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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화 신선의 악보 (3) (91/250)


91화 신선의 악보 (3)
2022.05.02.


정신없이 몰아치는 소무의 공세에 은화파파는 혼비백산했다.

한 세기에 가까운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맞수를 만나보지 못했다. 죽을 때까지도 그런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음공(音攻). 손쉽게 대량 살상이 가능한 최고의 무공이기도 하지만, 현경에 이른 초인을 상대로는 그 효과를 볼 수가 없다.

약자들을 상대로 음공에만 의지하며 살아온 나태한 습관이 지금의 상황에 이르게 만들 줄 어찌 예상이나 했겠는가.

은화파파는 몹시 억울한 듯했다.

“이놈!!!”

노파의 양손이 뿜어내는 거센 장력은 분명 가공스러운 위력을 내포하고 있었다. 괴물 같은 내공은 바닥을 몰랐으며, 그 속에 담긴 중후한 힘은 산을 부술 정도였다.

하지만 단조로운 공격들은 시간이 갈수록 점차 소무에게 통하지 않았다.

소호객잔을 운영했던 짧은 기간을 제외한다면, 그의 인생은 언제나 전장의 중심에 있었다.

검성의 신체는 무수히 많은 변칙공격을 기억하고 있으며, 반사적으로 반응한다. 내공을 제외한다면 불리할 것이 없었다.

노파의 전면이 밝게 빛나며 눈부신 섬광이 발현되었다.

번쩍-!

빛이 사그라지는 순간, 소무는 노파의 측면에서 검 끝을 내지르고 있었다.

쩌엉-!

가까스로 막아내긴 했지만, 노파는 확실히 수세에 몰려 있었다.

분노에 찬 노파의 손바닥이 거센 장력을 뿜어내며 반격을 개시했다. 하지만 반응을 눈치채고 있던 소무는 이미 보법을 밟고 있었다.

쒜에엑-!!!

은화파파의 오른손이 허공을 휘저을 무렵. 어느새 소무는 또다시 상대의 등 뒤에서 검강을 뿜어냈다. 화들짝 놀란 노파는 재빨리 상체를 회전하며 왼손을 마주쳐갔다.

콰아앙-!!!

소무는 충격의 반발력을 이용해 반대 방향으로 폭풍처럼 회전했다. 그 순간 강기에 휩싸인 그의 주먹이 은화파파의 허리를 강타했다.

쩌엉-!

“끄허억!”

은화파파는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그동안 무수히 많은 인명을 살상했지만, 본인이 누군가에게 맞아본 것은 거의 백 년 만의 일이었다. 숨이 턱하고 막혀오는 고통. 결코, 익숙할 리가 없었다.

노파에게 드러난 작은 빈틈을 놓칠 소무가 아니었다. 지면을 짧게 박차고 떠오른 그는 검을 우측 어깨 위로 잡아당겼다.

탈혼검법 사 초식, 멸섬무흔(滅殲無痕). 짧은 한순간에 막대한 내공을 폭발시키듯 뿜어내는 필살의 일격이다. 그의 검 끝이 건곤(乾坤)의 기세를 머금으며, 우주를 그렸다.

소무의 검날에서 시퍼런 섬광이 연달아 쏟아져 나오며 노파를 향했다. 그 순간 은화파파의 양손에서도 거센 암화(暗火)가 타오르며 전면을 향해 뿜어졌다.

푸른 빛무리와 검은 기류. 이 두 가지 기운이 충돌을 일으키는 순간 천지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꽈아아아앙-!!!

난화봉에 내리깔린 자욱한 눈이 단번에 비산하며 폭풍을 일으켰다. 거센 눈보라 속에 둘의 모습이 자취를 감추었다.

멀찍이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연설화는 손에 땀을 쥐었다. 당대 무림의 제일 고수와 전대 무림의 전설이 나눈 절정의 격돌. 잠시 후 승패가 드러날 것이 분명했다.

거센 눈보라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휘몰아쳤다.

그러길 잠시 후. 한 사내가 비틀거리며 눈보라 속을 뒷걸음질 치며 빠져 나왔다.

내상을 입었는지 입가로 한 줄기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단숨에 다가간 연설화가 재빨리 그를 부축하며 전면을 경계했다.

소무가 힘겨운 목소리로 나직이 말했다.

“빌어먹을……. 도망쳤어.”

안광을 빛내어 살펴보았지만, 눈보라 속 어디에서도 은화파파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연설화는 자신의 소매로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주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괜찮은 거야?”

“옷 더러워지는 거 싫다며. 그냥 가벼운 내상 정도야.”

그녀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정말 괜찮은 거 맞아?”

“응……. 노인네가 내공 수준만은 정말이지 괴물이더군.”

“근데 왜 계속 기대고 있어?”

그러고 보니 소무의 오른팔이 연설화의 어깨를 자연스럽게 감싸고 있었다. 머쓱해진 소무는 미소를 한 번 머금고는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는 낭군이라며.”

“이 상황에서 농담이 나오나 보네. 네가 전에 부인이라고 해서 나도 한번 따라해봤어.”

소무의 왼손이 눈보라 속의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보다, 음악의 대가가 이제 악기를 연주할 수 없게 되었으니 화가 많이 났을 거야.”

그 순간 눈보라가 걷히며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멀지 않은 곳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팔 한 짝이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연설화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아주 속이 시원하네. 마귀할멈.”

그때였다. 주남산의 어딘가에서 분노에 가득 찬 노파의 고함이 쩌렁쩌렁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어디 한번 두고 봐라!!! 내 오늘 일은 반드시 되돌려줄 것이다!!!”

산 전체를 뒤흔드는 중후한 괴성에 곳곳에서 눈사태가 일어났다.

쿠쿠쿠쿠쿵-!!!

지면이 요동치고 거센 바람이 이곳까지 휘몰아쳤다. 상상을 초월하는 미친듯한 음파는 전신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메아리가 잠잠해지자 소무가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이게 소소가 수련하고 있다는 사자후의 위력인가? 끔찍하군.”

“아니. 위력은 내 제자가 익히고 있는 용격사자후(龍擊獅子吼)가 훨씬 강해. 저건 단지 내공의 힘으로만 뿜어낸 거거든.”

소무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고는 말했다.

“그나저나 악인이 원한을 품었으니 앞으로가 걱정이군.”

“집요한 노파야. 확실히 끝장을 냈어야 안심이 되는데…….”

은화파파가 무엇인가에 집념을 한다면 그것은 집착에 가까울 정도였다. 연설화는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은 독기까지 품었으니 조금도 방심할 수가 없었다.

“일단 운기조식부터 좀 하고 생각해보자.”

우선 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기혈을 다스려야 할 필요가 있었다.

본디 적이 근처에 있으면 운기조식은 금기시되는 행동이다. 그러나 기의 흐름을 순간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현경은 예외였다.

일다경이 지난 후. 안색이 한층 밝아진 소무가 눈을 뜨며 말했다.

“그래도 악보는 회수했으니 다행이군. 우선 한중으로 돌아가자.”

연설화가 고개를 내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안 돼. 너는 이 할멈에 대해 겪어보지 않아서 모를 거야. 복수에 눈이 뒤집혔으니 우리를 미행할 수도 있어.”

“음. 확실히 우리 위치가 파악되면 곤란하겠군.”

둘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한쪽 팔이 날아갔다고 한들 마(魔)의 정점을 이룬 탈마의 고수였다. 노파가 자신들이 한중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주변 인물들까지 위험해질 수 있었다.

고민 끝에 연설화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중을 위해서라도 확실하게 처리하는 게 좋겠어. 유인해서 잡아볼까?”

“마기가 드러나지 않으니 작정하고 따라오면 쉽게 포착할 수가 없어. 인적이 드문 곳이어야 하는데, 적당한 장소가 있을까?”

“위헌원 나루터에서 선박을 타고 위수(渭水)를 통해 섬서로 이동하는 건?”

소무는 잠시 고민해보았다.

강 위에서라면 몸을 숨겨서 따라올 수는 없을 것이다. 초인이라 할지라도 백사십의 나이에 한 손으로 장시간 헤엄치는 것도 무리일 터. 매우 훌륭한 의견이었다.

“그리 하는 게 좋겠군. 설령 유인에 걸려들지 않더라도 한중으로 가는 이목은 숨길 수 있을 테니.”

이곳에서 나루터까지는 일반인도 하루면 갈 수 있는 거리로 상대적으로 가까운 거리였다. 소무와 연설화는 나란히 경공을 펼치며 그곳을 향해 나아갔다.

반 시진이 지난 후. 나루터에 도착하자 여객용 너벅선 한 척이 정박해 있었다. 과거에는 상인들로 북적이던 나루터였지만, 접경지역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 다소 한적한 모습이었다.

너벅선의 입구에는 항해사 두 명이 요금을 받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잠시 후 그들의 시선이 다가오는 연설화에게 고정되었다.

기품 있는 걸음걸이와 완전무결한 얼굴에 서려 있는 도도한 표정. 은은히 풍기는 마성의 매력은 항해사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옥구슬이 굴러가듯 청량한 목소리가 그들의 귓가를 울렸다.

“언제 출발하죠?”

“지금 막 정박한 터라 아직 손님이 타지를 않았습니다. 저녁쯤 되어야 만석이 되어 출발할 수 있을 겁니다.”

“요금은 얼마죠?”

“인당 엽전 열 냥입니다.”

연설화의 시선이 배의 구조를 살폈다. 길이가 십 장이 넘고 너비도 상당했다. 백 명 이상은 탈 수 있는 대형 여객선이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려면 손님이 없는 것이 더 유리했다.

“만석일 때의 요금이 은자 다섯 냥쯤 되겠군요. 지금 출발한다면 제가 그 세 배를 드리지요.”

두 명의 항해사는 눈빛을 교환했다. 옷차림과 기품으로 보아 허언이 아님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보다 더한 횡재가 어디 있단 말인가.

“자, 잠시만 기다리시오.”

항해사 한 명이 쏜살같이 선박으로 뛰어 올라갔다. 선장과 상의하기 위함이리라.

그는 반각도 안 되어 다시 헐레벌떡 내려왔다.

“지금 바로 출발하시겠답니다.”

지폐로 계산을 마친 그녀는 소무와 함께 선박 위로 올랐다. 소무는 은연중 선박의 주변을 살펴보며 물었다.

“지폐까지 쓰다니. 적은 돈이 아닌데 부담되지 않아?”

“물론 부담되지. 하지만 마귀할멈을 잡을 수만 있다면 이 정도는 아깝지 않아.”

겉으로 하는 말과는 달리 그녀의 재력은 상당했다. 교주의 자리를 내려놓고 마교를 떠나올 때 상당한 자금을 챙겨 나왔기 때문이다.

이런 선박 따위 통째로 사도 부담이 안 될 정도로 말이다. 그동안 이용당한 보상이었으니 죄책감 따위는 없었다.

연설화의 재력을 알 턱이 없는 소무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한중에 돌아가면 보태줄게.”

“됐어. 나중에 객잔에서 술이나 사시든가.”

가끔 차나 즐겨 마시던 그녀가 술을 찾다니. 의외였다.

“술도 마셔?”

“지금부터 한번 마셔보려고.”

오랜만에 은화파파의 얼굴을 보니 가슴이 답답한 모양이었다. 물론 안 좋은 쪽으로 말이다.

이들은 시야가 훤히 보이는 선미 쪽으로 이동했다. 한시도 경계를 늦출 수가 없었다.

잠시 후 배가 출발하며 물길을 가르기 시작했다. 손님이 타지 않았기에 갑판 위는 한적하기만 했다.

일다경이 지나서 소무가 물었다.

“혹시 영교라는 집단에 대해서 들어봤어? 정파 쪽에서는 정보가 별로 없는 것 같은데.”

그동안 뒤로 미뤄두었을 뿐 언젠가 물어보려고 했던 부분이었다. 금나라를 강탈한 영교. 그리고 그곳의 교주이자 황제까지도.

화산에서 마주한 영교의 무공은 마교의 것과 흡사한 부분이 많았다. 어쩌면 마교의 핵심간부였던 연설화라면 뭔가 정보가 있을지도 몰랐다.

“물론. 마교에서도 몇 명만이 알고 있었지. 나를 포함해서.”

“아는 대로 얘기 좀 해줘.”

“마교와 영교의 뿌리는 같아. 이백 년 전쯤 마교 내부에서 계파가 나뉜 시절이 있었어. 부교주 멸절마제(滅絶魔帝)가 자신을 따르는 이들과 함께 교단을 장악하고 천하를 제패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지.”

“마교는 단순히 힘을 숭배하는 세력이 아니었던가? 야망이 대단하군. 일개 개인이 무림도 모자라 천하제패를 꿈꾸다니.”

“아무튼 멸절마제가 자신의 세력을 이끌고 교주와 일전을 벌였는데, 결국 힘에서 밀려나 지금의 영교를 세운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시도조차 못하고 물러나다니. 결국 별 볼 일 없는 녀석이었나?”

“그렇지도 않아. 기록을 보면 당시 교주가 정파의 도움까지 받았다고 나와 있어. 정파에서도 도와줘야 했을 만큼 상황이 좋지 않았나 봐.”

꽤 흥미로운 내용이었다. 정파가 마교를 도왔다는 기록은 무림맹에도 없었다. 아마도 극비에 정파의 절정고수들이 힘을 보탰으리라.

“그리고?”

“영교라는 세력을 세우고 싸움은 한동안 계속되었어. 결국엔 음지로 스며들며 한마디를 남겼다고 해. 영교가 다시 양지로 나오는 날, 세상은 마신(魔神)을 보게 될 것이라고.”

“지금 하는 행태를 보면 확실히 휘나라의 황제가 마신인 것은 틀림없군.”

“언젠가 만나게 된다면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금나라를 내부에서 완전히 장악했을 정도로 준비를 오래 해왔으니.”

소무는 묵묵히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였다. 그러고는 지평선 너머를 가리키며 말했다.

“역시 네 직감이 맞았어. 무심코 한중으로 그냥 이동했으면 큰일 날 뻔했군.”

연설화가 안광을 빛내자 먼 곳에서 조그만 나룻배 하나가 보였다. 사공도 없이 스스로 움직이는 광경이 신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한 인영이 미동조차 없이 우뚝 서 있었다.

얼굴의 형태는 제대로 분간할 수 없었지만, 누구인지는 분명했다 그리고 마치 이쪽을 노려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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