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꼬마장수 (1) 2022.05.07.
하루의 일과를 마친 소소는 정군산에서 내려와 다시 막사로 복귀하고 있었다. 스승님에게 용돈으로 엽전 열 냥을 받았다. 퉁소를 움켜쥔 채 살랑거리면서 걷는 모습이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히히. 뭐 사 먹지?” 한중성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저잣거리로 향했다. 줄지어 늘어서 있는 노점상 중에 한 가게가 아이의 눈에 들어왔다. “탕후루!” 산사나무 열매를 꼬챙이에 꽂은 후 엿당을 발라 만든 이것은 소소가 제일 좋아하는 간식이다. 소소는 한걸음에 다가가 엽전 세 냥을 내밀었다. “이거 한 개 주세요.” “예쁜 아가, 또 왔구나? 자, 여기 가장 큰 것으로 줄게.” “고맙습니다~” 소소는 이 노점의 단골손님이었다. 허리 숙여 인사를 건네고는 거리 구경에 나섰다. 어차피 군영으로 이어지는 길이기도 했으니. 고양이 같은 혀로 탕후루를 핥으며 연신 싱글벙글했다. “음~ 맛있어.” 오십여 장쯤 걸어갔을 때 아는 인물을 만났다. 할아버지의 집무실에서 자주 봤던 행정병 아저씨였다. “아저씨 뭐해요?” “어? 소소구나? 지금 거리에 공고문을 붙이고 있단다.” “공고문이 뭐예요?” “장군님이 이곳 주민들에게 안내하는 말 같은 거란다.” “한 입 먹을래요?” 행정병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소소가 탕후루 꼬치를 자신의 입으로 내밀고 있었다. “아, 아니야. 방금 밥 먹었거든. 아저씨는 바빠서 이만 가볼게.” “네, 안녕히 가세요~” 조금 더 걸어가자 수십 명의 주민들이 몰려들어 소란스럽게 웅성대고 있었다. “구호대라고?” “장군님이 부탁하는 거래.” “그럼 뭘 망설여? 지원해야지, 이 사람아!” 흥미가 생긴 소소는 다가가서 자세히 보았다. 벽면 상단에 공고문이 붙여져 있었다. 『민간 구호대원 모집 공고. 섬서 북부 주민들이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이들을 구호하기 위해 여러분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지원 자격 : 제한 없음 참여 보상 : 식사제공 문 의 : 군영 내 랑아대 훈련장 발 신 : 안서절도사 장양』 공고를 봤지만 무슨 얘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틈틈이 글을 배우고 있지만, 아직은 아는 글자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민들이 소곤거리는 소리를 좀 더 들어보았다. “섬서 북부라면 우리 군단이 반격을 개시한단 말이겠지?” “암, 그렇겠지. 얼마 전 장안에서 쳐들어온 놈들을 싹 쓸어버렸잖아. 이제 우리가 갚아줄 차례지.” “안전한 거야?” “아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구호하는 거니 괜찮을 거야. 그나저나 랑아대 훈령장이라고?” “운이 좋으면 한중의 영웅들이 훈련하는 것도 볼 수 있겠네.” “그럼 일단 구경이라도 가봐야겠구만.” 한중의 거리는 온통 구호대의 얘기로 가득 차 있었다. 소소가 주민들의 틈에 껴서 물었다. “구호는 어떻게 하는 거예요?” 허리춤에 웬 여자아이가 탕후루를 핥으며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호기심이 많을 나이였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인자하게 생긴 중년인이 대답해주었다. “굶주린 사람들에게 식량을 나눠주고, 힘든 사람들을 도와주는 거야.” “배고픈 사람들이 많아요?” “그럼~ 그쪽은 휘나라에 점령당해서 먹을 걸 다 빼앗겼어. 굶어 죽는 사람이 태반이래.” “힝……. 밥도 못 먹고 배고파서 어떡해요…….” “그래서 우리가 가서 도와주는 거지.” 중년인은 울적해진 아이를 보고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고 싶어 하는 순수한 마음이 기특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다시 무어라 말을 하려다 말고 화들짝 놀라고야 말았다. 한 줄기 바람과 함께 아이의 모습이 감쪽같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파앙-! 한달음에 랑아대의 훈련장에 달려온 소소는 크게 놀랐다. 벌써 수백 명이 넘는 인파가 몰려들어 바글바글 들어차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 숫자는 계속해서 불어나고 있다. 소소도 그들의 틈새에서 줄을 서서 기다렸다. 쪼그만 아이가 혼자 구호대에 가입하겠다고 와있으니 웃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옆에 있던 아저씨가 웃으며 물어봤다. “랑아대 보려고 줄 서 있는 거니?” “네. 헤헤.” 중년인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소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한식경이 지난 뒤 그들의 차례가 다가왔다. 훈련장에 설치된 열두 개의 탁상. 랑아대의 대원들이 앉아서 서류를 작성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굉장히 바빠 보였다. 그리고 그중에는 아버지도 있었다. 가장 바쁜 것은 단연 소무였다. 행정 일에 익숙하지도 않은데, 주민들이 자신의 앞에만 집중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고개를 들 새도 없었다. 자신이 언제 이러한 노동을 해봤단 말인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근처에서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기운이 느껴졌지만, 신경 쓸 여력조차 없었다. 그는 정신없이 서류를 적으며 물었다. “이름이 무엇입니까?” “소소예요!” 화들짝 놀란 소무가 고개를 올렸다. 탁상 위에 딸아이가 얼굴을 쓱 내밀며 웃고 있었다. “네가 왜 여기에 있어?” “히히. 나도 배고픈 사람 도와주러 갈 거예요.” “하…….” 상상도 못 해 본 일이었다. 그래도 어려운 사람을 가엽게 여기는 마음을 나무랄 수가 없었다. 후방에서 구호 활동을 벌이는 것이라면 환영이었다. “그냥은 안 돼.” “왜요?” “조건이 하나 있어.” 소소는 궁금하다는 듯 큰 눈을 빛내며 재촉했다. “조건이 뭐예요?” “일단 군복으로 갈아입고 나오면 얘기해줄게.” “헤헤. 약속 꼭 지켜야 해요, 아버지~” * * * 한 시진이 지난 뒤. 소무가 앉아 있던 자리에는 다른 인물이 대체되어 있었다. “이름이 뭐예요?” “흠, 흠! 나는 정철이라 한다.” “나이는 몇이세요?” “서른일곱이란다.” “고향은 어디예요?” “이곳에서 멀지 않은 수현읍이야. 어촌마을이지.” “그럼 배 타봤어요? 나는 타봤는데. 히히.” 군복을 입은 여자아이가 붓대를 움켜쥔 채 연신 질문을 퍼붓고 있었다. 소소의 군단 보직은 엄연히 행정보조였다. 행정병들의 사무 업무를 도와주는 것은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잠시 후 질문이 마무리되자 소소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군순포 망루에서 종이 울리면 이거 들고 모이세요. 알았죠?” “음, 그래. 이제 가봐도 되지?” “잠깐만요!” 소소는 뒤에 있는 상자에서 만두 하나를 꺼내어 내밀었다. “배고프죠? 이거 먹으면서 가세요.” “고, 고맙다……. 수고해.” “다음 아저씨 오세요~!” 열심히 일하는 소소의 모습에 랑아대의 삼촌들이 연신 감탄했다. 바로 뒤에서 화산파 출신의 청해와 현정이 휴식을 취하며 소곤거렸다. “와……. 사형, 소소 일 처리가 장난 아닌데요?” “쉬지도 않고 벌써 오십 명을 넘겼어.” “제법 행정 업무에 소질이 있어요.” “확실해. 가끔 이상한 질문을 해서 그렇지, 속도는 대장님보다 훨씬 빨라.” * * * 딸아이 덕분에 탈출에 성공한 소무는 정군산으로 향했다. 암자에 가까워지자 허기를 자극하는 음식 냄새가 감지되었다. ‘그러고 보니 저녁을 준비할 시간이었군.’ 부엌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연설화가 작은 가마솥에 무엇인가를 삶고 있었다. 머리를 묶고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모습에서는 단아한 매력이 물씬 풍겨 나왔다. “뭐 만들고 있어?” “마침 딱 맞춰왔네. 보계탕이야.” 보계탕은 최소한의 조미료와 함께 닭을 푹 고아서 먹는 음식이었다. “내가 좀 도와줄까?” 소무를 쓱 바라보는 그녀의 입이 작은 미소를 그렸다. “그러시든지.” 연설화는 식기구를 들고 원두막으로 이동했다. 홀로 남겨진 소무는 부엌을 쓱 둘러보고는 몇 가지 재료를 움켜쥐었다. 인삼과 황기, 그리고 대추를 투척하고 소금으로 간을 맞추었다. 일각이 지나고 모든 음식이 준비되자 둘이 원두막에 마주 앉았다. “오늘은 한가한가 보네. 여기서 이러고 있어도 괜찮아?” “소소가 대신 일해주고 있어.” 소무는 오늘 있었던 일들을 설명했다. 그러자 연설화가 깔깔대고 웃었다. “하하. 소소에게 일을 시키고 나오다니, 너무한 거 아냐?” “혹시나 해서 한번 시켜봤더니 잘하더라고. 나만큼 하려면 아직 멀었지만. 그래도 덕분에 모처럼 이렇게 볼 수 있게 되었잖아?” “제자한테 고마워해야겠네~ 언제 얘기할 거야?” 그녀가 무엇을 물어보는지 잘 알고 있었다. 언젠가 소소에게 둘 사이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 “갑자기 얘기하면 아이가 충격을 받을지 모르겠어. 자연스럽게 알게 해야 하는데.” 소무의 반응이 재밌다는 듯, 연설화가 얼굴에 장난기를 머금었다. “아버지하고 스승님하고 마음이 통했다고 왜 얘기를 못 해? 이제부터 엄마라 부르라고 말이야.” “휴. 조만간 얘기해야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던 연설화는 한참이나 진정하지 못했다. 잠시 뒤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나서 물었다. “표정 보니까 뭔가 고민이 있는데? 소소가 구호대에 가입한다니까 걱정되는 거지?” “음. 소소의 무공 수준이면 문제 될 건 없지만, 신경이 좀 쓰이긴 해.” “험한 난세에서 살아남으려면 경험만큼 중요한 것도 없어. 게다가 비전투지역에서 남을 돕는 일이잖아?” “하긴. 군순포의 포수들까지 호위를 해주니.” “한중에서 마공 익히는 애들? 오히려 소소가 보호해줘야 할걸? 이제 막 걸음마 뗀 병아리들인데.” 연설화의 말에 소무가 웃으며 대답했다. “후후. 극마의 눈에는 포수들이 귀여워 보일 수밖에 없겠지.” “그런데 딸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거 아니야? 만일에 대비해서 최고의 생존기술들까지 알려줬잖아. 검성의 경신법에 마교의 천마환영보까지. 소소가 도망치고자 마음먹는다면 화경의 고수라도 추격이 쉽지 않아.” “하긴…….” 연설화가 탁상에 턱을 괴며 은근슬쩍 물었다. “내가 도와줄까?” “네가……?” “소소와 관련된 일이면 나한테도 남 일이 아니야.” “구호대와 함께 가주겠다는 얘기야?” “그냥 바람이나 쐬러. 산속에만 있으니 답답하기도 하고.” 연설화의 곁이라면 오히려 한중에 있는 것보다 더 안전할 터. 그렇다면 더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구호대에 최고의 조력자가 생겼군.” “그보다 우리 낭군님이 간을 어떻게 맞췄나 좀 볼까?” 연설화는 국자로 닭국을 두 그릇에 나누고는 하나를 내밀었다. 그러고는 자신도 한 입을 떠먹었다. 소무가 기대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어때?” “맛있네. 국수도 그렇고 솜씨가 제법인데? 어디서 배웠어?” 소무는 한 숟가락을 떠먹고는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여기 오기 전에 백양현에서 객잔을 운영했어.” 연설화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검성이 객잔을?” “백양현의 소호객잔.” 잠시 상상을 해보던 그녀는 재밌다는 듯 한참을 웃고 나서 말했다. “아쉽네. 소호객잔의 요리 맛을 못 봐서.” “후후. 한번 찾아오지 그랬어.” “음식 먹다가 죽을 일 있어?” “그때는 그냥 객잔 주인이었을 뿐, 무공을 사용하지 않기로 다짐했었어. 날 공격하지 않는다면 교주가 찾아와도 음식은 해줬을 거야.” 턱을 괸 연설화가 눈빛을 빛내며 당돌하게 말했다. “앞으로 하나씩 해줘.” “응……?” “소호객잔의 요리 말이야. 소소도 못 먹어봤다며? 가끔 찾아와서 해주면 좋잖아.” 얼마 전에 자신이 해줬던 국수를 맛있게 먹던 딸아이의 모습이 생각났다. 최근에도 또 먹고 싶다고 연신 얘기하곤 했다. 게다가 아직 객잔의 주요리는 먹여주지도 못한 상태였다. “뭐……. 시간이 된다면.” 둘은 오순도순 보계탕을 먹기 시작했다. 은화파파와의 사건 이후로 사이가 부쩍 가까워져 있었다. “진일심소곡은 언제부터 연습할 수 있어?” “지금은 호흡이 안 돼서 못하고……. 용격사자후의 화후가 십성이 되어야 해. 아직은 육성이니.” “벌써 육성이라고?” “재능이 놀라워. 망나니들이 천마의 자질을 타고난 아이라고 놀라는 모습을 봤어야 했는데.” 망나니들이란 무림맹의 원로고수들을 얘기하는 것이리라. 마교와 정파의 대표들이 모두 딸아이의 재능을 인정하니 아비로서 어찌 뿌듯하지 않겠는가. 소무는 저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암기술도 가르쳤던데?” 연설화는 고개를 올려 가냘픈 턱선을 드러내고는 도도한 표정으로 말했다. “마공 빼고는 다 전수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