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벚꽃 핀 어느 날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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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화 벚꽃 핀 어느 날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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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화 벚꽃 핀 어느 날 (4)
2022.05.26.
“이쪽이에요!”
소소는 친구들이 남긴 흔적을 귀신같이 찾아내고 있었다. 뒤따르던 소무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어떻게 알아?”
작은 손이 바닥에서 무엇인가를 집어 들었다.
“유설이 머리끈!”
“잘했어. 빨리 이동하자.”
상황이 이렇게 되자 딸을 돌려보낼 수가 없었다.
마음이 다급해지면 놓치는 것이 많은 법이다. 연설화도 초조한 얼굴로 소소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소무가 설화의 등을 살며시 감싸며 위로해주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일광이 갔으니 아직은 괜찮을 거야.”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몰라……. 할멈이 한쪽 팔이 없다고 해도, 일대일로는 나도 무리야.”
같은 화경급이라 할지라도 높낮이가 있는 법이다.
십수 년 전에 경지에 오른 설화조차 감당할 수 없는 노파가 아니던가. 이제 갓 화경의 문턱을 넘어선 일광이 홀로 대적한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상대가 누구든 일광은 쉽게 안 쓰러져. 맷집만은 천하제일이니까.”
그때였다. 앞장서서 후다닥 내달리던 소소가 경공을 멈추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세 갈래로 나뉜 갈림길.
연설화가 어두운 표정으로 물었다.
“어디로 갔을까?”
소소는 팔짱을 낀 채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잠시 후 아이의 손가락이 오른쪽 길을 가리켰다.
“이쪽으로 갔어요.”
동생의 목숨이 달려있었다. 의심하고 싶진 않았지만, 확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그렇겠지?”
소소가 바닥에서 무엇인가를 집어서 보여주었다.
“벚꽃송이!”
확실히 일리가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근처에 벚나무는 없었으니까.
지켜보던 소무가 소소를 번쩍 올려서 왼쪽 가슴으로 안아 들었다.
“역시 내 딸이야. 수고했어.”
“나 잘했어요? 빨리 가요, 우리.”
길이 확인된 이상 머뭇거릴 이유는 없었다. 소무와 연설화의 신형이 동시에 전광석화처럼 쏘아져 나갔다.
파아앙-!!!
그들이 자리했던 공간으로 바람이 휘몰아치며 새들이 놀라 흩어졌다. 쭉쭉 늘어져 가는 두 줄기 빛은 화살처럼 소화산을 질주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목적지의 흔적을 찾아낼 수 있었다.
육안으로 확인하기 전에 청각이 먼저 반응했다.
꽈아아앙-!!!
초인들이 만들어낸 엄청난 굉음의 메아리. 상황이 무척 시급한 듯했다. 내달리던 소무는 딸을 지면에 낙하시키며 말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부질없는 외침임을 그도 알고 있었다. 여기까지 따라온 소소가 얌전히 숨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길게 생각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우선 은화파파를 잡는 것이 우선이었다.
파아앙-!!!
소무가 질주하는 전면으로 바람이 찢겨 갈라져 나갔다.
잠시 후 멀지 않은 곳에서 이 층으로 지어진 전각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에 펼쳐진 처절한 광경을 보는 순간, 이가 뿌드득 갈렸다.
“끄흑!”
일광의 입에서 터져 나온 신음이었다. 비틀거리는 그를 향해 은화파파가 연달아 장법을 내지르고 있었다.
쾅-! 콰콰쾅-!!!
일광 또한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죽기 살기로 버티고 있는 모습이었다. 전신이 성한 곳이 없었다.
그가 입고 있던 백의 장삼은 혈의(血衣)로 변한 지 오래였다. 갈기갈기 찢긴 의복 사이로 피가 냇물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탈마를 상대로 이렇게까지 버틴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그런데도 눈빛만은 아직도 죽지 않고 맹수처럼 번뜩였다.
은화파파는 기가 질릴 지경이었다.
“이제 좀 뒈져!”
노파의 오른손에서 십여 가닥의 백색 빛무리가 쏟아져 나왔다. 일광의 주먹에서도 붉은 강기가 연달아 뿜어지며 허공에서 격돌했다.
콰콰콰쾅-!!!
기어코 한 가닥의 강기가 일광의 어깨에 적중했다.
콰앙-!
“크윽!”
호신강기가 아니었다면 어깨가 꿰뚫렸을 만큼 큰 충격이었다. 쓰러져야 정상이었지만, 굳건한 두 다리는 절대 무너지지 않는 철옹성 같았다.
비틀거리는 그를 향해 은화파파는 마지막 일격을 준비했다. 하지만 일광의 옆구리를 향해 다가가던 노파의 오른손이 돌연 방향을 틀었다. 측면에서 무시할 수 없는 일격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쩌엉-!
무방비 상태에서 당한 기습. 겨우 막아내긴 했지만 불안정한 자세에서 받아냈기에 상체가 휘청거렸다.
“어떤 새…….”
은화파파는 욕지거리를 내뱉다 말고 회피 동작을 개시했다. 두 눈에는 당혹스러움이 떠올라 있었다. 천적이라 할 수 있는 최악의 상대가 나타났으니 그럴 수밖에.
소무의 검이 한 번씩 번뜩일 때마다 서늘한 빛살이 거침없이 쇄도했다.
콰앙-!! 콰콰쾅-!!!
은화파파는 당황하며 도망칠 궁리부터 했다.
그러나 순순히 빠져나가도록 지켜보고 있을 연설화가 아니었다. 흑룡신장을 극성으로 끌어올린 설화가 싸움에 끼어들며 퇴로를 차단했다. 이대 일의 상황이 되자 전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일광의 입에서 처음으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늦었잖아, 대장.”
소무가 검강을 난사하며 소리쳤다.
“어서 아이들을 구해!”
대장이 온 이상 걱정이 없었다. 일광은 절뚝거리며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온몸이 욱신거리고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가 막 전각 안으로 진입했을 때였다.
“무식한 놈. 네 꼴을 보니 아주 시원하구나. 감히 파파에게 맞서다니.”
어느새 깨어난 흑무대의 대장 매천풍이었다. 아이 하나를 인질로 삼고 협박을 하고 있었다.
“후회하지 말고 애는 보내줘.”
매천풍은 코웃음을 치며 나직이 말했다.
“닥치고 일단 꿇어.”
도무지 방도가 없었다. 무사히 아이를 구해낼 수 있는 몸 상태가 아니었다. 일광이 무릎을 꿇으려는 찰나였다.
“아저씨, 내 친구 놓아주면 안 돼요……?”
전각의 입구에서 웬 여자아이가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인질로 잡혀있던 아이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흐엉……. 소소야……. 나 어떡해…….”
상황을 대충 짐작한 매천풍이 무섭게 인상을 쓰며 소리쳤다.
“너 언제 내려왔어!?”
“아까요…….”
“다시 이 층으로 올라가!”
고개를 숙인 아이가 쭈뼛쭈뼛 다가오고 있었다. 이 층으로 올라가지 않고 왜 자신에게 온단 말인가.
하지만 기껏해야 어린아이였다. 전혀 경계감이 들지 않았기에 무시했다. 거리가 가까워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일 장 거리까지 좁혀진 순간이었다. 매천풍은 아이가 기를 갈무리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갑자기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너 뭐야? 머, 멈춰!”
당황하며 소리쳤지만, 이미 아이는 자신의 코앞까지 접근해 있었다. 소소가 고개를 올리며 물었다.
“아저씨. 파산권이 뭔지 알아요?”
“그게 뭔데?”
“나쁜 아저씨들한테 주는 선물이에요.”
등골이 오싹해진 매천풍은 좀 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꼬마가 허리춤에서 호두 같은 주먹을 움켜쥐고 있었다. 게다가 주먹을 휘감고 있는 맹렬한 기의 파동.
“뭐, 뭐야!?”
이미 주먹은 자신의 복부를 향해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완전히 방심하고 있다가 당한 기습이었다. 도무지 피할 틈이 없었다.
쏴아앙-!
기어코 바람을 가르는 주먹이 그의 아랫배에 정통으로 꽂혔다.
쩌어억-!!!
“꾸허억!!!”
상체가 구십 도로 꺾인 매천풍은 입에서 토사물을 쏟아냈다. 소소가 재빨리 피하며 친구를 낚아챘다.
“흐잇. 더러워.”
일광만큼은 아니었지만, 무지막지한 일격이었다.
단 한 방에 항거불능이 된 매천풍. 그의 얼굴엔 억울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며 앞으로 고꾸라져갔다. 그리고 토사물 위에 엎어지려는 그 순간. 어느새 다가온 일광이 그의 목을 틀어쥐었다.
꽈악-!
“후회한다고 했지.”
매천풍은 대답할 수 있는 정신이 아니었다. 눈이 반쯤 풀려있었기에, 회복하려면 시간이 좀 필요해 보였다.
“빨리 올라가요, 삼촌!”
일광은 축 늘어진 매천풍을 어깨에 들쳐메고는 소소를 따라 올라갔다.
이 층에서 기다리던 아이들은 일광을 보고는 눈물을 글썽였다.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떠났던 아저씨가 피범벅이 되어 돌아오다니……. 서 있는 것조차 힘들어 보이는 모습에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아저씨……. 어떡해요…….”
“흑흑……. 죽으면 안 돼요.”
소소가 괜찮다는 듯 친구들을 진정시켰다.
“걱정하지 마. 우리 삼촌은 절대 안 죽어.”
일광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제 정말 가자. 우리들의 집으로…….”
“삼촌, 우리 지금 못 나가요.”
소소는 발꿈치를 들고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문 앞에서 처절한 싸움이 한창이었다. 마귀처럼 생긴 할멈이 아버지와 스승님에게 두들겨 맞고 있었다.
일광도 고개를 돌려 창문을 내려다보았다. 그 순간 악에 받친 은화파파의 고함이 터져 나왔다.
“이 빌어먹을 연놈들!!! 누가 이기나 어디 한번 해보자!!!”
싸움의 양상이 갑자기 변했다.
노파는 이곳의 아이들을 인질 삼아 전각을 향해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무지막지한 노파의 내공은 일광도 잘 알고 있었다.
몇 번만 적중당해도 전각이 통째로 무너질 터. 소무와 연설화는 수세로 전환하여 전각을 보호해야만 했다.
콰콰쾅-! 쾅-!! 쾅-!!!
연달아 들려오는 폭음에 전각이 쉬지 않고 흔들렸다.
“어떡해요, 삼촌?”
우선 이곳에서 대피해야 했다.
“모두 뒤로 물러나서 귀 막아…….”
아이들이 측면으로 이동하자, 일광이 오른손을 움켜쥐었다. 그 순간 쇳덩이 같은 주먹이 벽면을 강타했다.
콰아아앙-!!!
한쪽 벽면이 완전히 허물어지며 전각 밖의 모습이 드러났다.
일광은 망설임 없이 지면으로 뛰어내렸다. 매천풍을 바닥에 팽개치고는 위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한 명씩 뛰어내려!”
아이들은 겁먹은 표정으로 움찔했다. 맨정신으로 이 층에서 어찌 뛰어내린단 말인가.
소소가 무너진 벽을 붙잡고 친구들에게 물었다.
“우리 삼촌 믿지?”
“응……. 아저씨 믿어…….”
“근데 여기서 어떻게 뛰어……. 무서워…….”
소소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방긋 웃어 보였다.
“그럼 모두 눈 감아볼래?”
아이들이 양손으로 두 눈을 가렸다. 그 순간 소소가 옆에 있는 친구를 붙잡으며 소리쳤다.
“삼촌, 받아요!”
휘익-!
새처럼 허공으로 날아오른 아이는 화들짝 놀랐다.
“으악!”
덥석-!
일광이 사뿐하게 낚아채며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것이 시작이었다.
소소는 친구들을 한 명씩 낚아채고는 연달아 밖으로 내던졌다.
“으앗!”
“흐익!”
한 호흡에 두세 명씩 지상으로 내려오는 아이들. 그 숫자는 빠른 속도로 늘어갔다.
몇몇 아이들이 무서워하며 뒷걸음질 쳤지만, 소소의 힘을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먼저 내려온 아이들이 밑에서 손짓하며 응원했다.
“걱정하지 마!”
“빨리 내려와!”
순식간에 지상에 내려온 아이들은 늘어서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지막으로 뛰어내린 소소가 어깨를 으쓱했다. 마치 나 잘했냐고 묻는 듯한 표정으로 말이다.
“수고했어. 내려가는 길 알지? 친구들 데리고 먼저 돌아가 있어.”
“삼촌은요?”
“나는 아직 구해야 할 사람이 남아있어…….”
쪼그려 앉은 일광은 매천풍에게 싸대기를 날리며 그를 깨웠다.
쫘아악-!
“큭…….”
그는 아직도 소소에게 맞은 충격이 가시지 않은 모양이었다.
“한 번 만 묻겠다. 처맞고 안내할 건지, 그냥 안내할 건지 선택해.”
피떡이 된 채로 두 눈을 부라리는 모습에 매천풍은 기가 질렸다.
“저쪽이다…….”
일광은 매천풍을 움켜쥔 채 절뚝거리며 어딘가로 사라져갔다. 그의 뒷모습을 소소가 걱정스럽다는 눈빛으로 지켜보았다. 돕고 싶었지만, 친구들을 버리고 갈 수는 없는 노릇.
“초희 선생님은 삼촌이 구해 올 거야……. 우리도 돌아가자.”
아이들이 떠나자마자 전각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