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개세영웅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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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화 개세영웅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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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화 개세영웅 (1)
2022.04.17.
적들의 감시가 허술한 야심한 새벽. 한중의 성벽 어딘가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끼기기긱-!
성벽의 구석 일부분이 문처럼 열리며 작은 틈새가 드러났다. 벽처럼 위장해놓은 돌문이었다.
그곳으로 삼십여 명의 검은 인영이 은밀히 나왔다. 칠흑처럼 검은 갑주의 어깨에는 작은 보따리가 하나씩 매어져 있었다.
돌문을 닫은 그들은 자세를 낮춘 채 성벽의 끝으로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반각도 지나지 않아 적들의 감시가 가장 허술한 사각지대에 도착했다. 해자의 앞에서 소무가 손을 들어 올렸다.
“수상비는 적들의 시선을 끌 수 있으니, 헤엄쳐서 간다.”
대원들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몇몇이 당황하며 말했다.
“저, 저는 헤엄을 못 쳐요.”
“저도…….”
해자의 평균적인 폭은 십여 장에 이른다. 그리고 무공이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물을 무서워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렇다고 버려두고 갈 수 없었다.
소무가 먼저 물속으로 들어가며 나직이 말했다.
“내가 도와줄 테니 들어와.”
두 명의 대원이 조심스럽게 물속으로 들어가 그의 어깨를 잡았다.
대원들은 소무의 뒤를 따라 은밀하게 해자를 건너는 것에 성공했다.
“휴. 고맙습니다.”
소무는 왼손을 입술에 갖다 대며 신호를 보냈다. 적진에도 귀가 밝은 고수들이 있기에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그는 대원들에게 손짓을 보내고는 휘나라의 본진을 우회하여 전진했다. 자세를 낮춰 이동했기에 적들의 시야에서 벗어나는데 한식경이나 걸렸다.
“이곳에서부터는 경공을 펼쳐서 가지.”
문제는 한중성의 근처에 포진해있는 정찰병들이었다.
소무는 감각을 최대로 끌어올리며, 감시망을 피해 근처의 산으로 이동했다. 한중성으로부터 삼백여 장이 떨어진 이름 모를 야산의 꼭대기. 적군의 본진이 내려다보이기에 제법 괜찮은 장소였다.
목적지에 도착한 이후 모두가 갑주를 벗어 말리기 시작했다. 이 근처에는 정찰병이 없는 것을 확인했기에 굳이 조심할 필요는 없었다.
“모두 수고했어.”
소무는 자리에 털썩 앉으며 가부좌를 틀었다. 그러자 대원 중 하나가 다가오며 물었다.
“대장님, 이제 뭘 해야 합니까?”
“기다려야지. 다들 푹 쉬어둬.”
하지만 하루가 걸릴지 열흘이 걸릴지는 알 수가 없었다.
준비해온 식량은 넉넉했다. 문제는 지루한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날이 밝아오고, 다시 또다시 이틀이 지났다.
일광이 다가오며 물었다.
“대장, 뭐 하는 거야? 어떻게 이틀 동안 가부좌를 틀고 움직이지 않을 수가 있어?”
소무는 식음을 전폐한 채 단 한 번의 미동조차 없었다. 대답이 없자 일광이 다시 한번 물었다.
“죽었어?”
그 순간 감겨있던 소무의 눈이 서서히 떠졌다.
“명상하고 있었어.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일광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벌써 이틀이 지났어. 무슨 명상을 그렇게 오래 해?”
“내가 어떻게 화경에 이르렀는지 궁금하다고 했지? 그것은 명상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야.”
일광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더니 적진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나저나 저 새끼들, 공격할 마음이 없는 거 아냐?”
“아니. 저들은 반드시 움직인다.”
한숨을 내쉰 일광은 소무의 옆에 털썩 주저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그를 흉내 내 보려는 것이었다.
그러기를 반시진. 소무의 입이 나직이 달싹였다.
“시작되려나 보군. 대원들을 소집해.”
자리에서 일어선 일광이 대원들을 불러모았다.
소무의 시선은 적의 본진을 향해 있었다. 까마득한 점들이 한중성의 북문을 향해 맹렬히 돌진하는 모습이 보였다. 사령부는 여전히 꿈적도 하지 않고 있었다.
어느새 다가온 일광이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놈들은 지금 어디 가는 거야!?”
소무의 시선도 그곳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 삼백여 명의 병사들. 그들은 은밀히 본대를 이탈하여 서쪽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정예병사들로 서문을 함께 기습할 심산이로군.”
서문은 산맥을 끼고 있으며 대로가 좁아 대군이 움직일 수 없다. 하지만 소수의 정예로 성벽을 넘어 내부에서 뒤흔들 수만 있다면, 수비군 전체가 혼란에 빠질 수가 있었다.
그쪽에도 아군 병사들이 일부 배치되어 있었지만, 결코 저들을 막아낼 수 있는 전력이 아니었다. 게다가 서문의 근처에는 지금 딸아이가 있는 현화당이 있었다.
“대장, 우리는 어떻게 해?”
서둘러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적들의 사령관을 처치하든지 서문을 지원해야 했다.
‘옥화신녀가 나서주기만 한다면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서둘러 테무르의 수급을 취하고 합류한다.’
이윽고 생각을 정리한 소무가 일광을 향해 말했다.
“대원들을 이끌고 서문을 지원해줘.”
“설마 저곳을 혼자 공격하겠다고?”
적군의 핵심고수들이 모두 성벽을 향해 돌격하는 상황이었다. 지금이라면 충분히 시도해볼 만했다.
“여의치 않으면 빠져나올 거니 문제없어. 서문 근처의 현화당에 소소가 있으니 서둘러야 해.”
일광도 더는 망설일 수 없었다. 사령부를 같이 공격하지 못하는 것이 조금 아쉬웠지만, 사랑하는 조카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했다. 둘은 눈빛을 교환하고는 서로 등을 돌렸다.
잠시 후 일광이 대원들을 이끌고 서문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소소야, 조금만 기다려라. 삼촌이 간다!”
그들이 출발하기 전에 이미 소무는 시야에서 사라진 상태였다.
사령부에는 아직도 천여 명의 병사들이 남아 대열을 갖추고 있었다. 테무르의 직속 호위부대이리라. 곳곳에 포진하여 대기하고 있는 장수들의 모습도 보였다.
하지만 소무의 질주에는 머뭇거림이 없었다. 직선으로 쏘아져 나가는 그는 순식간에 목표지점에 가까워졌다.
스르릉-!
검집에서 검날이 모습을 드러내며 진동했다. 그 순간 소무의 두 눈에 분노가 차올랐다. 그자의 기운이 느껴지는 순간 지난날의 아픔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유화가 살해당한 그날 백양현에는 네놈이 있었지. 지금부터 그 책임을 묻겠다.’
대열을 갖추고 있는 천여 명의 병사들. 그들의 후미로 소무가 벼락처럼 들이닥쳤다.
콰앙-!!!
기습을 당한 십여 명의 병사가 동시에 허공으로 떠올랐다.
“크윽!”
“컥!”
난데없는 소란에 모두의 시선이 후미로 향했다. 한 줄기 빛이 엄청난 속도로 자신들의 후미를 돌파하고 있었다.
써컹-! 촤아악-! 푸욱-!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모두의 눈이 부릅떠졌다. 파도가 갈라지듯 병사들이 갈대처럼 좌우로 쓰러지고 있었다.
한 명의 장수가 다급히 소리쳤다.
“막아!!!”
테무르의 앞을 호위병들이 겹겹이 막아서며 뒤늦게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나 상대는 이미 자신들의 중심부까지 파고든 상태였다.
소무의 왼손이 활짝 펴지며 붉은 강기에 휩싸였다. 곧이어 그의 손바닥이 바로 앞에서 다가오는 병사의 앞가슴을 후려쳤다.
콰앙-!!!
가슴이 함몰된 병사는 뒤쪽에 자리한 다섯 명의 병사를 함께 튕겨내며 날아갔다. 가공스러운 위력 앞에 모두가 입을 떡하니 벌렸다.
보다 못한 두 명의 장수가 그의 앞을 가로막으려 했다. 그 순간 내달리던 소무가 보법을 밟았다.
탈혼검법 이초식 전광추흔(電光追痕).
그의 신형이 벼락처럼 쏘아져 나가며 두 명의 장수를 통과했다.
투콱-!
소무의 등 뒤에서 두 개의 수급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단 일격에 두 명의 장수가 쓰러지자 휘나라의 사령부는 공포에 휩싸였다.
“헉!?”
“뭐 이런…….”
테무르의 최측근을 호위하던 오십여 명의 살라타이가 행동을 개시했다. 이들은 다급히 산개하며 진법을 펼치기 위해 방위를 잡았다. 지금까지 막아서던 병사들과는 차원이 다른 움직임이었다.
그들이 진법을 완성하기 직전, 눈부신 섬광이 빛났다가 사그라졌다. 검성의 경신술인 섬전비영보(閃電飛影步)였다.
단숨에 살라타이들을 돌파한 소무는 어느새 테무르를 향해 일검을 내지르고 있었다.
콰앙-!
일합을 막아내며 뒷걸음질 치던 테무르는 굉장히 놀랐다.
“너, 너는……?”
어찌 눈앞의 인물을 잊을 수 있겠는가. 백양현에서 가공스러운 무위로 만인을 압도했던 무인(武人)을 말이다.
테무르는 상대가 현경의 고수란 것도 알고 있었다.
‘한중의 맹장이 바로 검성이었단 말인가?’
테무르는 조심성이 많은 인물이다. 만약 이 사실을 처음부터 알았다면 지금과 같은 전략을 짜지 않았을 것이다. 애초부터 군단의 모든 절정고수가 이자를 포위하여 상대해야 했다.
하지만 후회해도 이미 때는 늦은 상황이었다. 그는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며 상대의 공격을 막기에 급급했다.
카캉-!! 카카카캉-!!!
테무르는 선봉장이었던 야율환보다 움직임이 빨랐다. 그렇다고 한들 결코 혼자서는 현경의 벽을 넘어설 수 없었다.
소무의 공격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빨라졌고, 정교해져 갔다. 조금의 빈틈이라도 보인다면 초식으로 일격을 가할 것이 분명했다.
테무르가 정신없이 검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모두 달라붙어!!!”
초인들의 싸움에 끼어드는 게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그러나 살라타이는 감정을 도려낸 살육의 전사들이다. 오십여 명의 전사들은 망설임 없이 불구덩이 속으로 달려들었다.
“감히!”
소무의 신형에서 기의 파동이 뿜어져 나오며 그들을 움찔하게 했다.
쏴아아아악-!
테무르와 오십여 명의 살라타이가 주춤하는 사이, 그가 지면을 박차고 허공으로 떠올랐다.
탈혼검법 삼초식 비진난격(飛進亂擊).
그의 손에 움켜쥔 검이 밝은 빛에 휩싸이며 허공을 난자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초승달 모양을 한 수십 가닥의 강기가 지면을 향해 쏟아져 나왔다.
콰콰콰콰쾅-!!!
“크윽!”
“컥!”
단 일격에 십여 명의 살라타이가 바닥을 뒹굴며 고혼이 되었다. 살아남은 살라타이들도 부상당한 자들이 상당했다. 지면의 곳곳이 움푹 꺼지며 처참한 광경이 펼쳐졌다.
내력의 소모가 매우 큰 기술이라 소무로서도 평소에는 잘 사용하지 않는 초식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것저것을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소무의 발이 지면에 닿는 순간, 테무르는 이미 도주를 감행하고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 그는 이십여 장을 벗어나 빠르게 멀어져갔다.
그를 결코 이대로 보내줄 수가 없었다. 소무도 경공을 펼치며 테무르를 뒤쫓기 시작했다. 살라타이들도 뒤따라 내달렸지만, 거리는 점차 벌어졌다.
테무르가 정신없이 도주하는 곳은 한중성의 성벽이었다. 그곳에서 다른 화경의 고수와 합류하여 어떻게든 맞서볼 요령이었다.
마침 성벽의 적루 위에 장창을 움켜쥔 맹장 화륜이 보였다. 그곳에서 연달아 불꽃이 번뜩였기에 손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또한 일개 군단을 이끄는 화경의 고수. 화륜은 적루에서 방어를 지휘하는 장군을 잡을 요령인 듯했다.
‘이자는 홀로 상대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화륜과 합류한 뒤 살라타이를 집결시켜 진법으로 맞서야 한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화륜의 움직임이 눈에 선명히 들어왔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했다. 화륜은 마치 무엇인가의 벽에 가로막힌 듯, 장군에게 접근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밀려나고 있었다.
‘대체 뭐 하는 거야?’
길게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테무르는 단전에서 내공을 끌어모아 그곳으로 기성을 발출했다.
“화륜 장군은 이쪽으로 와주시오!!!”
시간이 없었다. 등 뒤에 따라붙은 검성과의 거리가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화륜에게 그를 지원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잠시 후 그 이유를 알아챈 테무르는 절망에 휩싸였다. 오히려 화륜을 압박하고 있는 검은 그림자를 보았기 때문이다.
장양의 호위무사. 살왕(殺王)이었다.
‘빌어먹을…….’
테무르는 걸음을 멈추며 등 뒤를 향해 검을 휘둘러 갔다. 서늘한 빛무리가 다섯 가닥으로 갈라지며 후방을 향해 뿜어졌다.
카카캉-!!!
자신의 강기를 단숨에 소멸시킨 검성은 반격까지 시도하고 있었다.
앞가슴을 향해 직선으로 뿜어지는 검강은 막아낼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고 빨랐다. 미간을 좁힌 테무르는 상체를 급격히 기울이며 검을 흘려보냈다.
파앙-!
앞가슴으로 검강이 스치고 지나가며 갑주를 갈랐다. 서늘한 바람이 뿜어지며 그의 얼굴을 강타했다.
가까스로 피하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이어지는 그의 퇴법은 막아낼 방도가 없었다. 곡선을 그리는 소무의 왼발이 그의 옆구리를 타격했다.
콰직-!
“큭!”
세 걸음을 물러선 테무르는 다급히 자세를 잡았다. 소무가 그의 전면으로 마주서며 말했다.
“도망치면서 비참하게 죽겠는가. 아니면 용감하게 맞서보겠는가.”
잠시 고민하던 테무르는 표정을 굳히며 기수식을 취했다. 명색이 휘나라의 사령관이었다. 꼴사납게 죽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다.”
잠시 후 성문의 지척에서 목숨을 건 장수들의 대결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