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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화 개세영웅 (4) (79/250)


79화 개세영웅 (4)
2022.04.20.


한중에서 살아 돌아간 적병의 수가 고작 수백 명에 불과했다. 십만에 이르렀던 군세가 궤멸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반면 아군의 전사자는 천 명을 넘지 않았다. 부상병의 숫자가 꽤 많았지만, 의료부대의 활약으로 많은 수가 회복되고 있었다.

위기에서 벗어난 한중은 빠른 속도로 정비가 이루어졌다. 열흘이 지난 뒤에는 참상의 흔적을 더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한중성 군영의 군사회의실.

장양의 소집에 간부급 인사가 모두 모였다. 회의는 한 시진이 넘도록 계속되고 있었다.

“곽철 부장, 지시한 일은 어찌 되었는가.”

“노획한 전리품 중 필요한 물자를 제외하고 모두 시장에 매각하였습니다. 그리고 황금 이백팔십 냥을 확보하였습니다.”

“전사자의 가족과 다친 병사들에게 충분히 지급하고, 그것도 부족하다면 말씀하시게. 군단에서 가능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마시게. 나라를 위해 싸운 대가로 남은 삶이 고통스러워서는 결코 안 될 것이네.”

“예, 장군. 다른 병사들의 사기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고개를 끄덕인 장양은 전투보고서를 펼쳤다.

“모두 애써주었지만, 이번 전투에서 일등공신은 단연 랑아대의 소무 대장이네. 전공을 일일이 나열하기조차 어렵군.”

모든 부장이 만장일치로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소무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장군님의 전략에 따라 움직였을 뿐입니다.”

“기쁜 일에 겸손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자네들의 공적을 모두 적어 상소를 올렸으니, 머지않아 좋은 소식이 당도할 걸세.”

야전까지 포함하여 일만 오천 병력으로 열 배에 가까운 병력을 물리쳤으니, 그야말로 역사에 기록될 만한 대승이었다. 황실로부터 장수들의 승진 인사와 포상이 줄을 잇게 될 것은 당연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랑아대의 병사는 전원 십부장으로 승급시키겠네. 이들의 활약을 생각하면 진작에 진행했어야 하는 일이었지. 그 외에도 공을 세운 자들은 적절한 포상 안을 마련해주시게.”

부관 양연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알겠습니다, 장군.”

장양이 다시 무엇인가를 얘기할 찰나였다. 행정관이 다급히 회의실로 입장하며 말했다.

“장군, 유광세 상장군의 전령이 찾아왔습니다.”

모두의 표정이 별로 밝지 않았다. 그다지 반가운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침 모두 모여 있으니 잘되었군. 이곳으로 들라 하게.”

잠시 후 처참한 몰골의 장수 하나가 회의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갑주는 곳곳이 파손되어 너덜너덜해져 있었으며, 제대로 먹지도 못했는지 혈색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모두의 뇌리에 불길함이 스쳤다. 일개 병사도 아닌, 상장군의 휘하 장수가 직접 전령으로 찾아올 만큼 상황이 다급한 모양이었다.

그는 장양 장군을 향해 양손을 모아 포권하며 말했다.

“상장군 휘하의 부장 남천입니다.”

“안색이 좋아 보아지 않는군. 무슨 일로 오셨는가.”

“현재 도성이 위험하니 상장군께서 급히 무한(武漢)으로 병사를 보내라고 지시하셨습니다. 한중의 병사 중 절반을 차출해주길 원하십니다.”

다짜고짜 찾아와서 절반의 병력을 보내라니. 지켜보던 군단의 부장들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특히나 유광세의 연합군에 참전해봤던 소무는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어떤 상황인지 짐작이 되었기 때문이다.

부장들과는 달리 장양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솔직하게 말해보시게. 그것이 순서가 아니겠는가.”

잠시 고민하던 남천은 그간의 일을 설명했다. 유광세가 이끌던 십오만 군세가 회남에서 휘나라의 대장군인 완안후이에게 대패를 당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가 패배한 여파로 안휘성이 단숨에 돌파당하고, 휘나라의 군세는 도성을 치기 위해 장강을 넘을 준비를 하는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상장군께서는 지금 무한에서 다시 병력을 모으고 있습니다. 한중뿐만 아니라 각지로 전령이 모두 파견되었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장양은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유감이지만 나는 병력을 내어줄 수가 없네.”

뜻밖의 대답에 남천이 당황했다.

“장군……!?”

“첫째, 상장군께서 각지의 병력을 집결시켜 또다시 패배한다면 우리 송나라는 반격의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무너지게 될 것이네. 확실한 승리를 자신할 수 있겠는가?”

“비록 앞전의 전투에선 패배하였지만, 지금은 충분한 경험을 쌓았기에 능히 대응하여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계획이 있는지 말해보시게. 만약 나를 설득시킬 전략을 준비해두었다면 흔쾌히 병력을 내어주겠네.”

“그, 그것은…….”

계획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지금껏 유광세의 휘하에서 죽어간 병사들의 숫자만 삼십만을 상회할 정도였다. 그렇지 않아도 울화통이 터졌던 장양이었다.

“어찌 승리하지 못할 곳으로 휘하의 병사를 보낼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단 한 명의 병사도 헛되이 죽도록 허락할 수 없네.”

“병력을 보내지 않으신다면 상장군께서 노하실 것입니다.”

이미 추밀원사도 없애버린 마당에 상장군을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둘째, 임안은 다른 도시에 비교해 전략적인 중요도가 낮기 때문이네. 임안을 지키고자 한중을 비롯한 중요한 요충지들을 위험에 빠트릴 수 없는 일일세.”

임안이 함락당하더라도 양양이 건재하다면, 적군은 추가적인 공세를 이어가기 힘들 것이었다. 게다가 한중이 무너지기라도 한다면, 한수강 이남의 도시들이 대도살을 당할 우려가 있었다.

“장군, 임안은 도성입니다. 그곳에는 폐하가 계십니다.”

장양은 단호하게 말했다.

“나라의 안위를 위해 폐하께서 임안의 백성들을 이끌고 천도하실 것이라 믿겠네.”

“이제는 천도할 만한 궁성도 마땅히 없습니다. 돌고 돌아 정착한 곳이 바로 임안입니다. 폐하께서 이제 어디로 갈 수 있다는 말입니까?”

장양의 손바닥이 탁상을 강타했다.

타앙-!

그의 입에서 노기 서린 호통이 뿜어져 나왔다.

“백성들의 노역으로 만들어진 그따위 궁성은 부끄러운 고통의 상징일 뿐이야!!!”

남천은 고개를 푹 숙이며 목소리가 작아졌다.

“하, 하지만…….”

장양은 한마디를 더 하려다가 입을 닫았다. 단지 마음속으로 세 번째 이유를 되뇌었을 뿐이다.

‘셋째, 우리 한중의 군단은 장안성을 탈환하여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해야 하네. 그렇기에 지금은 여유가 없는 상황일세…….’

아직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계획이었다.

장안에 주둔해있던 휘나라의 정예부대가 궤멸하였기에, 지금이야말로 역공을 가할 절호의 기회였다. 물론 겨울이 지나야 하겠지만 말이다. 아군이라 할지라도 계획이 새어나가서 좋을 것은 없었다.

장양의 시선이 지그시 남천을 응시했다. 풀이 죽어 있는 모습이었다. 거지같은 몰골로 어깨가 축 처져 있는 그를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동정심이 일었다.

“자네는 지금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 것인가. 폐하의 안위인가? 아니면 상장군의 명을 이행하지 못한 실책 때문인가?”

남천은 잠시 고민하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저 상장군께서 다시 한번 일전을 벌여 적군을 물리쳐야 한다는 것만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무엇이 옳은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상장군의 휘하에 있으면서 휘나라를 상대로 연전연패만 기록하고 있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부질없는 일이었다. 일개 장수로서 부끄러워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차마 그 말을 입으로 꺼낼 수가 없었던 것뿐이었다.

“자네에게 아직 충심이 남아있다면, 상장군을 설득하시게.”

“무엇을…… 말입니까?”

“지금 한세충 장군이 양양성을 방어하느라 고전하고 있을 것이네. 만약 상장군이 임안을 포기하고, 양양성을 공격하고 있는 휘나라의 후미를 공격해준다면 무척 값진 일이 될 걸세.”

남천의 눈빛이 일순간 흔들렸다.

“하지만 상장군께서는 한세충 장군과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아마도 도와주려 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들의 불화는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황실에서도 중재를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했을 정도였다.

“백성과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있다면 못할 것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그저 자네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주시게.”

남천은 포권을 하며 진심으로 화답했다.

“조언 감사드립니다, 장군.”

전령으로 온 남천이 물러가고 회의는 금세 종료되었다.

군사회의실을 나선 장양은 집무실로 향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새 그의 옆으로 소무가 다가와 나란히 걸으며 물었다.

“이미 예상하셨던 일이지 않습니까?”

장양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자네 또한 그의 휘하에서 전투를 해봤으니 알 것이네. 유광세의 능력으로는 결코 완안후이를 당해낼 수가 없네. 황실에서 유능한 인재를 모두 쳐내고, 말을 잘 듣는 자들만 종용하니 지금의 상황이 어찌 우연이라 할 수 있겠는가.”

“상장군의 요청을 거절했으니 그자가 어떤 해코지를 할지 모릅니다.”

“두려울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소무가 진지한 표정으로 본론을 꺼내었다.

“휘나라의 목표는 폐하입니다. 임안에서 퇴각하더라도 집요하게 추적할 것입니다.”

“아마도 그리하겠지.”

“만약 폐하께서 붙잡혀서 항복한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장양의 시선이 노을이지는 하늘을 향했다. 한중의 모든 백성과 관군의 운명이 달린 일이기도 했다.

“지금 휘나라에 점령당한 백성들의 삶이 어떠한 것 같은가.”

“많은 이들이 노예로 끌려가거나, 강제 노역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대부분이 굶주린 삶을 사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맞서 싸우다가 패한다면 한중의 백성들은 도살을 당할 테지. 그럼 나도 하나 묻겠네. 자네라면 평생을 무릎 꿇고 살겠는가? 아니면 하루를 살더라도 자유롭고 당당하게 서 있겠는가?”

“물론 후자입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이었다. 장양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허허허.”

“무엇이 즐거우신지요?”

“허허. 사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네. 이미 나와 약속하지 않았는가. 모두가 함께 웃고 춤출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로 말일세.”

“끝까지 저항하시겠다는 말씀이군요?”

“물론일세.”

그 순간 소무의 얼굴에도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자신과 마음이 일치함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후후. 그럼 되었습니다. 백문휘 부장님이 함께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뿐입니다.”

“하늘에서 우리를 응원해줄 걸세.”

“분명 그리하실 겁니다.”

묵묵히 걷던 장양은 다시 안색이 무거워졌다. 오랜 세월 자신을 충직하게 보좌해온 그를 생각하니 마음이 우울해진 것이다.

“더는 부장들의 죽음을 보고 싶지 않네. 이들의 생존능력을 올려주고 싶지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방법이 떠오르지를 않는군.”

“죽지 않으려면 강해지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맞는 말일세. 허나 양연정 부관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랑아대의 대원들보다도 약한 것이 사실이지. 그렇다고 자네가 다른 부장들을 훈련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같은 품계의 장수라 할지라도, 군에서 오랜 세월 공헌해온 고참 부장들이었다. 그들을 자신이 직접 훈련시키는 것은 썩 마음이 내키는 일이 아니었다.

“속성으로 익힐 수 있는 무림의 무공을 수련해보게 하는 것은 어떤지요?”

“물론 무림의 무공이 관군의 것보다 수준이 높은 것은 잘 알고 있네. 하지만 천금과도 같은 그것들을 어찌 구한단 말인가.”

“그 방면에 능통한 친구가 하나 있습니다. 장담은 못 하지만, 제가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어느새 장양의 집무실에 도착했기에, 소무는 작별을 고하고 나왔다. 만나봐야 할 사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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