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벚꽃 핀 어느 날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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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화 벚꽃 핀 어느 날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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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화 벚꽃 핀 어느 날 (2)
2022.05.24.
장소는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었다. 아이들의 울음소리와 진득한 피비린내가 매화나무숲을 진동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참혹하게 죽은 병사들의 시신들. 그리고 곳곳에 앉아 오열하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에 일광의 두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참혹한 현장에 도착한 일광은 주위를 둘러보며 한 걸음씩 나아갔다. 잠시 후 그를 발견한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흐어엉……. 아저씨…….”
“흑흑…….”
수십 명의 아이들이 일광의 허리를 부둥켜안고 서럽게 울었다.
“선생님도 잡혀갔어요. 끄흑…….”
입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오려는 걸 애써 참았다. 이윽고 그의 시선이 쓰러져 있던 한 병사를 발견했다.
아직 숨이 붙어있던 십부장급 병사였다. 공교롭게도 어제 랑아대의 막사에 찾아왔던 인물이기도 했다. 복부의 검상이 깊어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백부장님…….”
일광의 큼지막한 손이 그의 머리를 살며시 들어 올리며 물었다.
“어떤 새끼들이야……?”
“휘나라의 잔당은 아니었습니다……. 복면을 뒤집어쓴 흑의인들이…….”
“어느 쪽으로 갔는지 방향만 얘기해.”
병사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며 한곳을 가리켰다.
“아이들을…… 구해주십시오…….”
일광은 다시 그를 눕히며 나직이 말했다.
“알았다……. 나한테 맡기고 좀 쉬고 있어.”
자리에서 일어선 일광이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 순간 아이들이 둘러싸며 애원했다.
“아저씨, 친구들 구해줄 거예요?”
“우리 선생님 좀 구해주세요……. 흑흑.”
이가 부드득 갈리고 얼굴이 일그러지려 하고 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무서운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흉악한 인상이 어색한 미소를 그렸다. 자신의 허리를 끌어안은 아이들의 머리를 한 번씩 쓰다듬었다.
“응……. 아저씨 갔다 올게. 곧 소소가 삼촌들 데리고 올 거니, 씩씩하게 기다리고 있어.”
듬직한 일광의 모습에 아이들은 마음이 진정되는 듯했다. 서럽게 울던 아이들이 하나둘씩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저씨…….”
“친구들 꼭 구해주세요…….”
고개를 한 번 끄덕인 일광은 지면을 박찼다.
타앗-!
무려 오 장 이상을 한 번에 날아오르는 그의 움직임은 예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십부장이 가리킨 길목을 따라 미친 듯이 질주했다.
얼마 가지 않아 바닥에서 경련을 일으키는 흑의인 한 명을 마주할 수 있었다. 죽지는 않을 정도의 부상. 그렇다면 아마도 소소의 작품일 확률이 높았다.
“끄으으…….”
안광에서 느껴지는 기분 나쁜 마기(魔氣). 말로만 들어보았던 마교 출신의 인물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일광은 그의 목을 틀어쥐고 번쩍 들어 올렸다.
“시간이 없으니, 애들 어디로 데려갔는지만 불어.”
“큭……. 큭……. 미친놈. 내가 말할 것 같으냐……?”
역시나 쉽게 불지 않는다. 일광은 이러한 눈빛을 가진 자들을 잘 알고 있다. 죽인다고 협박한들 끝까지 입을 열지 않을 것이다.
“알았다.”
그의 오른손이 우두둑 소리가 들려올 정도로 강하게 움켜쥐어졌다. 어른의 얼굴 크기와 맞먹는 거대한 주먹. 그것을 지켜보던 복면인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뭐 하려는 거지……?”
“혹시라도 중간에 얘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면 왼손을 들어라.”
잠시 후 쇠망치와 같은 그의 주먹이 복면인의 얼굴에 틀어박혔다.
콰앙-!
단 한 방에 복면이 찢겨 날아가며 이빨 몇 개가 튀어 올랐다. 일광은 죽지 않을 정도로 내력을 조절하고 있었다.
“크윽!”
또다시 다가오는 주먹을 마주하는 흑무대원은 눈동자가 부르르 떨렸다.
콰앙-! 콰앙-!
계속해서 틀어박히는 주먹. 그리고 흑무대원의 얼굴은 점차 피떡으로 변해갔다.
“주, 죽여…….”
그의 말은 일광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냥 얘기하지 않아도 돼.”
그의 주먹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내력을 최소한으로 하였기에 죽을 수도 없었다.
콰앙-! 콰앙-! 콰앙-!
“크헉!”
복면인은 죽음을 넘어서는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이러한 행위가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른다는 공포였다.
일광의 주먹이 그의 안면에 스무 번쯤 꽂혔을 때쯤이었다. 그의 왼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보았다. 공격이 멈추자 주먹에서 피가 빗물처럼 뚝뚝 떨어져 내렸다.
“기회는 한 번이다.”
고개를 끄덕이는 흑무대원은 처참한 몰골이었다. 코뼈는 가루가 되었는지 눌려버렸으며, 이빨은 하나도 없었다.
“얘기하면…… 날 죽여줘…….”
“네 대답이 마음에 들면.”
“소화산……. 정확한 위치는 설명할 수가 없어…….”
소화산은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일광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가 정확하게 위치를 집어서 얘기했다면 거짓으로 치부했을 것이다. 어느 정도는 신뢰할 수 있는 정보였다.
틀어진 목을 내동댕이치자, 흑무대원이 바닥에 축 늘어졌다.
“이제 날 좀 죽여줘…….”
운이 좋아서 살아나도 불구가 될 몸이었다. 이대로 죽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죽음을 약속했던 자는 이미 등을 돌려 멀어지고 있었으니까.
일광은 방향을 틀지 않고 길을 따라 더 내달렸다. 정작 소화산으로 가는 길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흔적을 발견했다.
버려진 마차 두 대였다.
눈빛을 빛내어 마차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산속으로 이어지는 길목에서 작은 주머니 하나를 발견했다.
‘꽃씨 주머니?’
아이들이 놓친 물품이 분명해 보였다.
‘이곳에서 산속으로 들어갔군. 마차를 끌고 갈 수는 없으니.’
일광은 산길로 진입하여 좁은 길목을 따라 전진했다. 그리고 그의 발걸음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또 멈추었다.
양쪽으로 나뉜 갈림길. 방향을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발…….’
일광은 점차 다급해졌다.
한참을 둘러보던 그의 표정이 갑자기 밝아졌다. 뭔가의 흔적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우측 길목으로 보이는 투박한 머리끈. 어린 여자아이가 쓸법한 물품이었다.
‘잘했다, 얘들아…….’
일광은 다시 길을 따라 내달렸다.
갈림길이 나오는 곳이면 어김없이 흔적이 남겨져 있었다. 신발이나 학용품, 그리고 작은 조개를 엮어 만든 팔찌 등. 아이들이 자신이 찾아오길 기다리며 남겨놓은 것이 분명했다.
방향을 계속 확인해야 했기에 속도는 빠르지 못했다.
그리고 한 식경이 지난 후. 드디어 목적지에 당도할 수 있었다.
분지에 자리한 이 층 구조의 거대한 전각이었다. 비선문(備善門)이라 각인된 부서진 현판이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곳곳에 새겨진 전투의 참혹한 흔적. 아마도 다른 세력이 이곳을 강탈한 것으로 짐작이 되는 현장이었다.
일광은 양쪽 귀에 내력을 집중하여 전각 안의 소리를 들어보았다. 화경이 가진 초인적인 청각이 곧이어 아이들의 목소리를 감지했다.
- 이거 놔요…….
- 흑흑……. 보내주세요…….
아이들의 흐느끼는 목소리는 이 층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일 층에서는 몇 명의 장한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은밀하게 벽면까지 다가가서 내용을 들어보았다.
“모두 수고했어. 이렇게 쉬운 일을 그동안 고생을 했다니.”
“어쩔 수 없었지. 파파께서 관군의 감시망에 걸리지 말라고 했으니. 뭐 이제 더는 눈치 볼 필요도 없겠지만.”
“응. 오늘 잡아 온 애들의 정기만 흡수하면 드디어 흉마살혼조가 완성될 거야. 다행히 마지막 날 맞춰서 끝났어.”
“파파께서 언제 온다고 했지?”
“오늘 해지기 전에 온다고 했으니 곧 도착하실 거야.”
“슬슬 준비해야겠군. 그리고 잡아 온 계집은 건들지 마. 대장님이 따로 볼일이 있다고 했으니.”
“흐흐……. 나도 그 정도 눈치는 있다고.”
일 층과 이 층으로 오십 명이 넘는 인기척이 느껴진다. 상대가 많았지만, 더는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붉게 달아오르는 일광의 주먹. 그것이 다짜고짜 벽면을 강타했다.
콰아아앙-!!!
지진이라도 난 듯 전각의 골격이 뒤흔들리며, 거대한 구멍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 사내가 몸을 비집고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내부에 있던 이십여 명의 흑무대원들이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뭐, 뭐야!?”
“이런 미친놈이…….”
처음엔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랐고, 두 번째는 상대의 체구에서 놀랐다. 그리고 세 번째는 그의 얼굴이었다. 악귀처럼 일그러지고 있는 그의 표정은 분노의 화신과도 같아 보였다.
“이곳에 있는 새끼들, 오늘 전부 뒈질 준비해라.”
물러설 흑무대가 아니었다. 자신들이 누구인가. 은화파파의 손으로 만들어진 마교의 정예부대 중 하나였다.
“뭐해? 빨리 죽여!”
근처에 있던 흑무대원 한 명이 검을 뽑아 들며 선공을 개시했다. 목젖을 향해 직선으로 다가오는 검 끝. 그것을 바라보는 일광의 머릿속엔 한 가지 단어만 떠올랐다.
‘느리다.’
예전 같았으면 어느 정도 위협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나도 느리게 다가왔다.
목을 살며시 흔드는 것만으로 검날을 흘려보냈다. 그 순간 일광의 거대한 손이 상대의 안면을 뒤덮듯이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반바퀴를 회전하며 한쪽 벽면에 그대로 꽂아버렸다.
꽈아아앙-!!!
벽면에 구멍이 뚫리며 머리가 밖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몸이 축 늘어진 것으로 보아 그대로 즉사한 모양이었다. 가공스러운 위력에 흑무대원들이 몹시 긴장했다.
그때 조장급의 대원 한 명이 측면에서 옆구리를 향해 기습을 시도했다.
쐐에에엑-!!!
바람을 가르는 검 끝에는 서늘한 검기가 맺혀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일광의 눈에는 너무나도 느리게 다가왔다. 그의 왼손이 빛의 속도로 움직이며 검을 쥔 상대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덥석-!
엄청난 악력에 검기가 소멸하며 신음이 터져 나왔다.
“끄아악!”
그리고 그 찰나의 순간. 쇠뭉치 같은 거대한 주먹이 그의 안면을 향해 쇄도해 들어갔다.
파산권(破山拳) 일 초식 일타격산(一打擊山).
꽈아아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피떡으로 쓰러지는 조장의 모습. 지켜보던 흑무대원들은 입을 떡하고 벌렸다. 쓰러진 조장은 머리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렇게 무식한 초식을 언제 본 적이 있었던가.
그때 일광의 양손이 붉은 강기에 휩싸이며 타올랐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서늘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맞서는 놈들은 한 방에 보내주지. 하지만 도망치는 놈들은 팔다리를 모두 끊어버리겠다.”
소름 돋는 내용이었다. 도망치면 고통스럽게 죽인다니. 몇몇은 온몸에 오돌토돌한 닭살이 솟아남을 느꼈다.
하지만 물러서는 자들은 없었다. 상대는 고작 한 명이었다.
“모두 한 번에 덮쳐!”
그러나 이번에는 일광이 먼저 움직임을 개시했다. 강기에 휩싸인 그의 주먹이 사방을 향해 연달아 내질러졌다.
섬멸폭권(殲滅爆拳) 이 초식 비격강살(飛擊强殺).
붉은 권경(拳勁)이 뿜어져 나오며 다가오는 흑무대원들의 가슴을 강타했다.
콰쾅-! 콰콰쾅-!
“크윽!”
“컥!”
쓰러지는 네 명의 흑무대원은 가슴이 움푹 들어가며 선명한 주먹 자국이 남았다.
곧이어 움찔하는 그들의 사이를 비집고 일광이 쏜살같이 진격해 들어갔다. 거대한 사자 한 마리가 양 떼 사이를 휘젓듯 거침이 없었다.
그의 손이 한 번씩 움직일 때마다 어김없이 한 명의 머리가 터져나갔다.
쩌억-! 콰직-!
벼락같은 움직임은 흑무대원들이 대항할 속도를 넘어서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좁은 전각의 내부라 진법을 펼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의 주먹에 맞는다면 누구든 단 한 방이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무식하고 엄청난 괴력.
장내가 공포에 휩싸였다. 조장급의 인물이 무엇인가 소리치려 했다.
“무, 물러서지 마…….”
그는 말을 끝마칠 수 없었다. 집채만 한 손바닥이 그의 얼굴을 후려쳤기 때문이다.
콰직-!
목뼈가 꺾인 그의 신형이 허공을 떠올라 벽면에 쾅 하고 부딪쳤다.
“이, 이런 미친…….”
“화경이 왜 이곳에…….”
상대는 분명한 화경의 고수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들을 이렇게까지 밀어붙일 수가 없을 테니. 난데없는 소란에 이 층에서 동료들이 쏟아져 내려오고 있었지만, 하나같이 움찔거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일광의 움직임은 점차 빨라지고 있었다. 화경에 이르고 난 뒤 처음으로 치러보는 전투였다. 그리고 그의 천부적인 전투 감각은 빠른 속도로 새로운 신체에 적응해갔다.
“끄아아압!!!”
일광의 괴성이 전각을 뒤흔들었다. 흑무대원들이 놀라 움찔하는 찰나 양손에 휩싸인 강기가 더욱 밝은 빛을 뿜어냈다. 그가 한 번씩 내지르는 주먹은 십여 개의 잔상을 남기며 동시에 여러 명을 후려쳐갔다.
퍼퍽-! 퍼퍼퍽-!!!
“크윽!”
“끄아악!”
화경의 고수가 펼치는 섬멸폭권의 위력은 대단했다. 살상능력에 있어선 소림의 백보신권을 뛰어넘는 상승무공이었다.
흑무대의 대장이 이 층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소리쳤다.
“파파께서 올 때까지 버텨야 한다!!!”
그의 목소리는 이미 대원들의 귓가에 들려오지 않았다. 그들의 동공에는 하나 같이 두려움이 생겨나고 있었다. 지옥 같은 훈련으로 영혼까지 단련된 흑무대가 말이다.
학살의 현장이 계속되는 가운데, 누군가가 소리쳤다.
“대장, 진법을 펼칠 수 없는 이상 잡을 수가 없습니다!”
흑무대의 대장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이곳에서 무리해서 맞설 이유는 없지 않은가.
“모두 밖으로 나간다!”
부하들이 입구를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순순히 보내줄 일광이 아니었다. 그의 신형이 자리에서 감쪽같이 사라지는 듯하더니 어느새 전각의 입구를 틀어막고 있었다.
“분명히 말했을 텐데. 도망치는 놈들은 팔다리를 모두 끊어버리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