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한중 방어전 (5)
(75/250)
75화 한중 방어전 (5)
(75/250)
75화 한중 방어전 (5)
2022.04.16.
셋은 식탁을 사이에 두고 품(品)자 형태로 앉았다. 잠시 후 오리고기와 만두, 동파육 등 소소가 좋아하는 음식들이 잔뜩 나왔다.
젓가락을 움켜쥔 소소가 돌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좌우를 살폈다.
“왜 아무 말도 안 해요?”
둘이서 전음으로 대화하고 있으니 그렇게 보일 수밖에.
어색함을 달래기 위해 소무가 물었다.
“아이의 실력이 좀 어때요?”
그야말로 더 이상 어설플 수가 없는 연기였다. 연설화가 애써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음악에 대한 재능이 탁월해요. 요즘에는 호흡법을 같이 익히고 있습니다.”
고작 퉁소 연주에 호흡법까지 익힌다니.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 벌써 사자후(獅子吼)의 연마에 들어갔다는 말이야?
- 하루라도 빨리 시작하는 게 좋아. 하루 이틀에 완성되는 무공이 아니니까.
그러고 보니 소소의 단전에서 느껴지는 중후한 기운은 호수처럼 한계를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 진일심소곡에 무슨 비밀이 있는 거지? 이렇게까지 해서 연주하려는 이유가 도대체 뭐야?
- 화가가 최고의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듯, 연주가도 최고의 악보를 연주하고 싶은 건 당연한 거야. 그리고 이 합주곡에는 세상을 움직일 힘이 있어.
- 음악에 세상을 움직일 힘이 있다고?
- 응. 분명 그렇게 들었지만,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몰라.
조금은 흥미로운 내용이었다.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라는 게 좋은 쪽인지 나쁜 쪽인지 알 수는 없다는 게 마음에 걸릴 뿐.
어차피 합주곡이고, 소소의 심성이라면 걱정할 것은 없었다.
“아버님, 이것 좀 드셔보시지요. 맛이 괜찮습니다.”
연설화가 소무의 그릇에 동파육 몇 점을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오리고기 한 점을 집어 소소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아이의 입이 반사적으로 열렸다. 그 모습이 마치 어미 새에게 먹이를 받아먹는 작은 참새 같아 보였다.
“맛있어요~ 히히.”
음식을 음미하면서 먹던 소소가 갑자기 손가락을 내밀었다.
“저기 삼촌들이 왔어요!”
모두의 시선이 화양객잔의 입구를 향했다. 일광을 필두로 몇몇 대원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전쟁이 한창이었지만, 이교대로 움직이고 있었기에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북문에서 오백 장 이내에서 자유로운 활동이 허용되어 있었다.
소무 일행을 발견한 일광이 아는 체를 하려다가 정지했다. 소무 앞에 마주 앉은 화사한 미모의 여인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머쓱해진 그는 소소를 향해 말했다.
“우리 조카, 밥 먹으러 왔구나?”
“응~ 삼촌. 같이 먹을래요?”
“아니야. 탁상이 좁으니 따로 먹지 뭐.”
일광을 포함한 네 명의 대원은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들은 머리를 모으고 작은 목소리로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소소 엄마 생기는 거야?”
“하하. 저런 미인을 어디서 만나셨대?”
“우리 대장님도 한 인물 하잖아. 큭큭. 잘 어울리는데 뭐.”
이들의 대화는 소무는 물론이고, 연설화의 귀에도 똑똑히 들어가고 있었다. 둘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붉어졌다.
소무는 오해를 풀기 위해 대원들에게 얘기할까 고민하다가 그냥 관두었다.
‘소소에게 어미가 생긴다면 좋은 일이긴 하겠지. 하지만 상대가 옥화신녀인 걸 알고도 과연 그런 말들이 나올까?’
별호만 들어도 어린아이가 울음을 그친다는 가공스러운 명성을 지닌 여인이다.
정마전쟁 당시 그녀의 손에 죽어간 무림인들은 셀 수조차 없었다. 오죽했으면 지금까지도 무림맹으로부터 수배령이 내려져 있을 정도였다.
그때 연설화의 전음이 날아들었다.
- 지금 무슨 생각 했어?
속이 뜨끔한 소무는 모르겠다는 듯 대꾸했다.
- 응? 뭐가?
연설화가 수상하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자신을 노려봤다.
- 나 정도면 훌륭한 어머니라고 생각했지?
누구나 상상은 자유다. 아니라고 대꾸한다면 그녀의 반응이 어떻게 나올지 무시할 수가 없었다. 농담으로 받아들이고 무심하게 대꾸했다.
- 맞아.
그녀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러더니 자신의 그릇에 동파육 한 점을 올리며 말했다.
“많이 드시지요, 아버님.”
소무는 음식을 먹으며 부하들을 슬쩍 바라보았다. 모두가 눈을 힐끔거리며 자신의 반응을 살펴보고 있었다. 일이 커지기 전에 이쯤에서 관계를 밝혀줘야 했다.
“고맙습니다, 소소 스승님. 많이 드십시오.”
부하들의 눈에 실망한 기색이 나타났다.
그때 일광이 눈빛을 빛내며 대원들에게 속삭였다.
“아직 몰라. 분명 뭔가가 있어.”
* * *
휘나라의 대군이 한중을 포위한 지도 어느새 한 달이 지났다. 그들은 지금까지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단지 곳곳에 망루를 건설하여 포위망을 두텁게 구축하고 있을 뿐이었다.
한중성 성벽 중앙의 적루. 그곳에서 장양이 뒷짐을 쥔 채 적진의 모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뒤로는 장수 몇 명이 기립해 있었다.
양연정 부관이 침묵을 깨고 말했다.
“이곳에 백성의 숫자가 많다는 것을 알고, 기어코 말려 죽이려는 수작인 듯합니다.”
“우리의 비축미가 넉넉하다는 것은 모르는 모양일세. 오히려 저들의 식량이 먼저 떨어지고 있네.”
“맞습니다. 이미 배식 양이 하루에 한두 번으로 줄었습니다. 인근 마을의 촌민들이 모두 대피했기에 약탈로 조달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겠지요.”
장양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곧 있으면 겨울이 올 것이네. 그전에 이곳을 함락시키지 못한다면 회군을 시작하겠지. 하지만 나는 저들을 무사히 돌려보낼 생각이 없네.”
“묘안이 있으십니까?”
“적들이 공격해오도록 초조하게 만들고 도발해야겠지. 현재 우리 관군이 소유하고 있는 소가 얼마나 있는가?”
“둔전에 빌려주기 위해 매입해놓은 소가 삼백 마리가 좀 넘습니다.”
“오늘부터 닷새 동안 하루에 열 마리씩 도축하시게. 성벽을 지키는 병사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부족함이 없어야 하네. 우리의 식량이 충분하다는 것을 적군에게 보여줄 수 있을 정도로 말일세.”
소 한 마리를 도축하면 천이백여 명이 한 끼를 먹을 수 있는 양이 나온다. 하루에 열 마리를 도축한다면, 성벽 위를 지키는 병사들이 배가 터지도록 먹고도 남을 수준이었다.
양연정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알겠습니다, 장군. 병사들이 기뻐할 것입니다.”
“소무 부장.”
적루의 한쪽에서 묵묵히 있던 소무가 다가갔다.
“예, 장군.”
“자네는 훈련병 시절부터 천부적인 무(武)의 자질을 타고 났다는 소리를 들어왔지. 그리고 지금은 화경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고 있네.”
굳이 공식화하지 않았을 뿐 이미 모두가 짐작하던 부분이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야율환의 수급을 베는 것이 불가능했을 테니.
“맞습니다.”
장양의 시선이 적군 진영의 사령부쯤으로 짐작되는 곳을 향했다.
“만약 자네가 테무르와 일기토를 벌인다면 승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기회만 주어진다면 십 할의 확률로 이길 자신이 있지만, 일군의 사령관인 테무르가 자신과 일기토를 벌일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계책이 있는 모양이었다.
자신의 경지를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기에 소무는 적당한 수준으로 얘기했다.
“그는 저의 실력을 모르고 있습니다. 방심을 유도한다면 육 할 이상의 승률을 확신합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듯 장양은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입이 다시 열리기 시작했다.
“자네가 승부수를 띄워줘야겠네.”
“말씀하십시오.”
“내일 새벽 소수의 정예병사를 이끌고 돌문을 빠져나가시게.”
돌문은 성벽으로 위장해놓은 비밀 출구다. 앞서 야전을 벌이기 전에 진립 부장을 시켜 만들어놓은 바가 있었다.
“알겠습니다.”
“인근에 매복해 있다가 적군의 본진이 공격을 개시하면, 방비가 허술해진 사령부를 기습하여 테무르의 수급을 거둬주시게.”
소무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잠시 떠올랐다가 이내 사그라졌다.
적들의 훈련 강도가 아무리 대단한들, 사령관이 죽은 상황에서도 버틸 수는 없을 것이다. 성공할 수만 있다면, 아군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승리할 수 있는 훌륭한 계책이었다.
“맡겨주십시오.”
옆에서 지켜보던 곽철 부장이 울분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자네가 테무르의 수급을 가져온다면, 내가 직접 그것으로 백문휘 부장의 제사상을 준비하겠네.”
평소 백문휘와 친분이 두터웠던 곽철이었다. 그의 눈빛에는 깊은 원한이 사무쳐 있었다.
장양이 곽철 부장의 어깨에 손을 살며시 올렸다.
“자네의 심정을 잘 알고 있네만, 전투가 끝날 때까지는 평정심을 유지해야 하네.”
곽철은 마지못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장군.”
* * *
해가 뉘엿뉘엿해지며 차츰 노을이 지고 있었다.
평상시와 다름없는 일상이었지만, 성벽의 위에서는 난리가 났다. 그야말로 축제의 분위기가 한창이었다.
“이게 웬 떡이야?”
“갑자기 소고기라니?”
성벽에 삼삼오오 늘어앉은 병사들은 모닥불을 지피며 침을 흘리고 있었다.
소는 농사일에 사용되는 귀중한 자산으로, 한때는 도축이 금지되기까지 했다.
값이 매우 비싸고, 돈이 있어도 먹지 못하는 고급음식이다. 이것을 배가 터질 때까지 먹을 수 있는 상황이니 병사들이 기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랑아대의 대원들도 침을 꼴깍 삼키고 있었다.
“이건 그냥 바로 먹어도 돼.”
핏기가 가시기 무섭게 일광이 자신의 입속에 우걱우걱 처넣었다. 옆에서는 대원 한 명이 능숙한 솜씨로 검을 이용하여 고기를 썰어대고 있었다.
고기는 충분했다. 넓적하게 잘려나간 고기는 모닥불 위의 돌판에 계속해서 올라갔다.
“너무 맛있어요!”
“하하! 이런 이게 얼마 만인지.”
성벽 위에 앉아 저무는 노을을 바라보며 고기를 구워 먹으니 운치가 제법 괜찮았다.
장양은 병사들이 일부러 성벽 위에서 먹도록 지시했다. 맛있는 냄새가 적군의 진영까지 스멀스멀 풍기도록 말이다. 마침 바람까지 북쪽으로 불고 있었다.
“저쪽 친구들은 탕으로 만들어서 먹네요?”
한 대원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어느 지방에서 온 병사들이냐에 따라 식성과 문화가 다르다.
탕을 해 먹는 병사들이며, 찜을 쪄서 먹거나, 볶아먹는 병사들도 보였다. 성벽 위에서 모든 취사가 허용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일광이 손을 저으며 말했다.
“먹을 줄 모르는 녀석들이야. 소고기는 무조건 구워 먹어야 해.”
“하하. 역시 그렇죠?”
고기를 굽는 냄새는 바람을 타고 휘나라 병사들을 고통스럽게 했다. 자신들은 피죽으로 배를 채워야 했다. 그것도 배불리 먹을 수가 없었다.
한참을 먹어대던 일광이 무엇인가가 생각났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고는 성벽 밖을 바라보았다. 휘나라의 병사들이 이쪽을 바라보며 군침을 흘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푸하하하!!! 이 녀석들, 한 입 먹어볼래!?”
적병들의 얼굴에 노기가 서렸다. 부럽다는 시선과 함께 말이다.
“먹고 싶으면 이리 와 봐, 이놈들아!!!”
적루의 장수들이 도발하는 일광의 모습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이것은 분명 칭찬받을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시작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조국을 침략하고, 약탈과 노략을 일삼았던 적병들을 놀려줄 좋은 기회였다. 배가 부른 병사들이 하나둘씩 일어서서 성벽을 향해 도발을 시작했다.
“너희들, 오늘 밥은 먹었냐!?”
“와서 한 입 먹어봐!!!”
도발이 한창인 가운데 소무가 말없이 웃으며 대원들에게 다가갔다.
“언제부터 랑아대가 입으로 싸웠어? 다 먹었으면 출발하지.”
잠시 후 삼십여 명의 대원들이 소무를 따라 어딘가로 은밀히 이동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