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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화 설화원 (5) (108/250)


108화 설화원 (5)
2022.05.19.


연초희가 담당하는 평화반의 아이들은 궁성 안의 한적하고 넓은 공터로 향했다.

이백여 명의 고아들이 눈빛을 빛내며 일광을 응원하고 있었다. 처음엔 무서운 얼굴과 위협적인 체구에 모두가 두려워했지만, 지금은 그가 입만 열면 깔깔대고 웃기 일쑤였다.

“이건 무림 제일의 격투술이라 함부로 사용하면 안 돼. 상대가 죽을 수 있어. 언제 사용해야 한다고 했지?”

아이들이 동시에 소리쳤다.

“나쁜 아저씨들이 잡아가려 할 때요!!!”

일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실제로 잡혀간 애가 있었어. 잠깐 이리 나와봐.”

소소가 쭈뼛쭈뼛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일광이 어른의 머리보다 큰 손바닥으로 소소의 뒤통수를 감싸며 쓰다듬었다. 어색한 그 모습이 웃겼는지, 옆에서 지켜보던 연초희가 남몰래 웃었다.

“이 아이는 나쁜 아저씨들에게 잡혀갔다가, 가까스로 탈출한 적이 있지. 어떻게? 바로 내가 알려준 권법을 사용해서 나왔다.”

소소는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무기도 없이 한중의 인신매매범에게 잡혔을 때 일광이 알려준 파산권을 사용했던 기억이 났다.

“맞아요. 무서웠어요.”

아이들이 동시에 놀라며 입을 벌렸다.

“우와~ 소소 최고야!”

“소소 언니 멋있어.”

소소가 자신 앞에서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자 일광이 다시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아저씨를 잘 봐봐. 싸움의 기본은 상대의 눈을 피하지 않는 것이다. 두 번째는 방심을 유도하는 것이지. 어떻게?”

또다시 고아들의 입이 동시에 열렸다.

“아저씨 잘생겼어요!!!”

“그래. 그렇게 얘기하면 상대가 방심하면서 입을 열 거야. 그때 바로 공격을 개시한다. 모두 따라 해. 일 초식 필살낭심권!”

일광은 왼손을 허리춤에 붙이며 오른손 주먹을 전면을 향해 내질렀다.

파아앙-!!!

간단한 기본동작이었지만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아이들의 볼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지켜보던 초희도 예상보다 강렬한 일광의 무예에 적지 않게 놀랐다.

곧이어 기마자세를 한 아이들이 일광의 동작을 따라 오른손 주먹을 내뻗었다.

“이얍!”

“얍!”

체구가 작은 아이들의 눈높이라면 상대의 급소에 적중하게 될 터.

“일 초식에 맞은 놈은 반드시 고개를 앞으로 숙인다! 그때는 뭘 해야 한다고 했지?”

아이들이 진지한 표정으로 동시에 외쳤다.

“이 초식 목젖후리기!!!”

“옳지! 오른손을 회수하면서, 왼손을 이렇게 오므리고 아래에서 위로 올려친다.”

파아앙-!!!

아이들이 또다시 그의 동작을 흉내 내기 시작했다. 무공이라기보단 호신술이었기에 어렵지 않았다.

“야압!”

“얍얍!”

흐뭇한 미소를 지은 일광이 다음 초식을 준비했다.

“잘했다! 그리고 삼 초식이 바로 가장 중요한 절초다. 안 보여줘도 알겠지?”

“네, 아저씨!!!”

“동시에 초식 이름을 외치는 것으로 대신한다! 하나, 둘, 셋!”

아이들의 입이 동시에 열리며 이구동성으로 소리쳤다.

“삼 초식 능멸도주!!!”

검성의 전승자인 소소라면 모를까. 어린아이들이 어른을 당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도망치는 것이 바로 최고의 기술이었다.

“잡히지 말고 잘 도망쳐야 한다. 잡혀가면 엉덩이 두들겨 맞아.”

아이들이 웃긴다는 듯 연신 키득거렸다.

“네. 히히힛.”

“크큭.”

“하하하.”

처음 장안에 왔을 때만 해도 웃음이 없던 아이들이었다.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만 가득했던 고아들이 조금씩 밝아지고 있었다. 일광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뿌듯했다.

“만약 상대가 너무 강해 보이고 도망칠 수 없다고 판단되면 저항하지 말고 순순히 잡혀가라. 하지만 반드시 흔적을 남겨야 한다.”

소소 옆에 있던 여자아이가 눈을 끔벅이며 물었다.

“그럼 아저씨가 구해줄 거예요?”

“신발을 벗든지 옷자락을 찢어도 좋다. 흔적을 남기면 반드시 아저씨가 찾아간다.”

그때 지켜보던 초희가 손뼉을 부딪치며 갈채를 보냈다.

“자, 우리 모두 일광 선생님께 박수!”

아이들이 해맑은 표정으로 동시에 환호했다.

“와아아아!”

“아저씨 최고예요~!”

“하핫. 재밌었어요!”

그가 해주기로 한 역할은 여기까지였다. 초희가 다가오며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시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어떻게 보상해드려야 할지…….”

일광은 머쓱한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하하…….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언제든지 부탁만 하세요.”

그녀와 몇 마디 작별인사를 나누고는 등을 돌렸다. 그때 아이들이 강아지 같은 눈빛을 하며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아저씨, 또 올 거죠?”

“매일 보고 싶어요…….”

“소소야, 꼭 데리고 와…….”

일광은 멋쩍게 웃으며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아갔다.

“잘들 있어. 또 놀러 올게.”

“정말이죠?”

“꼭 또 와야 해요……. 알았죠?”

아이들과도 작별한 일광은 왠지 모르게 마음이 뭉클해져 있었다. 그 또한 고아 출신이 아니었던가.

‘나도 누군가가 이렇게 돌봐주었다면…… 뒷골목에서 그러한 삶을 살지는 않았겠지.’

누구보다 강하게 자랐다고 자부하는 그였지만, 속내는 처절하고 쓸쓸한 기억뿐이었다.

저 아이들의 나이에 그가 배운 것은 실전 싸움이었고, 왈패들의 심부름이나 하면서 생을 연명해야만 했었으니.

묵묵히 걷던 일광의 걸음이 갑자기 정지하며 기립했다. 전면에서 낯익은 인물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장군님께서 여긴 어떻게……?”

장양이 흐뭇한 표정으로 뒷짐을 쥔 채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소무 대장도 있었다.

“허허허. 사실 아까부터 지켜보았네. 자네에게 이런 면이 있을 줄은 몰랐군.”

“예……. 어쩌다 보니…….”

“잘하고 있네. 이 아이들이 모여 우리의 미래가 되는 것이 아닌가. 아이들의 마음이 즐거워야 밝은 미래도 있는 법이지. 계속 힘써주시게.”

“예, 장군…….”

“이 가여운 아이들이 오늘따라 더 행복해 보이니 좋구먼. 허허허…….”

장양은 볼일을 다 봤다는 듯 등을 돌렸다. 그의 옆을 소무가 보폭을 함께 맞추며 걸었다.

“일광 백부장을 무서워하는 병사들이 많지만, 속내는 누구보다 정의로운 인물이지 않은가.”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자입니다. 후후……. 불같은 성격 때문에 가끔 걱정도 되지만요.”

“허허. 기개가 범상치 않으니 앞으로 기대가 많네. 부장으로 추천해주고 싶은데, 황실이 사라졌으니…… 당장은 임명할 수 있는 방도가 없는 것이 아쉬울 뿐일세.”

“새로운 황제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후계를 세우지 못하고 죽었으니, 당장은 이 상태가 계속되겠지. 하지만 또다시 무능한 자가 같은 핏줄이라고 나서는 것도 지켜볼 수 없는 일이지. 다른 절도사들도 인정하지 않을 것이고.”

“전세가 안정화되면 장관급 조정회의라도 주선해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리하는 것이 좋겠군. 공백이 길어질수록 각지의 결속력이 떨어질 것이 우려되네.”

“맞습니다. 유광세도 몸을 사리고 있고, 후방 지역의 절도사들도 움직임이 없으니까요.”

“음. 우리와 연계를 기대할 수 있는 건 한세충 절도사뿐일세. 헌데 양양성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으니…….”

지금 상황에서 가장 골칫거리인 문제였다. 그가 출진하지 않음으로 양양성이 위기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었다. 더는 두고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방법을 찾아봐야겠습니다.”

“나도 고심 중이네. 우선 전령이 돌아오는 내달까지만 기다려봅세.”

“알겠습니다. 혹시 고려 쪽에 대한 소식은 없는지요? 우리와 고려 둘 중 하나가 무너지면 나머지 한쪽도 버티기 힘들 것입니다.”

“임안이 함락당한 이후로는 해상길이 막혀 정보를 얻기가 쉽지 않더군. 마지막에 확인한 바로는 요동성에 병력을 집결하여 버텨내고 있다고 들었네.”

“휘나라의 양대 맹장인 사묘아리를 잘 막아주고 있으니 고맙기만 하군요.”

“인재가 많고 대단한 나라일세. 그쪽도 쉬운 상황은 아니겠지만, 당분간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더군.”

담화를 나누던 둘은 어느새 태액지에 도착했다. 궁성의 뒤편에 자리한 거대한 호수. 이곳에는 어느새 많은 주민이 몰려들어 곳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허허……. 이렇게 주민들과 함께 구경하니 더 보기 좋지 않은가.”

“맞습니다. 이 넓고 아름다운 호수가 황제 일가족의 전용 휴식공간으로 만들어졌었다니…….”

“머지않아 이곳은 뱃놀이도 하고, 먹고 마시며 즐길 수 있도록 조성될 것이네.”

“다들 좋아하겠군요.”

장양은 흐뭇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서도 제법 많은 일자리가 나올 걸세. 게다가 타지에서도 관광객들이 몰려와 소비하고 간다면 정상화에 빠른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소무가 어딘가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분명 그럴 것입니다. 저기 나와 있군요.”

호수 근방에 마련된 노점 찻집이었다. 지금은 군단에서 매우 싼 값에 운영하는 상황이었다. 의자 네 개가 딸린 목재 탁상에 두 명의 인물이 앉아 있었다.

“저들이 오늘 만나기로 했던 의병대의 인물들임을 어찌 아는가?”

“근처에 무공을 익힌 자들이 저들밖에 없습니다.”

“허허……. 눈썰미가 대단하군. 어서 가보세.”

장양과 소무가 다가가자 두 명의 중년인이 재빨리 일어서서 예를 갖추었다. 관복을 입고 왔기에 바로 정체를 눈치챈 것이리라.

“처음 뵙겠습니다, 장군. 꼭 한 번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장양이 밝은 표정으로 그들의 손을 맞잡았다.

“그간 고생들 많으셨습니다. 고맙고, 또 고맙습니다.”

“저희가 한 게 뭐가 있겠습니까? 관군의 활약에 비교한다면 그저 조족지혈일 뿐입니다.”

“허허허……. 의병대가 아니었으면 큰일을 치를 뻔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일단 앉으시지요.”

네 명의 인물이 탁상을 끼고 마주 앉았다. 장양이 노점을 바라보자 병사 한 명이 긴장한 얼굴로 재빨리 다가왔다.

“바로 차를 대령하겠습니다, 장군.”

“이곳의 차 가격이 얼마인가.”

“엽전 한 냥입니다.”

한중에서 평균적인 가격이 세 냥인 것을 감안하면 매우 저렴한 수준이었다. 소무가 품속에서 엽전 네 개를 꺼내어 내밀었다.

“네 잔 주시게.”

“아, 아닙니다, 대장님! 어찌 돈을…….”

“장군님 성격 알면 받아야지. 곤장 맞기 전에.”

소무가 농을 건네자 병사가 피식 웃으며 건네받고는 재빨리 사라졌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다른 자들의 얼굴에도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덕분에 가벼운 분위기에서 대화가 시작되었다.

“저는 송겸 대장이고, 이쪽은 무현 부장입니다.”

소무도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통성명을 마주했다.

“저는 랑아대를 이끄는 소무입니다.”

송겸과 무현 부장의 얼굴에 놀라움의 빛이 떠올랐다. 랑아대의 대장이 누구인가.

무수히 많은 적장의 목을 따고 백전불패의 신화를 가지고 있는 맹장이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존경스럽다는 눈빛이 가득했다.

“섬서 제일의 영웅을 이렇게 뵙게 되니 영광입니다.”

“정말이지 랑아대의 대장님께서 함께 나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소무는 묵묵히 포권하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통성명이 끝나자 장양이 밝은 표정으로 물었다.

“호현 관아에서 이천 기의 기마대를 물리치셨다고 들었습니다. 초대 의병장이셨던 소소 장군께서 도와주셨다고요?”

소소라는 이름이 또 나오자 소무는 자신도 모르게 흠칫했다.

군단 내에서 사실을 눈치채고 있는 자는 오직 양연정 부관뿐이었지만, 그조차도 너무 황당하여 우선 함구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자신이 경공에서 밀려 아이를 놓친 사실을 굳이 먼저 나서서 소문낼 필요가 없지 않은가. 그렇기에 소무는 아직 정확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

송겸 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위기의 순간 소소 장군께서 단 한 번의 일갈로 이천 기의 기병을 모조리 쓰러트렸습니다. 이후 그분의 부하가 나타나서 저희와 함께 마무리를 지었지요.”

장양은 적지 않게 놀란 듯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소무 부장, 일갈로 이천 기의 군마를 쓰러트렸다고 하네. 일평생 처음으로 들어본 일일세. 그렇다면 자네도 그것을 할 수 있겠는가?”

“저는 불가능합니다. 중후한 내공으로 고난도의 광역 무공을 전문적으로 수련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대표적으로는 음공…….”

말을 하다 말고 또다시 흠칫했다. 왠지 모르게 몸에 소름이 돋는 듯했다.

‘설마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연설화와 함께 구호대에 있던 아이였다.’

그때 장양이 다시 송겸을 바라보며 물었다.

“정말 대단한 인물이지 않습니까. 또다시 자취를 감추었다니 안타깝구려.”

“예, 다음번에 다시 만나게 된다면 꼭 장군님과의 만남을 주선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장양이 소무를 바라보았다.

“자네 안색이 좋지 않군.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겐가?”

그는 애써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장군.”

어느새 병사들이 네 잔의 차를 가지고 나왔다. 장양이 목을 축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보시자고 한 이유가 따로 있다고 들었습니다.”

송겸이 고개를 끄덕이며 품속에서 지도를 하나 꺼내었다.

“저희 의병들은 장안성 근방을 수색하며 휘나라의 잔당을 소탕해왔습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무척이나 고마운 일이지요. 헌데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송겸이 지도의 한 부근을 가리켰다. 장안에서 오십여 리가 떨어진 한적한 곳이었다.

“이곳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고수들을 발견했습니다. 분명 무림에서 온 자들은 아닙니다.”

어느새 마음을 진정시킨 소무는 흥미로운 소식에 다시 관심을 가졌다.

“자세히 말씀해보십시오.”

“동굴이었습니다. 정탐을 갔던 의병들이 스물이나 죽고, 고작 한 명만이 겨우 살아 돌아왔습니다.”

조금 더 얘기를 들어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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