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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화 신선의 악보 (4) (92/250)


92화 신선의 악보 (4)
2022.05.03.


연설화가 멀찍이서 따라오는 나룻배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직 우리가 미행을 눈치챘다는 건 모르는 거 같네. 저 할멈을 어떻게 잡지?”

고민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금 이곳은 강의 폭이 좁고, 좌우로는 대나무숲이 있다. 수상비를 펼쳐 다가간다면, 단번에 눈치채고 육지로 달아날 것이 분명했다.

“수심이 깊은 곳으로 이동할 때까지 기다려야겠어. 눈치챌 수 있으니 일단 선수로 이동할까?”

둘은 배의 뒤쪽 선미에서 다시 앞쪽 갑판으로 향했다. 경공에 비교하자면 배의 속도가 너무 느리기에 답답하기만 했다.

한참을 묵묵히 대기하던 중 연설화가 정적을 깨고 물었다.

“소소는 배 타봤어?”

“지난해에 한수강에서 배를 처음 본 뒤로, 타고 싶다고 몇 번 말하긴 했어. 그렇지 않아도 휴가 때 유람이나 갈까 했는데, 요즘에는 타고 싶다는 얘기를 안 하네.”

“애들은 어릴 때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어줘야 해.”

“어떻게 그리 잘 알아?”

연설화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나는 별로…… 추억이 없거든.”

어린 나이에 은화파파한테 잡혀서 감금되다시피 했으니 그럴 수밖에.

“추억……. 지금부터 만들면 되지.”

연설화의 두 눈이 소무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럼 좋은 추억 좀 나한테 만들어 줄래?”

왠지 모르게 어색했다. 얼굴이 붉어진 소무는 강물을 바라보며 말을 돌렸다.

“수심이 어느 정도 깊어진 것 같아.”

“왜 대답 안 해?”

“우선 할멈부터 잡고…….”

말을 마친 소무는 붉어진 얼굴을 감추려는 듯 배 위에서 도약했다.

풍덩-!

물속에 잠긴 소무는 깊숙이 내려갔다.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경지. 현경에 이른 초인은 한 번의 호흡으로도 반 시진을 버틸 수 있다.

깊이가 삼 장을 넘는 강물의 바닥 면에 자리한 소무는 서서히 선박의 선미를 지나 나룻배를 향해 헤엄쳐 다가갔다. 잉어와 메기들이 호기심이 일었는지 주변을 맴돌며 기포를 뿜어냈다.

작은 허점도 허용할 수 없었다. 나룻배와의 거리가 이십 장에 이르렀을 때 그는 모든 움직임을 멈추었다.

호기심이 없어진 물고기들이 멀리 사라지고, 먼 곳의 수면 위로 나룻배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남은 거리 오 장. 소무는 검을 움켜쥔 채 허리춤으로 잡아당겼다. 서서히 다가오는 나룻배는 어느새 바닥 면을 내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소무가 움직임을 개시했다. 그의 발이 강바닥을 박차고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마치 한 마리의 인어(人魚)와도 같아 보였다.

구르르르르륵-!

배의 바닥 면이 급속도로 가까워지며 크게 다가왔다.

한 호흡이 더 지난 후. 검날에 맺힌 검강이 노파가 서 있는 나룻배의 바닥을 단번에 두 동강 내버렸다.

콰앙-!!!

완파되어 터져나가는 배의 틈새로 소무의 신형이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이어서 들려오는 한 줄기 비명이 강가를 울렸다.

“크아악!!!”

하강하는 소무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난파된 배의 나무 조각을 밟고 있는 은화파파. 노파의 왼쪽 어깨 위로 한줄기 자상과 함께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찰나의 순간 급소를 피했단 말인가?’

완벽한 일격이라 자신했지만, 역시나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소무는 강 위를 떠다니는 대나무에 내려선 채 기수식을 취했다.

“감히 날 이렇게 만들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두 눈이 충혈된 노파의 얼굴은 소름 돋을 정도로 무섭게 일그러져 있었다. 절단된 왼쪽 팔과 피로 얼룩진 혈의(血衣). 처참한 몰골이었지만, 그 모습이 더 흉악해 보였다.

“그동안 네가 세상에서 저지른 악행들의 죗값. 오늘 치르도록 해주지.”

“입 닥쳐!!!”

은화파파가 내민 오른손으로 강력한 기의 파동이 일었다. 한계를 알 수 없는 그녀의 중후한 내공에 강물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거센 물결이 소용돌이치며 거대한 장창의 모습으로 변모해갔다.

중원을 통틀어 수공(水攻)을 익힌 자는 많지 않다. 내공의 소모가 극심하고 익히기가 까다롭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정도로 가공스러운 위력이라니.

대나무에 우뚝 선 소무는 검을 검집에 꽂아놓은 채 자세를 낮추었다. 그 순간 노파의 손에서 쏘아져 나온 수창(水槍)이 거센 돌진을 시작했다.

쏴아아아앙-!!!

무엇이든 뚫을 것만 같은 엄청난 기세. 그 거리가 일 장 이내로 좁혀진 순간, 소무의 미간이 좁혀졌다.

탈혼검법 일 초식, 탈혼일섬(奪魂一閃).

눈 깜짝할 사이 검날이 검집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시퍼런 섬광을 뿜어냈다.

촤아아아악-!!!

두 갈래로 갈라지는 수창(水槍). 그 틈새를 비집고 소무가 미끄러지듯 수상비를 개시했다.

물 위를 밟고 쏜살처럼 접근하는 그는 노파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노파가 오른손을 다급히 튕기자 아래에서 화산이 폭발하듯 물줄기가 솟구쳐 올랐다.

콰아앙-!!!

“크윽!”

물줄기에 의해 소무의 신형이 하늘 높이 튕겨 올랐다. 십여 장의 허공에서 자세를 바로잡은 그는 검을 어깨 위로 잡아당기며 낙하를 준비했다.

하나밖에 없는 은화파파의 오른손이 허공을 사정없이 휘저었다.

그러자 노파의 주위로 물결이 회오리치며 수룡(水龍)을 만들어냈다. 하늘 높이 승천하는 수룡을 향해, 한 마리의 매가 급강하를 하며 격돌했다.

콰아아앙-!!!

수룡이 터져나가며 물살이 홍수처럼 사방으로 뿜어졌다. 물결을 뚫고 모습을 드러낸 소무가 상대의 위치를 탐색했다.

노파는 다급히 등을 돌리며 물러서고 있었다. 도주를 감행하려는 것일 터.

‘이런, 또…….’

낭패였다. 백사십 년간 쌓은 공력으로 펼치는 수상비는 소무도 쫓을 수 없을 만큼 빨랐다. 이대로 도망치면 답이 없었다.

소무는 검에 내력을 가득 주입하고는 전면을 향해 날려 보냈다. 팽이처럼 회전하는 검날은 정확히 노파의 등 뒤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휘리리리릭-!!!

뒤에서 느껴지는 매서운 기세에 은화파파는 상체를 돌려 장력을 내뿜었다.

쩌어엉-!!!

우레와 같은 굉음과 함께 검날은 다시 소무를 향해 날아갔다. 비틀거리는 노파는 휘청거리며 다시 수상비를 펼치려 했다.

그때였다. 자세를 바로 하기도 전에, 또 한 명의 인영이 쏜살같이 노파의 앞을 막아섰다. 필살의 일격을 준비하고 있던 연설화였다.

마화비전 절초, 비살난무(飛殺亂舞).

연설화의 양손이 십여 개로 늘어나며 오십여 개의 비침을 한 호흡에 쏟아내기 시작했다.

파파파파팟-!!!

은화파파의 두 눈에 노기가 서렸다.

“이년이!!!”

중후한 내공을 머금은 오른손이 전면을 휘젓자 물결이 응집되며 수벽(水壁)을 형성했다. 이어서 연설화가 날린 비침들이 하나둘씩 수벽에 충돌하며 무용지물이 되어갔다.

푹-!! 푸푸푸푸푹-!!!

그러나 이러한 상황을 예측하지 못한 그녀가 아니었다. 수십 개의 가는 비침 사이에는 대침이 하나 섞여 있었다. 그녀의 내기를 가득 머금은 대침은 붉은 기류에 휩싸인 모습이었다.

쿠웅-!

수벽에 작은 구멍이 뚫리는 소리였다.

물 위에서는 경신법이 불가능하다. 불안정한 자세에서 피할 틈이 없었다. 은화파파의 동공이 부릅떠졌다.

그리고 그 찰나의 순간. 대침이 노파의 오른쪽 눈을 향해 빛살처럼 다가갔다.

푸우욱-!

“끄아아악!!!”

노파의 입이 반사적으로 열리며 처절한 비명이 뿜어져 나왔다. 그러나 고통에 신음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어느새 등 뒤로 다가온 소무가 검을 휘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싸늘한 기운에 노파는 생각할 것도 없이 고개를 숙여갔다.

“히익!”

그 순간 소무가 뿜어낸 검강이 노파의 머리칼을 단번에 잘라냈다.

서걱-!

허공으로 흩뿌려지는 노파의 머리카락. 그 사이를 비집고 연설화가 섬전같은 속도로 다가섰다. 이윽고 묵빛의 기류에 휩싸인 그녀의 오른손이 노파의 가슴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콰아앙-!!!

“끄허억!!!”

은화파파는 수면 위를 미끄러지듯 튕겨나가며 비명을 토해냈다. 흑룡신장에 적중당한 우측 가슴이 검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소무와 연설화가 시선을 교환했다. 이들은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 위해 동시에 노파를 향해 질주했다.

그 거리가 삼 장 이내로 가까워질 무렵. 돌연 비명을 지르던 노파의 신형이 갑자기 물속으로 증발하듯 꺼져버렸다. 연설화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떠올랐다.

“천근추!?”

천근추(千斤墜). 순간적으로 몸의 체중을 급격하게 증가시키는 상승무공으로, 중후한 내공을 가지고 있어야만 사용이 가능한 무공이다.

소무도 천근추를 펼치며 노파를 따라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대나무를 밟고 우뚝 선 연설화는 수면 위를 경계하며 묵묵히 결과를 기다렸다.

일각이 지나서 다시 소무가 수면 위로 솟구쳐 올랐다. 그가 대나무를 밟고 서자 연설화가 다급히 물었다.

“어찌 되었어?”

“후……. 도망치는 기술만은 확실히 천하제일이야.”

탈마의 고수를 잡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연설화의 얼굴에 아쉬움이 떠올랐지만, 그를 탓할 수는 없었다.

“복수는 다음으로 미뤄야겠네. 그래도 치명상을 입혔으니 더는 따라오지 못할 거야.”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당장은 악보를 회수한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들은 아쉬움을 달래며 대나무를 타고 선박으로 다시 나아갔다. 그때 백여 장 밖의 육지 어디에선가 악에 받친 노파의 고함이 쩌렁쩌렁 들려왔다.

“반드시 너희들을 찾아낼 것이다!!! 내 남은 삶을 네년놈들에게 복수하는 데 바칠 테다!!!”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노파의 목소리는 연신 연설화를 불쾌하게 했다.

“말을 못 하게 입을 날렸어야 했는데.”

마지막에 적중시킨 흑룡신장을 노파의 얼굴이 아닌 가슴을 후려친 게 후회가 되었다. 소무가 그녀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음엔 꼭 얼굴부터 노려.”

어느새 선박에 접근한 이들은 동시에 도약하며 날아올랐다.

타앗-!

삼 장 이상을 도약하여 선미에 내려서자, 몰려있던 십여 명의 항해사들이 동시에 움찔했다. 초인들이 물 위에서 싸우는 장면을 목격했으니 겁에 질릴 수밖에.

소무가 안심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말했다.

“우리는 신경 쓰지 마시오. 그저 이대로 있다가 섬서에 도착하면 내릴 테니.”

그의 말에 안심이 되었는지 항해사들은 조심스럽게 위치로 해산했다.

소무와 연설화는 선미에 우뚝 서서 경계를 계속했다. 이미 쫓아올 수 없는 상태인 것을 알지만, 노파의 집요함이 상상을 초월했기에 방심을 늦출 수가 없었다.

배가 제 속도를 내기 시작하고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어느새 서서히 노을이 지고 있었다.

한참이나 시간이 지났지만, 그녀는 토라진 듯이 입을 꾹 닫고 있었다. 아까 자신이 질문했던 대답을 듣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소무도 어색한지 말없이 주변만 살펴보고 있었다.

한참 뒤 연설화가 백옥같은 손을 선미 밖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수면에서 대나무 하나가 붕 떠오르며 손아귀에 움켜쥐어졌다.

그녀는 허리춤에서 비침을 하나 꺼내 들고는 그것을 다듬기 시작했다. 대나무는 순식간에 훌륭한 피리로 변모해갔다.

이윽고 벚꽃잎 같은 그녀의 입술이 피리에 맞닿으며 바람을 불어넣었다. 맑고 청량한 음률이 갑판으로 은은히 퍼져나가며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피리의 음률은 곧 구슬프게 변해갔다. 마치 영혼을 저미는 것 같은 느낌은 소무의 가슴을 격동시키고 있었다.

‘이런 감정을 노래할 수 있는 자를 그 누가 악인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의 시선이 피리를 부는 연설화의 얼굴로 향했다. 노을빛에 비추어진 그녀의 모습은 마치 선녀가 내려와 하늘의 음을 연주하는 것만 같았다.

곡명은 낭군비연소(郎君悲戀召)였다. 그가 어찌 알겠는가. 사랑하는 낭군에게 버림받은 여인을 노래하는 것임을.

‘추억이 없다고 했던가……. 노파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녀의 인생에도 아름다운 날이 많았을 것을…….’

어느새 연주가 멈추었다.

그녀는 다시 대나무를 선박 밖으로 휙 내던졌다. 입술이 삐죽 튀어나온 모습이 왠지 소소가 심술 났을 때와 비슷해 보였다.

‘내면은 누구보다 연약한 여인…….’

그녀를 감싸주고 싶었다.

결심을 굳힌 소무는 손을 서서히 움직여갔다. 그녀의 왼손을 향해…….

두근-!

소무는 갑자기 자신의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정마전쟁에서 수천 명의 적에게 포위되었을 때도 이런 긴장감은 없었다.

‘내가 왜 이러지? 그냥 손만 잡아주는 것뿐이잖아…….’

잠시 후 손끝이 그녀의 손에 살며시 맞닿았다. 부드럽고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는 손끝의 감촉. 마치 뇌전을 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소무와 연설화의 심장이 동시에 쿵쾅거렸다. 서로가 그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소무는 기어코 그녀의 손을 움켜쥐고는 따스하게 감싸주었다.

손을 맞잡은 일남일녀는 선미에서 묵묵히 붉은 석양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어느 순간 소무의 입이 움직이며 나직이 한마디를 뱉어냈다.

“좋은 추억……. 만들어 줄게.”

연설화는 말없이 한 발자국을 다가섰다. 그러고는 소무의 품에 스르륵 안겼다.

이들은 배가 선착장에 도착할 때까지 어떤 움직임도 없었다. 배가 정박을 마쳤지만, 항해사들도 감히 이들에게 내리라고 말을 꺼내지 못했다. 주변의 시선이 따가워지자 소무가 조용히 물었다.

“갈까?”

“응.”

선박 위에서 동시에 날아오른 이들은 한중을 향해 나아갔다.

한 시진을 내달리고 나서 도착한 곳은 정군산에 자리한 그녀의 거처였다. 어느새 날이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암자 앞까지 바래다준 소무는 작별인사를 건넸다.

“푹 쉬어…….”

소무가 등을 돌리자 연설화가 다급히 불러세웠다.

“잠깐만!”

“응?”

잠시 머뭇거리던 연설화는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국수…… 먹고 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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