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퉁소 부는 아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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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화 퉁소 부는 아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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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화 퉁소 부는 아이 (1)
2022.04.21.
군영을 벗어난 소무의 발걸음은 거리로 나와 서문으로 향했다. 노점에서 죽립도 하나 사서 착용했다. 사복 차림에도 가끔 자신을 알아보는 자들 때문에 불편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작 살 걸 그랬군.’
주위의 이목을 받지 않으니 마음이 한결 편안했다.
백색 장삼에 죽립과 한 자루의 검을 움켜쥔 모습이 영락없는 무림인이었다. 일반인들은 호전적인 무림인들과 엮이는 것을 꺼리기에 쉽사리 다가서는 자가 없었다.
한참을 걷던 그는 어느새 서문의 오십여 장 앞까지 당도했다. 우측으로는 연설화가 기거했었던 현화당의 터가 보였다. 지금은 비어있는 곳이었다.
무심코 지나치려 했으나 그의 발걸음이 갑자기 멈추었다.
‘누구지?’
현화당의 곳곳에서 느껴지는 다섯 개의 기운. 분명 무림인이었다. 확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기척을 죽인 채 담장 너머를 살펴보았다. 백의 무복을 입은 다섯 명의 무림인이 화원과 전각 안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소무의 시선이 그들의 왼쪽 어깨를 향했다. 사나운 범의 문양이 자수되어 있었다.
‘무림맹의 맹호대 소속이로군. 벌써 냄새를 맡았단 말인가?’
잠시 후 그들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조장님, 이곳에도 마공의 흔적이 있습니다.”
“옥화신녀가 이곳에 기거했던 것이 분명하다.”
“어떻게 할까요?”
“본단으로 돌아가 대주님께 보고해야겠다. 이후 추적대를 구성하여 샅샅이 뒤져야겠지. 우선 이곳에서 철수한다.”
“예!”
담장에서 멀어진 소무는 다시 서문을 향해 천천히 나아갔다.
그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무림맹의 추적 능력에 대해서는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한때 자신이 직접 교육하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연설화가 흔적을 잘 지웠기를 바랄 수밖에.’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머릿속에 의문이 떠올랐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했던 거지?’
자신이 마교의 핵심인물이었던 자를 걱정하다니. 예전 같았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계속 나아갔다. 그러기를 얼마 후. 등 뒤에서 돌연 적대감이 서린 음성이 들려왔다.
“이봐, 왜 여기서 알짱거리는 거지?”
맹호대의 대원 중 하나였다. 굳이 이곳에서 엮일 필요가 없었다.
“나는 그냥 지나가는 사람일 뿐이지 않소.”
다시 발걸음을 옮기려 했으나, 그들은 허락하지 않았다.
“너는 무림인이로군. 멈추고 죽립을 벗어라.”
“왜 그러시오?”
또 다른 동료가 다가와서 대신 답했다.
“행색이 수상하니 한번 조사해 봐야겠다. 멈추지 않으면 제압할 것이다.”
다짜고짜 드러낸 이들의 적개심에 소무의 미간이 좁혀졌다.
직감은 칭찬해 줄 만했으나, 이런 무례한 행동은 자신이 알던 무림맹의 방식이 아니었다. 규정상 본인을 먼저 밝히고 정중하게 부탁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의 말투가 돌변했다.
“무림맹이 언제부터 이렇게 안하무인인 집단이 되었단 말인가.”
노기 서린 대원들의 음성이 등 뒤에서 뿜어져 나왔다.
“이놈! 지금 무어라 했느냐!?”
“감히 우리의 정체를 알고도 입을 함부로 놀린단 말이냐!?”
소무의 입에서 한숨이 토해져 나왔다. 강호의 배분으로 따지면 까마득한 후배들이었다.
“지금 맹호대의 대주가 누구인가. 대원들 교육이 엉망이로군.”
“나다, 이 새끼야!”
맹호대의 대원 중 한 명이 다짜고짜 제압하기 위해 다가왔다. 등 뒤로 목덜미를 움켜쥐기 위해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 순간 소무의 검집이 어깨 뒤로 움직이며 그의 손목을 가볍게 타격했다.
뻐억-!
“크윽! 네 이놈, 정체가 무엇이냐?”
보지도 않고 등 뒤로 일격을 막아냈다. 이들은 본능적으로 상대의 무위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쉽사리 다가가지 못했다.
소무는 이들을 무시한 채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굳이 상대할 필요가 없었다.
그때 맹호대의 조장이 소리쳤다.
“만만치 않은 놈이니 동시에 제압한다!”
그들의 움직임은 소무의 감각에 낱낱이 감지되고 있었다.
“후. 도저히 안 되겠군.”
소무의 신형이 물 흐르듯 등 뒤로 미끄러졌다. 그러자 두 자루의 칼등이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헛손질을 하며 휘청이는 맹호대원들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소무가 검집을 비틀었다. 그의 검집이 움직이는 듯싶더니, 어느새 그들의 다리를 강타하고 있었다.
퍽-! 퍼억-!
“크윽!”
“큭!”
두 명의 대원은 자세가 무너지며 볼품없이 고꾸라졌다.
그 순간 소무의 삼면에서 나머지 세 명이 동시에 공격을 내질렀다. 세 자루의 검은 분명 그의 몸에 적중했지만, 마치 연기를 찌른 듯 모두 허공을 관통했다.
그때 신기루처럼 움직이는 그림자가 그들의 전신을 동시에 휘어 감았다. 이어서 둔탁한 타격음이 경쾌하게 뿜어져 나왔다.
쩌억-! 퍼퍼퍽-!
“크윽!”
“컥!”
“끄헉!”
세 명의 대원은 한 호흡 만에 바닥에 주저앉아 신음했다. 다시 일어서서 저항할 수도 있었지만, 그럴 마음은 추호도 들지 않았다.
그들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멀어져가는 사내를 응시했다.
“도대체 누구일까요?”
“우리를 살려둔 걸 보니 마교와 관련된 인물은 확실히 아닌 듯합니다.”
“휴. 강호는 넓고 기인은 많은 법이지. 재수 없게 잘못 걸렸구나.”
이들을 뒤로한 소무는 어느새 한중성의 서문을 벗어나고 있었다.
살기(殺氣)가 느껴지지 않았기에 굳이 심하게 다루지 않았다. 단지 협(俠)을 추구하는 무림의 모습이 점차 사라지고 있었기에 실망이 감돌았을 뿐.
성내에서는 순시를 목적으로 어지간해선 경공을 펼치지 않았지만, 이곳에서부터는 시간을 허비할 이유가 없었다.
경공을 펼쳐 내달리는 그는 작은 점이 되어 순식간에 어디론가 멀어져갔다.
* * *
정군산 분지 어딘가의 암자.
얼마 전까지 누군가가 머물던 이곳은 관리가 아주 잘 되어 있었다. 근처로는 작은 텃밭과 맑은 계곡도 보였다.
인적이 드물기에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생활하기에는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최근에 연설화가 통째로 매입한 장소이기도 했다.
암자 근처의 원두막에는 한 여인과 아이가 음을 연주하고 있었다. 합주가 막 끝나자 여인이 물었다.
“음악이 왜 배우고 싶었어?”
소소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마음이…… 두근두근하고…… 좋았어요.”
의병대에서 소소의 마음을 울렸던 유정 대협의 퉁소 소리. 그것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것은 타고난 감성을 지녔기 때문이란다. 이런 재능으로 음악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늘에 죄를 짓는 일이지.”
소소의 시선이 푸른 하늘을 향했다.
“하늘한테 잘해주고 싶어요. 스승님은 음악을 하는 이유가 뭐예요?”
“이것은 우리의 숙명이란다.”
“그것은 어떻게 알아요?”
“예를 들면…… 가끔 무식하고 기품이 없는 자들은 검으로 말할 수 있다고 하지. 하지만 우리 같이 감성이 타고난 연주가들은 음을 통해 대화를 나눌 수도 있단다.”
“음으로 어떻게 말해요?”
본디 아이들은 호기심이 많은 법이었다. 끊임없는 질문에 연설화는 다소 난감했다. 그러나 이내 대답할 필요가 없어졌음을 느끼고는 화두를 돌렸다.
“손님이 오는구나.”
소소는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잠시 뒤에서야 반가운 기척을 느끼고는 표정이 밝아졌다. 그러고는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아버지, 우리 여기에 있어요!”
원두막에 당도한 소무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하고 있어?”
“재밌어요~ 헤헤.”
소무가 마주하고 앉자 연설화가 말했다.
“아버지한테 차 한 잔 타드릴까?”
“네, 스승님!”
벌떡 일어선 소소는 한달음에 달려나갔다.
아이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소무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한중에 무림맹의 무사들이 와있더군.”
연설화는 자기랑은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얼굴에 장난기를 머금었다.
“검성이 나를 걱정해주는 거야?”
최근 들어 자신을 보면 놀려대는 재미에 빠져 있는 듯했다. 한때 공포의 마두였다고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추적조가 헤집고 다니면 위험할 수 있어. 흔적은 모두 없앴겠지?”
“물론이지. 내가 무림 초출로 보였어?”
“후후. 하긴. 내가 괜한 걱정을 했군.”
연꽃처럼 붉은 연설화의 입술이 미소를 그렸다.
“맞네. 내 걱정한 거.”
“후. 마음대로 생각해.”
“이곳엔 무슨 일로 왔어? 이 말이나 전해주려고 오진 않았을 텐데.”
눈치 하나는 귀신이었다. 소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속성으로 익힐 수 있는 마교의 무공이 필요해. 관군이 익힐 수 있을 만한 것으로.”
연설화는 한참이나 깔깔대고 웃었다.
“하하. 마교를 무슨 전당포쯤으로 생각한 거야?”
“음. 마교 서열 육 위라면 뭐라도 나올 줄 알았는데?”
돌연 연설화는 도도한 표정을 지으며 자부심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마전쟁 직후에는 내 서열이 첫 번째였어. 한때는 교주였단 얘기지.”
소무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말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무림맹은 최후의 전투에서 교주를 포함한 마교의 수뇌부를 몰살시키는 것에 성공했다.
그 혼란의 와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아 도주한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눈앞에 있는 옥화신녀 연설화였다.
“후. 아무튼, 도와줄 수 있어?”
“물론 도와줄 방법은 알고 있어. 하지만 그냥은 안 돼.”
충분히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최근 부쩍 가까워졌다고 한들, 한때는 적대관계였던 사이였다.
하지만 서로가 이해타산이 맞는다면 언제든 얘기는 달라질 수 있다.
“어쩌면 나도 뭔가를 해줄 수 있을 듯한데.”
연설화가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나도 원하는 게 있어.”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무엇을 원하는지 우선 들어봐야 했다.
“어서 말해 봐.”
“사실 어디를 좀 다녀와야 하는데 호위가 좀 필요해.”
극마의 고수에게 호위가 필요하다니. 도무지 짐작이 가는 곳이 없었다.
“이해할 수 없군. 계속 얘기해봐.”
“내가 가지고 있는 진일심소곡의 악보는 일부분이야. 나머지 부분은 스승님한테 있어. 찾아와야 하는데, 순순히 내어주진 않을 거야.”
그녀의 말투에서 스승과의 관계가 그리 가까운 사이가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다.
“스승님? 그자가 누구지?”
“은화파파(隱華婆婆).”
소무의 얼굴에 놀라움의 빛이 스쳤다.
이전 세대에 유명했던 인물로 겨우 이름만 들어보았을 뿐이었다. 그녀가 무림의 전설적인 마두로 군림했을때 소무는 태어나지도 않았었다. 살아있다면 최소한 백이십 살은 넘겼을 나이였다.
“그녀가 지금까지 살아있었다고?”
“무공 때문인지 명이 질기시더라.”
“스승과 무슨 일이 있었어?”
연설화의 표정이 다소 어둡게 변했다.
“강호를 은퇴하고 심심했나 봐. 열한 살이었던 나를 잡아다가 신나게 굴리고, 열여섯이 되던 해에 마교에 처넣은 고마운 분이지. 만나게 되면 또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몰라.”
대충 어떤 상황인지 짐작이 되었다. 마교는 자질이 있는 아이들을 납치해서 세뇌시키고 육성하는 일들이 빈번했으니.
왠지 모르게 그녀가 안쓰러워졌다. 아마도 꽃이 필 나이부터 타의로 혹독한 일생을 보냈으리라.
“악연이었군.”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기억들이야……. 함께 가줄 수 있어?”
연설화와 은화파파 사이에는 또 다른 무엇인가의 사연이 있는 듯했다. 하지만 소무에게 그것은 중요한 부분이 아니었다.
문제는 반세기가 넘도록 은거해 있는 은화파파의 무위가 경지를 짐작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연설화가 호위가 필요하다고 한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상대가 누구이든 검성에게 두려움 따위의 감정은 없었다.
“좋아, 거래 성립이군. 이제 무엇을 도와줄 수 있다는 건지 좀 들어볼까?”
연설화는 밝아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검성이 함께해준다니 마음이 든든해진 모양이었다.
“마교는 천무각에 무공 비급을 보관하고 있었어.”
“그곳의 비급은 영교에서 모두 강탈해 간 것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 그곳 안에 또 다른 무고가 존재하고 있어. 본교에서도 극소수의 간부들만 알고 있는 장소였지.”
“지금까지도 그대로 있을까?”
“아마도. 그곳을 아는 자는 최후의 전투에서 나 말고 모두 죽었거든.”
굉장히 솔깃한 내용이었다.
비록 정파에 패배한 마교의 무공이 완성형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군의 전투력과 생존능력을 비약적으로 상승시켜 줄 것은 분명했다.
“관군이 익힐 만한 무공이 있을까?”
“마교의 내공심법을 함께 수련해야 가능한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무속성의 무공들도 있어.”
무속성도 좋지만, 마교의 내공심법과 함께 새로 마공을 익힌들 어떠한가.
관군이 익힌다면 정파에서도 어찌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부작용도 있기에 섣불리 결정할 수는 없었다. 장양 장군과 의논해 봐야 했다.
그때 소소가 부엌에서 차를 들고 다가왔다.
“어서 먹어봐요. 헤헤.”
무심코 찻잔을 움켜쥔 소무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새 다도를 배웠다니. 기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소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빨리 먹어보라고 쳐다보고 있었다. 딸아이가 처음으로 타준 차였다.
빛깔이 조금 이상했지만 기쁜 마음으로 한 모금을 들이켜보았다. 순간 소무의 입에서 반사적으로 신음이 뿜어져 나왔다.
“크헙!”
이것은 분명 차가 아니었다. 소금 덩어리에 향신료를 섞어놓은 듯한 고통스러운 맛이었다.
반사적으로 연설화를 향해 전음을 보냈다.
- 부엌에 무슨 차를 준비해놓았던 거야?
- 나도 모르겠어. 분명 차는 암자 안에 있을 텐데, 애가 왜 부엌에서 나왔을까…….
소소가 곁눈질로 계속해서 자신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그러더니 기대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맛있어요? 소소가 만든 하늘차예요.”
소무는 은연중 한숨을 내쉬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
“맛있지 그럼…….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는 맛이구나. 소소도 한 입 먹어볼래?”
“히히. 아니요! 저는 차 안 마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