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설화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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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화 설화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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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화 설화원 (1)
2022.05.15.
장안은 빠른 속도로 생명을 되찾았다. 중원에서 가장 부유한 한중의 지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지원을 끌어낸 인물은 한 사람. 섬서의 행정구역을 관장하는 절도사 장양이었다.
섬서 백성들의 맹목적인 믿음과 신뢰. 그것은 믿을 수 없게도 일개 장군을 향하고 있었다.
장안성 대명궁.
지금 이 거대한 궁성의 주변을 장양과 휘하 장수들이 거닐고 있다.
“저 전각은 무슨 용도였는가.”
장양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는 위엄을 자랑하는 거대한 전각이 자리하고 있었다. 드넓은 디딤돌 위로 하늘 높이 세워진 웅장함. 그 크기는 수천 명이 들어차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였다.
행정관이 앞으로 나서며 설명했다.
“저곳은 자신전(紫宸殿)이라는 전각으로, 황제가 휴식을 취하고 생활하는 곳입니다. 보수작업을 하면서 좀 더 크게 지어진 것 같습니다.”
“후……. 고작 개인의 휴식에 어찌 저런 사치를 부리려 한다는 말인가.”
“자신전은 황제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최대한 크게 짓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반드시 없어져야 할 몹쓸 관행이다. 황제의 권위가 백성과 다르지 않다면 그 누가 천하를 탐하려 하겠느냐. 그렇다면 어찌 이렇게 무의미한 전쟁이 일어나겠는가.”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아직 보수되지 않았지만, 이러한 전각이 두 개는 더 있었다고 합니다.”
장양은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쉬고 나서 말했다.
“모청 대장. 저곳을 의무 막사로 쓰면 어떻겠는가.”
허리가 굽은 노인이 앞으로 나서며 밝은 목소리로 답했다.
“관군은 물론이거니와 민간의료도 함께 돌보기에 더할 나위 없는 장소입니다. 역사상 가장 훌륭한 의료시설이 될 것입니다.”
“준비해주시게. 이곳에는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네.”
“예, 장군.”
대명궁 안에는 크고 작은 수백 채의 전각이 존재한다. 관군에게 할당된 일부 공간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이 비어있는 상태였다.
부관 양연정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휘나라의 황제가 차후 이곳으로 천도할 생각이었나 봅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준비를 마치기 전에 우리가 빼앗은 것이지.”
“황제 놈이 화가 많이 났겠습니다.”
“잘된 일이지. 그리고 언젠가 반드시 이 악행의 대가를 치르게 해줄 걸세.”
반각을 더 걸어가자 자신전에 못지않은 거대한 전각이 또 등장했다. 주변에는 화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작은 연못도 보였다.
행정관이 먼저 나서서 설명했다.
“선정전(宣政殿)이라는 전각으로 황제가 정무를 보는 곳입니다.”
“고작 정무를 보는 공간이 이렇게 거대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겉으로 드러난 위엄 따위, 백성들이 인정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거늘.”
진립 부장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황제는 자기가 하늘이라 여기는 족속들이지 않습니까.”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태어나 같은 피를 흘리는 사람이거늘, 누가 더 잘나고 못났다고 할 수 있겠는가. 제 입으로 하늘이라 떠들어도 사람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금수만도 못한 법이지.”
옆에서 듣던 행정관은 속이 시원한 듯 미소를 지었다. 거침없이 하늘을 욕하는 고위 관료, 그리고 같은 마음을 가진 부하들이 모였기에 그 재미가 더했다.
“이곳은 어찌하시겠는지요?”
“고아들의 보육 장소로 쓰면 어떻겠는가.”
“조금 과한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만…… 아이들이 좋아할 것입니다.”
고아들이 궁성을 마음껏 뛰어다니게 된다니.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소무 부장, 이 일은 자네가 추진해주는 것이 어떻겠는가?”
고아들의 숫자가 천 명을 상회한다. 대규모의 보육시설을 제대로 꾸리기 위해선 섬서 남부의 모금 활동과 인력 모집이 필요했다.
“보육시설을 말입니까……?”
“대대적인 선전이 필요한 일일세. 섬서의 영웅인 랑아대의 대장보다 더한 적임자가 어디 있겠는가.”
소무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또래의 고아들을 챙겨주던 딸에게 부끄럽지 않고 싶었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고맙네. 이곳의 이름은 무엇으로 하는 것이 좋겠는가?”
소무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러던 중 마침 생각나는 이름이 하나 있었다.
“설화원(雪花院)으로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름이 마음에 들었는지 장양이 고개를 끄덕이며 화답했다.
“허허. 순수한 눈송이 같은 아이들이니, 잘 어울리는 이름일세.”
“최선을 다 해보겠습니다.”
이들은 다시 대명궁을 산보하며 나아갔다. 몇 채의 전각을 더 거쳐 시설을 정한 후 마지막으로 당도한 곳은 궁성의 뒤뜰이었다.
이곳에는 놀라운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너비가 십여 리에 이르는 거대한 호수. 태액지(太液池)였다.
호수 주변에는 구름다리와 정자 및 누각이 늘어서 있었으며, 넓은 화원이 펼쳐져 있는 모습이었다. 게다가 중앙에는 섬도 있었다. 굉장한 운치에 지켜보던 이들도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행정관이 앞으로 나서서 설명했다.
“마침 복원이 완료되어 있군요. 이곳은 황실의 가족들이 풍경을 감상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던 장소입니다.”
“후……. 이 넓고 아름다운 공간을 어찌 일가족이 독차지해왔단 말인가.”
“관군의 휴식 장소로 쓰면 어떻겠습니까?”
“이 멋진 장소를 우리만 볼 수는 없지. 궁성의 함원전에서부터 이곳까지 유원지로 꾸며봅세. 마음의 상처가 있는 백성들이 이곳에서 조금이나마 위로 삼을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이미 언질을 받아 알고 있던 양연정이 앞으로 나섰다.
“이 일은 제게 맡겨 주십시오. 부호들의 투자를 유치 받아 뱃놀이와 먹거리 등 최대의 관광단지를 조성해보겠습니다. 게다가 이곳 주민들의 일자리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해주시게. 이곳이 빠른 속도로 정상화되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떠나간 주민들이 다시 돌아올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하네.”
“맡겨만 주십시오.”
뒷짐을 쥔 채 묵묵히 호수를 응시하던 장양이 누군가를 지목했다.
“진립 부장.”
“말씀하십시오, 장군.”
“곧 있으면 모내기철이지. 이제 약탈당할 우려가 없으니 섬서 북부 주민들이 다시 농사일을 시작할 수 있을 걸세. 토지가 없는 자들에겐 국가 소유의 비옥한 토지를 무료로 임대해주고, 지원을 아끼지 마시게.”
“알겠습니다. 일거리가 없어서 일을 못 하는 백성이 없도록 살피겠습니다.”
장양이 흡족한 표정으로 휘하 장수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들 바쁘겠군. 허나 모두 본연의 책무 또한 소홀히 해서는 아니 될 것이네. 모두 힘내서 한 걸음을 더 나아가보세.”
장수들이 동시에 기립하며 대답했다.
“예, 장군!”
모두가 해산하고 소무의 발걸음은 행정실로 향했다. 십여 명의 행정병이 마당에서 서성이며 휴식하고 있었다. 그들은 소무를 발견하고는 동시에 기립하며 소리쳤다.
“오셨습니까, 대장님!?”
“어서 오십시오!”
기합이 바짝 들어가 있었다. 그들의 눈빛에는 존경스러움이 가득했다.
“음. 내가 부탁한 건?”
몇 명의 병사들이 동시에 대답했다.
“물론 알아냈습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이쪽입니다!”
서로 안내하겠다고 눈치를 보더니, 가장 계급이 높은 병사가 결국 앞장서기 시작했다.
“아직 한중으로 복귀하지 않은 구호대원이 많은 모양이군.”
“대부분은 군순포의 호위를 받으며 돌아갔고, 아직 삼백 명 정도가 남아 좀 더 활동한다고 합니다!”
“음.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얘기해.”
“예, 알겠습니다!”
행정병을 따라 궁성의 귀퉁이로 향하자 백여 채의 작은 전각이 밀집된 지역이 나타났다.
구호대원들의 임시거처로 활용되는 곳이었다. 당장은 궁성의 전각들이 텅텅 비어있었기에, 원한다면 누구든 독방을 쓸 수 있는 상태였다.
“바로 이곳입니다!”
소무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수고했다, 행정병. 네 이름이 뭐지?”
“왕규입니다!”
“내가 그 이름을 기억하지. 너 또한 나에게 부탁할 일이 생긴다면 언제든 나를 찾아오너라.”
왕규는 환호에 휩싸인 표정으로 소리쳤다.
“고, 고맙습니다, 대장님!”
왕규가 사라지고 그의 시선이 눈앞에 있는 아담한 전각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단아한 미모의 여성이 드러났다. 토라진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있는 연설화였다. 장안에 도착한 이후 한 번도 보질 못했으니 심술이 날 수밖에 없었다.
“왜 이렇게 늦게 찾아왔어?”
“정무가 조금 바빴어…….”
“보고 싶지도 않았나 봐.”
“그럴 리가 없잖아. 항상 생각하고 있어. 전투 중일 때도, 잠을 잘 때까지도.”
“흥, 말은 청산유수네.”
그녀가 삐졌을 때는 어떻게 해야 마음이 풀리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한 걸음을 더 다가갔다. 그녀와의 거리가 코앞까지 가까워졌다.
눈앞에서 얼굴을 마주하자 연설화의 얼굴이 붉어졌다. 지금이 기회였다. 소무는 그녀를 살며시 안아주며 말했다.
“보고 싶었어, 연매. 그리고 고생 많았어.”
“말로만…….”
어느새 토라졌던 그녀의 목소리가 많이 풀려있었다.
“소소도 챙겨주고 고마워.”
“그럼 잘 챙겨줘야지. 내 딸이 될 아이인데.”
모처럼 재회한 둘은 진한 인사를 마친 후 의자로 향했다. 작은 탁자를 끼고 마주 앉은 후 소무가 물었다.
“그나저나 소소는 어디 갔어?”
“우리 장군님은 산책한다고 나가셨어. 궁성 구경한다고 신나셨더라.”
“장군님이라니?”
“몰랐어?”
그러고 보니 딸아이가 훌륭한 장군이 되겠다고 떠들던 기억이 났다. 연설화에게도 장군 행세를 한 모양이었다.
“알아. 훌륭한 장군이 될 아이지.”
연설화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진짜 알고 답변하는 것인지 긴가민가했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은 중요한 부분이 아니었다. 모처럼 만의 재회였으니 그것 외에도 할 얘기가 많았다.
“뭐 때문에 그리 바빠?”
“지금은 설화원.”
“설화원?”
“보육시설의 이름을 그렇게 지었어.”
“혹시…… 내 이름을 딴 거야?”
그녀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올랐다가 금세 사그라졌다. 자기 이름을 딴 게 맞는지 확신이 없었기에 일부러 티를 안 내는 것이리라. 그것을 모를 소무가 아니었다.
“맞아. 아이들이 우리 연매처럼 화사하고 예쁘게 자라라고 지은 거야.”
그녀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의외인데? 정말 그렇게 생각해서 지은 거야?”
“응. 그리고 내가 그곳의 모금 활동과 자원자 모집에 적임자라더군.”
“방법은 있어?”
“막막하지 뭐. 선뜻 모금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도 모르고……. 아이들을 가르칠 사람은 어디서 구할지. 휴…….”
“그럼 내가 우리 낭군님 좀 도와줄까?”
“어떻게……?”
“생각 좀 해보고. 우선 한중에 좀 다녀와야겠어.”
“거긴 왜?”
“군단이 장안에 계속 머무른다며? 나도 이곳으로 옮겨오려고. 암자에서 챙겨올 게 있어.”
“음……. 거처는?”
“우선 이곳에 하나 사지 뭐. 근방의 양주산에 새 수련 장소를 구할 때까지.”
교주의 신분으로 탈주를 감행할 때 마교의 재산을 빼돌린 그녀가 아니던가. 장안에 전각 하나쯤 사는 것은 조금의 부담도 없었다.
“산속 수련은 언제까지 해야 해?”
“소소가 사자후를 완성할 때까지만. 장안성의 대로에서 포효할 수는 없잖아?”
“하긴…….”
오순도순 얘기를 나누던 그들은 한 식경이 지난 후 암자 앞에서 작별을 고했다.
“잘 다녀와…….”
“그럼 갔다 올게.”
장안에서 한중까지는 일반인의 걸음으로는 꽤 긴 여정이지만, 극마의 기준에서는 왕복으로 반나절도 안 걸리는 거리였다.
암자를 나선 연설화는 경공을 펼쳐 정군산에 있는 암자를 향해 나아갔다.
두 시진이 지난 뒤 목적지에 당도한 그녀는 우선 암자 근처의 원두막으로 향했다.
그곳에선 아리따운 한 여인이 붓을 움켜쥔 채 풍경을 그리고 있었다. 꽃에서는 향기가 느껴질 것 같고, 새는 화폭에서 빠져나올 듯 생명이 넘쳐났다.
“실력이 더 늘었는데?”
“언니 왔어?”
동생 연초희였다. 원두막에 다소곳이 걸터앉은 설화는 은근슬쩍 동생에게 물었다.
“요즘 뭐해?”
“그냥 하는 거 없이 그림이나 그리고 있어.”
“지루하지 않아?”
대화하면서도 붓을 멈추지 않을 정도로 조예가 대단했다. 연설화가 음악을 배울 때 홀로 있던 동생은 그림을 그렸으니 그럴 수밖에.
“그림이라도 안 그리면 내가 살아있다는 걸 모르겠어.”
일평생 언니의 보호와 보살핌 속에서만 자라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은화파파의 손에서도. 그리고 마교에서도. 그렇기에 자기주장이 약하고, 언니의 부탁이라면 뭐든지 다 들어줄 정도로 순종적이었다.
“사람이 사람들 속에 어울려야지. 언제까지 혼자 산속에서 궁상맞게 있을래?”
“난 그냥…….”
“아직도 사람들이 무서워?”
“그냥 언니랑만 얘기하고 싶어…….”
과거의 충격적인 기억들. 그것에 대한 후유증이었다. 언니는 강인한 정신력과 타고난 선인의 오감으로 극복이 되었지만, 동생은 달랐다.
“그러다가 만약 언니가 혼인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응?”
초희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떠올랐다. 언니가 곁에 없는 세상은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초희야, 나랑 장안으로 가자. 언니가 도와줄게.”
“장안……. 그래.”
반사적으로 나오는 대답. 예상은 했었지만, 너무 쉽게 승낙하니 대화가 되질 않아 답답했다.
“안 물어봐?”
“가서 뭐할 건데……?”
“아이들이 몇 명 있는데, 네가 그림 좀 가르쳐 볼래?”
“응?”
“우리 어렸을 때 기억나지? 그런 불쌍한 애들이야…….”
초희의 얼굴에 처음으로 호기심이 떠올랐다.
“몇 명이나……?”
“장안에 고아들이라고 해봐야 몇 명이나 있겠어. 한번 해볼래?”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