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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화 개세영웅 (3) (78/250)


78화 개세영웅 (3)
2022.04.19.


서걱-!

테무르의 수급이 떠오르는 소리였다.

“후…….”

소무는 호흡을 내쉬며 내려오는 그것을 틀어쥐었다. 사령관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주위에는 백여 명이 넘는 테무르의 부하들이 함께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소무는 고개를 들어 성벽 위의 적루를 바라보았다.

살왕이 맹장 화륜의 숨통을 막 끊어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곳의 근처에서 장양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휘나라의 사령관이 참살되는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다.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인 장양은 등 뒤의 장교에게 무엇인가를 지시했다.

뿌우우우우-!!!

웅장한 뿔피리 소리가 전장을 울렸다. 성벽에 달라붙어 있던 모든 병사가 어리둥절하며 좌우를 살폈다. 그때 위진철 부장이 기다렸다는 듯이 거센 기성을 뿜어냈다.

“적군의 사령관이 죽었다!!!”

적아를 불문하고 모든 병사가 화들짝 놀랐다. 전투에 참여하지도 않은 사령관이 죽었다니.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모두의 시선이 휘나라의 본진을 향했다.

피로 얼룩진 사령부는 초토화가 되어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성문에서 멀지 않은 곳. 눈에 띄는 장소에서 한 무장이 테무르의 수급을 움켜쥐고, 개세영웅(蓋世英雄)의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다.

“뭐, 뭐야?”

“어, 어떻게 이런 일이…….”

휘나라의 병사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설상가상 적루의 깃대에 맹장 화륜의 수급이 올라오고 있었다. 이 정도면 지휘부가 궤멸 수준의 타격을 입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절망에 빠진 휘나라의 병사들은 다리가 풀리고, 무기를 움켜쥔 손아귀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반대로 아군은 사기가 하늘을 꿰뚫을 듯 승천하기 시작했다.

“우와아아!!!”

“와아아아아!!!”

조금이라도 지능이 있는 자라면 전세가 기울었음을 단번에 짐작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휘나라의 병사들이 주춤하며 퇴각할 자세를 잡았다.

그러나 장양 장군은 이들을 곱게 돌려보내 줄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성벽의 중심에 선 그가 검 끝을 치켜세우며 아군 병사들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한 놈도 살려서 보내지 마라!!!”

이미 사기가 땅에 떨어진 적군은 압도적인 인원수에도 싸울 의지를 잃은 상태였다. 그리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한중의 역습이었다.

가장 먼저 성벽의 위에서 분노의 물결이 일렁였다. 두려움이 없어진 병사들은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모조리 밀어버려!”

“감히 이곳을 넘봤겠다!?”

“뒈져!”

도망치는 적병의 등짝을 후비고, 성벽 아래로 걷어차거나 밀어내는 광경이 곳곳에서 펼쳐졌다.

성벽 위에 올라선 병사가 다시 아래로 퇴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다리에 있는 병사들은 갈팡질팡하고 있으며, 한도 인원을 초과한 공성탑은 아군의 노포에 좋은 먹잇감이 되고 있었다.

갈 곳을 못 찾은 병사들은 성벽의 끄트머리로 밀려났다.

“오, 오지 마!”

“크악!”

기어코 무너진 둑에서 물이 쏟아져 내리듯, 성벽 위에서 적병들이 우수수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더는 전투라고 부를 수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도망치는 적병을 향해 아군 병사들이 눈에 불을 켜고 분노의 검을 휘둘렀다.

아래에서 성벽을 오르지 못한 적병들은 등을 돌려 내달렸다. 썰물 빠지듯 수만 군세가 동시에 물러서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그때 적루의 위에서 북이 울리기 시작했다.

퉁-! 퉁-! 퉁-! 퉁-!

그 순간 한중의 북문이 움직임을 보였다. 굳건히 지켜졌던 성문이 자의에 의해 열리는 것이다.

끼이이이익-!!!

열리는 문틈으로 말을 탄 한백 부장이 장창을 꼬나 쥐고 나타났다. 그의 뒤로는 지금까지 대기하고 있던 한중의 기마부대가 도열해 있었다.

한백은 군단에서 장양 다음으로 경험이 많은 노장이었다. 위엄만은 다른 부장들을 압도했다.

그의 얼굴에 사선으로 길게 자리한 자상 자국이 꿈틀댔다.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돌격을 준비하는 기수들의 귓가를 울렸다.

“한중의 기수들이여 듣거라! 지금까지 우리는 단 한 번도 전투에 참여하지 못했다! 동료들이 싸우고 있을 때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장창을 움켜쥔 이천여 명의 기수들이 상기된 표정으로 한백을 응시했다.

“그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 우리가 죽어간 동료들의 넋을 달래줄 것이다! 감히 한중을 넘본 자, 지금부터 대가를 치르게 해줄 것이다! 적들의 숨통을 모조리 끊어 놓아라!!!”

말을 마친 한백이 선두에서 말을 박찼다.

“이랴앗!!!”

성문을 나섬과 동시에 한 손으로 움켜쥔 장창을 사정없이 휘둘렀다. 창날이 빛을 뿜어내자 두 개의 수급이 동시에 떠올랐다.

투콱-!

그의 뒤로 눈이 뒤집힌 기병들이 고함을 내지르며 죽기 살기로 말을 몰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끄아아악!!!”

말발굽이 지면을 두드리는 소리가 한중의 북문에서부터 거세게 요동쳤다.

두두두두두두-!!!

아직도 살아남은 적병의 수가 오만이 넘었다. 그러나 하나같이 싸울 의지를 포기하고 지친 보병들이었다. 아군의 기병들이 미친 듯이 날뛰며 적군을 참수하기 시작했다.

푸욱-! 촤아악-!!

“크아악!”

“커억!”

기수들이 장창을 한 번씩 내지를 때마다 어김없이 적병의 등이 사정없이 꿰뚫렸다. 실력이 뛰어난 기수들은 한 번의 동작으로 두 명을 죽이는 노련함도 보여주고 있었다.

성벽 근처의 적들은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아군의 보병들이 처리해 줄 것이다.

한백 부장이 장창을 꼬나쥐며 기수들을 이끌었다.

“돌파한다!!!”

기마부대는 한 명의 적도 살려 보내지 않겠다는 듯, 적진의 후미에서부터 선두를 향해 거침없이 돌파를 시작했다.

어느새 성벽의 위에서도 근접보병들이 내려와 합류하고 있었다. 성문을 지키던 예비 병력도 모조리 뛰쳐나왔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단연 랑아대였다. 도망치는 적진의 중심으로 산개하여 무적의 신위를 펼치는 대원들은 마치 야차들 같았다.

“육십칠!”

랑아대의 철두는 습관처럼 자신이 처치한 숫자를 외치고 있었다.

푸욱-!

검을 뽑아내며 그의 입이 다시 외쳤다.

“육십팔!”

그 광경이 소름이 돋았는지, 근처의 적군은 도축장의 닭들이 도망치듯 흩어졌다. 그러나 철두의 경공은 그들을 월등히 압도했다. 그의 검기가 반월을 그리며 도망치는 두 명의 병사를 동시에 베어 넘겼다.

촤아악-!

“칠십일!”

그 순간 그의 측면으로 피를 뒤집어쓴 랑아대의 송화가 나타났다.

“철두 형, 방금 세 명이 아니라 두 명이잖아요!?”

머쓱해진 철두가 또 한 명을 처치하며 말했다.

서걱-!

“칠십일!”

한중의 북문 앞에서 벌어지는 대학살은 멈추지 않고 계속되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도망치는 적군을 얼마나 잡느냐의 문제였다.

* * *

아군이 완벽한 승기를 잡은 순간, 소무는 북문을 벗어나 있었다. 그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서문 근처에 자리한 현화당이었다.

입구에서부터 무수히 많은 살라타이의 시신이 보였다. 사지가 검게 그을려 죽은 자들이 가장 많았다. 아마도 옥화신녀의 마공에 당한 것이리라.

‘괜한 걱정이었던가?’

이미 상황은 모두 정리되어 있었다. 일광을 포함한 삼십여 명의 대원들은 다른 곳으로 이동했는지 보이지 않았다.

현화당의 화원. 처참한 시신들의 중심에서 연설화가 무심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소무가 전투의 흔적을 살펴보며 다가갔다.

“무사해서 다행이군.”

연설화가 팔짱을 끼고 물었다.

“정말 내 걱정을 한 거 맞아?”

예리한 그녀의 질문에 속이 뜨끔 했다.

“조금은. 물론 네가 당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느긋하게 나타나서 뻔뻔하시네.”

강호를 떠나 조용히 사는 그녀가 다시 마공을 사용하게 했으니, 조금은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사정이 좀 있었어. 소소는?”

“저기서 자고 있어.”

전각의 안쪽을 바라보니 딸아이가 대자로 뻗어 정신없이 자고 있었다.

사자후는 막대한 진기와 기력을 동시에 소모하는 무공이다. 화후가 낮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사용했으니 피로가 몰려온 것은 당연했다. 대충 상황을 짐작한 소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네게 빚을 하나 졌군. 아비의 입장에서도, 그리고 관군의 입장에서도 말이야.”

연설화가 새침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떻게 갚을 건데?”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당당하게 물었다.

“그럼 날 보호해 줄 수 있어?”

무림을 공포에 떨게 했던 옥화신녀가 보호란 말을 꺼내다니. 극마이면서도 그 수준이 극에 이른 무시무시한 고수가 말이다. 이보다 더 웃기는 소리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무슨 뜻이야?”

“개방의 거지들이 냄새를 맡았으니, 무림맹의 망나니들이 날 잡으러 올 게 뻔하잖아?”

그녀는 현재 무림맹의 척살 명부에서도 최상단에 이름을 올린 인물이었다.

한중의 성내에서 이러한 소란이 벌어졌으니, 그들의 이목을 숨길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머지않아 정파에서 내로라하는 원로 고수들이 몰려들 것이 분명했다.

방법을 고심하고 있을 찰나였다. 그녀가 서운하다는 말투로 먼저 말했다.

“그냥 농담한 거야. 검성이 정파 편을 들어줘야지, 나 따위가 뭐라고.”

비록 강호를 은퇴했지만, 오랜 세월 정파의 편에 서서 마교와 싸워왔다. 만약 무림맹에서 연설화의 안전을 위협한다면, 자신의 행동을 자신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성격상 그냥 넘어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자신 또한 딸아이의 안전을 위해서 그녀를 이용했으니.

“방법을 찾아보지. 소소의 스승이 그냥 죽도록 내버려 두진 않을 거야.”

소무의 말에 연설화의 얼굴이 밝아졌다.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까지 떠올랐다. 그러나 표정과는 달리 입에서는 다른 말투가 흘러나왔다.

“됐어. 어차피 성내는 너무 소란스러워서 떠나려고 했어.”

그녀가 떠난다는 말에 왠지 모르게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그냥 떠난다고……?”

“이곳에 가만히 앉아서 정파 놈들에게 얌전히 죽어줄 수는 없잖아. 이제는 도와줄 사람도 없는데.”

“어디로?”

“얼마 전부터 알아보고 있었어. 정군산 근처 경관이 좋은 곳으로.”

정군산이면 한중에서 매우 가까운 위치였다. 소소와 함께 경공을 수련할 때 매번 그 근처까지 다녀왔었다. 그렇다면 한중을 떠난다는 것이 아닌, 현화당의 위치를 옮긴다는 얘기였다.

왠지 모르게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소무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가 이내 사라졌다.

“하긴, 자연과 함께 음을 연주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그때였다. 돌연 그녀의 고개가 가까이 다가오며, 자신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방금 웃었지? 내가 안 떠난다니깐 좋은 모양이네.”

연설화의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두 번의 환골탈태를 겪은 그녀는 아기의 피부처럼 완전무결한 얼굴을 갖고 있었다.

당황한 소무의 얼굴에 홍조가 떠올랐다. 그 모습이 귀엽다는 듯 연설화가 깔깔대고 웃었다. 조금 전까지 휘나라의 병사들을 학살했던 옥화신녀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소소가 스승을 잃을까 봐 걱정했던 거야.”

“누가 뭐래? 내가 공력까지 나눠주고 이대로 포기할 리가 없잖아?”

한숨을 내쉰 소무는 떠날 채비를 하며 말했다.

“장난은 이쯤 해두지. 그만 가봐야 해.”

이미 아군이 승리한 싸움이었지만, 계속해서 자리를 비워둘 수가 없었다. 연설화와 인사를 마친 그는 거리를 지나쳐 북문으로 나아갔다.

서문이 뚫렸음에도 성내의 피해는 눈에 띄게 적었다. 입구 근처의 현화당이 완충 역할을 해주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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