합니다, 나으리.”
“지켜주셔서 고맙습니다…….”
마주치는 거리의 상인들마다 연신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소무는 짧게 화답하며 서둘러 군순포로 이동했다.
드넓은 장원 곳곳에 수백 명의 병사들이 드러누워 있었다. 가벼운 경상자부터 숨을 헐떡이는 중상자까지 다양했다. 백여 명의 의무병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난리였다.
그때 양손이 피로 물든 노인 한 명이 다가왔다.
“자네 왔는가.”
“좀 어떻습니까?”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는 자들은 모두 살려볼 생각이네. 허나, 살아나도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자들이 꽤 있을 걸세.”
“고생이 많으십니다. 그래도 살아있는 것만큼 소중한 것은 없지요.”
“자네 말이 맞네. 딸을 보러 왔지? 바로 저기 있네.”
모청의 말에 소무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소소가 여기 있었다니. 그의 시선이 모청이 얘기한 방향을 향했다.
내려앉은 토끼의 귀처럼 머리를 묶어놓은 여자아이. 자신의 딸아이가 분명했다.
소소는 한 병사 앞에서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저씨, 많이 아파요?”
한쪽 다리가 없는 병사였다. 가슴에도 검상을 입었는지 피가 연신 흘러나오고 있었다.
군영의 입구를 지키는 병사로 매일 아침에 간식을 챙겨줬던 인물이다. 그간 정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고통이 대단할 터인데 병사는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다.
“소소 왔구나? 아저씨는 괜찮아…….”
“퉁소 불어 줄까요?”
소소는 품속에서 퉁소를 꺼내어 들었다. 그러더니 병사의 앞에서 해심소(海心笑)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최근에 배운 곡으로, 마음을 평온하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
배운 지 얼마 안 되었는데도 실력이 꽤 괜찮았다. 주변에 누워있던 부상병들도 아름다운 퉁소의 음률에 하나둘씩 미소가 떠올랐다.
반각이 지나서 연주가 끝나자 모두가 갈채를 보냈다. 소무도 손뼉을 부딪치며 딸아이에게 다가갔다.
“우리 소소, 실력이 많이 늘었는걸?”
반가운 목소리에 소소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그러더니 소무의 품에 안겨 엉엉 울기 시작했다.
“흐어엉……. 아버지, 이 아저씨 죽는 거예요?”
아이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는 병사를 바라보았다. 상태가 심각해 보였지만, 잘 조치한다면 살아날 가능성이 있었다.
“어디 한번 볼까?”
소소를 뒤로한 채 병사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그가 다친 몸을 일으켜 상급자에 대해 예를 갖추려 했다. 랑아대의 대장은 바로 자신의 우상이었기 때문이다.
소무의 오른손이 그를 제지했다.
“이름을 말하거라.”
“양철입니다.”
“병사 양철……. 잘 싸워주었다. 내가 항상 그 이름을 기억하지.”
랑아대의 대장이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 준다고 했다. 병사는 가슴이 벅차오르는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고맙습니다…….”
그 순간 소무의 오른손이 재빠르게 움직이며 그의 전신 곳곳의 혈도를 짚었다.
푹-! 푸푹-!
순식간에 지혈을 마친 이후 양철에게 자신의 진기를 주입했다. 해일 같이 웅장하고 태양의 양기처럼 따뜻한 기운이 그의 전신을 돌며 기혈을 빠른 속도로 안정시켰다.
“혈도를 보니 내공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군. 자질이 충분하니 상심하지 말고 수련을 멈추지 말거라. 환골탈태를 이룬다면 다리는 다시 재생될 수 있다. 그 이후 나를 찾아오너라. 원한다면 랑아대에서 받아주겠다.”
병사는 그 말이 기뻤는지 참지 못하고 눈물을 쏟아냈다.
소무의 진기는 곧 그의 장기를 한 바퀴 돌며, 절단된 그의 다리로 스며들어 갔다. 그러자 병사의 안색에 홍조가 떠올랐다.
위기를 넘긴 것이다. 소무는 그가 편히 쉴 수 있도록 혈도를 눌러 깊은 잠에 빠지도록 했다. 이후부터는 의무병들의 몫이었다.
일을 마친 소무는 딸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살아날 수 있어. 아버지가 약속할게.”
“정말이죠?”
“응, 스승님은 어디에 있어?”
그녀는 자신의 기운을 모두 갈무리하고 다니기에 소무로서도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저기요!”
소소의 손가락이 정원의 구석을 가리켰다.
연설화는 검은 무명옷 대신 화사한 비단옷을 입고 나와 있었다. 활짝 핀 한 송이의 백합과도 같은 외모만 보면 도무지 마교의 고수였다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소무는 그녀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여 보이는 한편 전음을 보냈다.
- 위장술이 뛰어나군. 이곳엔 무슨 일이야?
- 먹을거리를 좀 사러 나왔다가, 소란스러운 이곳이 궁금하다고 해서 잠깐 들렀어. 근데 그동안 딸한테 옷도 안 사주고 뭐 한 거야? 애가 옷이 한 벌밖에 없어.
그러고 보니 소소의 옷은 훈련복과 전투복 등이 대부분이었다. 소무는 뻘쭘한지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 그동안 정신이 좀 없었어.
- 검성이 요즘 바느질도 해?
- 그건…….
소무가 무어라 말할 찰나, 연설화가 먼저 선수를 쳤다.
- 옷 망가트리지 말고 앞으로 나한테 가져와.
정파의 영웅이었던 자신이 마교의 간부였던 인물에게 질타를 받고 있다니. 어이가 없는 상황이었지만, 연설화의 진심이 느껴졌기에 굳이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행동이 좀 의아했다.
‘의외로군. 옥화신녀에게 이러한 면이 있었나?’
그때 이들의 틈새로 소소가 파고들며 말했다.
“배고파요~ 우리 밥 먹으러 갈래요? 나 돈 많아요~”
둘의 시선이 집중되자 소소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더니 허리춤의 주머니에서 은자 한 개를 꺼내어 보여줬다. 축국대회에서 받은 상금 다섯 냥 중, 아해와 청아한테 두 냥씩 주고 남은 것이었다.
소무는 자세를 낮추며 물었다.
“뭐가 먹고 싶어?”
잠시 고민하던 소소는 손뼉을 부딪치며 말했다.
“음~ 오리고기!”
소무와 연설화는 얼떨결에 함께 거리로 나섰다. 얼마 걷지 않아 소소가 그들의 틈새로 파고들더니 양손을 올렸다. 손을 잡아달라는 의미였다.
잠시 후 이들 셋은 나란히 늘어서서 손을 잡은 채 걷고 있었다. 평상시와 같이 딸아이의 손을 잡고 있을 뿐이지만, 왠지 어색했다.
“좋아요!”
조금 전까지 울고 있던 아이는 어느새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연설화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응? 뭐가?”
“아버지랑 스승님하고 함께 밥 먹어서 좋아요~! 히히히…….”
어느새 이들은 목표로 정한 장소에 도착했다. 랑아대의 대원들과 즐겨 찾는 화양객잔이었다. 전쟁이 한창이라 손님이 거의 없이 한적한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