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인내심의 한계 (2)
(87/250)
87화 인내심의 한계 (2)
(87/250)
87화 인내심의 한계 (2)
2022.04.28.
호북성 동구수용소.
이곳에선 죄수들의 노역이 한창이었다. 인근의 채석장에서 암석을 채굴해온 후 성벽이나 도로에 사용할 벽돌을 만드는 고된 일이었다.
죄수들의 수는 약 이천여 명. 그중 군계일학(群鷄一鶴)의 위용을 드러내는 죄수가 한 명이 있었다. 팔십여 장이 떨어진 언덕 너머에서 한 사내가 그의 모습을 지그시 응시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엇이 이자를 이렇게까지 움직이게 만드는 것인가.’
소무는 며칠째 이곳에 서서 악비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라에 버림을 받은 것도 모자라 어머니까지 억울하게 참수되었다.
그런데도 그는 절대로 꺾이지 않겠다는 듯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지금도 한가득 석재를 짊어지고 있는 그의 걸음걸이에서는 숭고함마저 느껴지고 있다.
겉으로는 분명 그러했다. 그러나 소무의 예리한 시선은 그의 작은 움직임 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있었다.
‘마음은 분명 동요하고 있다. 그 동요가 절정에 이르는 순간에 장양 장군의 서신을 전달해야만 승산이 있다.’
그렇게 소무는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능한 장군을 포섭하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의 수고는 사치가 아니었다. 유비도 공명을 얻기 위해 수고를 마다치 않고 삼고초려를 하지 않았는가.
그러기를 삼 일째. 고목처럼 서서 묵묵히 지켜보던 소무의 눈빛이 빛났다. 그의 시선은 수용소에서 삼백여 장이 떨어진 곳을 향해 있었다.
다급히 말을 몰고 오는 한 명의 기수. 그는 분명 수용소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말 안장에 고정된 깃발의 문양에서 그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황실에서 온 전령이로군. 이 외진 곳에 전령을 보낼 이유는 하나밖에 없겠지.’
전령의 교지가 이곳에 전해지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소무가 처음으로 움직임을 개시했다. 수용소로 이어진 소로를 향해 내달리는 그의 속도는 빛살처럼 빨랐다.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져 갔다. 전령은 소무가 다가오는 것도 모르는 채 앞만 보며 내달리고 있었다.
그러길 잠시 후. 검은 그림자가 전령의 전신을 덮치며 한 바퀴를 휘감았다.
휘리리릭-!
말이 놀라며 멈추는 순간, 전령은 이미 바닥에 기절해 있었다. 그의 가슴팍에 삐죽 튀어나온 황금빛 두루마리. 봉인된 밀서가 아니었기에, 내용을 확인하는 것은 문제가 없었다.
두루마리를 풀자, 표지 안에 황실에서 내려온 교지가 꽂혀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읽어가는 그의 눈빛은 분노에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이제 와서…… 다시 나라를 위해 싸우라고?’
예상대로 악비에게 전해지는 복직명령서였다. 죄를 사하여 줄 테니 조속히 복귀하여 적들을 물리치고 도성을 구하라는 내용이었다.
‘황실이 지금까지 악비 장군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는가. 그러고도 어찌 감히 또 그의 어깨에 다시 짐을 지을 수 있단 말인가.’
그만큼 도성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전세가 기울자 다시 이용하려는 것일 뿐.
‘그러기엔 이미 너무 늦었다. 이러한 희생으로 지켜지는 궁성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도성이 함락된다 할지라도 소무에게는 관계가 없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황실의 부흥이 아니었다. 송나라의 황실 또한 휘나라와 같이 썩어간다면 그 또한 척결대상일 뿐.
황실의 교지를 가로챈 소무는 품속에서 은자 다섯 냥을 꺼내었다.
‘전령한테는 무슨 죄가 있겠는가. 교지를 잃어버렸으니 돌아갈 수도 없겠지. 이대로 이곳을 떠나거라.’
은자는 전령의 품속에 넣어주었다. 적지 않은 돈이었지만 그의 행동에 망설임은 없었다. 타고 온 말까지 매각한다면, 변방에서 작은 장사 정도는 할 수 있는 금액이 나올 것이리라.
소무는 다시 위치로 돌아와 묵묵히 하던 일을 계속했다.
한식경이 지난 뒤 정신을 차린 전령은 한참을 당황해하고 고민하다가 이내 어딘가로 말을 몰고 사라졌다. 도성이 있는 방향이 아닌 다른 곳이었다.
그리고 다시 이틀이 지났다. 여전히 악비는 흔들림이 없었다.
‘이대로는 답이 없겠군.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고심 끝에 그의 발걸음이 탕인현의 지방관아로 향했다. 악비의 고향인 그곳까지는 쉬지 않고 말을 타면 하루 정도가 걸린다. 소무가 전력으로 달린다면 한 시진이면 충분했다.
노을이 질 무렵 소무는 탕인현의 관아 입구에 당도했다. 종오품인 현령(縣令)이 다스리는 곳이었다. 소무는 정오품의 관직으로 현령보다 품계가 한 단계 더 높았다.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그는 입구를 지키고 있는 네 명의 병사에게 명패를 꺼내 보이며 말했다.
“매우 중한 일로 급히 현령을 만나러 왔네.”
명패를 확인한 병사들은 화들짝 놀랐다. 이미 교위의 관복까지 입고 있었기에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정오품이면 지방 현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고위급 무관이었다.
병사 한 명이 현령에게 전하기 위해 미친 듯이 내달렸다. 그리고 두 명의 병사가 소무를 관아의 안뜰로 안내했다.
“이곳으로 모시겠습니다, 교위님.”
관아 내에는 고위급 손님을 모시는 장소가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소무는 한 손을 올려 보이며 사양했다.
“시간이 없으니 잠시 이곳에서 기다리지.”
그의 예민한 청각은 곳곳의 기척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현령이 있는 곳으로 짐작되는 장소도 말이다. 관아임에도 불구하고 여자들의 깔깔대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잠시 후 현령이 기거하는 내아(內衙)의 문이 열렸다. 살이 뒤룩뒤룩찐 돼지 한 마리가 눈알을 굴리며 힘겹게 걸어오고 있었다.
소무는 지금까지 이보다 탐욕스럽게 생긴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황실을 등에 업고 악비 장군의 어머니를 참수한 장본인이다.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제가 이곳의 현령 왕기입니다. 교위께서 이곳에는 무슨 일이십니까?”
하급자임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뻣뻣이 세우고 있었다.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리라.
“이곳에서 악비 장군의 노파가 참수된 것으로 알고 있네.”
왕기는 의심의 눈초리와 함께 떨떠름한 말투로 물었다.
“악비는 반역자입니다. 왜 그놈을 장군이라 부르시는지요?”
“대장군을 그놈이라 칭하다니. 간이 부은 놈이로군.”
호의적이지 않은 목소리. 왕기는 상황을 지레짐작하고는 미간을 좁혔다.
“다시 한번 말해보시오.”
“자기 앞날이 어찌 될지도 모르는 간 큰 멍청이라고 했다.”
악비를 추종하는 자들이 많으니 이상한 상황도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몇 명이 비슷한 상황으로 거쳐 갔었다.
왕기는 주변의 병사들을 향해 다짜고짜 고함을 내질렀다.
“악비 놈의 추종자다! 모두 이놈을 포박하라!!!”
주변에 있던 이십여 명의 병사들이 소무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소무는 눈길도 주지 않고 현경의 기세를 발출했다.
쏴아아악-!!!
숨 막히는 기운이 사방으로 번져나가며, 병사들의 몸을 동시에 얼어붙게 했다. 이들에게는 볼일이 없었다.
소무의 손이 움직이는가 싶더니, 어느새 왕기의 목을 틀어쥐고 있었다.
“네놈이 직접 고문하며 심문했다고 들었다. 그러니 그분이 죄가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겠지.”
“크……. 크윽.”
숨이 턱하고 막혀온 왕기는 공포에 젖어갔다. 병사들은 몸이 굳은 것처럼 한 발자국도 다가오지 못하고 있었다.
소무는 당장에 목을 비틀어버리고 싶었지만, 그것은 자신의 몫이 아니었다. 손아귀의 목을 풀자 왕기가 컥컥대며 소리쳤다.
“쿠, 쿨럭! 황실에서 지시한 일입니다. 저는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소무는 품속에서 둘둘 말려진 교지를 꺼내어 그에게 건네줬다.
“폐하께서 악비 장군을 다시 복직시키셨다. 과연 황실의 그자가 대장군으로부터 자네도 보호해줄 수 있을까?”
교지를 부여잡은 왕기는 두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몇 번이고 내용을 살펴보았지만, 분명 황제의 인장이 틀림없었다.
“저, 저는 그저 시키는 대로…….”
소무는 교지를 다시 빼앗고는 나직이 말했다.
“폐하께서는 그가 마음 편히 복직할 수 있게 어머니의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하라 명하셨다. 그래서 이곳에 들른 참이지. 어서 안내하거라.”
왕기는 죽상을 쓰며 소무를 관아의 뒤쪽 산길로 안내했다. 관아를 벗어나 일각을 걸어가자 늪지대가 나타났다.
“이곳입니다.”
시신을 늪지대에 묻는 경우가 어디 있단 말인가. 이 최악의 장소에는 묘비조차 없었다.
“후……. 어서 꺼내어 관으로 옮기거라.”
병사들이 동원되어 묽은 진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소무는 심정이 착잡했다.
한식경이 지난 후.
수급이 몸과 분리된 처참한 노인의 시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게다가 진흙의 틈새로 드러난 고문의 흔적들. 늙고 힘없는 노인을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참혹한 상태였다.
한 가지 다행이라면, 온도가 낮은 늪에 파묻혀있어 시신이 부패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대장군이 복직하면 네놈부터 찾아서 찢어 죽일 것이다. 대장군은 이미 네가 누군지도 알고 있지.”
왕기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절망에 찬 목소리로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사, 살려주십시오. 저는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나 따위가 어찌 그분을 막을 수 있겠나. 하지만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하지.”
“그, 그게 무엇입니까?”
소무는 잠시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는 나직이 말했다.
“그럼 자네는 나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겠나.”
왕기는 눈앞의 인물이 왜 이곳에 왔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단번에 눈치챘다. 그의 표정이 금세 밝아졌다.
“그런 것이라면 진작 말씀하시지 그러셨습니까. 저를 구해줄 수만 있다면 금자 열 냥을 드리겠습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금자 열 냥이라면 정오품인 소무의 십 년 녹봉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고작 지방관아의 현령이 그토록 큰돈을 선뜻 내놓을 수 있다니. 그동안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착취와 비리를 저질렀는지 알 만했다.
“금자 열 냥이라. 그 정도면 충분하군.”
태도가 돌변한 왕기는 양손을 모으고는 굽신거리며 말했다.
“그 방법이란 것이 무엇인지요?”
“이 교지를 너에게 줄 테니, 관을 가지고 수용소로 가서 죄를 고하거라. 악비 장군도 폐하의 전령을 감히 어찌하지는 못할 것 아니겠는가.”
잠시 계산을 해보던 왕기는 표정이 밝아졌다. 누가 감히 황제의 친서를 가지고 온 전령에게 해코지한다는 말인가.
“고, 고맙습니다. 그럼 어서 교지를 건네주십시오.”
소무는 의심의 눈초리를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네가 중간에 교지를 가지고 도망이라도 간다면 나는 죽은 목숨이 아니더냐. 도착하면 금자와 이것을 교환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교위님.”
“시신이 부패하면 악비 장군이 격노할 수 있으니 서두르게.”
왕기는 열 명에 이르는 병사들과 함께 마차를 이용해 이동했다. 중간에 객잔에서 하루를 묵었기에 도착하기까지 이틀이 걸렸다.
수용소에서 오십여 장을 앞두고 드디어 물물 교환이 진행되었다.
“여기 금자 열 냥입니다. 나중에 탕인현으로 다시 한번 찾아오십시오. 저를 살려주셨으니, 극락의 맛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꼭 그리하지. 어서 서두르시게. 시신이 부패하기 시작했으니 시간이 없네.”
“그럼 살펴 가십시오.”
품속에 교지를 갈무리한 왕기는 단숨에 말을 몰아 수용소로 진입했다. 그의 뒤를 마차 한 대가 뒤따랐다.
교도관들이 앞을 가로막으며 물었다.
“무슨 일이시오?”
“나는 황실의 교지를 들고 온 전령이다! 악비 장군을 만나러 왔으니 어서 안내하거라!”
황실에서 내려온 사람이라고 하니, 교도관들은 부랴부랴 움직이며 악비를 데리고 나왔다. 다른 죄수들도 궁금해하며 소란스럽게 몰려들었다. 악비의 얼굴에서는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었다.
말에서 내린 왕기는 황금빛 비단으로 감싸진 두루마리를 그에게 건네며 말했다.
“폐하의 전령인 왕기입니다. 어머니의 일은 유감입니다.”
그는 묵묵히 교지의 내용을 읽어보고 있었다.
왕기는 그의 표정이 조금도 나아지고 있지 않자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준비해온 선물을 꺼내야 했다.
“어서 그분의 시신을 가져오너라!”
병사들이 관을 가지고 성큼성큼 다가오며 악비의 앞에 내려놓았다.
악비는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관의 뚜껑을 열어보았다. 참혹한 모습의 시신은 어머니가 분명했다.
악귀처럼 일그러진 그의 얼굴로 따뜻한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분노와 슬픔이 교차하며 입에서 한 줄기 서러운 울음이 토해져 나왔다.
“크흑…….”
그의 일평생 처음으로 흘려낸 눈물이었다.
어느새 뒤에 다가온 왕기가 위로하듯 말했다.
“이것은 장례를 치르실 수 있도록 직접 가져온 저의 선물입니다. 비록 제가 죄를 묻긴 했으나, 악의는 없었으니 섭섭해하지 마십시오. 그럼 어서 교지의 뜻을 받들어 일어서시지요.”
악비의 입에서는 기대와는 전혀 다른 음성이 흘러나왔다.
“네놈이 감히…….”
그때였다. 그의 손이 등 뒤로 뻗어 나가며 왕기의 목을 우악스럽게 틀어쥐었다.
꽈악-!
“크헉……. 큭……. 왜……?”
왕기는 억울했다. 충혈된 그의 두 눈은 멀찍이 숨어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소무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표정에서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이 속았음을.
‘이런 X팔…….’
황금빛 두루마리 안에 꽂혀 있던 종이는 교지가 아니라 장양의 서신이었다.
소무가 은근슬쩍 바꿔놓은 것이었다. 그리고 서신을 가지고 올 자가 어머니를 고문하고 참수한 장본인이라는 문구 하나를 추가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