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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화 인과응보 (3) (95/250)


95화 인과응보 (3)
2022.05.06.


한 병사의 활약으로 인해 전세는 급격히 기울어갔다.

푸욱-!

또 한 명의 금병이 쓰러지고 있었지만, 아무도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단지 그곳에서 신기루 같은 공간의 일렁임이 한 번 발생했을 뿐이었다.

황실 호위대의 핵심 고수들이 영문도 모른 채 하나둘씩 명을 달리하고 있었다. 죽어가는 이들은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검기 발출이 가능한 자는 어느새 단 한 사람만이 남았다. 호위총관 조충. 그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주변을 경계하며 물었다.

“네 이놈, 정체가 뭐냐!?”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단지 자신의 그림자에서 검은 인영 하나가 솟구쳐 올랐을 뿐이었다.

“히익!”

화들짝 놀란 조충은 있는 힘껏 방어 동작을 개시했다.

카앙-!

손목이 떨어질 것 같은 통증. 게다가 단번에 자세까지 뒤틀려 버렸다.

비틀거리던 그는 자신의 주변으로 희뿌연 운무가 차오르는 것을 보았다. 운무 속에 밝은 빛줄기가 번뜩이자, 그는 죽기 살기로 검기를 뿜어내며 그것을 쳐내었다.

카앙-!

“크윽!”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운무 속에서 뿜어지는 빛살은 점차 빨라졌다. 그리고 공격이 어디서 오는지조차 분간할 수가 없었다.

캉-! 카카캉-!!!

조충은 한때 금군의 훈련교관이었던 인물이었다. 수없이 많은 경험이 그를 지금까지나마 버텨낼 수 있게 해준 것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얻은 요행은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촤아악-!!!

“크아악!”

그것이 시작이었다. 비틀거리는 조충은 운무 속에서 빛무리에 점차 난자되기 시작했다.

파파파파팟-!!!

희뿌연 연무는 어느새 혈무(血霧)가 되어 주변으로 흩뿌려졌다. 그리고 그것이 사그라지는 순간 태도를 움켜쥔 한 병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완벽하게 절제된 몸동작. 그리고 칼처럼 예리하고 서늘한 눈빛은 완벽한 살수의 모습이었다.

무림 제일살수 살왕(殺王) 백리현. 그의 시선이 전장을 한 번 쓱 둘러보았다.

핵심고수들이 모두 사망한 금군 소속의 황실호위대. 이들은 상대 진영의 병사들에게 포위되어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었다. 이곳의 싸움은 더는 볼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십여 장이 떨어진 곳. 황유 장군이 백여 명의 정예를 이끌고 어가행렬을 향해 돌진을 시작하고 있었다.

백리현이 보법을 펼치자 그의 신형이 유령처럼 쭉쭉 늘어져 갔다. 어느새 그는 황유 장군의 대열 후미에 위치하여 함께 내달리고 있었다.

한편 이 상황을 지켜보던 조정의 대신들은 기겁했다. 혼비백산하여 이리저리 뛰며 북새통을 이루었다.

“이, 이럴 수가…….”

“이, 이제 어떡합니까?”

황제도 다급히 진회를 향해 소리쳤다.

“재상, 뭐라도 좀 해보시오!”

진회는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아직 믿고 있는 구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방묘야.”

나직한 한마디에 그의 그림자에서 검은 인영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온몸을 붕대로 칭칭 동여맨 소름 돋는 모습. 이를 본 대신들의 얼굴에 놀라움과 기대감이 동시에 떠올랐다.

“암영추혼?”

“소문이 정말이었단 말인가?”

암영추혼(暗營錐魂). 진회 가문의 호위로 키워지는 전설적인 살수의 별호다. 대신들 사이에서도 존재 여부가 소문으로만 들려왔던 인물이었다.

그가 붕대 사이로 서늘한 눈빛을 드러내며 물었다.

“명하십시오, 어르신.”

“너 혼자 저들을 다 죽일 수 있겠느냐.”

“불가능합니다. 저들 중 제가 승리를 자신할 수 없는 인물이 한 명 섞여 있습니다.”

진회의 얼굴에 놀라는 기색이 떠올랐다. 지금껏 방묘가 한발 물러선 상대는 오직 한세충, 단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방묘의 말은 틀림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황실의 호위부대가 저리 처참히 당할 리가 없겠지.’

그의 시선이 황제를 한 번 쓱 바라보았다.

‘이 모든 것은 모두 네놈의 무능함과 변태 같은 탐욕 때문이다.’

곧 병사들이 당도하기 때문에 서둘러야 했다. 황제와 함께 이동한다면 정체불명의 고수가 따라붙을 염려가 있었다. 결심을 굳힌 진회는 방묘를 향해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이곳을 떠날 때가 되었구나.”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암영추혼은 진회를 들쳐메고 쏜살같이 내달렸다. 싸우기를 포기하고 도주를 택한 것이다. 그 모습을 확인한 대신들이 눈에 불을 켜고 욕설을 뿜어냈다.

“저, 저런 개X끼가!?”

“네놈이 그러고도 재상이란 말이더냐!!!”

“이 천하에 때려죽일 놈!!!”

마지막으로 믿었던 재상마저 도주를 택했다. 황제는 할 말을 잃고 겁에 질려 벌벌 떨기만 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들이닥친 것은 황유 장군과 백여 명의 병사들이었다.

“이 나라를 좀먹었던 천하의 간신배들을 모조리 도륙하라!!!”

황제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가는 황유는 어디선가 낯선 전음을 들었다.

- 당신을 도와주었으니 나도 부탁 하나만 하겠소. 궁녀들은 강제로 끌려온 죄 없는 아이들이니, 죽이지 말고 모두 한중으로 보내주시오.

거절할 이유가 없는 부탁이었다. 그 순간 황유의 거센 기성이 다시 한번 쩌렁쩌렁 올려 펴졌다.

“궁녀들은 건들지 마라!!!”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분노의 살육이 시작되었다.

도망치는 조정대신들은 자국의 병사들에게 칼에 찔리고 난자되며 곳곳에서 비명을 토해냈다. 대다수가 기름지고 살찐 체구였기에 도망치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학살의 현장에서 황유는 성큼성큼 황제를 향해 다가갔다. 황제는 다급히 말을 더듬으며 소리쳤다.

“사, 살려다오! 짐이 너에게 대장군의 작위를 부여하겠다! 아, 아니 원한다면 재상의 자리도 내어줄 것이다!”

그 모습이 황유를 더욱 화나도록 만들었다.

“그동안 내가 짐승을 섬겼군. 입 닥치고 백성들의 분노나 받아라, 이 새끼야!”

푸욱-!

“끄아아악!”

황제는 난생처음으로 겪어본 고통에 미친 듯이 고함을 내질렀다. 위엄과 권력의 상징인 황금빛 용포가 피로 물들어갔다.

“황제라면 무릇 백성들의 고통을 함께해야 하는 법이지. 네놈이 버리고 온 백성들은 더욱 심하게 당했다.”

황유는 한 번에 죽일 생각이 없었다. 그는 눈앞의 돼지 한 마리를 서서히 도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십여 장이 떨어진 어가 밑의 그림자. 어둠 속에서 눈동자가 번뜩이며 진회가 사라진 방향을 지그시 응시하고 있었다.

‘암영추혼……. 승부는 다음으로 미뤄야겠군.’

살행의 최고 경지는 자신의 손을 쓰지 않고 상대를 죽이는 것이다. 그리하면 증거가 남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맡은 의뢰까지만 정확히 완수했다.

* * *

장양의 집무실에는 두 명의 손님이 찾아와 함께 차를 마시고 있었다. 부관 양연정과 소무였다.

찻잔을 움켜쥔 장양은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여의치 않으면 그냥 돌아오라 했지만, 아무래도 혼자 보낸 게 좀 걱정이 되는군. 내가 좀 섣불렀네.”

소무는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가 마음을 먹고 도망치고자 한다면 잡을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근데 그를 어떻게 움직이게 하셨습니까? 천만금을 주더라도 내키지 않으면 의뢰를 받지 않는 인물입니다.”

살왕은 자신이 의뢰받은 일이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다고 했다. 장양이 의뢰의 대가로 무엇을 주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의뢰에 대한 보상은…… 닭죽 한 그릇이었네.”

만백성 위에 군림하던 황제의 목숨이 닭죽 한 그릇 값이라니. 웃을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양연정 부관도 겨우 웃음을 참고 있는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잠시 후 겨우 마음이 진정된 소무가 궁금했던 부분을 물었다.

“그런데 진회는 왜 살려야 한다고 하셨습니까?”

“나라고 어찌 그 간신을 살리고 싶었겠는가. 황제가 죽으면 나라가 사분오열되어 쪼개질 우려가 있네. 비록 진회가 수족들을 모두 잃고 허수아비가 된다고 한들, 재상이라는 상징적인 존재가 있어야 좀 더 이 국가를 지탱할 수 있을 것일세.”

양연정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황실이 사라져도 괜찮은 건지요?”

“황실은 이미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되었네. 황제가 없다고 한들 지금의 상황에서 달라질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이곳 한중만 보더라도 아무런 변화가 없을 걸세.”

이미 황실을 향한 한중의 민심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오히려 백성들은 좋아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다른 지역들이 걱정이군요.”

“우리 송나라는 건국 초기 각 지역의 절도사들에게 군사, 재정, 행정을 아우르는 삼권이 주어져 있었네. 중앙정부가 기능을 못 하게 된다면 다시 그들을 중심으로 나라가 돌아갈 것이네.”

“간신배들이 장악했던 중앙정부의 권력이 분산된다면 좋은 일이 아닌지요?”

“당장은 그럴 수도 있네. 하지만 이 상태가 오래가면 누군가는 황제의 자리를 탐할 것이고, 절도사들이 인정하지 않는다면 결국 나라는 갈라지고 말걸세.”

“나라가 통째로 휘나라에 넘어갈 우려는 없어지겠지만, 또 다른 문제가 남아있군요.”

“지금으로선 지켜보는 수밖에. 우리는 그저 해야 할 일을 하면 될 뿐이네.”

양연정이 지도를 한 번 바라보고는 물었다.

“장안성의 탈환은 언제 시작할 겁니까?”

“날씨가 풀리는 대로 하루빨리 시작해야겠지. 그전에 의논하고 싶은 일이 하나 있네. 그 때문에 오늘 자네들을 부른 것이지.”

“말씀하십시오.”

“이번 점령전에 민간인들로 구호대(救護隊)를 조직하여 함께하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네.”

구호대는 생소한 이름이었다. 중원의 역사에서 이러한 이름을 가진 단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소무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혹여 백성들의 구호 활동을 위한 단체인지요?”

“정확하네. 섬서 북부 마을들을 비롯하여 장안성의 백성들은 굶주리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지. 우리 군단이 탈환한 지역으로 구호대가 당도하여 그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네. 어찌 생각하는가?”

“좋은 생각입니다. 구호 활동을 하고자 전투 중에 군단의 병력을 나눌 수도 없는 일이지요. 아군이 점령한 안전지역이라면 민간인들도 충분히 활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양연정도 밝은 표정으로 동조했다.

“그리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도움 없이는 그곳의 백성들이 다시 일어서기가 쉽지 않은 상황일 겁니다. 구호물자는 어떻게 준비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아직 황실에 납부하지 않은 둔전의 곡식이 있지 않은가.”

둔전의 수확량 중 이 할은 황실에 세금으로 납부해야 한다.

올해는 수확이 끝난 직후 휘나라의 공격이 시작되어 지금까지 보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 이후에도 겨울이 찾아와 미뤄두고 있었던 일이었다. 올해는 대풍년을 보았던 터라, 그 양이 어마어마했다.

“도성이 함락된 이상, 황실에 납부할 필요는 없겠군요. 게다가 군단 창고에 비축해둔 구휼미까지 더하면 양이 상당할 것입니다.”

“맞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겠지. 그들의 배고픔을 달래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약재와 의류 등 모든 것이 부족할 걸세. 어느 정도 자금이 필요하겠지.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휘나라에 점령당한 도시는 모두 초토화되어 있었다. 인구가 대폭 감소하였으며, 경제활동이 정지되어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식량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모두가 고민에 빠져 있던 중, 소무가 침묵을 깨고 말했다.

“부호들이나 상인들에게 모금 활동을 독려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장안을 탈환한 뒤 공헌을 많이 한 자들에게 좀 더 유리한 상권을 보장해준다고 하면 참여자가 제법 많을 것입니다.”

장양의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

“허허. 그거 좋은 생각이네. 차후 장안의 경제가 빠르게 회복되기 위해선 부호들이 몰려 투자를 해야겠지. 그리고 그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은 우리 몫일 테고.”

양연정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미 한중의 인구는 포화상태이니, 장안을 탈환하여 안정시킨다면 많은 백성이 그곳으로 이주할 것입니다. 당장 구호에 필요한 자금도 확보할 수 있으니 소무 부장의 의견이 좋을 것 같습니다.”

구호물자의 확보 방안과 앞으로의 계획까지 어느 정도 가닥이 잡혔다. 이제 남은 논의 사항은 구호대에 참여할 민간인을 모집하는 일이었다.

“행정병들에게 거리마다 구호대의 모집 공고를 붙여 놓으라 하겠네. 하지만 무보수로 하는 일에 자발적인 참여자가 얼마나 나올지 걱정이군.”

“적극적인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선전을 좀 해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무엇이 좋겠는가?”

양연정이 웃으며 대답했다.

“백성들에게 인기가 많은 랑아대의 대장이 여기 있지 않습니까.”

“허허허. 그거 좋은 생각일세. 랑아대가 이번 일을 좀 도와줄 수 있겠는가?”

소무는 피식하고 웃었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관복을 입고 모집소에서 교대로 얼굴만 비춰주면 되는 일일 테니.

“알겠습니다,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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