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신선의 악보 (1)
(89/250)
89화 신선의 악보 (1)
(89/250)
89화 신선의 악보 (1)
2022.04.30.
연가장(連家莊). 오래전 호북성의 북단에 존재했던 한 무가의 이름이다.
그리 대단한 세력은 아니지만, 일대에서는 어느 정도 유례가 깊은 가문이었다. 가문의 무공 수준도 나름 준수하지만, 음악의 조예로 더 유명했다.
장원에는 여인들이 음을 연주하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으며, 사내들은 무공을 연마하며 가문의 안전을 책임져왔다.
언제나 중도를 유지하며 명맥을 유지해왔지만, 위기는 뜻하지 않은 순간에 찾아왔었다.
“이젠 끝입니다! 총관께서 이끄는 세가의 고수들도 곧 전멸 직전입니다!”
연가장의 가주 연남진. 그는 가문의 대청에서 뒷짐을 쥔 채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후……. 연은소는 어찌 되었는가.”
“고모께서 음공을 익힌 여인들과 함께 총관님을 지원하고 있으나 역부족입니다.”
가문의 제일 고수이자 총관인 연서풍도 무리라고 한다. 음공의 대가인 연은소 또한 어림도 없었다. 그녀가 찾아온 순간부터 이미 정해진 결과였다.
“마교의 전대교주가 도대체 왜 우리 연가장을 공격하고 있단 말인가…….”
연가장은 마교와의 원한을 쌓은 적이 결코 없었다.
강호를 은퇴하고 잠적한 지 수십 년이 지난 은화파파. 그녀가 어느 순간 홀연히 나타나더니, 음악을 익힌 자들을 찾아다니며 악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이번엔 연가장의 차례였다.
“미안하구나. 지켜주지 못해서…….”
연남진의 뒤에서 두 명의 여자아이가 부둥켜안고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전설적인 마인(魔人)이 직접 찾아왔다. 오래전 탈마(脫魔)의 경지를 이룬 그녀는 당대의 교주보다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녀로부터 도망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버지…….”
“두려워하지 말거라, 설화야. 긍지 있는 연가장의 일원으로 당당하게 맞서자꾸나.”
대청의 밖에서는 지금도 끊임없는 비명이 들려오고 있다. 비록 부질없는 일이지만 가주인 자신도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검을 움켜쥔 연남진도 대청의 문을 열고 사라져갔다.
연설화와 동생 연초희. 두 명의 아이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아비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언니, 우리 이제 어떡해……?”
연설화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대청에 숨을 만한 곳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러던 중 어릴 적 숨바꼭질을 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초희야, 고모가 악보를 모아놓는 다락 알지? 거기에 숨어있어.”
연초희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한 명밖에는 들어갈 수 없는 비좁은 공간이었다.
“언니는……?”
“걱정하지 마. 언니도 바로 도망칠 거니깐.”
연설화도 무섭긴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어린 동생이 우선이었다.
억지로 동생을 보낸 연설화는 용기를 내어 일어섰다. 열한 살의 어린 나이였지만, 눈빛에는 제법 당당한 기개가 서려 있었다.
잠시 후 귀에 익은 목소리의 비명이 들려왔다. 아버지도 당한 것이리라. 그리고 더는 이어지는 소리가 없었다.
터벅. 터벅.
대청 밖을 향해 한 걸음씩 걸어 나갔다. 손에는 작은 소검(小劍) 한 자루도 움켜쥐어져 있었다.
연가장의 장원 곳곳으로 식솔들이 어지러이 뒹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버지와 어머니. 연가장의 제일검으로 알려진 총관 아저씨. 그리고 음공의 대가로 알려진 고모까지. 모두가 허무하게 죽어있었다.
잔인한 비명과는 달리 식솔들은 사지가 모두 멀쩡했다. 긁히고 베인 흔적조차도 없었다. 단지 양쪽 귀로 피를 흘리고 있는 것만이 공통점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허리가 굽은 노파 한 명이 비파를 움켜쥔 채 서 있었다.
“음공을 익히는 가문이라 하여 기대했건만, 이곳에도 없는 모양이군.”
잠시 후 노파의 눈이 번뜩이며 호기심이 일었다.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한 아이가 보였기 때문이다. 살기가 느껴질 텐데도 눈을 피하지 않고 있었다.
가족을 잃은 슬픔에 연설화의 얼굴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우리한테 왜 이러는 거죠……?”
“헐헐. 어린년이 제법 당당하구나. 내가 누군지 아느냐?”
연설화는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소리쳤다. 목소리에서는 분노가 여실히 묻어나 있었다.
“마귀 할머니!!!”
은화파파의 얼굴에 노기가 서렸다가 다시 사그라졌다.
“이 할머니는 선인(仙人)의 오감을 가진 자를 찾고 있다. 그리고 네가 마지막이구나.”
연설화는 어디 한번 해보라는 듯 계속해서 노려봤다.
그렇다고 멈출 은화파파가 아니었다. 주름이 가득한 손이 비파의 현을 튕겨냈다.
티링-!
눈에 보이지 않는 음파는 아이의 전신을 직선으로 관통하고 지나갔다. 연설화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빽 하고 소리를 내질렀다.
“무섭지 않으니까 어디 한번 해보세요!!!”
은화파파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아이의 고함 따위는 귀에 들려오지도 않았다.
‘살파소(殺破召)의 음파가 통하지 않았다……? 설마?’
음공이란 내력으로 음파의 진동을 거세게 일으켜 상대의 기혈을 들끓게 하고 고막을 파괴하는 무공이다. 사람의 타고난 오감에 따라 음파의 영향을 크게 받을 수도 있고,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아주 가끔, 어떠한 음공도 통하지 않는 자가 있다. 선음지체(仙音之體). 신선의 오감을 타고난 인물이다.
자신이 그러했고, 눈앞의 아이가 그러했다.
“어디 한번 이것도 견뎌 보아라!”
은화파파는 계속해서 비파의 현을 튕겨냈다. 그러나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계속해서 노려보고만 있었다.
잠시 후 노파의 얼굴이 함박웃음을 머금었다.
“헐헐. 드디어 찾았구나! 이 할머니와 함께 가자꾸나.”
“싫어요! 우리 가문의 원수 주제에…….”
아무래도 관계없었다. 마교의 전대교주가 바로 자신 아니던가. 일단 잡아가면, 아이를 세뇌할 수 있는 수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럼 나한테서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아이는 자신의 목에 소검을 가져다 대었다.
“어디 한번 해보세요.”
검을 빼앗고 제압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앞으로도 계속 이런다면 피곤해 질 염려가 있었다. 그렇다면 약점을 잡으면 그만이었다.
“안에서 작은 기운이 느껴지는구나. 동생이겠지? 이 할머니를 따라오겠다면 동생을 살려주겠다. 마침 시중들 아이도 필요했으니.”
동생이란 말에 소검을 움켜쥔 연설화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초희를 살릴 수만 있다면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잠시 후 소검이 스르륵 내려오며 저항을 포기했다.
그렇게 연설화와 연초희는 은화파파의 손에 거두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오 년의 시간이 흘렀다.
감숙성 주남산(朱枏山) 난화봉.
이곳은 그 누구도 들어설 수 없는 금단의 영역이다. 난화봉에 발을 들이고 살아나온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무림의 고수이건, 관군이건 그 누구도 예외는 없었다.
전설적인 마도의 지존. 은화파파의 거처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어찌하여 합주가 안 되는 것이냐!?”
퉁소를 움켜쥔 노파의 호통이 연이어 들려왔다.
연설화는 칠현금을 움켜쥔 채 고개를 푹 숙였다. 다리 맡에는 진일심소곡(眞一心笑曲)이라 적힌 악보가 펼쳐져 있었다.
“다시!!!”
수천 번, 그리고 수만 번을 반복했다. 머릿속으로 이 복잡한 칠현금의 악보를 그릴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이 악보를 연주하기 위해 은화파파는 연설화에게 무공까지 가르쳤다.
그런데도 이 합주곡을 완성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필수조건인 선음지체의 악사들이 만났지만, 마음이 하나가 되질 않았기 때문이다.
퉁소의 음률에 맞춰 연설화의 손이 칠현금을 튕기기 시작했다. 웅장하게 가슴을 울리는 선율에는 사람의 감정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다.
옆에서 듣고 있는 동생 초희는 서글피 울다가 웃기도 했으며, 수십 가지의 감정 변화를 겪고 있는 모습이었다. 굉장한 명곡임에는 틀림이 없었지만, 노파의 얼굴은 계속해서 구겨졌다.
문제는 두 개의 음이 하나로 합쳐지지 않는다는 것에 있었다. 그렇다면 결코 완성된 곡이라 할 수 없었다.
그때였다.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은화파파가 퉁소를 집어던졌다.
“썅!”
쏜살같이 다가오는 퉁소는 마룻바닥에 튕기고는 연초희의 머리를 향해 다가갔다. 그 순간 연설화의 신형이 쏜살같이 움직이며 동생의 앞을 가로막았다.
콰직-!
퉁소의 끝자락이 어깨에 적중당했지만, 입에서는 조금의 신음도 나오질 않았다. 그 모습을 확인한 은화파파는 연설화를 향해 터벅터벅 다가갔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설화입니다.”
“어디에서 왔느냐?”
“모르겠습니다.”
“부모님은?”
“스승님이십니다.”
노파는 의심의 눈초리로 연설화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분명 자신이 직접 마혼술(魔魂術)을 시전하여 기억을 지워놓았다.
그것도 여러 번이나 말이다. 과거의 기억이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은화파파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등을 돌렸다.
“반드시 이 신선의 합주곡에 숨겨진 비밀을 풀어낼 것이다. 어디 좀 다녀올 터이니 수양하고 있거라.”
말을 마친 노파는 퉁소를 움켜쥔 채 어딘가로 사라져갔다.
한참이 지난 뒤 연설화의 뺨으로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동생 초희가 다가와 안아주며 위로했다.
“언니, 괜찮아?”
한참을 흐느끼던 연설화의 두 눈이 다시 초점을 잡으며 분노에 이글거렸다.
“언젠가는…… 반드시 복수할 거야. 우리 가문의 원수…….”
연설화는 단 한 순간도 기억을 잃어본 적이 없었다. 영혼까지 새겨진 그녀의 원한과 타고난 오감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난화봉의 주변으로는 강력한 진법이 설치되어 있어 도망칠 수도 없었다. 노파가 돌아올 때까지 이 둘은 무공수련에 전념했다. 한시도 수련을 게을리할 수가 없었다.
노파가 다시 돌아온 것은 삼 개월이 지나서였다. 뒤에는 한 명의 어린아이를 달고 왔다. 이어서 살기(殺氣)가 서린 노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희들은 이제 쓸모가 없겠구나.”
“살려주십시오, 스승님…….”
“내가 언제 너희를 죽인다고 했다더냐. 사람이 곧 올 것이니 기다리고 있거라.”
다음 날 정체불명의 흑의인이 찾아왔다. 그리고 연설화와 동생을 어디론가 데리고 이동했다.
마교(魔敎). 도착한 그곳에선 오직 지옥 같은 훈련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독기를 품은 그녀는 누구보다 열심히 무공수련에 전념했다.
불과 일 년 만에 마교의 최정예 무력단체인 천살대에 들어가는 것에 성공했다. 마교의 역사상 최연소의 나이였다.
그리고 오 년이 지난 뒤에는 천살대의 대주가 되었다. 마교 내에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손에 쥐게 된 것이다. 동생은 그녀의 보호 아래 나름대로 마교에서 평탄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다시 삼 년이 지난 뒤. 드디어 연설화가 극마의 벽을 무너트리는 것에 성공했다.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처절한 정마전쟁이 시작되었다.
죽고 죽이는 살육의 전투가 매일같이 계속되었다. 독기를 품은 그녀의 눈에는 보이는 것이 없었다. 다가오는 적은 죽이고 또 죽였다.
그렇게 지옥 같은 일상을 보내오던 중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 앉아 있는 검성(劍聖) 소무. 이 자에 의해 교주와 장로들이 몰살을 당한 것이다.
마교를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는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가까스로 정파의 포위에서 벗어난 연설화와 동생은 탈출을 준비했다.
서열이 가장 높았기에 더는 자신을 감시할 자도, 막을 수 있는 자도 없었다. 은화파파의 움직임이 없다는 것도 확인을 마쳤다.
모든 준비가 완벽해진 그때. 동생과 함께 마교를 홀연히 떠나왔다. 그리고 그녀의 걸음이 향한 곳은 한중의 현화당이었다.
* * *
“그렇게 된 것이었군.”
소무의 얼굴에는 연민이 떠올라 있었다.
한때는 그녀가 단순히 잔악한 무림의 마녀라고만 생각했다.
전쟁의 참혹한 살육에 어찌 정의와 악행이 따로 있겠는가. 은화파파가 아니었다면 그녀 또한 지금쯤 연가장에서 행복한 날을 보내고 있을 터였다.
“그렇게 불쌍하게 보지 마.”
“그런 적 없어. 아무튼, 소소도 선음지체란 얘기지?”
“응. 혹시라도 은화파파의 눈에 띄는 날에는 위험할 수 있어.”
“그렇다면 반드시 끝을 보아야겠군.”
그때였다. 소소가 찻잔을 움켜쥔 채 살랑거리면서 다가왔다.
“아버지, 소소가 만든 마음차를 가지고 왔어요~”
연설화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마음차라니?’
중원에 이런 차의 이름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분명 자신이 가르쳐 준 적이 없는 차였다.
“수고했어. 잘 먹을게, 우리 딸.”
소무는 차를 크게 한입 들이켰다.
그 순간 마주하고 있던 연설화는 은연중 전면으로 기막(氣膜)을 펼쳤다. 마음차가 분수처럼 뿜어질 것에 대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