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인내심의 한계 (1)
(86/250)
86화 인내심의 한계 (1)
(86/250)
86화 인내심의 한계 (1)
2022.04.27.
한중에 겨울이 찾아왔다. 하루아침에 온 거리와 군영이 눈으로 수북이 뒤덮였다.
날씨가 쌀쌀해졌지만, 무공을 익힌 병사들에게는 오히려 시원할 뿐이었다. 다만 허벅지까지 쌓인 눈 때문에 모두가 애를 먹어야했다.
랑아대의 대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자, 다들 빨리 마무리하자고!”
대원들은 저마다 눈을 치우는 도구인 목험(木杴)을 하나씩 움켜쥐었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막사 주변의 눈이 빠른 속도로 정리되어갔다.
소무는 대원들을 뒤로한 채 장양 장군의 집무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멀지 않은 곳에 낯익은 아이의 뒷모습이 보였다. 다람쥐처럼 쪼그려 앉아 눈사람을 만들고 있는 소소였다.
‘이른 아침부터 어딜 나가나 했더니, 여기 있었군.’
마침 최근 딸이랑 놀아주지 못해서 마음이 좀 쓰였던 참이었다. 오른손을 펴자 바닥에 쌓인 눈가루가 빨려들듯 다가왔다. 이윽고 가루가 뭉쳐지며 작은 공 모양으로 변했다.
소무의 손에서 쏘아져 나간 눈덩이는 곧 소소의 등에 정확히 적중했다.
퍽-!
정신이 팔려있던 소소는 난데없는 기습에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아얏!”
아이의 반응이 웃겼는지 소무의 입가가 미소를 그렸다.
“눈사람 만들었어? 솜씨가 제법인데.”
“헤헤. 내 친구 소봉이에요~ 예쁘죠?”
자신의 가슴 높이 정도로 만든 작은 눈사람이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얼마나 정성을 들여 만들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머리에는 소무의 죽립도 가져와 씌워 놓았다. 사람 형상으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게 실력이 꽤 괜찮았다.
“친구 코가 좀 틀어졌구나.”
소소는 막대기로 만들어진 소봉이의 코를 매만졌다.
“아프지 마, 소봉아!”
그 틈을 노려 소무가 웃으며 다시 눈뭉치를 쏘아 보냈다. 그것은 정확히 소소의 엉덩이에 적중했다.
퍼억-!
“하하!”
넘어질 듯 휘청거리던 소소는 고개를 휙 돌리며 미간을 좁혔다.
“우씽!”
소소는 한 움큼의 눈덩이를 움켜쥐고는 돌돌 말아 발사했다. 얼마나 강하게 던졌는지, 바람을 가르는 파공음 소리가 요란하게 뿜어졌다 아버지가 이 정도쯤은 맞아도 끄떡도 안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리라.
날아오던 눈뭉치를 바라보던 소무는 그냥 무시했다. 각도가 자신의 위치에서 분명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착각이었다.
거리가 일장으로 좁혀진 순간이었다. 돌연 눈덩이의 각도가 갑자기 꺾이며 빨라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회전하기까지.
‘곡구(曲球)? 연설화에게 암기술을 배우고 있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맞아줄 수는 없었다. 이 정도로 다치진 않겠지만, 얼굴을 향하고 있었기에 자칫 꼴사나운 모습을 보일 수가 있었다. 적중의 순간 소무의 상체가 뒤로 슬쩍 기울었다.
맹렬한 속도로 소무의 코앞을 스치며 지나간 눈덩이는 하필 다른 누군가의 뒤통수를 향해 계속해서 나아갔다. 랑아대에서 머리가 가장 큰 인물. 목험을 움켜쥐고 있는 일광의 뒤통수였다.
빠아악-!!!
“크악! 누구야!?”
소소는 모르는 척 고개를 휙 돌리며 딴청을 피웠다. 그 순간 뒤통수를 부여잡은 일광의 두 눈이 소무와 마주쳤다.
“아 놔, 비겁하게 기습을 해!? 얘들아 대장이 한번 해보잔다!”
그렇지 않아도 무료했던 대원들이었다. 저마다 눈덩이를 재빠르게 준비하고는 자세를 잡았다.
“투척 준비!!!”
이 모습을 지켜보던 소무는 한숨을 내쉬었다. 딸아이는 모르겠다는 듯 어느새 등을 돌리고 있었다.
“다들 이따 봐.”
외마디를 남긴 채 소무는 눈 위를 밟고 섬전같이 도주하기 시작했다. 수상비보다 어렵다는 설상비(雪上飛)였다.
순식간에 대장이 멀어져 가자 대원들의 표정에 아쉬움이 떠올랐다. 기껏 눈뭉치를 만들었지만, 목표를 잃고 나니 뻘쭘한 상황이 되었다. 그렇다고 그냥 내려놓을 수는 없지 않은가.
“에라이!”
일광이 근처에 있던 청해를 향해 눈덩이를 날렸다. 이미 눈치채고 있던 그는 상체를 흔들며 피해냈다. 그리고 그것은 등 뒤에 있던 철두의 얼굴에 맞았다.
뻐억-!
“큭! 일광 형님 너무합니다!”
철두가 손에 쥐고 있던 눈덩이를 날렸다. 옆에 있던 몇몇 대원이 행동을 함께했다.
퍼퍽-!!!
일광이 옷에 묻은 눈을 털며 근처의 대원들을 향해 소리쳤다.
“형님이 당하고 있는데 두고만 보고 있을 거냐!?”
그것이 시작이었다. 사방에서 수십 개의 눈덩이가 허공을 날아들며, 본격적인 눈싸움이 개시되었다. 대원들의 얼굴에 모처럼 활기찬 웃음이 떠올랐다.
그러기를 반각 후. 돌연 일광의 얼굴에 장난기가 떠올랐다. 목표는 다람쥐 같이 앉아 있는 소소였다.
“받아랏, 소소!!!”
화들짝 놀란 소소는 풍차처럼 옆으로 회전하며 회피 동작을 개시했다. 그런데 무심코 한 가지를 간과한 게 있었다.
“안돼, 소봉아!!!”
소소가 재빨리 고개를 돌렸지만, 한발 늦고야 말았다. 일광이 날린 눈덩이는 목표물을 잃고 소봉이의 목젖을 꿰뚫었다. 그 순간 소봉이의 잘려나간 머리가 바닥으로 쿵 하고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본 일광은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며 온몸이 정지했다. 소소의 눈가로 순식간에 물기가 차올랐다.
“흐아앙……. 일광 삼촌이 내 친구 소봉이 죽였어!!!”
소소는 잘려나간 소봉이의 머리를 끌어안고 오열했다. 대원들이 움직임을 멈추며 걱정하는 얼굴로 조카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서럽게 우는 소소를 향해 일광이 머리를 긁적이며 다가갔다.
“사실 소봉이는 나쁜 친구였어. 대신 삼촌이 좋은 친구 만들어줄게. 중봉이가 좋아? 대봉이가 좋아?”
대원들은 일광을 바라보며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때였다. 눈물범벅이 된 소소가 고개를 돌리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초대봉이…….”
그 순간 일광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가 주변의 대원들을 향해 소리쳤다.
“모두 들었지!? 우리의 조카가 친구 초대봉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마음이 쓰였던 삼촌들이었다. 모두가 목험을 움켜쥔 채 의기투합하여 산개했다. 중원 역사상 가장 큰 눈사람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 * *
군영의 깊은 곳에는 이미 재설작업이 거의 끝나있었다. 대규모의 병사들이 동원되었기 때문이었다.
장양 장군의 집무실에는 이미 또 다른 손님이 찾아와있었다. 오늘 이곳에서 함께 만나기로 한 양연정 부관이었다.
양연정이 비어있는 의자를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
“오셨는가, 소무 부장. 어서 앉으시게.”
작은 탁상을 사이에 두고 세 명이 마주 앉았다. 그때 장양이 소무를 바라보며 명패를 내밀었다.
“먼저 기쁜 소식이 있네. 황실에서 온 교지일세. 자네의 품계가 정오품 충무교위(忠武校尉)가 되었네.”
정육품인 창무교위에서 정오품인 충무교위라니. 무려 품계가 두 단계나 오른 것이다. 군단장 야율환과 사령관 테무르의 수급을 벤 것이 가장 핵심적인 공적이었다.
부관 양연정이 진심 어린 표정으로 축하해주었다.
“고생 많았네. 덕분에 나와 다른 부장들도 모두 한 단계씩 올랐네.”
소무의 품계는 양연정과 동급이 되었으며, 다른 부장들보다 한 단계가 높은 상태가 되었다. 기쁜 일이었지만 그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다른 분들이 기회를 만들어주었기에 제가 덕을 본 셈입니다.”
“큰일을 해냈으니 겸손할 필요 없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장군님께서 드디어 절도사의 등급이 되었다는 것일세.”
무표정하던 소무의 얼굴이 처음으로 밝아졌다.
정삼품인 절제사에서 종이품 절도사로 한 단계가 올랐을 뿐이지만, 그 권력의 힘은 천지 차이였다. 드디어 공식적인 섬서의 군사령관으로서 지역을 관장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는 상장군의 눈치를 보지 않으셔도 되겠군요.”
장양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며 답했다.
“적어도 섬서에서만은 병사를 차출해 간다거나, 마을에서 강제로 징발하는 악행은 막을 수 있게 되었네.”
“잘되었습니다. 하지만 황실에서 갑자기 이렇게 파격적인 인사를 감행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중의 군단이 연이어 대승을 거두고 마땅한 공적을 세웠다지만, 분명 무엇인가 이상했다.
“섬서에 주둔해있는 군단은 오직 우리뿐일세. 그렇기에 절도사의 품계를 준다고 한들 변하는 것은 없다고 판단했겠지. 단지 한중의 병력을 빼내기 위해 당근을 준 것일 뿐이네.”
“황실에서 우리 병사들의 파병을 함께 요청한 겁니까?”
“자네 말이 맞네. 최소한의 수비병력을 제외하고 모든 병력을 보내라 하더군.”
도성을 지키기 위해 강군으로 이름을 날린 한중의 병사들을 소집하려는 의도였다. 그 대가로 당근을 함께 내어준 것이 분명했다.
“한중과 임안은 가까운 거리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황실이 요충지인 한중의 병력까지 빼가려는 것을 보면 상황이 다급한 모양입니다. 어찌하실 생각이신지요?”
장양은 양손으로 깍지를 끼고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답했다.
“이미 늦었네. 교지가 이곳에 도착하는데 벌써 한 달 이상이 소요되었지. 수집된 정보에 따르면 지금쯤 도성이 공격을 받고 있을 걸세.”
무능한 황실에 병력을 바치고 싶지도 않았지만, 이미 그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소무는 도성을 방문했던 기억을 되짚어보고는 대답했다.
“금군 병사들의 무공 수준이 꽤 괜찮았지만, 그들만으로는 휘나라의 대군을 상대하기엔 역부족일 것입니다.”
“임안은 곧 함락될 것일세. 상장군이 회남에서 대패했을 때부터 어느 정도는 정해진 수순이었지. 한세충 장군까지 양양에 발이 묶여 있으니, 누가 완안후이를 막아낼 수 있겠는가.”
“그럼 우리는 이후의 상황에 대비해야겠군요.”
장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자네는 눈치가 빨라서, 대화하다 보면 속이 시원하군. 폐하는 아직도 후계자를 지목하지 않았네. 정세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으니, 상황을 지켜만 볼 수도 없는 일이지.”
“무엇을 준비하고 계십니까?”
부관 양연정이 대답을 대신했다.
“우리는 겨울이 지나는 대로 장안성을 탈환할 계획이네.”
이미 소무도 짐작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한중의 방어전에서 적군을 괴멸시킨 영향으로 장안은 고립된 상태였다. 역공을 가할 절호의 기회였지만 한 가지 문제가 남아 있었다.
“장안을 탈환하는 것보다는 지키는 것이 더 문제입니다. 우리가 방어해야 할 지역은 늘어나지만, 일개 군단으로는 작전 반경에 한계가 있지 않습니까?”
장양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나도 그 부분을 가장 고민하고 있었네. 섬서에 주둔한 군단은 우리가 유일하니, 지원을 받을 여력도 없는 상황일세. 반드시 우리를 보조해줄 추가적인 군단을 편성해야만 하네.”
섬서의 군권을 관장하는 절도사가 된 이상 휘하의 군단을 편성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부족한 병사는 각지에서 신병 모집을 통해 어느 정도는 충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소무는 말끝을 흐렸다.
어차피 장양도 다 알고 있을 터.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들어봐야 했다.
“경험이 많은 유능한 장군이 절실한 상황이지. 최고의 지휘관이 말일세.”
“누가 있겠습니까?”
양연정도 궁금하긴 마찬가지였다. 소무와 함께 묵묵히 장양의 대답을 기다렸다.
잠시 후 그의 입이 나직이 열렸다.
“한 명이 있지 않은가. 대장군까지 역임했던 명장이 말일세.”
소무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악비 장군은 지금 동구수용소에 수용되어 있지 않습니까? 황실과의 불화가 극에 달했기에 순순히 풀어줄 리가 없습니다.”
“스스로 걸어 나와 의용군을 편성하게 하면 어떻겠는가.”
양연정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답했다.
“절도사의 권한으로 눈을 감아주신다면 활동에는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다만 황실로부터 장군의 입지가 곤란해지실 수 있습니다.”
최근까지도 각지에서 반란이 끊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 과정에서 각 성의 절도사들이 임의로 반란군을 흡수하여 휘하 부대로 편성한 전례도 많이 있었다.
“우리가 언제 백성의 안위 앞에서 황실의 눈치를 보았단 말인가.”
소무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저도 동의합니다. 지금 생존을 위협받고 있는 황실에서 악비 장군을 신경 쓸 여력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을 무슨 수로 움직이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미 직접 만나본 소무도 그의 강인한 의지에 혀를 내둘렀을 정도였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장양이 아무 생각 없이 이런 구상을 할 리가 없었다.
장양이 다소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무리 군자라 할지라도 사람인 이상 인내심에 한계가 있는 법이네……. 관아에서 기어코…… 그의 어머니에게 누명을 뒤집어씌워 참수했다고 하네. 내가 막아 보려 했으나, 뒤에 황실이 있었기에 역부족이었네.”
양연정의 미간이 급격히 좁혀졌다.
“후……. 어찌 세상에 이런 잔악한 놈들이.”
소무도 이가 갈리긴 마찬가지였다.
“지금껏 금수들이 왕관을 쓰고 나라를 통치하고 있었군요.”
부하 장수들이 대놓고 황실을 욕하고 있었지만, 장양도 제지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는 서글픈 눈빛으로 소무를 바라보며 말했다.
“서신을 한 장 써줄 터이니, 자네가 한번 그를 만나주시게.”
“알겠습니다, 장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