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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화 도둑이 들다 (3) (111/250)


111화 도둑이 들다 (3)
2022.05.22.


따스한 봄날이었다. 꽃이 만개하기 시작했으며, 하늘에는 포근한 햇살이 마음을 보듬어주고 있었다.

뒷짐을 쥔 채 궁성을 시찰하는 일광. 그의 표정이 사뭇 밝아 보였다.

“좋구나~.”

한중에서 군순포의 포수 중 절반인 오백 명이 이곳으로 이동 중인 상황이었다. 그때까진 그가 치안 대장으로 임명되어 장안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었다.

날씨도 좋고 바람도 선선하니 기분이 좋았다. 무엇보다 화경의 벽을 뚫었지 않은가. 하늘을 날아갈 듯 좋았다.

초인의 신체로 느껴지는 자연의 기운이 전신의 신경을 자극하고 있었기에, 그 느낌이 한층 더했다.

눈앞으로 경계를 서던 병사가 자신을 보고는 기립했다.

“백부장님, 안녕하십니까?”

“음, 그래. 어디 소속이지?”

“검병대 십육조입니다!”

“그래, 나도 처음엔 거기 있었지. 검병대 십육조.”

병사가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눈빛에는 영광스럽다는 기색이 가득 차 있었다. 자신과 같은 조였으니 뿌듯한 모양이었다.

일광도 마음이 흐뭇해졌다. 다음 말을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 그럼 소무 대장님도 검병대 십육조셨습니까?”

“하…….”

좋았던 기분이 확 잡치려 했지만, 애써 눌러 참았다. 아직 자신이 소무의 명성에 비교할 정도는 아니었으니.

하지만 지금부터는 달랐다.

“잘 기억해둬라, 이 일광의 이름을. 훗날 나와 얘기를 나눴다는 걸 영광으로 여기게 될 테니.”

병사는 웃음이 나올 뻔한 걸 억지로 참았다. 군단 내에서 떠도는 소문으로는 랑아대에서 가장 포악한 성격을 지닌 인물이었다. 어찌 감히 그의 앞에서 이빨을 보일 수가 있겠는가.

“예, 알겠습니다!”

“그래. 수고해.”

병사가 다시 한번 기립하며 외쳤다.

“들어가십시오!”

일광은 어깨너머로 손을 올려 보이며 인사를 대신했다. 한적한 길을 따라 계속 걸어갔다.

반각을 더 걷자 전면으로 설화원이 보였다. 아이들의 소곤거리는 소리. 위치는 전각 앞에 펼쳐진 넓은 화원이었다.

“이 꼬마 녀석들, 잘 지내고 있나 볼까?”

그의 시선이 측면의 담장 너머로 향했다. 아이들의 모습이 기둥에 가려서 보이질 않았다.

다만 낯익은 한 여인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선홍빛이 감도는 화사한 의복을 차려입은 그녀는 다소곳이 꽃밭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오늘은 그림 그리는 날인가……?’

일광은 무심코 연초희를 바라보았다. 꽃밭에 펼쳐진 포근한 화광이 그녀의 전신을 밝게 빛내고 있었다. 바람을 타고 흩날리는 꽃씨가 주위에서 반짝반짝 빛났다.

한동안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그녀였지만, 오히려 그 모습 자체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화경에 이르러서야 갖게 된 초인적인 후각이 그녀의 향기를 느꼈다.

그렇게 얼마나 바라봤을까. 떠나려 했지만 조금만 더 지켜보기로 했다.

그때였다.

“삼촌 뭐 봐요?”

귀에 익은 목소리. 일광이 화들짝 놀라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소소였다. 아무리 다른 데 정신이 팔려있었다지만, 조카가 다가오는 것도 모르다니. 오히려 익숙한 기운이었기에 방심했었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어느새 발끝을 치켜든 소소가 담벼락에 매달리며 고개를 들고 있다. 반가운 얼굴에 활짝 웃으며 소리를 지르려는 모습이었다.

“선…….”

일광이 다급히 소소의 입을 막았다. 입만 막으려고 했지만, 거대한 손이 작은 얼굴을 완전히 덮어버렸다.

“가, 가만있어 봐.”

“숨…… 숨쉬기 힘들어.”

당황한 일광은 손가락 한 개를 들어 숨 쉴 구멍을 만들어줬다.

“지, 지금 여기 도둑놈이 있었어. 도망칠 수 있으니까 조용히 해야 해.”

손을 떼자 소소가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도둑이 왔어요?”

“응. 난 이쪽으로 갈 테니까 넌 저쪽으로 돌면서 찾아봐.”

소소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삼촌.”

“검은 옷을 입고 있으니 먼저 찾으면 소리를 질러. 삼촌이 가서 도우러 갈 테니.”

“삼촌도 조심해요.”

살금살금 이동하는 소소는 허리춤에서 날이 없는 소검(小劍)을 뽑았다.

담벼락 밑에 숨어 한 바퀴를 빙 둘러봤지만…… 도둑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힝……. 다른 데로 도망갔어.”

도둑을 잡고 싶었지만, 흔적조차 찾을 수 없자 속상했다. 그렇다면 근방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이동했을 터. 그렇게 궁성을 헤집고 다니며 한 시진을 헤맸다.

“휴…….”

어느새 설화원에 가는 시간도 지나버렸다. 눈물이 찔끔 나왔다.

“놓쳤어……. 흐잉…….”

한참을 싸돌아다녔더니 배가 고파졌다.

소소의 시선이 주변을 살폈다. 간식을 얻어먹을 곳을 찾기 위함이었다.

곧이어 낯익은 작은 전각이 눈에 들어왔다.

“양 아저씨…….”

양연정의 거처였다. 안에서 몇 명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무렴 어떠하랴. 소소가 가지 못할 곳은 없었다.

“아저씨, 저 소소예요~”

문이 벌컥 열리며 양연정의 모습이 보였다.

“허헛. 우리 소소 놀러왔구나.”

그는 양손으로 아이를 번쩍 들어 올려 안으로 들고 갔다. 거처 안의 원형 탁자를 끼고 두 명의 손님이 앉아 있었다.

양강과 양소. 얼마 전 지하 뇌옥에서 구사일생으로 빠져나온 그의 아우들이었다. 몸이 회복되었는지 혈색이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하하! 요 이쁜 녀석.”

“아주 잘 찾아왔다, 소소야.”

양가장의 형제들은 함박웃음으로 극진히 반겼다. 생명의 은인이 찾아왔으니 반가울 수밖에.

방이 비좁아 따로 앉을 곳은 없었다. 얼떨결에 탁상을 끼고 네 명이 마주 앉게 되었다.

“배고파서 왔지?”

양연정은 수납장에서 미리 준비해놓은 간식을 한 움큼 꺼내어 탁상 위에 올려두었다. 소소가 좋아하는 전통 과자들이었다.

“헤헷. 잘 먹겠습니다~”

소소는 간식을 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세 명의 형제는 찻잔을 움켜쥔 채 대화를 계속해나갔다.

양가장의 넷째인 양강이 말했다.

“섬서가 지켜지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게다가 장안을 탈환하다니……. 형님께서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양연정이 간식을 먹고 있는 소소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나는 그저 거들기만 했을 뿐이네. 우리 장군님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지. 그리고 섬서의 영웅이 된 이 아이의 아비도 말일세.”

“저희도 보았습니다. 정말이지…… 경지를 짐작할 수가 없는 무인(武人)이었습니다.”

“직접 겪어보면 알 걸세. 조자룡도 한 수 접어줘야 할 정도이니.”

“적이 아닌 아군 장수라 정말 다행입니다. 아무튼, 이제 형님과 함께하게 되어 너무 기쁘군요.”

“그 말은 전투에서 패한다면 셋이 모두 같은 날 죽는다는 의미이기도 하지. 그러니 연승을 이어갈 수 있도록 아우들 모두 장군님을 위해 애써주게.”

양강과 양소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 형님.”

“반드시 공헌하여 가문의 명예에 누가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양연정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투박한 도자기 형태의 주전자에서 우유를 따랐다. 그런 뒤 나무잔을 소소에게 내밀며 말했다.

“체할 수 있으니 천천히 먹거라.”

“고맙습니다~”

소소는 목이 탔는지 우유를 단번에 들이켰다.

양연정이 아이의 입가에 묻은 우유 자국을 닦아주자 막내인 양소가 물었다.

“형님한테 이런 자상한 면이 있었을 줄은 몰랐습니다.”

양소가 의아해하는 것은 당연했다. 양가장의 막내인 자신은 이런 대우를 한 번도 못 받아봤기 때문이었다.

“세상을 바꿀 능력을 지닌 아이다. 어찌 귀히 다루지 않을 수가 있겠나.”

“무슨 능력이 있는 것입니까?”

잠시 고민하던 양연정은 자신만의 비밀을 꺼내놓았다.

“아우들. 역사상 이렇게 어린 나이에 의병들을 이끌고 적군을 격파한 장군을 들어본 적 있는가?”

양강과 양소가 몹시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형님이 거짓말을 하는 성품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예?”

“의병장이라니요?”

양연정이 미소를 머금었다.

“이미 지난 일이고, 나도 좀 황당해서 그냥 함구하고 있었네만…… 섬서 의병대의 대장이 바로 이 아이였다더군. 지금도 믿기지 않지만.”

놀란 눈으로 소소를 살펴보던 양강이 감탄하며 말했다.

“기(氣)를 갈무리하고 있지만, 깊이를 알 수 없는 중후한 내공이 느껴집니다. 근데 어찌 꼬마가 의병장이…….”

“의병들이 반로환동한 고수인 줄 착각한 모양이네. 사실을 알게 되면 충격을 감당하지 못할 사람이 한둘이 아니겠지. 계속 함구해야 할지 지금도 고민이군.”

가만히 듣고 있던 양소도 황당한지 헛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영웅의 기세를 타고난 아이이니 세상이 자연스레 알게 될 것입니다. 이 정도라면 나중엔 천하대장군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확실히…….”

소소는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자 쑥스럽다는 듯 방긋 웃었다.

이미 배도 채웠겠다, 이곳엔 더는 볼일이 없었다. 의자에서 일어서고는 다소곳이 양손을 모으고 인사했다.

“아저씨, 저 이제 가볼게요~”

“음, 그래. 다음에 또 놀러 오거라. 장기 한판 두자꾸나.”

“헤헤. 좋아요~”

소소가 사라지자 양연정이 구석에 세워놓은 장창을 움켜쥐었다.

“우리도 나가지. 오랜만에 아우들의 양가이화창이 얼마나 늘었는지 한번 볼까?”

“예전처럼 쉽지는 않으실 겁니다.”

양씨 형제들은 대련을 위해 마당으로 나서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 어딘가로 쫄랑쫄랑 멀어져가는 소소의 뒷모습이 보였다.

배가 든든해진 소소는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우선 일광 삼촌이 도둑을 잡았는지가 가장 궁금했다.

랑아대의 훈련장에 가보았지만, 다른 삼촌들만 있었다. 그렇다면 막사에 있을 확률이 높을 터.

재빨리 랑아대의 막사로 달려가 문을 벌컥 열어보았다.

벌컥-!

역시나 막사 안에 돌아와 혼자 있었다. 일광 삼촌의 모습이 뭔가 좀 이상했다. 머리 뒤로 깍지를 끼고 누운 채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모습이었다.

“삼촌, 도둑 잡았어요?”

일광은 여전히 초점이 없는 눈으로 누워서 말했다.

“응? 방금 뭐라고 했어?”

성큼성큼 다가와 삼촌의 머리맡에 쪼그려 앉은 채 이마에 손바닥을 올려보았다.

“어디 아파요?”

무공을 익힌 자들은 면역력이 강해져 아픈 경우가 거의 없다. 하물며 화경에 이른 그가 아플 리가 없지 않은가.

“아니.”

“그럼 도둑 못 잡아서 그래요?”

“응. 놓쳤어…….”

소소는 한숨을 내쉬며 도둑을 원망했다.

“휴……. 나쁜 도둑. 뭘 훔쳐갔어요?”

일광이 두 눈을 감으며 나직이 한마디를 내뱉었다.

“내 마음…….”

소소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큰 눈을 더욱 크게 뜨며 물었다.

“마음이요?”

“아, 아니야. 말이 잘못 나왔어.”

쪼그려 앉아 고개를 갸우뚱하던 소소는 막사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인기척이 들리며 누군가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끼이익-!

막사의 문이 열리며 한 병사가 긴장한 얼굴로 모습을 드러냈다.

병사의 동공이 잠시 흔들렸다. 하필이면 포악하기로 소문난 일광 백부장 혼자 있다니.

하지만 어디까지나 소문일 뿐, 진실은 모른다. 여기까지 온 이상 어찌 물러나겠는가.

“아, 안녕하세요. 백부장님! 불쑥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일광이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자 소소가 일어나서 다가갔다.

“아저씨, 무슨 일이예요?”

병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마침 여기 있었구나. 설화원에서 선생님이 안내해달라고 해서 모셔왔어. 오늘 안 와서 걱정된다고. 그리고 전할 말도 있다고.”

가만히 누워있던 일광이 벌떡 일어섰다. 그러더니 소소의 옷깃을 뒤로 잡아끌며 말했다.

“잠깐 뒤로 가 있어 봐.”

“왜요? 나 보러 온 거래요.”

일광은 거대한 덩치로 소소를 가린 채 말했다.

“흠흠! 누추하지만 안으로 들어오시라 전하게.”

병사가 뒤돌아서 속삭이자 단아한 외모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초희가 막사 안을 천천히 둘러보며 말했다.

“아, 안녕하세요……. 여기가 랑아대의 막사구나…….”

“선생님~”

반가운 목소리에 소소가 앞으로 나서려고 했지만, 일광이 등 뒤로 왼손을 뻗으며 못 나오게 막았다. 그러고는 오른손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소소가 요즘 술래잡기 놀이를 좋아해서요. 누추한 이곳까지는 무슨 일이신지…….?”

“오늘……. 설화원에 안 와서 걱정되어 와봤어요. 잘 있으니 안심이네요.”

“하핫.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잘 돌보고 있으니.”

“좋은 삼촌이시네요…….”

일광은 환하게 웃으며 화답했다.

“제가 원래 아이들을 좀 좋아합니다.”

“내일 소풍가기로 한 날이거든요. 벚꽃이 예쁘게 펴서…….”

“저도 벚꽃을 참 좋아합니다. 산책하기 좋은 날씨죠. 하하.”

초희는 어색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내일 아침에…… 잊지 않고 나오게 챙겨주실 수 있으신지……”

“마음 놓으세요. 제가 아침에 데려다줄 테니.”

“아, 예…….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눈인사를 마친 후 초희가 사라지자 일광은 심호흡을 내쉬었다.

“휴.”

그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래에서 소소가 팔짱을 낀 채 수상하다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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