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인과응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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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화 인과응보 (2)
2022.05.05.
황실의 어가행렬은 강서성의 중심을 넘어 제남산의 길목을 지나고 있었다. 조정대신들과 호위를 맡은 금군. 그리고 황제의 시중을 드는 궁녀와 환관들까지 천여 명이 넘는 규모였다.
금군 대장을 비롯한 황실의 핵심 고수들은 도성에 남아 결사항전을 택했다. 그렇기에 현재 행렬의 안전을 살피는 총 책임자는 호위총관 조충이었다.
조충은 어두운 안색으로 재상 진회에게 다가가 말했다.
“재상, 이대로면 머지않아 휘나라의 추격부대에 따라잡힐 것입니다. 대열을 해산하고 폐하의 옥체만이라도 보존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대신들은 모두 죽어도 상관이 없다는 말인가? 조금만 더 들어가면 폐하를 구출하기 위해 구원군이 속속들이 당도할 것이네.”
진회는 굉장히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금 나라의 핵심관료들은 자신이 하나하나 직접 공들여 만든 자들이다. 이들이 있기에 진회의 천하가 존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이룩한 모든 것을 이렇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길이 좁고 험한데 어가(御駕) 때문에 행렬이 제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가라도 포기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황제의 전용 마차로 특수제작된 초대형 어가. 이것을 들기 위해 무공을 익힌 열두 명의 병사가 동원되고 있었다.
서너 명이 몸을 뒹굴 수 있는 거대한 어가 안에서는 지금도 궁녀들의 신음이 끊이질 않았다.
“폐하께서 절대 어가만은 포기할 수 없다고 하셨네. 제남산만 벗어나면 지세가 평탄해질 것이니 조금만 버텨보게.”
“후……. 알겠습니다.”
호위총관 따위가 어찌 감히 진회에게 반기를 들 수 있겠는가. 의견을 냈으나 무시당한 조충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때 환관 한 명이 다가오며 말했다.
“폐하께서 시장하시다고 합니다. 조속히 수라를 준비하라 명하셨습니다.”
다급히 떠난 피난길에 충분한 음식을 준비해왔을 리가 만무했다.
어제부터 음식이 끊겨 아무것도 먹지 못했으니 배가 고플 수밖에. 진회는 짜증이 치솟았지만 보는 눈이 많았기에 무시할 수도 없었다.
“잘 알겠네. 한 시진 내로 성찬(盛饌)을 준비하겠다고 올리시게.”
환관이 사라지자, 조충이 의아한 표정으로 진회를 바라보았다.
“식량은 저녁쯤 마양현의 관아에서나 보급받을 수 있습니다. 무슨 방법이 있는지요?”
“제남산 아래에 촌락이 하나 있다고 들었네.”
“네. 태평촌이란 마을이 하나 있긴 합니다만…….”
“자네는 호위병 백 명을 인솔하여 먼저 출발하시게. 그곳에서 음식을 조달하여 풍성하게 차려놓으시게. 폐하의 기분이 울적하시니 궁녀도 몇 명 준비해둬야겠지.”
“약탈을…… 하라는 말씀입니까?”
진회가 인상을 찡그리며 그를 노려봤다.
“백성들이 폐하를 위해 헌신하는 것을 어찌 약탈이라 비하한단 말인가!”
“알겠습니다…….”
조충은 백여 명의 금군을 이끌고 경공을 펼쳐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어가 행렬은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 계속해서 전진해나갔다.
이따금 좁은 길목이 등장할 때마다 수많은 호위병이 애를 먹어야 했다. 거대한 어가가 통과하기 위해서는 전면에 자리한 나무를 꺾고 길을 터야 했기 때문이다.
한 시진이 지난 후. 가까스로 대열을 벗어난 행렬은 태평촌에 당도할 수 있었다. 촌민들이 약탈에 저항했는지, 곳곳에는 핏자국과 혈향(血香)이 진동했다.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조충은 재상의 말을 착실히 이행했다. 수라상과 함께 한쪽 구석에는 어린 소녀들이 울먹이는 모습까지 보였다.
잠시 후 어가에서 황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기름기 가득한 얼굴에 배가 불룩 튀어나온 모습은, 그간 얼마나 게으른 생활을 해왔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괴롭도다…….”
황제는 수라상에 앉으며 연신 고개를 젓고 있었다. 그러자 환관이 다가와 물었다.
“무엇이 괴롭습니까?”
“짐은 하늘이 아니더냐. 하늘이 이런 천한 음식을 먹어야 하는 상황이 어찌 괴롭지 않겠는가.”
비록 황제가 좋아하는 고기는 없었지만, 그래도 팔첩으로 차려진 반상이었다. 반찬 투정을 지켜보던 진회가 짜증 서린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폐하. 병사들은 건포로 끼니를 때웁니다. 일각 후에 다시 출발해야 하니 서두르시지요. 목적지에 당도하면 성대한 수라를 올리겠습니다.”
황제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대신들도 살기 위해 반찬 없이 쌀밥을 욱여넣고 있었다.
“크흑…….”
황제는 무엇이 억울한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젓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진회는 묵묵히 서서 그가 어서 식사를 마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정확히 일각이 지난 후 어가행렬이 다시 출발했다.
선두에서 조충이 병사들을 인솔하며 외쳤다.
“출발한다!”
구원군을 마주할 때까지는 조금도 지체할 수 없었다. 행렬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나아갔다. 평야에 접어들자 점차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한 시진. 드디어 반가운 소식이 당도했다. 정찰을 나갔던 병사 한 명이 헐레벌떡 다가왔다.
“총관님, 드디어 구원군이 당도했습니다.”
“후. 수고했네. 어디서 온 자들인가?”
“마양현의 관아에서 온 현령 남진입니다.”
소식을 들은 황실의 대신들은 긴장이 탁 풀렸다. 잠시 후 그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언덕 너머에서 천여 명의 관군이 늘어서 있었다. 기대보다 숫자가 많지 않았지만, 관계는 없었다. 앞으로도 계속 합류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재상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조 총관. 저들보고 우리의 뒤를 맡아서 시간을 벌라고 하시게.”
“알겠습니다.”
조충이 무엇인가 소리칠 찰나였다. 그의 두 눈이 부릅떠지며 온몸이 얼음이 된 듯 정지했다. 현령 남진이 관군과 함께 이쪽으로 활을 겨눴기 때문이다.
“조준하라!!!”
끼이이이익-!!!
시위를 먹인 화살들은 어가행렬을 향했다.
조충이 어이없다는 말투로 소리쳤다.
“자네 뭐 하는 짓인가!? 우린 같은 편이야!!!”
남진은 지지 않고 마주 소리쳤다.
“우리 현으로 진입하는 것을 허락할 수 없습니다!!! 돌아가십시오!!!”
“어서 활을 내려놓지 못할까!? 폐하의 어가 행렬이다!”
“폐하께서는 다니는 마을마다 무참히 짓밟고 있지 않습니까!!! 나는 이 마을을 지키는 현령으로서, 약탈당하는 것을 허락할 수 없습니다!!!”
조충은 말문이 막힌 듯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진회가 다가오며 그에게 물었다.
“저들을 모두 죽인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는가.”
“결사를 각오하고 있으니, 넉넉히 반시진은 잡아야 할 것입니다.”
무공을 익힌 황제의 호위병들이었다. 결코 지방의 관군이 상대할 수 있는 전력이 아니었다. 하지만 시간이 문제였다.
“지금 우리에게 반시진은 만금의 가치보다 귀중하다. 방향을 틀어 전진하게.”
“하지만 저 역도들은…….”
“세상에는 어딜 가나 미친놈이 있는 법이지. 지금은 굳이 신경 쓸 필요 없네. 자리부터 잡은 뒤에 소환해서 참수하면 그뿐이니.”
조충은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이고는 뒤를 향해 소리쳤다.
“마양현은 그냥 통과하고, 고안현으로 진입하여 보급할 것이다!!!”
어가행렬의 분위기는 침통해졌다. 황제를 포함한 조정의 대신들은 연신 분함 속에 이를 갈아댔다.
마양현의 현령을 어떻게 죽일지 백 번 정도 고민할 찰나였다. 정찰병 한 명이 헐레벌떡 다가오며 소리쳤다.
“호남성에서 출발한 황유 장군의 구원군이 멀지 않은 곳에서 진을 치고 있습니다!”
조충의 얼굴에 다시 화색이 돌았다.
“어서 그곳으로 방향을 틀라!”
다시 반시진이 걸려 당도한 곳은 의창 부근의 초원이었다. 훈련이 잘된 이천여 명의 군사들이 대열을 갖추고 있었다.
오십 장의 거리를 두고 어전 행렬이 멈추었다. 진회가 흡족한 목소리로 말을 탄 금병 중 한 명에게 소리쳤다.
“당장 황유 장군을 이곳으로 오라 해라!”
“예, 재상!”
기수는 머뭇거림 없이 전면을 향해 말을 몰았다.
황금빛 갑주에 붉은 술이 장식된 투구. 대도(大刀)를 움켜쥔 황유가 성큼성큼 기수를 향해 마주 다가갔다.
그리고 그들의 거리가 일 장에 이를 무렵. 양손으로 움켜쥔 황유의 대도가 곡선을 그리며 일격에 금병을 양단했다.
써컥-!!!
그 모습을 지켜본 황실의 대신들은 입을 떡하니 벌렸다. 화들짝 놀란 호위총관 조충이 다급히 소리쳤다.
“황유 장군! 지금 뭐 하는 짓이오!?”
“내가 폐하를 뵙기 전까진 누구도 이곳을 통과할 수 없소!”
황유는 단호했다. 말투로 보아 말로는 설득할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상황이 이쯤 되자 대신들이 어가를 바라보며 눈빛을 빛냈다.
이미 황제도 안에서 대화 내용을 다 듣고 있었다. 반드시 자신이 나서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잠시 후 황제가 모습을 드러내며 행렬의 선두로 걸어갔다.
“경은 어찌하여 짐에게 역정을 내는 것인가!”
“무릇 성군은 충신과 간신을 구분할 줄 안다고 하였습니다! 허나 폐하께선 간사한 내시들만 종용하고 상벌을 불공평하게 하지 않았습니까!!!”
“내 다시 한번 확인하여 공정하게 처리할 터이니, 그대는 어서 무릎을 꿇고 충심을 보여라!”
황유는 울분에 찬 목소리로 거센 고함을 내질렀다.
“그럼 이 자리에서 간신배 진회를 먼저 죽이십시오!”
황제는 당황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이미 군신을 장악한 재상을 무슨 능력으로 죽일 수 있단 말인가.
진회가 노기 서린 얼굴로 조충에게 물었다.
“자네들로 저들을 모두 쓸어버릴 수 있겠는가?”
하나같이 정예로 구성된 황실의 호위병들이었다. 그러나 인원의 차이가 무려 네 배에 이른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쪽의 피해도 어느 정도는 감수해야 합니다.”
진회는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고민에 빠졌다. 대치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시간을 오래 끌 수는 없었다.
“공격하시게.”
“예, 재상.”
호위총관 조충을 필두로 오백여 명의 금병이 전면으로 나섰다. 황유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대도를 움켜쥐며 소리쳤다.
“우리는 나라를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 천하를 위해 해악을 제거하는 것이다!!! 전투준비!!!”
그가 이끄는 이천여 명의 병사들이 전열을 가다듬으며 공격을 준비했다.
비록 보병들이었지만, 구성이 꽤 괜찮았다. 오백여 명의 궁수들과 이백여 명의 방패병. 나머지는 창병과 검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궁수들의 공격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금군 병사들이 먼저 질주를 개시했다. 하나같이 재빠른 몸놀림. 조준사격을 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궁수 발사!!!”
오백여 명의 궁수들이 마구잡이로 화살을 발사했다.
파파파파팟-!!!
하늘 높이 날아오른 화살들이 금군의 머리 위에서 비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금병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대다수가 화살을 피하거나 쳐내고 있었다. 오백여 명의 금군 중 적중당한 자는 일 할도 되지를 않았다.
“방벽(防壁)!!!”
황유의 외침에 이백여 명의 방패병들이 밀집하여 벽을 만들었다.
척-! 처처척-!!!
그 순간 금군의 대열에서 이십여 명의 금병들이 앞으로 튀어나왔다. 그들의 무기에선 날카로운 검기(劍氣)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황유는 예상보다 강한 호위부대의 전력에 놀랐다. 자신의 군단에서는 다섯 명만이 검기 발출이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선두에서 내달리던 스무 명의 금병이 방패벽에 격돌하기 시작했다. 방패는 검기에 종잇장처럼 사정없이 찢겨나갔다.
부아악-!!! 촤아아악-!!!
전열이 단번에 무너지고 난전이 이어졌다. 황유가 이끌고 온 이천의 정규군과 오백 명의 금군. 이 싸움은 시작부터 금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크윽!!!”
대도를 움켜쥔 황유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검기 발출이 가능한 금병들이 자신을 집중적으로 공격하고 있었다. 그것도 무려 세 명이었다.
캉-! 카카캉-!!!
검기가 부딪치며 연신 불꽃이 타올랐다.
뒷걸음질 치던 황유는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또 한 명의 금병이 검기를 뿜어대며 추가로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황실 호위대의 수준이 이 정도였단 말인가?’
자신의 부장들도 곳곳에서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그의 자세가 무너질 무렵.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금병 하나가 등 뒤에서 검 끝을 내지르고 있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써컥-!!!
둔탁한 절단음과 함께 황유를 공격하려던 금병이 두 토막으로 갈라졌다.
‘누구……?’
황유는 암흑과도 같은 검은 그림자를 보았다. 그것은 곧이어 자신을 포위한 금병들을 휘감기 시작했다.
휘리리리릭-!!!
눈으로는 쫓기 힘들 만큼 엄청난 움직임. 마치 거센 회오리가 그들을 휘감고 있는 듯했다.
바람이 멈추었을 때, 그곳에서는 한 병사가 뒷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후두두둑-!!!
검기를 발출하던 세 명의 금병이 조각나며 떨어지는 소리였다.
‘내 휘하에 이런 병사가 있었단 말인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분명 자신의 병사와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태도(太刀)를 움켜쥐고 있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이윽고 그 병사는 다른 곳을 향해 전광석화처럼 내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