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신선의 악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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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화 신선의 악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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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화 신선의 악보 (2)
2022.05.01.
감숙성 주남산(朱枏山) 난화봉.
이 금단의 영역에 일남일녀가 태연히 진입하고 있었다. 눈이 덮인 설산에 싸늘한 한기가 몰아치고 있었지만, 이들에게는 조금의 추위도 느껴지지 않는 듯했다.
둘의 얼굴은 굉장히 상반되어 있었다. 투지가 끓어오르는 소무와는 달리, 연설화의 얼굴에는 은연중 두려움이 내리깔려 있었다.
“왜 그렇게 경직되어 있어?”
“방심할 수 없어. 강호를 은퇴한 지는 오래되었지만,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탈마의 벽을 허문 괴물이야.”
소무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고개를 한 번 내저으며 말했다.
“아니 네가 얘기했던 대로라면 오히려 전성기 때보다도 못할 거야. 칼도 오랫동안 갈지 않으면 녹스는 법이지. 긴 세월 무(武)를 추구하며 수련해왔다면 모를까.”
“하긴, 허구한 날 약자들을 상대로 해코지나 하고 다니며 고약한 취미만 일삼았으니. 천하제일 자아도취에 빠진 노파라, 수련 따위 하는 걸 본 적이 없었어.”
“그래도 내공만은 엄청나겠군. 나이가 백이십은 넘었겠지?”
“정확한 나이는 아무도 몰라. 얼핏 들은 게 맞다면 지금쯤 백사십쯤 되었을 거야.”
“그렇게나 악행을 저지르고도 장수했군.”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던 이들은 주남산의 봉우리에 거의 인접했다. 오는 길에 환영진법 따위의 속임수가 있었지만, 이들에게는 모두 무의미했다.
구름 위를 뚫고 솟아오른 분지의 경치는 장관이었지만, 연설화에겐 그저 고통의 흔적에 불과했다.
“내키지 않으면 얘기해. 혼자 다녀오지.”
연설화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지금까지 당한 게 얼만데. 나도 갚아줘야 할 게 있어.”
삼십여 장 앞으로는 넓은 분지가 형성돼 있었다. 제법 큰 암자 하나와 원목으로 만들어진 작은 창고 몇 개가 보였다.
“맨 왼쪽 창고. 저기가 나와 초희가 지내던 곳이야.”
대충 보아도 성인 두 명이 겨우 몸만 눕힐 수 있는 크기였다. 오 년 동안 얼마나 혹독한 생활을 해왔는지 알 만했다.
“어린아이들을 저기서 지내게 했다고?”
“그래. 어린 나를…… 얼마나 괴롭혔는지 알겠지? 그러니 네가 복수해줘.”
그녀답지 않게 연약한 얼굴을 하는 모습이 귀여워 보였다. 진중한 상황이었음에도, 평소에는 하지 않던 장난기가 발동할 정도였다.
“그냥 악보만 찾아오면?”
연설화는 심통 난 표정으로 소무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언제는 내가 부인이라며. 나의 원수를 그냥 내버려 둘 거야?”
정파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무심코 내뱉었던 말이 이제는 족쇄가 되다니.
그러나 싫은 느낌은 아니었다. 검 하나만 잡고 살아왔던 인생에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감정. 왠지 모르게 기분이 묘했다.
“어차피 살려둘 생각은 없었어. 혹시 모를 소소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저 옆에 창고들은 뭐야?”
“그냥 보관창고지 뭐……. 가끔 추종자들이 와서 식량이랑 이것저것을 채워놓고 갔어.”
어느새 암자와의 거리가 십 장 이내로 좁혀졌다. 몇 걸음을 더 나아가자, 그곳의 문이 저절로 열리기 시작했다.
끼이이익-!
안에서 오싹한 한기가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옆으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백발의 노파가 보였다. 매부리코에 심술이 가득한 얼굴. 굉장히 불쾌한 인상이었다.
소무는 노파가 탈마의 경지에 도달한 상태임을 단번에 알아챘다. 전신의 모든 기(氣)가 갈무리되어 조금의 기세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 자신은 현경의 경지를 숨기기 위해 은연중 약간의 기를 드러내고 다닌다. 그렇기에 상대가 절정의 수준 정도로 느끼고 있을 터였다.
곧이어 쇠를 긁는 것 같은 기분 나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를 갔다가 이제야 오는 게냐.”
연설화는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이 느껴졌다. 그동안 참혹한 환경에서 길든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과거와는 상황이 달랐다. 자신 또한 극마지체의 극(極)을 이루었으며, 옆에는 당대 무림의 제일고수인 검성이 있지 않은가.
“아직도 살아있었군요.”
연설화의 말투에서 적개심을 느꼈던 것일까? 노파의 말투가 더욱 사납게 변했다.
“천년마교의 역사가 네년의 손에서 끝났다! 교주가 마교를 버리고 도망을 쳐!?”
마교의 십일대 교주 은화파파. 그녀가 화를 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연설화가 종적을 감춘 뒤, 교주를 잃은 그곳은 영교에게 제대로 저항조차 못 한 채 잡아먹히고 말았으니.
“마교는 제가 원해서 들어간 곳이 아닙니다. 파파가 강제로 처넣었을 뿐이지요.”
은화파파의 미간이 급격히 좁혀졌다.
노파의 왼손이 허공을 한 번 휘저었다. 그러자 암자 안에서 칠현금 하나가 붕 떠오르며 쏜살같이 날아갔다.
어지간한 일류고수는 화들짝 놀라 피할 만큼 중후한 내력이 담겨있었지만, 연설화에게 이 정도를 받아내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터업-!
칠현금을 움켜쥔 연설화는 다짜고짜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음률로 대화가 통하는 음악의 대가들이었다. 굳이 입으로 떠들 필요도 없었다. 가늘고 고운 양손이 칠현금의 현을 튕기며 마음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띠리링-! 띠링-! 띠디딩-!
웅장한 선율은 거침이 없었다. 슬픔과 분노. 그리고 원한을 노래하고 있었다. 옆에서 묵묵히 지켜보던 소무도 그녀의 감정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굉장한 실력이었다.
그녀의 연주는 반각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연주에서 그녀의 본심을 읽은 은화파파는 진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네 마음은 충분히 알겠다. 그런데도 이곳에 돌아온 이유가 무엇이냐?”
“진일심소곡의 악보를 받으러 왔습니다.”
칠현금의 악보는 이미 연설화의 머릿속에 있었다. 퉁소의 악보를 얘기하는 것이리라.
“악보를 찾는 것을 보니 합주가 가능한 상대를 찾은 모양이구나. 그자가 누구더냐.”
“파파가 알 필요 없습니다.”
“건방 떠는 것을 보니 무엇인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게구나. 하지만 네년의 입을 불게 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다시 한번 기회를 주겠다. 상대가 누구인지 어서 말하거라.”
연설화가 얼굴을 정색하며 대답했다.
“저도 기회를 한 번 드리지요. 악보를 순순히 넘겨준다면 말입니다.”
노파의 얼굴에 자글자글한 주름이 야차처럼 일그러지며 소름 돋는 표정이 나타났다.
“감히 키워준 부모의 은혜도 모르고 어디서 대드는 게냐!?”
부모의 은혜라는 말에 연설화는 머릿속이 찡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수십 년을 간직해온 서러움과 분노. 그녀의 인내심이 폭발하는 소리였다. 그동안 참아왔던 성질이 화산이 분출하듯 한 번에 터져 나왔다.
“부모!? 오 년을 동생과 함께 창고에 가둬 키우고선 부모라고!? 우리 연가장의 진짜 부모를 죽인 원수가 바로 네년이 아니었더냐!”
은화파파의 입이 떡하고 벌어졌다. 지금까지 자신이 알던 아이의 모습이 아니었다. 충격적인 상황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잠시 후 정신을 겨우 수습하고서는 물었다.
“그동안 기억을 잃은 것이 아니었던 게냐?”
“살기 위해서, 그리고 이 순간을 위해 그렇게 보여야만 했지. 우리 연가장을 학살하던 마귀 같은 너의 모습을 단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은화파파는 오히려 표정이 밝아진 듯했다. 그동안의 의문이 풀렸기 때문이다.
“그동안 합주를 완성할 수 없었던 이유가 이것이었군. 네가 원하던 악보다. 가져가거라.”
그 순간 암자의 깊숙한 곳에서 서책이 한 권 떠오르며 마당으로 날아갔다.
풀썩-!
무엇인가 이상했다. 눈앞에 있는 것은 자신이 원하던 악보가 분명했다. 하지만 이것을 이렇게 순순히 건네줄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마냥 지켜만 보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
자리에서 일어선 연설화는 터벅터벅 다가가며 악보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그녀가 상체를 숙이는 그때였다.
“네 이년!!!”
외마디와 함께 은화파파의 신형이 증발하듯 사라졌다.
노파는 어느새 연설화의 뒤에서 다시 나타나 손을 내뻗고 있었다. 머리채를 움켜쥐려는 움직임이었다. 가공스러운 속도에 연설화가 흠칫하고 놀랐다.
그 순간 묵묵히 지켜보던 소무가 동시에 움직임을 개시했다. 그가 움켜쥔 검집이 빛의 속도로 움직이며, 노파의 손목을 쳐내었다.
카앙-!
마치 금속을 때리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난데없는 기습에 한 걸음을 물러선 노파는 짜증이 솟구쳤다. 분노가 먼저 앞섰다.
“네까짓 게 감히!”
검은 기류에 휩싸인 노파의 손바닥이 소무의 앞가슴을 향해 다가갔다. 한눈에 보아도 엄청난 내력이 담긴 일격.
소무의 왼손도 어느새 붉은 강기에 휩싸여 있었다. 상대의 내공을 시험해 보기 위해 일합을 교환하려는 의도였다.
한순간 검붉은 빛깔이 뒤섞이며 우레와 같은 굉음이 터져 나왔다.
꽈아아앙-!!!
분지 전체가 뒤흔들리는 듯했다. 소무는 충격으로 바닥을 끌며 뒤로 삼 장을 미끄러져 갔다.
끼기기긱-!!!
양쪽 발이 지나친 자리로 지면이 움푹 꺼져 들어갔다. 손목으로 전해지는 짜릿한 통증. 은화파파의 내공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엄청났다. 오히려 그것이 소무의 가슴을 더욱 요동치게 했다.
노파 또한 다섯 걸음을 물러서며 놀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팔십 년쯤 된 것 같구나. 나의 멸살장(滅殺掌)을 멀쩡히 받아낸 녀석이.”
연설화는 이 틈에 악보를 회수하여 갈무리하고는 소무의 옆에 바로섰다.
그녀의 얼굴에 걱정스럽다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검성이 내공에서 압도적으로 밀렸기 때문이었다. 지켜만 보고 있을 수 없었다. 연설화의 두 손에 묵빛의 기류가 타올랐다.
그러자 소무가 고개를 내저으며 등 뒤로 한 손을 올려 보였다.
“물러서 있어.”
천성적으로 타고난 무인(武人)의 피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상대가 강할수록 그의 투지는 오히려 더욱 불타오른다. 도움 따위는 원하지 않았다.
은화파파가 비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정파에 검성이라는 애송이가 하나 있다더니 바로 네 녀석이었군. 둘이 무슨 관계지?”
정파의 영웅과 마교의 마지막 교주가 함께 다니니 궁금할 수밖에.
연설화가 대답을 가로챘다.
“내 낭군이시다.”
소무의 얼굴에 홍조가 떠오르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동시에 노파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헐헐헐. 미쳤군. 내 백사십 인생에서 가장 웃긴 말이었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노파의 양손이 움직임을 개시했다. 마치 천수관음(千手觀音)이 현신한 듯 노파의 손이 수십 개로 늘어났다.
백골삽심팔장(白骨三十八掌). 사람의 정기를 빨아들여 연마하는 이 마공은, 수련하는 방법이 워낙 잔인하여 마교에서도 익히는 것을 금지할 정도였다.
유백색의 빛무리가 서늘한 기운을 내뿜으며 상대를 휩쓸어갔다.
그 순간 왼발을 앞으로 내디딘 소무도 검을 뽑아 들었다.
탈혼검법 삼 초식, 비진난격(飛進亂擊).
그가 움켜쥔 검날이 밝은 빛에 휩싸이며 허공을 난자했다. 그 순간 수십 가닥의 강기가 뿜어져 나오며, 유백색의 빛무리에 맞서 연쇄 폭발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콰콰콰콰쾅-!!!
폭음이 끝나기도 전에 소무가 먼저 움직임을 개시했다.
빛의 속도로 미끄러지며 노파의 코앞까지 당도한 소무. 그의 검이 바닥을 차고 오르며 빛살을 뿜어냈다.
쩌엉-!
둔탁한 굉음과 함께 벌어진 그들은 자석처럼 다시 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쩌저정-!! 쩌저정-!!!
눈 깜짝할 사이에 십여 합을 넘어섰다.
서로가 잔재주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은화파파의 압도적인 내공과 검성의 천부적인 전투 감각. 누구도 쉽게 우위를 점할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어느 순간 노파의 전신이 검은 기류에 휩싸였다. 그것은 증발하듯 양손으로 빨려 들어가며, 다시 전면을 향해 흩뿌려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연설화가 다급히 무어라 소리치려 했지만, 그럴 틈이 어디에 있겠는가. 본능적으로 위기를 눈치챈 소무도 검강을 사정없이 뿜어내며 기류를 쳐내었다.
쩌어엉-!
“크윽.”
가공할 내공의 힘에 튕겨지듯 후방으로 미끄러져 갔다.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쏜살같이 다가오는 은화파파의 모습이 보였다.
오히려 소무의 얼굴은 씨익 하고 웃는 듯했다. 그 순간 그의 신형이 폭발하듯 은화파파를 향해 마주 쏘아져 나갔다.
그들의 거리가 순식간에 삼 장 이내로 좁혀졌다. 소무는 전면으로 검을 날려 보내며 지면을 박차고 도약했다.
비검술(飛劒術). 비록 강기를 머금고 있다고는 하나 이런 잔재주에 당할 은화파파가 아니었다. 노파의 손에서 검은 기류가 뿜어져 나오며 소무의 검을 튕겨냈다.
까앙-!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한 자루의 검. 어느새 노파의 등 뒤로 날아오르고 있던 소무가 오른손을 활짝 펼쳤다. 격공섭물(隔空攝物). 튕겨나가던 검은 각도를 틀어 주인을 향해 쏜살같이 다가왔다.
꽈악-!
회수한 검을 움켜쥐는 소리였다.
탈혼검법 이 초식, 전광추흔(電光追痕).
그의 신형이 한 줄기 벼락처럼 지면을 향해 내리꽂히며 은화파파의 측면을 통과했다.
꽈아아앙-!
일격으로 쓰러트릴 수 있다는 생각은 애초부터 하지 않았다. 등 뒤에서 암습을 받은 노파가 휘청거릴 무렵. 검은 그림자가 노파의 전신을 폭풍처럼 휘감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