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인내심의 한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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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화 인내심의 한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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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화 인내심의 한계 (3)
2022.04.29.
숨이 끊어진 왕기의 고개가 푹 숙여졌다.
교도관들은 난리가 났다. 수용소에서 황실의 전령이 살해당한 것이다. 악비의 행동은 역모에 해당하는 중죄였다.
곳곳에서 뿔피리가 울리고 교도관들이 뛰쳐나왔다. 수용소의 소장이 다급히 소리쳤다.
“당장 포박해!!!”
악비를 향해 다가가는 교도관은 한 명도 없었다. 지금까지 그를 강제로 이곳에 묶어놓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의지로 머물고 있었던 것일 뿐.
감히 누가 화경의 신체에 함부로 손을 댈 수 있겠는가. 교도관들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지켜보고만 있었다.
“끄흐흑…….”
악비는 관을 붙잡은 채 한참을 오열했다. 그의 옆에서 아들 악운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묵념했다.
그러기를 일다경. 관의 뚜껑이 다시 닫혔다.
어느새 마음을 다잡은 그의 얼굴은 지금까지와는 사뭇 달랐다. 잔잔하고 깊었던 두 눈은 어느새 맹호(猛虎)의 날카로운 눈빛으로 변해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교도관들은 겁에 질렸다.
그때 장헌 부장이 다가와 기립하며 말했다.
“명하십시오, 장군.”
“인두를 가져와라.”
장헌이 뒤쪽을 향해 소리치자 몇 명의 죄수가 어딘가로 내달렸다. 더는 교도관들의 눈치를 보는 자가 없었다.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화로와 쇠붙이를 들고 나타났다.
악비는 조용히 자신의 웃옷을 벗어 던졌다. 난자되고 짓이겨진 고문의 흔적들. 그리고 군더더기 하나 없는 근육질의 다부진 체구가 드러났다.
또 하나. 그의 등 뒤에 새겨진 네 글자의 문신이 가장 눈에 띄었다.
정충보국(精忠报国). 충성을 다하여 나라에 보답한다. 어머니가 자신의 등에 직접 새겨준 문구였다.
“짓이겨라.”
장헌은 그의 말이라면 절대복종하는 제일 충신이다. 달궈진 쇠붙이를 움켜쥔 그는 망설임 없이 악비의 등을 지져버렸다.
치이이익-!!!
살가죽이 타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지만, 그의 입에서는 단 한 번의 신음도 없었다.
화경의 신체였기에 한두 번 지져서는 어림도 없었다. 무려 한식경을 인두로 눌러대고 나서야 겨우 문구를 지울 수 있었다.
이윽고 분노에 찬 악비의 음성이 나직이 수용소를 울렸다.
“……되어주겠다.”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그의 입이 움직였다.
“황제 놈이 원하는 대로 역적(逆賊)이 되어주겠다.”
악비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교도관들의 입이 떡하고 벌어졌다. 기어코 올 것이 오고야 만 것이다.
그의 옆에서 장헌이 기립하며 말했다.
“장군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제가 함께할 것입니다.”
악비는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이고는, 죄수들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중후한 내공이 실린 거센 고성이 수용소를 쩌렁쩌렁 울렸다.
“나는 지금부터 황실에 반역하는 역적이니라!!! 나와 함께하는 자는 명예 따위는 손에 쥘 수 없을 것이다!!!”
이천여 명에 이르는 죄수들이 숨을 죽인 채 악비의 모습을 응시했다.
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상기되어 있었다. 그리고 대다수는 지금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표정이었다.
이윽고 악비의 입이 다시 한번 열리며 모두의 귓가를 강타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약속해줄 수 있다! 백성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영광을 약속해 줄 것이다!! 이 땅에 태어나 이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지금부터 나와 함께하고 싶은 자, 한쪽 무릎을 꿇어라!!!”
이곳 수용소에는 소싯적 각지에서 반란군으로 참전했던 죄수들이 가장 많았다. 기존에 악비의 부하였던 자들도 있었으며, 그 부류가 다양했다.
가장 먼저 부장 장헌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소리쳤다.
“장헌! 백성을 위해 장군께 목숨을 맡기겠습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천여 명에 이르는 죄수들이 동시에 무릎을 꿇었다. 무예를 익히지 않은 자들은 함께할 수 없었지만, 묵묵히 응원하는 눈빛을 보냈다.
명장 악비와 천 명의 병사들. 새로 시작하기에는 부족하지 않은 전력이었다.
“모든 죄악은 내가 짊어질 것이다!!! 악가군의 병사들이여 일어나라!!! 지금부터 이 땅에 침입한 적군을 밀어내고 백성을 위한 싸움을 시작할 것이다!!!”
그 순간 죄수들의 환호성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
“우와아아아!!!”
악비는 큼지막한 두 손으로 관을 들고는 어깨 위에 올렸다. 그가 숭고한 첫발을 내딛자, 그의 뒤를 천여 명의 죄수가 대열을 형성하여 보폭을 맞추었다.
집단 탈주가 시작되고 있었으나, 그 어떤 교도관도 앞을 가로막는 이가 없었다. 그저 넋을 놓은 채 멀어져 가는 이들의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앞서가던 악비의 시선이 지그시 하늘을 향했다.
‘모두가 웃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함께 싸워달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어디 한번 그 꿈을 펼쳐보시게. 이 못난 사형이 보잘것없는 목숨으로 사제에게 힘을 보태주겠네.’
새로 결성된 악가군의 행군을, 오십여 장이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는 한 사내가 있었다.
한 줄기 바람이 휘날리며 소무의 머리칼을 보듬으며 지나갔다. 그 사이로 심연같이 깊은 눈동자가 드러나며 살며시 빛났다.
‘나라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영광을 빼앗은 점은 미안하오. 하지만 이제는 황실의 장기판에서 벗어나, 백성을 위해서만 싸울 수 있게 되었지 않소.’
교지를 중간에 가로채고, 왕기를 보내어 그를 살해하게 함으로써 각성하도록 만들었다. 죄책감이 없지는 않았지만, 후회 또한 없었다.
비록 당장은 반란군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쓸 것이다.
하지만 백성들의 인정을 받는다면 그들의 마음속엔 영웅들로 기억되지 않겠는가. 그를 위해서도, 자신의 신념과 장양을 위해서도 옳은 선택을 한 것이라 굳게 믿었다.
소무는 다시 발걸음을 돌려 섬서로 나아갔다. 겨울이 지나기 전에 반드시 마무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
* * *
정군산 분지의 암자. 폭설의 흔적으로 사람이 살 수 없을 환경이었지만, 그것은 일반인들의 기준이었다.
암자 근처의 원두막에 앉아 태연히 음을 연주하는 이가 있었다. 경쾌한 칠현금의 선율과 함께 앞에서 한 아이가 검무(劍舞)를 추고 있다.
띵-! 띠링-!
칠현금의 현이 튕겨내는 음파는 강기로 변하며 전면을 향해 쇄도했다. 소소는 단지 강기를 쳐내고 있을 뿐이지만, 자연스럽게 춤을 추는 동작을 하고 있었다.
탕-! 타타탕-!
무희처럼 부드럽고 절제된 몸짓. 그리고 강기가 소멸하며 뿜어내는 밝은 빛살은 아름다운 장관을 연출했다.
연설화와 소소는 그들만의 세계에서 음무(音舞)를 즐기고 있었다. 오감이 극도로 발달한 자들이 만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들의 표정에서는 마치 천상을 거니는 행복함이 묻어있는 듯했다. 기예의 행위 속에서 서로의 마음이 하나가 되고 있었다.
잠시 후 칠현금의 선율이 멈추자 둘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연설화가 흡족한 미소로 물었다.
“어땠어?”
한달음에 달려간 소소는 그녀의 목을 끌어안으며 얼굴을 파묻었다.
“너무 신나고 좋았어요. 헤헤.”
그 누가 감히 옥화신녀의 신체에 손을 댄다는 말인가. 그러나 아이의 행동에는 조금의 위화감도 없었다. 그 모습이 마치 엄마를 끌어안는 것과도 같아 보였다.
연설화 또한 싫지 않은지 소소의 등을 토닥였다. 아이의 품에 안긴 것이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이 따듯해졌기 때문이다.
“방금 우리가 함께한 것은 선음무(仙音舞)라고 하는 기예이지. 서로 마음이 통하지 않으면 결코 할 수가 없는 거란다.”
“그럼 스승님하고 저하고 통한 거예요?”
“응, 사실 나도 처음으로 성공해봤어. 소소 덕분에.”
“히히. 궁금해요.”
“음. 뭐가 궁금해?”
소소는 쑥스럽다는 듯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스승님이 저하고 마음이 통했으면, 우리 아버지하고도 통할 수 있어요?”
연설화는 당황하며 말을 얼버무렸다.
“그건……. 나중에 한번 시도해봐야겠구나…….”
“통했으면 좋겠다…….”
연설화의 얼굴에 어느새 홍조가 떠올랐다.
‘얘가 갑자기 이런 걸 왜 물어보지?’
어색해지기 전에 화두를 돌려야 했다.
“눈사태가 일어날 수 있으니 당분간 사자후(獅子吼)의 수련은 어렵겠구나. 잠시 좀 쉬었다가 태평소를 연주할까?”
“네 스승님, 좋아요!”
소소의 용격사자후는 어느새 삼성(三成)의 성취를 이루고 있었다. 십성(十成)까지는 아직도 갈 길이 멀었지만, 급할 것도 없었다.
이 둘은 원두막에 앉아서 경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기를 얼마 후. 이곳으로 낯익은 손님이 찾아왔다. 설상비로 눈 위를 밟고 내달려온 소무였다.
“아버지~!”
한달음에 달려나간 소소가 폴짝 뛰며 단번에 안겼다. 며칠 동안 못 봤으니 반가울 수밖에.
왼손으로 엉덩이를 떠받친 소무는 예전보다 딸아이가 조금 더 묵직해졌음을 느꼈다. 잘 먹었으니 또래보다 성장이 빠른 것은 당연했다.
자신의 가슴팍에서 얼굴을 올린 소소가 눈빛을 빛내며 물었다.
“궁금한 게 있어요~ 아버지는 스승님하고 마음이 통할 수 있어요?”
“음. 마음이? 글쎄. 쉽지는 않을걸?”
“히히. 스승님이 한번 시도해보겠대요~”
연설화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이걸 그대로 말할 줄이야. 어색해지기 전에 어서 화두를 돌려야 했다.
“기별도 없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아이 앞에서 반말을 주고받을 수는 없었다.
“그동안 미뤄두었던 일. 장안성 공략이 시작되기 전에 어서 마무리했으면 합니다.”
은화파파로부터 악보를 회수하는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연설화가 의아한 표정으로 전음을 보냈다.
- 나는 가만히 있는데 왜 네가 보채지?
- 앞으로 좀 바빠질 거야. 그전에 서둘러 마무리했으면 좋겠군. 빚은 빨리 갚아야 성미가 풀리는 성격이라서.
- 흠…….
연설화는 분명 망설이고 있었다. 언젠가는 만나야 하지만 썩 내키지 않은 만남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소무의 품에서 소소가 뛰어 내려오며 물었다.
“아버지, 차 드실래요?”
모처럼 만났으니 접대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자리를 비키게 할 수 있는 기회였지만, 이미 소소의 차 맛을 호되게 맛보았던 터라 두려움이 앞섰다.
“다른 건…… 없어……?”
소소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없어요~”
반드시 차를 먹여야겠다는 의지가 분명해 보였다. 소무가 한숨을 내쉴 무렵 연설화의 전음이 날아들었다.
- 안심해도 돼. 자기도 직접 먹어봤는지, 예전처럼 새로운 차를 개발하겠다는 행동은 안 하니까.
그렇다면 망설일 이유가 없지 않은가. 소소의 등을 살며시 토닥이며 말했다.
“그럼 부탁할게. 천천히 끓여 와.”
“네~ 아버지!”
아이가 쫄랑쫄랑 사라지고 나자, 분위기가 무겁게 바뀌었다.
“단순히 악보만 받아오면 되는 일은 아니로군. 순순히 내줄 리가 없다는 거지?”
“맞아. 사실 네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훔쳐오려고 했었어. 그리고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지.”
“어떻게?”
연설화가 진지한 표정으로 나직이 답했다.
“은화파파를 반드시 죽여야 해.”
“음. 확실히 정파에서도 손에 꼽는 악인으로 평가하던 인물이긴 했지. 하지만 스승이었던 자를 꼭 죽여야 하는 이유가 뭐지?”
연설화는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는지 잠시 머뭇거렸다. 한동안 호흡을 고르고 나서야 힘겹게 말했다.
“가문의 원수니까. 그리고 소소의 앞날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죽여야만 해.”
소무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그녀가 열한 살의 나이에 은화파파에게 잡혀갔었다는 얘기는 들은 기억이 있었다.
‘어린 연설화를 납치할 때 가문에 해코지라도 했단 말인가? 세뇌 교육을 받았을 텐데 용케도 전부 기억하고 있었군. 하긴 타고난 오감이 극도로 발달해있으니, 다른 아이들이랑은 달랐겠지. 헌데 소소의 앞날을 위해서라니?’
도무지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그리고 딸아이의 일과 관계가 되었다면, 남의 일이라고 볼 수도 없었다. 원두막의 기둥에 몸을 기댄 소무는 팔짱을 끼며 물었다.
“그렇다면 나도 무슨 이유인지 들을 자격이 있는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