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설화원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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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화 설화원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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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화 설화원 (4)
2022.05.18.
한중의 군영은 대부분이 목재 건축물이었으나, 장안성은 대부분이 벽돌로 새로 지어진 신식이다. 랑아대의 막사 또한 기존보다 넓고 깔끔한 구조였다.
벌컥-!
막사의 문이 열리며 소소가 후다닥 들어왔다. 그러더니 다짜고짜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일광 삼촌밖에 보이질 않았다. 요즘 훈련도 안 가고 매일 혼자 막사 안에서 가부좌만 틀고 앉아 있었다.
“삼촌 뭐해요?”
일광은 눈을 감은 채로 나직이 말했다.
“명상.”
“명상을 왜 해요?”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깨달음이 필요한 법이지. 명상만큼 좋은 게 없어.”
소소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오늘 오전부터 진행되었던 그림 그리기에 참가를 못 해서 숙제를 받았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그려오라고 말이다.
어차피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이윽고 결심을 마친 듯 등 뒤에서 보자기를 풀러 냈다. 둘둘 말려진 종이를 펼치고 작은 붓을 움켜쥐었다.
“삼촌 가만히 있어요.”
“응. 지금 가만히 있잖아. 그러니 내가 계속 가만히 있도록 너도 침묵해줘.”
일광의 앞에 다소곳이 마주 앉은 소소는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붓을 움켜쥔 아이의 손이 일광의 이목구비를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러길 한 식경.
“흐힛.”
자기가 그리고도 웃기는 모양이었다.
왠지 얼굴이 따가운 느낌에 일광의 눈이 서서히 뜨였다. 그러더니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뭐, 뭐해?”
“삼촌, 움직이면 안 돼요!”
“설마 날 그리는 거야?”
“네~ 잘 그렸죠?”
“음……. 이 정도면 화가 수준인데? 계속 그려봐. 더 잘생겨 보이게.”
일광은 다시 명상에 잠겨갔다. 그림 실력이 괜찮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자신이 집중하기 위해서는 조용히 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한식경이 지나자 드디어 그림이 완성되었다.
“히히힛.”
“끝났어?”
“네. 너무 행복해요~”
그림이 마음에 드는지 가슴에 꼭 끌어안고 빙빙 돌았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말아서 보따리에 갈무리했다.
“어디 가려고?”
“초희 선생님한테 보여주러 가요~”
“잘생긴 삼촌 얼굴 보고 놀라는 거 아니야?”
“헤헤. 다녀오겠습니다~”
“오냐.”
보따리를 등에 메고 문 앞으로 나서던 소소는 돌연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더니 재빨리 달려와서 일광의 등 뒤에 우두커니 섰다.
“삼촌, 요즘 어깨 아프죠?”
다짜고짜 밤톨 같은 손이 일광의 어깨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가볍게 치는 듯 보이지만 중후한 내력을 머금고 있기에 묵직한 힘을 내포하고 있었다.
“시원하네. 계속해 봐.”
명상에 잠겨 있던 일광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있기를 일각이 지났다.
“시원했어요?”
“응. 아주 잘했어.”
일광은 품속에서 엽전 열 냥을 꺼내어 소소에게 내밀었다. 족히 주전부리 서너 개는 사 먹을 수 있는 돈이다.
“히히. 고맙습니다~ 나는 삼촌이 제일 좋아요.”
소소는 폴짝폴짝 뛰며 막사 밖으로 뛰쳐나갔다. 용돈을 받았으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한중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지만, 장안에도 노점과 상점이 하나둘씩 개점하여 간식을 사 먹을 수 있는 곳이 몇 군데 있었다. 그뿐인가. 궁성 곳곳에 군단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노점들도 많았다.
군영과 훈련소 등을 제외하고 궁성 대부분이 공개된 상태였기에, 곳곳에서 산보하고 휴식하는 주민들도 점차 늘어났다.
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초희 선생을 만나 그림부터 보여주는 것이 우선이었다. 설화원에 도착한 소소는 재빨리 그녀의 개인 사무실로 향했다.
“선생님~”
문이 스르륵 열리며 청아한 미모의 여인이 나타났다.
“소소 왔구나? 무슨 일로 왔니?”
“그림 그려왔어요. 헤헤…….”
소소는 쑥스럽게 웃으며 등 뒤에 보따리를 풀어 그림을 꺼내어 내밀었다.
묵묵히 그림을 받아든 연초희. 그것을 살펴보는 그녀의 표정이 의아함을 띠고 있었다.
“음……. 소소야. 사람을 그려오랬더니 왜 곰을 그려왔어?”
“사람 맞아요. 우리 삼촌이에요~”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는 몇 번이고 그림을 다시 들여다보길 반복했다.
그러고 보니 어디선가 이렇게 거대한 체구를 가진 랑아대원을 본 기억이 있는 듯했다. 얼굴은 못 봤지만, 체구만으로도 기억에 남을 만큼 강렬한 인물이었다.
“삼촌이라고……?”
소소는 문득 일광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네~ 잘생긴 얼굴 보고 놀란 거예요?”
“그, 그래……. 아주 잘 그렸구나. 뭐 하는 분이셔?”
“아무것도 안 해요. 매일 막사 안에서 앉아만 있어요.”
초희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막사 안에 있는 소소의 삼촌이라면 섬서의 영웅들인 랑아대가 틀림없을 터.
마침 체육(體育)을 담당하는 선생도 없지 않던가. 만약 그가 고아들의 일일 선생이라도 해준다면 아이들이 좋아할 것이 분명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앉아만 있다고?”
“네. 오늘도 밖에도 안 나가고…….”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다. 초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잘생긴 삼촌 데려와서 친구들한테 보여줄까?”
“친구들이 무서워하면 어떡해요?”
“무서워하다니? 친구들이 아주 좋아할걸? 다들 소소에게 고마워할 거야.”
“내일 데리고 올까요?”
“가능……하겠어?”
소소는 어깨를 으쓱하며 자신 있게 말했다.
“네. 삼촌 데려올 수 있어요!”
“응. 너무 무리하지 말고. 바쁘시다면…… 어쩔 수 없는 거니…….”
“히히. 알았어요. 선생님 그럼 이만 갈게요.”
친구들한테 삼촌을 소개해준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떠있었다.
설화원을 나선 소소는 군단에서 운영하는 노점상에 들렀다. 앞치마를 두른 병사가 반갑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소소 왔구나? 꼬치 먹고 싶어서 왔니?”
“네~ 두 개 주세요!”
이것은 일광이 좋아하는 오선곶이었다. 숯불에 익힌 돼지고기와 버섯, 구운 채소 등 다섯 가지 음식을 꿰어놓은 꼬치였다.
양손에 하나씩 움켜쥔 소소는 막사로 이동하면서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히힛. 맛있어~”
싱글벙글하며 꼬치 하나를 다 먹을 때쯤 막사 근처에 도착했다. 왼손에는 아직 한 개가 남아있었다.
“다녀왔습니다~”
막사 안에는 여전히 명상하고 있는 일광 삼촌이 보였다. 그리고 옆에는 아버지도 들어와 있었다.
“어디 갔다 왔어?”
“설화원 다녀왔어요~”
소소는 바로 일광에게 달려가 흔들어 깨웠다.
“삼촌, 이거 먹어 볼래요?”
그 모습을 지켜보던 소무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는 줄 생각도 안 하고 삼촌 먼저 챙겨주다니. 약간 서운했지만, 소소가 이러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 우선 지켜보기로 했다.
“뭐, 뭐야? 이거 내 거야?”
일광은 연신 놀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조카가 자신을 위해 간식을 사서 들고 오다니. 처음으로 있는 일이었다.
“네 삼촌 거예요~ 어서 먹어봐요.”
소소가 눈앞에서 쪼그려 앉아 눈빛을 빛내고 있다. 일광은 얼떨결에 꼬치를 받아들며 물었다.
“용돈 더 필요해?”
“아니요!”
일광은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하하! 우리 소소가 이제 철이 들었구나!?”
그의 시선이 소무를 쓱 바라보았다. 마치 놀리듯이 말이다.
“음. 맛있네. 혼자 먹으니 이렇게 맛있을 수가.”
절반 정도 먹었을 때였다. 소소가 일광의 다리에 양손을 지탱하며 다가왔다. 마치 자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라는 듯 얼굴을 들이밀면서 물었다.
“삼촌, 내일 나랑 설화원 같이 갈래요?”
“아니. 내가 거길 왜 가? 음 맛있네.”
“우리 초희 선생님이 삼촌의 잘생긴 얼굴을 보고 놀랐어요.”
옆에서 지켜보던 소무는 기어코 웃음이 터지고야 말았다.
“하하핫!”
하지만 일광은 의외로 진지한 얼굴이었다. 그 모습이 더욱 웃기기만 했다.
“선생님이 안목이 있으시구나. 너네 아버지는 사람 볼 줄 모른다니까.”
“같이 갈 거죠?”
“아니, 안 갈 거야. 내가 너랑 같이 앉아서 그림 그릴 수는 없잖아.”
생각과는 달리 삼촌이 바로 거절하자 소소는 울상을 지었다. 어느새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며 호두 같은 주먹을 움켜쥐고 있었다.
“왜요……?”
“아버지나 데려가.”
그때였다. 소소는 눈물을 쏟아내며 일광의 등 뒤로 가서 어깨를 마구 때렸다.
“나쁜 삼촌! 삼촌이 가야 해요!!!”
퍼퍼퍽-!
“크윽. 가서 뭐 하는데?”
“내 친구들한테 소개해주기로 했단 말이에요……. 히잉…….”
일광이 무슨 일인지 눈치챘다는 듯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냥은 안 돼.”
이 말뜻은 조건이 된다면 갈 수 있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여지가 생겼기 때문일까? 울고 있던 소소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뭐, 뭘 해야 해요? 안마해줄까요?”
일광은 은근슬쩍 소무를 한 번 바라보고는 능글능글한 표정으로 말했다.
“삼촌은 맛있는 국수가 먹고 싶구나.”
소소는 재빨리 허리춤의 주머니를 뒤적여 보였다. 은자 네 개가 남아있었다. 같이 먹기에는 충분하지 않았지만, 삼촌 한 명 정도는 사주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내가 사줄게요, 삼촌. 빨리 나가요.”
“아니. 그냥 국수 말고……. 오래전 백양현에서 어느 주방장이 팔았는데, 이제는 다시는 맛볼 수가 없으니. 아, 그 맛이 그립구나……. 소호객잔의 고기국수…….”
소무는 피식하고 웃었다. 그러고 보니 일광은 자신이 운영했던 객잔의 첫 번째 단골손님이 아니었던가. 백양현을 떠나기 직전 그 맛을 못 잊고 찾아와서는, 국수 먹다가 변을 당할 뻔한 적도 있었다.
그것을 소소가 알 턱이 없었지만, 고기국수가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삼촌, 우리 아버지도 고기국수 만들 줄 알아요. 어때요? 우리 아버지가 해준 거 먹어 볼래요?”
“음. 그거 맛있어?”
“엄청 맛있어요!”
“그럼 먹게 해줄 거야?”
“알았어요. 삼촌이 꼭 먹게 해줄게요.”
둘의 모습을 지켜보던 소무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들이켰다. 아직 해준다는 얘기도 안 했는데, 자기가 판단해서 결정하다니. 웃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어느새 성큼성큼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지 않은가. 그러더니 가부좌를 튼 무릎에 안겨서 웃으며 말했다.
“아버지~ 고기국수 언제 먹게 해줄 거예요?”
딸아이를 이길 아버지가 얼마나 있겠는가. 얼굴에 남은 눈물 자국을 닦아주며 말했다.
“조만간 연화당(聯化堂)에 일광 삼촌 초대해서 같이 만들어 먹을까?”
연화당은 연설화가 매입한 전각에 붙여 놓은 이름이었다.
“히히. 좋아요~”
소무의 목을 와락 끌어안고는 일광을 향해 고개를 휙 돌려 물었다.
“삼촌, 들었죠!?”
“그래. 거래 성사다.”
* * *
다음 날 아침.
소소는 일광 삼촌의 손을 잡고 설화원으로 향했다. 기분이 좋은 듯 걸음걸이에는 힘이 넘쳤으며, 손을 흔들기까지 했다.
오늘은 소무가 연설화에게 하루 쉰다고 미리 얘기해둔 상황이었다. 초희의 개인 사무실에 도착한 소소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 소소 왔어요!”
문이 드르륵 열리며 단정하게 차려입은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냘픈 외모와 순수한 눈빛은 언니 설화와는 전혀 다른 매력이 은은히 풍겨 나오고 있었다.
코앞에서 일광의 얼굴을 처음 마주한 그녀는 흠칫 놀라며 떨리는 목소리로 인사했다.
“아…… 안녕하세요.”
일광은 머쓱한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소소 삼촌, 일광입니다.”
“예……. 안으로 드시지요…….”
셋이 마주하고 앉자, 초희가 찻잔을 채워주기 시작했다. 내성적인 그녀는 아이들이 아니라면 말 수가 별로 없는 편이다. 실내가 적적해지자 소소가 은근슬쩍 물었다.
“우리 삼촌, 실제로 보니깐 더 잘생겼죠?”
“응……. 정말 그렇구나…….”
얼굴을 붉히는 연초희의 모습에 일광이 당황하며 말했다.
“서, 선생님도 아름다우십니다.”
말을 마친 일광은 화들짝 놀랐다. 자신도 모르게 말이 헛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다행인지 그녀는 별로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랑아대이시죠……? 몸이 탄탄하신…….”
대인기피 증세가 있는 초희는 말끝을 흐렸다. 일광은 자신을 좋게 봐주니 기분이 좋아진 듯했다.
“하핫……. 제가 원래 신체 하나는 타고 났습니다.”
“시간이 되신다면…… 아이들의 체육 수업에 일일 선생으로 부탁을 드리고 싶은데…….”
“체육 수업이라. 어떤 걸 원하시는지 말씀만 하십시오. 소소 삼촌인데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호, 혹시 아이들이 익힐 만한 호신술 같은 걸 알고 계시는지…….”
전란이 한창인 난세에서 자신의 몸을 지키는 훈련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렇다고 고아들에게 다짜고짜 무공을 수련시킬 수는 없는 법. 뒷골목에서 사용하는 잔기술이면 입문으로 충분할 것이었다.
“하하하! 그 분야에선 제가 전문가입니다, 선생님. 맡겨만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