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6화 벚꽃 핀 어느 날 (5) (116/250)


116화 벚꽃 핀 어느 날 (5)
2022.05.27.


아이들은 두 줄로 길게 늘어서서 하산하고 있었다.

드디어 탈출에 성공했지만, 표정은 밝지 않았다. 아직 한 명이 구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선생님 괜찮을까?”

“아저씨가 꼭 구해 올 거야…….”

앞장서서 걷는 소소도 시무룩한 표정이었다. 뒤에서 친구들이 소곤거리는데도 껴들지 않고 입을 꾹 닫고 있었다.

행렬의 속도는 무척이나 느릿했다. 경공을 배우지 못한 아이들의 발걸음이 얼마나 빠르겠는가. 장안성까지는 하루가 족히 걸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느 순간 소소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전면에서 낯익은 인물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현정 삼촌!”

소소가 손을 흔들자 맞은편에서 누군가가 호각을 불며 달려왔다. 랑아대의 현정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왜 너희들만 내려오고 있어?”

다친 일광 삼촌과 초희 선생님을 생각하니 갑자기 서글퍼졌다. 소소는 울먹이며 그동안의 일을 설명해나갔다.

그사이 랑아대의 대원들이 속속들이 모여들었다. 그 수는 오십여 명에 이르렀다.

“대장님이 늦지 않게 도착했으니 문제없을 거야.”

얘기를 들어보니 자신들이 도울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아이들을 무사 귀환시키는 것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랑아대원들이 아이들의 사이사이로 들어가 위로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고.”

“어서 돌아가자.”

대원들의 어깨에 아이들이 하나둘씩 올라탔다. 그때 소소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삼촌들, 나 어디 좀 다녀올게요…….”

앞에 있던 청해가 쪼그려 앉아 얼굴을 마주 보았다.

“우리 조카, 어디 가려고?”

“선생님 찾으러요…….”

“아버지하고 일광 형님이 갔다며?”

“내가 도와줘야 해요.”

청해의 얼굴에 어이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네가 왜 도와……?”

“지금 일광 삼촌이 많이 아파요…….”

빈말이라고 하기에는 소소의 표정이 너무 진지했다. 그렇다고 아이를 혼자 보낼 수는 없지 않겠는가.

“어딘지만 알려줘. 삼촌이 갔다 올…….”

청해는 말끝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조카가 이미 쌩하고 사라졌기 때문이다.

“휴. 성격 급한 건 아비를 똑 닮았네.”

소소는 일광이 사라진 방향을 따라 질주했다.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일단 급한 마음에 내달리고 보는 것이다.

청해가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을 때였다. 그의 어깨에 현정의 손이 올라왔다.

“혹시 모르니 우리가 따라 가보자.”

일광을 제외한다면 랑아대에서 가장 강한 두 명이었다. 화산파 출신의 대원들이 아니던가.

청해가 허리춤의 검집을 움켜쥐며 말했다.

“서두릅시다, 사형. 놓치기 전에.”

날이 갈수록 빨라지는 소소의 경공술은 가볍게 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조금 더 멀어진다면 추적이 불가능하기에 머뭇거릴 틈이 없었다.

동시에 지면을 박찬 현정과 청해. 이 둘은 나란히 소소의 흔적을 따라 쏜살같이 따라붙었다.

* * *

“끄학!”

은화파파의 비명이었다. 검강이 왼쪽 어깨를 짓이기며 지나갔지만, 그런데도 버티고 있었다.

소무와 연설화가 앞뒤에서 포위하며 살기를 뿜어냈다.

“아이들을 납치해서 흉마살혼조를 연마할 생각을 하다니. 도저히 용서가 안 되는군.”

“할멈, 오늘은 못 도망칠 줄 알아.”

한쪽 팔로 검성과 옥화신녀의 합격술을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하나 남은 노파의 오른쪽 눈은 핏줄이 잔뜩 튀어나와 있었다. 무척이나 억울한 모양이었다.

“하루만…… 고작 하루만 지나면 완성할 수 있었거늘……. 분하다……. 나는 이렇게 죽을 수 없다. 절대 못 죽어!”

돌연 은화파파의 전신이 눈부신 광채에 휩싸였다. 소무가 연설화에게 다급히 전음을 보냈다.

- 조심해. 선천진기를 사용하고 있어.

설화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선천진기(先天眞氣). 한 번 사용하면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근원의 기운으로, 일회성이지만 폭발적인 힘을 가진다. 탈마의 고수가 뿜어내는 선천진기의 힘은 무지막지했다.

은화파파의 오른손에서 섬뜩한 강기가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며 맹공을 퍼부어갔다. 정면으로 맞서기엔 너무나도 막강한 공세였다. 소무와 연설화는 거리를 벌리며 방어에 급급할 수밖에 없었다.

쾅-! 콰콰쾅-!!!

주변으로 뇌우를 머금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듯했다.

“크윽!”

“큭!”

소무와 연설화의 입에서 동시에 신음이 터져 나왔다.

잠시 수세에 몰리긴 했지만, 선천진기는 오래가지 않는다. 맹렬했던 기세가 조금씩 사그라지는 그 순간.

돌연 은화파파의 신형이 자리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이형환위?”

소무가 재빨리 고개를 돌려 노파의 위치를 찾았다.

은화파파는 삼 장 밖을 벗어나 어딘가로 질주하고 있었다. 선천진기를 도주하는 데 사용하다니.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어딜!”

연설화가 뒤쫓으며 비침을 날려댔다.

파파팟-!!!

십여 개의 비침이 은화파파의 등 뒤에 틀어박히려는 찰나. 노파가 지면을 박차고 떠올랐다.

그 모습을 확인한 소무가 오른손을 활짝 펼쳤다. 그러자 바닥에서 돌멩이 하나가 재빨리 날아와 붙잡혔다. 그의 손에서 쏘아진 돌멩이는 빛의 속도로 노파를 향해 다가갔다.

쏴아아앙-!!!

붉은 강기에 휩싸인 돌멩이는 무엇이든 꿰뚫을 만큼 막대한 내력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러나 역시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허공에서 몸을 비틀며 가까스로 피해내는 은화파파.

스팟-!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노파는 다시 화들짝 놀랐다. 마치 자신의 반응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전신으로 수십 개의 비침이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허공에서는 피해낼 수가 없는 방위였다.

노파의 전신에서 순간적으로 기의 파동이 뿜어져 나왔다. 반탄강기였다.

파파파팟-!!!

수많은 비침이 접근하기도 전에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막아냈다는 기쁨도 잠시.

반탄강기가 사그라진 찰나의 순간, 얇고 기다란 대침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정확히 노파의 허벅지에 한 치가량이나 틀어박혔다.

푸욱-!

“끄악!!!”

지면에 내려선 은화파파는 비틀거리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죽기 살기로 내달리는 노파는 분노의 고함을 내질렀다.

“이 연놈들, 기필코 죽여버릴 테다! 절대 나 혼자선 못 죽어!”

추격은 반각 동안 계속해서 이어졌다.

다리에 대침을 꽂고 움직인다면 극심한 통증이 동반된다. 그런데도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미친 듯이 달리고 있었다.

뒤따르는 소무와 연설화가 암기를 쏘아내며 몇 번을 더 적중시켰지만, 쓰러질 기미가 없었다.

“오늘 꼭 잡아야 해, 미친 할멈.”

“이렇게 독한 인물일 줄이야…….”

자신들을 향한 은화파파의 원한이 너무 깊었기에 살려둘 수가 없었다.

한참을 내달리던 중 드디어 막다른 길이 나왔다. 천 길 낭떠러지의 천애 절벽이었다. 아래로는 급류가 흐르고 있어서 떨어져 내린다면 누구든 살아나올 수 없어 보였다.

앞서 내달리던 노파가 움찔하며 멈춰섰다.

“이, 이런 썅!”

소무가 검을 늘어트린 채 성큼성큼 다가갔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지.”

연설화도 양손으로 십여 개의 비침을 움켜쥐며 도주로를 봉쇄했다.

“지긋지긋한 악연도 여기서 끝나겠네.”

은화파파는 심호흡을 들이쉬더니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내 죽어서도 너희들을 찾아갈 것이다!”

타앗-!

말을 마친 노파는 절벽 아래로 몸을 내던졌다. 두 눈을 감고 오른팔을 늘어트린 채 유성처럼 떨어져 내렸다.

허나 만일에 대비해서라도 그냥 보낼 수는 없는 일. 황급히 따라붙은 소무는 재빨리 자신의 검을 절벽 아래로 날려 보냈다.

쐐에에에엑-!!!

벼락처럼 내리 꼽히는 비검(飛劍). 소무의 내력은 검 끝에 집중적으로 담겨 있었다. 화들짝 놀란 은화파파가 눈을 번쩍 뜨며 오른손으로 검을 쳐내었다.

까앙-!

단 일격에 검날이 산산조각이 나며 분쇄되었다. 그 순간 조각난 검날 파편 하나가 노파의 복부를 관통하고 지나갔다.

푸욱-!

“끄허억!!!”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이 엄습해왔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설화가 날린 십여 개의 비침이 연이어 당도하며 노파의 전신 곳곳에 틀어박히기 시작했다.

푹-! 푸푸푸푹-!!!

“끄아아악!!!”

거센 비명을 토해내던 은화파파는 잠시 후 급류 속으로 모습을 감추어버렸다.

풍덩-!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는지 설화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라앉질 않았다.

“죽었을까……?”

“확실히…… 이번에는 신이라 해도 못 살아.”

“응……. 초희하고 아이들은 잘 빠져 나왔겠지?”

이들이 한 가지 모르고 있던 사실이 있었다. 설화의 동생은 다른 곳에 납치되어 있다는 것을 말이다.

* * *

일광은 부상이 심했기에 걸음이 빠르지 않았다. 쩔뚝거리던 그는 어느 동굴 앞에 당도할 수 있었다.

“이곳이다…….”

매천풍의 머리채를 붙잡고 동굴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시체 썩는 냄새에 코가 찌푸려졌다. 입에서 욕지거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어찌 사람이 사람한테 이런 짓거리를……. 아니지……. 네놈들은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개처럼 처맞아야 해.”

동굴 안으로 더 진입하자 드디어 반경 오 장 너비의 넓은 공간이 보였다. 연초희가 양손이 묶인 채 무릎을 꿇고 있었고, 그 주변으로 열 명의 흑무대원이 대기하고 있었다.

머리채를 붙잡힌 매천풍의 모습에 부하들이 화들짝 놀라며 무기를 들었다.

“대, 대장님?”

“도대체 무슨 일이…….”

흑무대의 대장이 누구인가. 마교에서 서열은 높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이름 있는 인물이었다.

자존심이 상한 매천풍은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이 말 하려고 이곳으로 데려왔어.”

일광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무슨 말?”

매천풍이 살기서린 목소리로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저년 그냥 죽여! 어서!”

부하들이 당황하며 주춤거렸다. 그러나 명령이 떨어진 이상 행동을 개시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몇몇이 검을 들어 올리자 일광의 인상이 구겨졌다. 우악스러운 손아귀가 매천풍의 목을 닭 모가지 잡듯 움켜쥐었다.

꽈악-!

“손 하나 까닥하면 네놈들 대장 모가지 비틀어버린다.”

부하들이 움찔하며 행동을 멈추었다. 매천풍은 숨이 막혀오는 듯 얼굴이 붉게 변했다.

“그……냥…… 주…….”

다음 명령을 내릴 수 있게 허락할 일광이 아니었다. 그가 손아귀에 더욱 힘을 주자 매천풍은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부하들은 당황했다.

“어떡하지……?”

“죽여야 해, 말아야 해?”

상대는 한눈에 보아도 화경급의 고수였다. 상태가 별로 좋아 보이지는 않지만,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인질을 죽인다면 대장의 목숨은 물론 자신들도 뒷감당이 어려울 터.

그때 푹 숙이고 있던 초희의 고개가 서서히 올려졌다.

“일광 씨……?”

초췌해진 초희의 얼굴을 보자 일광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렇다고 매천풍을 죽일 수도 없는 노릇.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며 물었다.

“괘, 괜찮으세요?”

“예……. 여긴 어떻게…….”

“구하러 왔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말은 그렇게 했으나 방도가 없었다.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십여 명의 흑무대원을 무슨 수로 일거에 떨군다는 말인가.

그때 초희가 또다시 힘겹게 입을 열었다.

“소소야, 넌 여기 어떻게 왔어……?”

일광이 뒤를 돌아보자 낯익은 여자아이가 터벅터벅 걸어오고 있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일광 옆에 멈춰선 소소는 양손을 허리춤에 올리며 눈썹을 가운데로 모았다.

“아저씨들, 우리 선생님 때렸어요?”

흑무대원 중 한 명이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넌 뭐야?”

“저는 소소예요.”

“쪼그만 게 어디서 어른들 일에 끼어들어? 맞기 싫으면 조용히 찌그러져 있어.”

소소는 대답 대신 양손으로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리고 다시 꺼냈을 때는 작은 손가락 사이사이에 앵두가 꽂혀있었다.

“아저씨들, 근데 앵두 먹어봤어요?”

소풍 장소에서 친구들과 함께 따먹었던 앵두나무. 거기에서 아버지에게 주려고 몇 개 챙겨놨던 간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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