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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화 퉁소 부는 아이 (3) (82/250)


82화 퉁소 부는 아이 (3)
2022.04.23.


흑의인이 모두 쓰러지는 데는 불과 반각도 걸리지 않았다.

“오십 일.”

소무가 처치한 적들의 숫자였다. 연설화가 미소를 지으며 청아한 목소리로 답했다.

“오십 이~”

소무는 안광을 빛내어 쓰러진 자들의 숫자를 빠르게 세어보았다.

“비겁하게 암기로…….”

아무리 자신의 무공이 더 뛰어나다고 한들, 원거리에서 암기 다발을 날려대는 그녀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이들은 목적지인 천무각을 향해 계속해서 나아갔다. 연설화의 얼굴에는 아직도 미소가 가시지 않았다. 요즘 소무를 놀려대는 재미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늘 저녁은 비싼 걸 먹을 수 있겠네~ 돈은 있지?”

억울했지만 내기에서 졌으니 번복할 수는 없었다.

“휴. 뭐가 먹고 싶어?”

“밀사빙!”

밀사빙(蜜沙氷). 잘게 부순 얼음 위에 꿀과 팥을 올려서 먹는 고급 간식이었다.

과거에는 금값처럼 비쌌지만, 당대에 이르러서는 초석을 물에 넣어 얼리는 기술이 생겼기 때문에 돈만 있으면 누구든 먹을 수 있었다.

이 외에도 연유를 얼린 빙소(氷酥)나, 빙락(氷酪). 그리고 앵두와 꿀을 얼음에 섞어 먹는 내락반앵도(奶酪拌櫻桃)등도 유명하다.

소무는 짐짓 놀라는 표정을 했다. 그러자 연설화가 따지듯 물었다.

“왜 놀라고 있어? 돈이 없어?”

“방금 너의 모습이 소소하고 겹쳐 보였어.”

연설화가 턱을 올리며 고상한 표정으로 물었다.

“스승하고 제자가 닮은 게 뭐가 어때서.”

“음. 소소도 점차 너를 닮아가겠지?”

“나 같은 스승을 닮으면 좋아해야지. 무식하게 검만 휘두르는 아비 닮았으면 좋겠어?”

“분하지만 그것도 그렇군. 진일심소곡을 익히는 데 기간이 얼마나 걸리지?”

“그 전에 먼저 익혀야 하는 음(音)의 기술이 스물여덟 단계가 있어. 사자후도 완성해야 하고. 재능에 따라 오 년에서 십 년쯤?”

소무의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필요로 했다. 그리고 이 기간에는 연설화를 계속 봐야 한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그때쯤이면 소소가 숙녀가 되어있겠군.’

아이의 모습을 상상하던 소무는 걸음을 멈추었다. 연설화가 손을 들어 올렸기 때문이었다.

전면으로 화려한 문양과 비단으로 장식된 원목의 전각이 보였다.

“이곳이야. 기관이 설치되어 있으니 그냥 열면 안 돼.”

연설화는 문틀에 장식된 다섯 개의 손잡이를 조정했다. 작업이 오래 걸리자 소무가 답답해하며 물었다.

“그냥 부숴버리지?”

“안 돼. 우리 정도면 죽지는 않겠지만, 독무가 뿜어져서 옷이 더러워질 수 있어.”

고작 옷이 조금 더러워질 가능성에 이런 고생을 하고 있다니. 그녀의 모습이 웃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천하의 옥화신녀도 확실히 여자였군.”

“대체 그동안 나를 뭐로 본 거야?”

딸칵-!

천무각의 기관이 해제되며 문이 스르륵 열렸다. 안으로 보이는 광경은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수백 권의 무공비급이 진열되어 있어야 할 책장은 텅텅 비어있었다. 주인 없는 집기류들만 곳곳에 나뒹굴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 안에 비밀 공간이 있다는 얘기지?”

“응, 바로 아래에.”

연설화가 벽면의 한 부근에 내공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바닥이 부르르 떨리며 틈새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드르르륵-!

“내공을 이용해야 열리는 기관이라니. 기술이 대단하군.”

“아직은 무사한 것 같네.”

연설화를 따라 아래로 내려가자 백여 권의 무공 서적이 보였다. 하나같이 마교의 상승 무공들이었다. 검성이나 옥화신녀의 수준에서 관심을 끌 만한 것은 없지만, 관군이 익히기에는 유용한 것들이 꽤 많았다.

품속에서 보자기를 꺼내고는 하나씩 선별하여 담던 소무의 손이, 붉은 표지로 감싸진 서책을 움켜쥐고 정지했다.

“혈풍검법(血風劍法). 이걸 쓰는 마교도를 본 적이 있었지.”

“마령검객 용운철이 즐겨 쓰던 검법이었어. 쓸 만할걸?”

“이건 우리 대원들이 익히게 해야겠군.”

하나둘씩 집어 담던 소무는 푸른 서책을 움켜쥐고 갸우뚱했다.

“섬멸폭권(殲滅爆拳)……?”

“그건 당대에는 익힌 사람이 없어서 모르겠네. 마교의 수뇌부에서는 권법을 선호하는 고수가 없었어.”

소무는 비급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총 육 초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파산권과 함께 응용해서 쓴다면 꽤 훌륭한 위력을 뿜어낼 수 있을 게 분명해 보였다.

‘일광이 좋아하겠군.’

비급은 검법과 창법, 그리고 궁술을 위주로 담았으며, 내공심법도 몇 개 챙겨 넣었다. 게다가 이형환위 같은 경신술과 호신강기류의 생존 비급까지.

하나하나가 천금의 가치를 지녔지만, 그것은 일반적인 무림인들의 얘기였다. 소무와 연설화의 수준에서는 의미 없는 비급들이었다.

그때 소무의 시선이 그녀의 손으로 향했다. 한 권의 서적을 챙겨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뭐야?”

“도착할 때까지 넣어줘. 이건 내 제자가 익히게 할 거야.”

소무는 무심코 비급을 건네받아 살펴보았다.

“천마환영보(天魔幻影步)?”

“너도 경험해 봤을걸?”

그야말로 마교 최고의 도주기였다. 자신도 이것을 익힌 상대를 몇 번이나 놓쳤을 정도로 애를 먹은 기억이 있었다. 검성의 섬전비영보를 수련한 소소라면 이 정도 경신법은 익히는 것도 어렵지 않을 터.

“생존 기술은 많을수록 좋은 법이지.”

천마환영보를 끝으로 보따리를 묶었다. 수십 권의 비급을 담았음에도 아직도 많은 서적이 남아있었다.

“남은 건 어떻게 할 거야?”

“더는 필요도 없고, 애먼 곳에 흘러 들어가면 화근이 될 터인데……. 없애버려도 되겠어?”

연설화가 오른손에 내력을 집중하자 검은 화염이 타올랐다. 암화(暗火). 마공의 수준이 정점에 올라야 가능한 기술로 내력의 소모가 크지만, 무엇이든 태울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곳에는 미련 따위 없다고 얘기했을 텐데.”

그녀의 손이 책장을 스치고 지나가자 화염이 순식간에 번져갔다.

화르르륵-!!!

천년 역사의 마교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단지 일부의 무공만이 보존되어 한중의 군단에서 이어가게 될 것이다.

“어서 나가지.”

천무각을 벗어난 둘은 미련 없이 하산을 시작했다. 나란히 경공을 펼치던 중 소무가 물었다.

“이젠 내가 보답할 차례로군. 은화파파가 있는 곳이 어디야?”

연설화는 고개를 가로로 내저으며 말했다.

“아니, 지금 당장은 싫어. 마음의 준비가 되면 그때…….”

그녀의 목소리에는 은연중 두려움이 깃들어 있었다.

어떠한 사연이 있는지 궁금했지만 급할 필요는 없었다. 직접 만나보면 알게 될 터였으니.

“내가 옆에 있어도 걱정이 되는 모양이군.”

“너도 마음의 준비를 해두는 게 좋을 거야. 마교의 비급을 전부 넘겨주더라도 나한텐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었으니까.”

연설화의 말에 오히려 투지가 끓어올랐다.

당대 무림의 제일 고수와 전대 무림의 전설이 만나게 된다. 그것은 오히려 소무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고 있었다.

소무는 잠시 후 무엇인가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저녁은 어디서 먹을 거야? 밀사빙이 아무 데서나 팔지는 않을 텐데?”

“한중에 아는 데가 있어. 이참에 내 제자도 밀사빙의 맛을 보여줘야지.”

* * *

끼기기기긱-!!!

돌 더미를 가득 실은 수레바퀴가 움직이는 소리였다. 무게가 어찌나 무거운지 십여 명이 달라붙어도 힘에 부치는 모습이었다.

“어서들 힘을 내!”

“으랏차!”

이들은 하나같이 허름한 회색 천 옷을 입고 있었다.

호북성 동구수용소. 이곳에 수용되어 강제 노역을 하는 죄수들이었다.

안간힘을 쓰는 죄수들의 틈새로 한 중년의 남성이 다가왔다.

“비켜들 보시게.”

그가 입은 죄수복의 틈새로 무수히 많은 상처와 짓이겨진 자국이 보였다.

“자, 장군?”

“이곳은 저희에게 맡기고 쉬십시오.”

수레를 움켜쥔 남성은 기성과 함께 그것을 사정없이 밀어내기 시작했다.

“으압!”

끼기기기긱-!!!

꿈쩍도 하지 않았던 것이 빈 수레처럼 빠른 속도로 멀어져갔다.

순식간에 할 일을 마친 그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또 다른 목표를 찾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가 걸음을 옮길 찰나였다.

뿌우우우우-!!!

식사시간을 알리는 뿔피리 소리였다. 교도관이 지나다니며 죄수들을 독촉했다.

“빨리들 처먹고 일각 내로 복귀해!”

상처투성이의 남성은 터벅터벅 걸어가 수레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정체는 대장군으로 복무했던 악비였다. 나이가 적지 않았지만, 화경의 신체 덕택에 아직도 중년의 외모를 유지하고 있었다.

“후…….”

근심거리가 있었기에 입맛이 없었다.

지급되는 식량은 고작 하루에 만두 한 개였다. 그런데도 전혀 손이 가지를 앉았다.

악비의 시선이 우측 십여 장으로 향했다. 낯익은 인물이 다리를 쩔뚝거리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자신보다 상태가 더욱 좋지 않았다. 한쪽 눈은 어찌 되었는지 안대로 가리고 있었으며, 왼손은 손가락이 세 개밖에 남아있지를 않았다.

무공을 익히지 않았으면 진작에 죽었을 만한 고문의 흔적이 곳곳에 남겨져 있었다.

충성스러운 자신의 부하 장헌이였다.

“장군, 입맛이 없으셔도 식사를 하셔야 합니다.”

“나는 괜찮으니 자네라도 많이 먹어두시게.”

장헌은 손에 움켜쥔 만두를 반으로 쪼개며 내밀었다.

“장군께서 드시지 않는다면, 저도 먹지 않겠습니다.”

억지로라도 먹으려 했지만, 도무지 손이 가지를 않았다.

“나는 신경 쓰지 말고 어서 드시게…….”

장헌이 한숨을 내쉬며 설득했다.

“이 잔악한 놈들이 장군의 어머니까지 죄를 뒤집어씌워 체포했다지만, 설마하니 무슨 해코지라도 하겠습니까? 금방 풀려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악비는 충성심 못지않게 효심이 지극한 인물로 유명했다.

얼마 전 관아에서 연로한 그의 어머니를 체포했단 소식이 이곳에 전해진 것이었다. 배경에 황실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거동조차 불편한 어머니가 차디찬 옥에 갇혀 있는데, 내가 어찌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때였다.

“그럼 저도 지금부터 식음을 전폐할 것입니다.”

함께 수감된 아들 악운의 목소리였다. 아비가 이리 고통스러워하는데 혼자만 먹을 수는 없었다.

그때였다.

“장군께서 드시지 않는다면 저도 먹지 않겠습니다!”

“저도 먹을 수 없습니다!”

악비의 고개가 올려지며 주변을 바라보았다. 수십 명의 죄수가 자신을 둘러싸고 만두 반쪽을 내밀고 있었다.

“다들 고맙네. 어서들 드시게.”

장헌에게서 만두 반쪽을 건네받고는 한 입을 물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죄수들도 똑같이 한 입만 깨물었다. 그가 다 먹을 때까지는 먹지 않겠다는 의도였다.

무슨 맛인지 느껴질 리가 없었다. 악비는 다른 이들을 위해서라도 억지로 욱여넣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장헌이 울컥하며 물었다.

“분하지도 않으십니까? 도대체 언제까지 참아야 합니까?”

“자네는 내가 어찌하길 원하는가.”

“마음을 먹으신다면 언제든 이곳을 나가실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함께하겠습니다.”

“후후……. 반란군이라도 되자는 말인가?”

그때 먼 곳에서 교도관 한 명이 달려왔다. 그의 손에는 한 장의 서신이 움켜쥐어져 있었다.

“한중에서 온 서신이라고 하니 받아보시오.”

악비는 무심코 그것을 받아들었다. 교도관의 입이 귀에 걸린 보아, 이것을 건네주는 대가로 뇌물을 받은 모양이었다.

서신을 건네준 그는 왔던 곳으로 돌아가 관군의 장교에게 연신 굽신대고 있었다. 그렇다면 아마도 군단에서 온 서신이리라.

악비는 묵묵히 서신을 열어보았다. 내용을 읽어보던 그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했다.

그러기를 잠시 후. 침울해 있던 그의 표정이 갑자기 밝아졌다. 게다가 웃기까지 하는 것이 아닌가.

“허허……. 허허허…….”

장헌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기쁜 소식이 있으신가 봅니다.”

“사제에게서 온 서신일세. 허허! 드디어 해냈구만. 기어코 사제가 해낼 줄 알았어…….”

이것은 장양이 보낸 친필 서신이었다. 한중의 승전보와 함께 안부를 묻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처한 상황들까지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악비는 서신을 장헌에게도 건네어 읽어보라고 했다. 기쁜 내용은 함께할수록 좋은 법.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부하였기에 충분한 자격이 있었다.

서신을 읽어본 장헌의 얼굴에는 기쁨과 걱정이 함께 떠올랐다.

“절제사께서 기개와 행동이 대담하신데, 어쩌면 장군처럼 위험해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악비의 표정이 점차 굳어졌다.

“내 다른 것은 모두 참을 수 있네. 하지만 만약 황실에서 내 사제에게 조금이라도 해코지를 가한다면 그때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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