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도둑이 들다 (2)
(110/250)
110화 도둑이 들다 (2)
(110/250)
110화 도둑이 들다 (2)
2022.05.21.
동굴 입구에서 이십여 장이 떨어진 바위 틈새. 이곳에 일남일녀가 웅크리고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내가 싸울 테니까, 연매는 못 도망치게 입구를 막고 있어.”
- 전음으로 얘기해.
- 알았어.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주변으로는 기막을 둘렀기에 심장박동조차 울리지 않고 고요하기만 했다.
- 해가 슬슬 어두워지고 있으니 곧 나타나겠지?
- 아마도. 할멈이 눈치가 보통이 아닌데 걱정이네.
- 잘될 거야.
둘은 묵묵히 주변을 살피며 은화파파를 기다렸다. 탈마에 이른 상대는 기(氣)를 감지할 수가 없기에 육안으로 살펴봐야 한다.
반 시진이 지난 후. 돌연 삼십여 장 밖의 새들이 지저귀며 사방으로 날아올랐다. 소무가 조심스럽게 검집을 움켜쥐며 말했다.
- 온 것 같아.
한쪽 팔이 없는 노인이 나뭇잎을 밟으며 나타났다. 구름을 타고 노니는 듯 바람 같은 경공술. 마치 신선으로 착각을 일으키는 움직임이었다. 얼굴을 안 봤다면 말이다.
- 언제 봐도 비호감이네.
매부리코에 심술이 가득한 얼굴. 게다가 이제는 왼쪽 눈까지 안대로 가리고 있었다.
지켜보는 소무는 손에 땀을 쥐었다.
- 들어간다. 조금만 더 기다려…….
성큼성큼 동굴 입구로 걸음을 옮기는 은화파파.
돌연 할멈의 발걸음이 입구에서 멈춰 세워졌다. 그러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것이 아닌가. 소무와 설화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설화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전음을 보냈다.
- 어떡해……. 눈치챘나 봐.
- 정말 연매 말대로 눈치가 귀신이야.
- 조금 더 기다려볼까?
- 어차피 도망치면 못 잡아. 무조건 동굴 안으로 밀어 넣어야 해.
그때였다. 중후한 내공이 실린 고함이 쩌렁쩌렁 울리며 산을 흔들었다.
“빨리 안 튀어나와!!!”
소무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설화와 눈을 마주쳤다.
- 우리 보고 나오라는 거 같은데?
- 그새 봤단 말이야……?
- 혹시 모르니 잠깐 기다려 봐…….
소무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은화파파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시선은 동굴 안을 향하고 있었다.
동굴 안에 가득 찬 습기가 기(氣)의 흐름을 방해하기 때문에 밖에서는 인기척을 감지하기 쉽지가 않다. 그런데도 노파의 예민한 오감이 뭔가 이상함을 느낀 것이리라.
“썅! 내 말 안 들려!?”
지켜보던 소무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 아직 우릴 발견 못 했어. 근데 성질이 참 더럽군. 저 할멈 밑에서 어떻게 오 년을 버텼어?
- 저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초희가 저 할멈 때문에 지금도 사람이랑 말을 잘 못 해.
- 그래도 아이들이랑은 잘 말하던데?
- 자기 어릴 때 생각이 나서 잘해주고 싶나 봐. 근데 지금 그런 얘길 할 상황이 아닌 것 같은데?
- 긴장 좀 풀라고.
잠시 고민하던 노파가 드디어 동굴로 걸음을 옮겼다. 한 발자국. 그리고 또 한 발자국. 가공할 무위를 가지고 있음에도 조심성이 많은 움직임이었다.
- 내가 먼저 이동할게. 싸움이 시작되면 나와.
- 조심해…….
바위 밖으로 빠져나온 소무는 전신의 모든 기척을 죽인 채 살금살금 접근해갔다. 자신 또한 노파의 기척을 감지하지 못하듯 상대 또한 마찬가지일 터.
거리는 십여 장. 그리고 점차 계속해서 가까워졌다.
심장이 두근두근했다. 조심스럽게 검집을 움켜쥐며 출수를 준비했다.
거리가 삼 장까지 가까워질 무렵이었다.
“이 고얀 새끼들, 잡히면 다 뒈질 줄…….”
그때였다. 돌연 노파의 고개가 뒤로 휙 꺾이며 돌아갔다. 그 모습이 어찌나 공포스러운지 소무는 깜짝 놀라 심장이 멎는 듯했다.
“헉!?”
노파 또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대로 멀뚱히 서 있을 수는 없었다.
동굴 밖을 빠져나가려는 은화파파와 그것을 막으려는 소무.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진 둘이 동시에 발을 박차며 동굴 입구로 쏘아져 나갔다.
소무의 오른손이 움직임을 개시했다.
탈혼검법 일 초식, 탈혼일섬(奪魂一閃).
검집에서 검날이 모습을 드러내며, 눈부실 정도로 밝은 한 줄기 섬광이 번뜩였다.
노파의 오른손에서도 유백색의 기류가 순간적으로 뿜어져 나왔다.
쩌어엉-!!!
격돌의 순간 소무는 천근추(千斤錘)를 시전했다. 압도적인 내공의 차이로 뒤로 밀려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그의 양발이 지면을 파고들며 세 치 가량을 밀려났다.
끼익-!
은화파파는 뒤로 세 걸음을 물러섰다.
노파가 자세를 바로잡기도 전에 소무가 선공을 개시했다. 그의 신형이 자리에서 감쪽같이 사라지는 듯했다. 눈 깜짝할 사이, 그는 은화파파의 코앞에서 검강을 난사하고 있었다.
노파의 손에서도 강기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쩌정-!! 쩌저정-!!!
굉음과 함께 눈부신 빛무리가 동굴 안을 환하게 밝혔다.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되고 있었지만, 검성의 연격을 어찌 한 손으로 버틸 수 있겠는가. 계속해서 동굴 안쪽으로 밀려나는 노파는 도망칠 궁리를 했다. 그러나 그것을 가만히 지켜볼 연설화가 아니었다.
“할멈, 오늘이 마지막이겠네.”
동굴 입구를 틀어막은 그녀는 수십 개의 비침을 움켜쥐고는 마화비전의 절초를 준비했다.
그 모습을 확인한 은화파파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일대일이라면 신경도 안 썼겠지만, 검성과 함께라면 얘기가 달랐다. 설화가 얄미웠는지 노파는 연신 오른손을 휘두르면서도 악에 받쳐 소리쳤다.
“네 이년!!!”
“어디다 대고 이년이래? 쭈그렁 마귀할멈 주제에.”
예전 같았으면 눈도 못 마주치던 아이가 자신을 비아냥거리고 있었다. 노파는 화를 못 참겠다는 듯 한쪽 눈이 붉게 충혈되어 갔다.
그때였다. 소무의 앞발이 노파의 복부에 틀어박히며 둔탁한 소리가 동굴 안을 울렸다.
쩌억-!
“끄헉!”
뒤로 튕겨 나가는 노파는 안색이 어두워졌다. 이미 도망칠 구멍은 없었다. 전면에서는 소무가 마무리를 짓기 위해 터벅터벅 다가오고 있었다.
“빌어먹을 연놈들……. 이제 고작 이백 명이 남았을 뿐인데…….”
이백 명의 정기만 더 흡수한다면 흉마살혼조를 완상하게 된다는 얘기이리라. 이 동굴에서 오십 명을 모은다고 했으니, 나머지에 은신처가 여럿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소무가 움켜쥔 검날을 푸른빛 검강이 감싸며 웅장하게 진동했다.
“그동안 무고한 사람을 팔백 명이나 죽였다는 얘기로군. 곱게 죽을 생각은 마라.”
거리가 일장으로 좁혀지는 순간 은화파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노파의 오른손에서 검은 기류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며 구체로 변해갔다.
“나 혼자 죽을쏘냐!!!”
그때였다. 소무가 공격을 개시하려 했지만, 노파의 손이 먼저 움직이며 동굴의 천장을 향해 뻗어 나갔다. 검은 구체가 천장을 때리며 거센 폭음이 터져 나왔다.
꽈아아아앙-!!!
동굴이 무너지는 순간 소무의 신형이 눈부신 섬광에 휩싸였다.
번쩍-!
섬전비영보(閃電飛影步). 검성의 경신법이었다.
순간적으로 자리를 이탈한 그는 연설화와 함께 동굴 밖을 벗어났다. 기다렸다는 듯이 동굴 전체가 무너지며 함몰되어버렸다.
쿠쿠쿠쿠쿵-!!!
입구는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으며, 안에서는 어떠한 인기척도 들려오지 않았다. 설화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죽었을까?”
“아직 숨은 붙어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저 몰골로 나올 수는 없겠지.”
“워낙 독한 할멈이라, 마무리는 확실하게 하는 게 안심이 되는데.”
“어쩔 수 없잖아. 맨손으로 동굴을 파낼 수도 없고.”
“하긴……. 이 정도면 손톱이 없어질 때까지 파내도 힘들겠지.”
찝찝함이 조금 남아있었지만 그래도 속은 좀 후련했다.
“그나저나 복수를 마쳤는데 기분이 좀 어때?”
“모르겠어……. 너무 쉽게 끝나서 뭔가 허전한 느낌이야.”
소무는 그녀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적들에겐 공포의 화신이겠지만, 자신 앞에선 한없이 여린 모습을 말이다.
설화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렇게 빤히 바라봐?”
“예뻐서.”
“매일 말로만…….”
“후후. 이제 과거는 모두 털어버리고 앞만 보고 가……. 나와 함께.”
설화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부드럽고 따듯한 체온이 서로에게 전해지며 정적이 흘렀다.
“어디까지?”
“세상 끝까지로 하지. 그럼 그곳까지 같이 산책 좀 해볼까?”
손을 맞잡은 일남일녀는 회양산의 소로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아무도 없는 으슥한 산이었지만 맑은 공기와 자연이 함께 했기에 나름의 운치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사라지고 두 시진이 지난 후. 돌연 화양산의 어느 곳에서 거센 폭음이 일었다.
퍼엉-!
산기슭 어딘가의 암벽에 작은 구멍이 뚫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온몸이 진흙더미로 변한 인영이 기어 나오고 있었다. 마치 탄광 속을 헤집고 나온 듯한 몰골이었다.
전신의 옷은 다 찢어져 있었으며, 오른손의 손톱은 다 빠져나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거지가 와서 동냥하고 갈 정도의 모습이었다.
한 손으로 무너진 동굴을 파내고 나온 은화파파. 충혈된 오른쪽 눈이 부들부들 떨리며, 소름 돋는 목소리가 주름진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이 죽일 연놈들……. 반드시 복수하고 말 테다.”
외마디를 내뱉은 은화파파는 고개를 숙이며 푹 쓰러졌다.
* * *
랑아대의 막사.
이곳에선 거대한 체구를 가진 사내 홀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었다. 그의 전신은 밝은 광채에 휩싸여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광경이었다.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막사의 입구. 다섯 명의 인파가 미동조차 하지 않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그중에는 소소도 포함되어 있었다.
“뭐예요?”
청해가 입술에 손가락을 올리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쉿. 방해하면 안 돼. 화경에 이르는 과정이야.”
신기한 광경에 소소가 연신 눈을 끔뻑이며 작게 속삭였다.
“화경이 뭐예요?”
청해는 화경의 경지에 대해서 요약해서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그렇기에 짧고 간략하게 대답했다.
“엄청 쎄지는 거야.”
“정말요? 어떻게 하는 거예요? 나도 일광 삼촌처럼 빛나고 싶어요.”
옆에 있던 대원들이 피식 웃었다. 밤톨만 한 아이가 화경을 논하다니. 웃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푸훗…….”
“네가 무슨 재주로……?”
삼촌들이 웃자 소소가 울상을 지었다.
“왜 저는 안 돼요?”
그때 화산파 출신의 현정이 소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랑아대에서는 무림의 식견이 가장 높은 인물이었다.
“그럼. 우리 소소도 충분히 가능하지. 무림의 역사에서도 예술적 조예가 깊은 사람들은 타고난 오감 덕택에 경지를 이룬 자가 많았어.”
소소가 현정을 쓱 끌어안더니 다른 삼촌들을 훑어보며 말했다.
“히히. 나쁜 삼촌들, 나는 현정 삼촌이 제일 좋아요.”
철두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전에는 내가 제일 좋다며.”
그때였다. 소소가 무엇이라 대꾸할 찰나 막사 안이 눈부실 정도로 빛났다.
“윽!”
“헙!?”
태양을 직사로 마주 본 듯한 밝음에 모두가 눈살을 좁혔다.
그러길 잠시 후. 빛이 응축되며 일광의 몸속으로 순식간에 흡수되어버렸다. 곧이어 일광의 두 눈이 서서히 뜨였다. 심연처럼 깊게 변한 그의 안광에 대원들이 놀라 소곤거렸다.
“서, 성공했어.”
“일광 형님이 드디어…….”
“여, 역시 대단해요.”
일광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기존의 기세가 칼날과도 같이 예리했다면, 지금은 태산의 기세를 머금은 듯 묵직하게 느껴졌다.
“어때? 나 좀 더 잘생겨진 거 같아?”
그의 잎에서 나온 첫마디에 모두가 폭소를 터트렸다.
“푸훗!”
“하하, 역시 형님다우십니다.”
소소도 웃긴지 보조개를 피어 올리며 까르륵 배꼽을 잡았다.
“나 지금 몸이 날아갈 것 같아!”
말이 끝남과 동시에 일광의 신형이 벼락처럼 움직였다.
파앙-!
막사 안에서 바람이 휘몰아치는 순간 그는 어느새 소소의 코앞에 있었다.
“방금 삼촌 보고 웃었지?”
일광의 거대한 손가락이 조카의 옆구리를 긁어댔다. 소소가 자지러지며 바닥을 뒹굴었다.
“흐히힛. 하지 마요, 간지러워~ .”
일광은 소소를 번쩍 들어 올려 어깨 위에 올렸다.
“으라차! 우리 조카 혼 좀 나보자!”
산을 때려 부술 수 있을 것처럼 넘쳐나는 힘. 도저히 주체할 수가 없었다. 소소를 업은 그는 막사 밖을 향해 쌩하고 내달렸다.
순식간에 작은 점이 되어 사라져가는 일광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대원들은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청해의 입이 뿌듯한 미소를 그리며 현정을 바라보았다.
“하하. 사형, 화경을 이루면 정신도 함께 성장하는 거 맞죠……?”
“가끔…… 특이한 체질도 있지 않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