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4화 벚꽃 핀 어느 날 (3) (114/250)


114화 벚꽃 핀 어느 날 (3)
2022.05.25.



“크윽……. 도대체 네놈……. 정체가 뭐냐…….”

흑무대의 대장 마전일검(魔電一劍) 매천풍. 그는 지금의 상황이 꿈만 같았다. 자신의 모든 부하가 피떡이 된 채 전각의 일 층을 나뒹굴고 있다.

상대가 아무리 화경의 고수라지만 인정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진법을 펼칠 수 없는 협소한 장소라 할지라도 말이다.

부하들이 동귀어진의 수법으로 몇 번의 공격을 성공시키긴 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이들의 체육 선생이다.”

“미친…….”

주먹을 움켜쥐며 다가오는 그의 모습은 마치 처형장의 망나니 같았다.

매천풍은 전신의 모든 내력을 담아 검기를 세차게 뿜어냈다. 순순히 죽어줄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강기에 휩싸인 주먹이 다가오자, 그의 검 끝이 바닥을 차고 오르며 절초를 개시했다. 바닥에서 물기둥이 치솟듯 유백색의 빛무리가 일광의 신형을 집어삼키는 듯했다.

콰앙-!!!

폭음과 함께 밝은 섬광이 번뜩였다. 그리고 일렁이는 빛의 물결을 뚫고 일광의 주먹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정확히 매천풍의 복부를 향해 쇄도해갔다.

쩌어억-!!!

“쿠헉!”

숨이 턱하고 막혀왔다. 지면에서 떠오른 그는 전각의 한쪽 벽면에 볼품없이 처박히고야 말았다.

콰앙-!!!

“끄윽…….”

정신을 잃을 것만 같은 엄청난 파괴력이었다. 살면서 느껴본 가장 큰 통증에 온몸이 경련을 일으켰다.

“엄살 피우지 마. 너는 좀 더 맞아야 해.”

소름이 돋을 정도로 어이없는 말이었다. 자신을 일부러 살려둔 것이리라. 개처럼 맞아 죽지 않으려면 무엇이든 해야 했다.
머리를 굴리던 매천풍은 입에서 겨우 한마디를 짜내었다.

“내가 죽으면…… 그년도 죽을 것이다…….”

얼굴을 때리려던 일광의 움직임이 정지했다. 이 층에서 아이들의 웅성거림이 계속되고 있었으나, 그녀의 목소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어딨어?”

“나를 보내준다면 말해주겠다.”

그의 말을 어찌 순순히 믿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이 층의 아이들도 구해야 했다.

“너는 나와 함께 간다. 일단 여기서 잠깐 기다리고 있어.”

말을 마친 일광은 매천풍의 머리를 향해 주먹을 날리기 시작했다.

쾅-! 쾅-! 쾅-!

“크윽! 왜…… 왜 때려, 미친놈아!?”

“나는 점혈 같은 거 몰라. 그러니까 기절할 때까지만 처맞자.”

“빌어먹을…….”

화경에 이른 자가 점혈을 할 줄 모른다니. 미치고 펄쩍 뛸 노릇이었다.

무공을 익힌 고수가 맞아서 기절하는 것은 보통 쉬운 일이 아니다. 매천풍은 울상을 지은 채 손가락을 움직이며 자신의 혈도를 눌렀다.

푸욱-!

그의 두 눈이 스르륵 감기며 고개가 떨궈졌다. 스스로 기절한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일광은 그를 뒤로한 채 이 층으로 터벅터벅 올라갔다.

서로 부둥켜안고 떨고 있는 수십 명의 아이들. 하나같이 공포에 질려 있었다.

“집에 가자…….”

귀에 익은 목소리에 아이들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자신들이 아는 한 세상에서 가장 듬직한 어깨를 가진 어른이 그곳에 서 있었다. 안도감과 함께 서러운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아이들은 동시에 달려나가며 서럽게 눈물을 흘렸다.

“흐어엉……. 아저씨, 무서웠어요.”

“올 줄 알았어요.”

“흑흑…….”

일광은 허리춤에 매달린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약속했잖아. 너희들이 잡혀가면 아저씨가 반드시 찾아낸다고.”

“초희 선생님은요?”

“이제 구하러 가야지…….”

돌연 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창밖의 광경 때문이었다.

정체불명의 노파 하나가 이곳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오고 있었다. 왼팔은 어깻죽지부터 존재하지 않았으며, 한쪽 눈은 안대로 가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일광은 단번에 알아챘다. 지금까지 상대했던 자들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임을.

소무에게서 느껴봤던 이질적인 기운. 그것이 노파에게서 느껴지고 있었다.

“조금 더 기다려야겠구나.”

창밖을 확인한 몇몇 아이들이 화들짝 놀랐다. 소름 돋을 정도로 차갑고 험악한 얼굴은 본능적으로 공포를 느끼게 할 정도였다.

“무, 무서워…….”

“마귀할멈이 왔어…….”

일광은 양팔을 벌려 아이들을 안쪽으로 살며시 밀었다.

“걱정하지 말고 있어. 아저씨가 있는 한 누구도 위로 못 올라와.”

계단을 내려가는 그는 왼쪽 옆구리를 살펴보았다. 조금 전의 전투에서 입은 상처가 욱신거렸다.

“후…….”

사실 그의 몸은 몹시 지친 상태였다. 거듭된 초식의 사용으로 내력도 많이 소진되어 있었다. 그러나 사지가 멀쩡한 이상, 멈출 그가 아니었다.

전각의 문 앞으로 나선 일광은 눈앞의 노파를 노려보았다. 복면인들이 얘기하던 인물이 틀림없었다.

“정말…… 거지같이 생겼네.”

은화파파의 얼굴에 노기가 떠올랐다. 초면에 대놓고 자신의 외모를 흉보다니. 백사십 년의 인생에 처음으로 겪어본 일이었다.

“짐승같이 생긴 놈이 감히 어디서 혓바닥을 놀려!? 곱게 죽고 싶지 않은 모양이구나!”

“시끄럽고, 빨리 오기나 해. 시간 없으니까.”

은화파파는 은연중 전각 안의 기척을 살펴보았다.

상황을 대충 직감해내고는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흑무대 따위야 어찌 되든 상관이 없었다. 중요한 것은 제물들이 아직 안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 입을 뭉개주겠다.”

노파의 오른손이 눈부신 광채에 휩싸였다.

눈높이까지 두 주먹을 치켜든 일광은 지면을 퉁퉁 튕기며 자신만의 보법을 준비했다.

그는 천성적으로 타고난 싸움꾼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뒷골목에서 자신들보다 강한 자들과 싸워왔다. 그리고 그들을 모두 눕히고 정점에 올랐을 정도로 천부적인 전투 감각을 지니고 있다.

지금 그가 가진 본능적인 감각은 정면 승부를 피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파앙-!!!

바람을 가르는 소리. 그 순간 일광의 얼굴을 노파의 손바닥이 스치고 지나갔다. 완벽히 피했음을 자신했음에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화경의 신체조차 부담스러울 정도로 가공스러운 속도였다.

재빨리 노파의 측면으로 이동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눈으로는 볼 수조차 없는 빠른 움직임. 수세에 몰리는 것은 자신이었다. 머지않아 퇴로가 막힌 일광은 하는 수 없이 일합을 교환해야 했다.

섬멸폭권 삼초식 추혼멸타(錐魂滅打).

송곳처럼 뻗어 나가는 주먹이 다가오는 노파의 손바닥을 강타했다.

쩌어엉-!!!

종소리와 같은 폭음이 산속을 메아리쳤다.

뒷걸음질 치는 일광은 적지 않게 놀랐다.

차원을 넘어서는 무력. 랑아대의 대장인 소무를 마주할 때 느꼈던 무기력함과 비슷했다. 만약 상대의 양팔이 멀쩡했다면 조금도 버티지 못할 것이 확실한 상황이었다.

“이제 감이 오느냐?”

비웃는 노파를 향해 일광이 마주 도발했다.

“입 닥치고 오라니까. 오늘 남은 눈도 뭉개줄 테니.”

일광은 노파의 왼쪽으로 미끄러졌다. 왼팔이 없는 노파가 유일하게 차지하지 못한 방위였기 때문이다. 버티기 위해선 모든 꼼수를 다 부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노파의 허리에 주먹을 꽂아가고 있었으나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적중하는 순간 뱀처럼 허리를 틀며 위치를 벗어난 은화파파. 상상을 초월하는 움직임이었다.

어느새 노파의 오른손이 일광의 가슴을 향해 쏜살같이 다가왔다. 일광은 양손에 내력을 모아 방어했다.

콰앙-!!!

“크윽!”

압도적인 내공의 차이는 도무지 어찌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일광의 발끝이 지면을 끌며 주르륵 밀려 나갔다.

쇳덩이에 맞은 듯 양팔이 부어오르고 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노파의 공세가 본격적으로 개시되었기 때문이다.

은화파파와 일광의 싸움이 본격적으로 접어드는 가운데. 전각 안에서 처참한 몰골의 누군가가 서서히 눈을 뜨고 있었다.

* * *

토끼 귀처럼 감아올린 머리에 소검(小劍)을 움켜쥔 아이. 소소가 땅콩 같은 손가락을 내밀며 흥분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여기예요!”

백여 명의 관군이 소소를 따라 줄이어 당도했다. 랑아대의 대원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소무와 연설화도 포함되어 있었다.

방황하는 아이들과 죽거나 다친 병사들. 처참한 상황에 지켜보던 모두가 눈살을 찌푸렸다.

연설화의 두 눈에 분노가 서렸다. 곳곳에 남아있는 마공의 흔적들은 틀림없이 마교의 것이었다.

감히 자신의 동생을 납치하다니.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흑무대 놈들이야…….”

소무가 어두운 표정으로 답했다.

“은화파파가 아직 살아있나 보군. 이렇게나 목숨이 질기다니…….”

“시간이 없어. 빨리 찾아야 해.”

자신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노파가 동생을 발견한다면 곱게 죽일 리가 없었다. 걱정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문제는 납치된 아이들과 초희가 어디로 끌려갔는지 오리무중이라는 것이었다.

그때 소소가 친구들한테 다가가서 물었다.

“일광 삼촌 못 봤어?”

“선생님하고 친구들 구하러 갔어…….”

“알았어.”

고개를 끄덕인 소소가 아버지한테 다가가서 말했다.

“내가 어디로 갔는지 알아요.”

연설화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어느 쪽이니? 어서 안내해줄래?”

소소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앞장섰다. 책임감 때문인지 작은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는 모습이었다.

“따라오세요, 스승님.”

잠시도 머뭇거릴 틈이 없었다. 소소의 뒤를 따라 소무와 연설화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남겨진 대원들은 주변을 수습해야 했다. 화산파 출신의 청해가 현정을 바라보며 물었다.

“사형, 우리도 도와줘야 하지 않아요?”

“대장님이 직접 갔으니 걱정은 없어. 하지만 수색하는 데 도움이 필요하지 않을까?”

“어떻게 할까요?”

“절반 정도면 충분할 거야.”

랑아대의 절반이 남아 이곳을 수습하고, 나머지는 소소가 사라진 방향으로 이동했다.

한편 먼저 출발한 세 명은 어느새 첫 번째 장소에 도착해 있었다. 좁은 소로에 홀로 누워 신음하는 흑무대원. 일광에게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맞았던 인물이었다.

소소가 앞에 쪼그려 앉아 물었다.

“아저씨, 내 친구들 어디로 데려갔어요?”

신음하던 흑무대원은 소소를 보자마자 경련을 일으켰다.

“왜, 왜 또 왔어…….”

소소가 미간을 좁히며 화난 얼굴을 해 보였다. 그 모습이 마치 새끼강아지가 으르렁대는 모습과 비슷했다.

“빨리 얘기해요!”

“너……. 너 뭐야 도대체……. 저리 꺼져.”

“우리 스승님한테 혼나볼래요?”

흑무대원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간신히 고개를 들어보았다. 그 순간 그의 동공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옥, 옥화신녀…….”

표정이 차갑게 식은 연설화가 한 움큼의 비침을 움켜쥐고 있었다.

“너희들이 내 동생을 납치했더군.”

흑무대원은 경악했다. 자신들이 납치한 여인이 전대교주의 동생이었다니. 마교에서도 활동을 거의 안 한 인물이기에 본 적은 없었지만, 들어본 적이 있었다. 옥화신녀가 자신의 동생을 끔찍하게 아낀다는 소문을 말이다.

성난 그녀가 자신에게 무슨 짓을 벌일 것인지는 상상해보지 않아도 알만했다. 날카롭게 빛나는 바늘들.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느끼게 할 수단은 얼마든지 알고 있을 터.

“무, 무엇이든 말하겠소…….”

“위치.”

“소, 소화산입니다. 길을 따라 오백여 장쯤 이동하면 진입로가 있을 것입니다……. 이제 저를 죽여…….”

연설화가 손가락을 튕기자 바늘 하나가 그의 인후에 틀어박혔다.

푸욱-!

흑무대원의 고개가 푹하고 떨궈졌다.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소무가 나직이 말했다.

“거짓말은 아닌 것 같군. 시간이 없으니 어서 출발하지. 소소 너는 이제 돌아가서…….”

소무는 황당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먼저 출발한 딸아이가 이미 시야에서 멀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말하기에 앞서 선수를 친 것이다.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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