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꼬마장수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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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화 꼬마장수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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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화 꼬마장수 (3)
2022.05.09.
한중의 출진 소식은 오래 지나지 않아 휘나라에도 전해졌다. 십만을 상회하던 대군도 궤멸당한 마당에 이만 군세로 어찌 막겠는가. 그들은 튼튼하고 굳건한 성벽에서 수성전을 벌일 심산이었다.
한중의 군단은 양현을 통과한 후 호현을 향해 거침없이 진격해나갔다. 군단의 행렬에서 랑아대는 보이지 않았다.
선두에 있던 양연정이 참담한 표정으로 연신 한숨을 토해냈다.
“후……. 이놈들이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란 말입니까.”
가는 곳마다 보이는 모습은 참혹함을 금할 수 없었다. 매장하지도 못한 채 썩어가는 시체가 즐비했으며, 동냥하는 이들로 넘쳐났다.
양연정과 함께 선두에서 말을 타고 나아가던 장양은 목이 메는지 연신 하늘을 보며 탄식했다.
‘전란이 일어나기 전에는 한중의 백성들과 삶이 다를 바 없던 자들이 아니던가. 이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한숨을 내쉬며 진군하던 장양의 군마가 돌연 걸음을 멈추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양연정이 후미로 신호를 보내 행군을 멈추게 했다.
“후…….”
장양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뿜어져 나왔다. 전면에서 대여섯 명의 아이들이 길을 막은 채 밥그릇을 내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섯도 안 되어 보이는 아이부터 예닐곱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들까지. 제대로 먹지를 못했는지 하나같이 뼈가 드러나 보일 정도로 마른 모습이었다.
군인을 보면 겁을 먹고 도망가는 것이 정상이지만, 밥그릇을 내미는 손에는 물러섬이 없었다. 배고픔이 두려움을 초월한 상태이리라.
말에서 내린 장양이 아이들의 어깨를 다독이며 물었다.
“마지막으로…… 밥을 먹은 지 얼마나 되었느냐.”
아이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눈치를 살폈다. 아마도 기억이 나질 않는 듯했다.
“부모들은 어디 있느냐. 어찌하여 너희들이 직접 나와 동냥을 하고 있느냐……”
대답 대신 아이들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어떤 사정인지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장양이 눈짓을 보내자 양연정이 보급관을 향해 소리쳤다.
“음식을 가져오너라!”
잠시 후 아이들의 밥그릇에 건포와 주먹밥 등의 음식이 수북이 쌓였다.
음식을 손에 쥔 아이들의 눈빛에 경계감이 떠올랐다. 동시에 어딘가로 몸을 감추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뺏겼던 경험이 있었던 것임을 짐작게 하는 모습이었다.
“한백 부장.”
장양의 부름에 기마부대의 한백이 말에서 내리며 다가와 기립했다.
“예, 장군!”
“지금 즉시 기수 한 명을 구호대가 있는 곳으로 보내어 전하시게. 각 마을에서 고아들을 발견하면 한 명도 빠짐없이 모아오라고 말일세.”
한백이 고개를 숙이고 물러가자, 양연정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장군…….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군단에서는 아이들을 돌볼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눈시울이 붉어진 장양이 떨리는 목소리를 겨우 쥐어짰다.
“세상에 이 가여운 아이들을 돌봐줄 곳이 없다면…… 우리가 만들어주면 되지 않겠는가.”
잠시 머뭇거리던 양연정은 기립하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장군.”
군단은 다시 장안성을 향해 거침없는 행군을 시작했다.
한참을 전진하던 중 양연정이 호기심 서린 표정으로 질문했다.
“장군, 아이들을 보육해줄 수 있는 전문 시설을 만든다면 분명 좋은 일입니다. 비용은 모금과 행정자금으로 지원하고, 보육 선생은 자원을 받으면 된다지만, 섬서 북부에 있는 고아들을 전부 수용하자면 거대한 시설이 필요할 것입니다.”
양연정이 아는 장양은 아무런 생각 없이 일을 벌일 사람이 아니었다. 장군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척 궁금했다.
잠시 후 그에게서 들려온 대답은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적군에게 잡혀간 우리의 수많은 백성이 지금도 대명궁의 보수공사에 동원되고 있지 않은가.”
장안성 대명궁(大明宮). 역사상 가장 크고 화려한 황궁 중 하나로, 이백 년이 넘는 기간 당나라의 황제가 기거했던 곳이다.
지금 이곳을 보수하기 위해 일만이 넘는 백성이 끌려가 노역하는 것으로 소문이 파다했다.
“설마……?”
“백성들의 노역으로 만들어진 궁성을 그들에게 다시 돌려주는 것뿐일세.”
상상조차 못 해본 일이었다. 나라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황궁을 고아들의 보육시설로 사용하겠다니. 역사상 전례를 찾아볼 수 없으며, 꿈에서조차 그리기 힘든 말이었다.
“하지만…….”
“황제와 간신배들이 모두 죽었는데 누가 뭐라 할 수 있겠는가.”
황실이 기능을 잃은 이상 나라에서 가장 큰 권력을 가진 이들은 절도사들이나 다름없었다. 각 지역의 군사와 재정, 그리고 행정을 움직일 권한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양연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했다.
“아직 보수가 완료되지 않았다고 하여도, 보육시설로는 일 할도 사용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겠지. 궁성 중 일부는 대규모 의료시설로 활용할 생각이네. 민간과 관군이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시설을 말이지. 가난한 자들이 돈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서는 안 될 것이네.”
“좋은 생각이십니다. 그래서 의무병의 수를 대거 늘리라고 하셨군요.”
“자네 말이 맞네. 예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일이지. 그리고 궁성의 나머지 공간은 유원지(遊園地)로 만들어 사업을 해보면 어떻겠는가. 사람들이 와서 구경도 하고, 먹고 마시며 즐길 수 있도록 말일세. 그리고 거기서 벌어들인 자금은 다시 복지로 환원하는 것이지.”
장양은 생각만으로도 즐거운지 어느새 표정이 밝아져 있었다.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장군의 모습에, 양연정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부호들도 대거 나서서 투자하려 들 것입니다. 궁성이 민간 백성들에게 공개된다면 각지에서 많은 인파가 몰릴 것이고, 도시에 활기를 불어넣으니 인구 증가에도 큰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 이번 점령전에 반드시 승리해야겠지. 멀지 않았으니 어서 함께 힘내보세.”
* * *
반나절을 늦게 출발한 구호대는 불평현(佛坪县)에 머무르고 있었다. 드디어 국경이었던 지점을 넘은 것이다. 이곳에서부터는 마을들의 환경이 차원을 달리했다. 그 모습에 구호대원들의 분위기는 무척 침울해져 있었다.
그때 군단의 기수 한 명이 도착해서 장양 장군의 말을 전했다.
“장군께서 고아들을 발견하면 전부 데려오라고 하셨습니다!”
군순포의 포수들이 돌아다니며 내용을 전달했다.
“여러분들! 아이들을 발견하면 모두 이쪽으로 모아오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내심 마음이 불편했던 구호대원들이었다. 모두가 흔쾌히 동의하며 지침을 숙지했다.
그러나 이는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린 나이에 전쟁의 참혹함을 겪은 아이들이 그 충격을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대부분이 온전한 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구호대원이 아이들을 챙기려 해도, 쉽게 따라오려 하지 않았다.
둔전의 농부 유경. 전란 통에 아들을 잃은 아픔에 시달리던 그는 부인과 함께 이번 구호대에 참가했다. 자식 같은 고아들을 보고 있노라니 마음이 찢어지는 듯했다.
“잘 좀 찾아봐. 이 근처에서 애들 목소리가 났어.”
부인이 고개를 연신 두리번거리며 대꾸했다.
“나도 들었어. 분명히 이 근처에서 들렸는데?”
“저, 저쪽인 거 같은데?”
유경이 손짓한 곳에는 허름한 움막 몇 개가 밀집되어 있었다. 그리고 겁에 질려 오들오들 떨고 있는 굶주린 아이들.
“이쪽에 아이 다섯이 있습니다!”
유경의 외침에 십여 명의 구호대원들이 몰려들었다.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꼬…….”
“자, 아저씨들 따라서 이쪽으로 오거라.”
어른들이 손을 내밀었지만, 아이들은 도망치려고 눈치만 살폈다.
“우리는 나쁜 사람들이 아니란다.”
“배불리 먹게 해줄 테니 어서 같이 가자.”
음식을 내밀어도 요지부동이었다. 아이들의 눈에는 세상에 대한 배신과 어른들을 향한 불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강제로 끌고 갈 수도 없는 일이고…….”
“후. 어쩌면 좋아요…….”
중년의 여성이 발을 동동 굴렀다. 구호대원들의 얼굴에는 안타까움이 물씬 묻어났다.
그때였다. 갑자기 뒤쪽에서 요란스러운 수레바퀴 소리가 거세게 들려왔다.
쿠쿠쿠쿠쿵-!!!
대원들의 시선이 동시에 등 뒤로 향했다.
웬 꼬마 하나가 빈 수레를 끌고 달려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 정확히는 빈 수레가 아니었다. 이미 뒤에 아이 넷이 타고 있었으니.
랑아대장의 딸이자 한중의 꼬마장수로 소문이 자자한 소소였다. 어깨에는 자신의 몸통만큼 큰 보자기를 사선으로 둘러메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처음으로 아이들의 얼굴에 호기심이 떠올랐다. 자신들과 같은 또래였기에 경계심이 없었던 것이리라.
수레를 놓은 소소는 보자기에서 만두를 하나씩 꺼내어 들었다.
“배고프지? 이거 먹을래?”
그동안 미동조차 없던 아이들이 처음으로 움직임을 보였다.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망설임 없이 만두를 받아드는 것이 아닌가.
“고마워 언니…….”
“히히. 맛있지?”
“응!”
다른 아이들도 경계감 없이 만두를 하나씩 받아들고는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뿌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소소는 다시 수레를 잡으며 말했다.
“우리 할아버지가 데려오래. 가면 맛있는 거 먹을 수 있어.”
“어디로 가……?”
“어딘지는 나도 몰라. 히힛.”
만두를 먹던 아이들은 망설이지 않고 수레 위에 올라탔다.
“꽉 잡아~”
아이들을 태우고 쏜살같이 사라져가는 소소의 뒷모습에 대원들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어느새 소소는 또 다른 아이 앞에서 수레를 멈추었다.
길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남자아이는 여섯 살쯤 돼 보였다. 세상을 다 잃은 것 같은 생기 없는 눈빛. 그리고 얼굴에는 마른 눈물 자국으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나는 소소야. 너는 이름이 뭐니?”
“소봉이…….”
소소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일광 삼촌이 던진 눈에 맞아서 죽은 친구와 이름이 같았기 때문이다. 눈사람 소봉이는 이제 세상에 없지만, 또 다른 친구가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소소는 씨익 웃으며 물었다.
“내 친구 대봉이 보러 같이 갈래?”
“응……. 누나…….”
소봉이에게 만두 하나를 쥐여주며 수레에 올려 태웠다.
만석이 된 수레는 마을 중앙의 공터에 정차했다.
“잠깐 기다리고 있어! 친구들 더 데리고 올게.”
아이들은 또 다른 빈 수레를 끌고 가는 소소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소소가 서너 번을 왕복하고 나서야 이 마을의 모든 고아를 모을 수 있었다.
일이 마무리되자 군순포의 황개칠 대장이 소리쳤다.
“자, 이제 다음 마을로 출발합니다!”
곡식이 채워져 있던 수레의 빈자리에는 점차 고아들이 대신 들어차기 시작했다.
행렬의 분위기는 그다지 밝지 않았다. 부모 잃은 아이들을 곁에서 보고 있자니 측은함이 공간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소도 울적해 있는 또래 아이들이 신경 쓰이는지 수레를 끌면서도 힐끔힐끔 뒤돌아보기 일쑤였다.
그때 어디선가 귀에 익은 음성이 소소의 귓가로 들려왔다.
- 해심소가 좋겠구나.
해심소(海心笑). 이 곡은 마음이 편안해지고 즐거워지는 효과가 있다. 스승님의 목소리에 소소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어디 계시는지 위치를 찾을 수가 없었다.
아무렴 어떠하랴. 소소는 옆에서 주변을 경계하는 포수 아저씨들한테 소리쳤다.
“아저씨들, 잠깐 이거 좀 잡아주세요!”
얼떨결에 세 명의 포수가 아이가 이끌던 수레를 건네받았다.
허리춤에서 퉁소를 꺼내든 소소는 행렬의 적당한 위치로 걸어가 해심소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중후한 내공이 실린 맑고 경쾌한 음률. 넓은 파도를 노래하는 아름다운 음악은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넓게 퍼져나가며 웅장하게 울렸다. 잠시 후 부모 잃은 아이들의 얼굴에 처음으로 미소가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