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3화 신녀와 마녀 (1) (123/250)


123화 신녀와 마녀 (1)
2022.06.03.


허규의 눈동자에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

“어서 말해주시게. 무슨 방법이 있다는 것인지.”

“얼마 전 연매의 도움으로 마교의 무공비급들을 얻게 됐지. 그것을 지금 관군이 익히고 있어.”

“우리도 파악하고 있었네. 군순포의 포수들이 신나게 익히고 있는데 모를 수가 있나.”

“역시 알고 있었군. 그런데 왜 정파에서 조용하지?”

“상대가 관군인데 뭘 어찌하겠나. 한때는 발칵 뒤집혔지만, 지금은 그냥 포기한 상태일세. 아무튼, 그것과 무슨 상관이지?”

“살펴보니 쓸 만한 무공들이 많더군. 원한다면 사본을 전달해주지.”

허규는 껄껄대며 웃었다.

“정파에서 마교의 무공을 익히라고? 무림맹에 가져다준다면 바로 불태워버릴지도 모르네.”

그들이 마공을 얼마나 혐오하는지 소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것저것을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지금의 무공으로는 대항할 수 없을 텐데? 기존의 무공에 마교의 것을 가미해서 초식을 조금 변형시키는 것뿐이야.”

허규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신마교에서 정파를 겨냥한 파훼 무공을 완성한다면, 정파로서는 버틸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반드시 초식의 변화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과연 무림맹에서 받아들일지 걱정이네.”

“세월이 흐르면 무공도 같이 진화해야지, 선대들이 만들어낸 몇백 년 전의 무공으로 언제까지 우려먹을 생각들이야? 그냥 갖다 주면 제갈수영이 알아서 추진할 거야.”

무림맹의 군사 제갈수영. 무공은 볼품없지만 지혜롭고 사리판단이 빠른 인물이다.

허규는 씁쓸한 웃음을 머금었다.

“시도는 해보겠네. 하지만 우리가 초식을 변형시키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탈혼검법이라는 최강의 검법을 만든 자네한테는 쉬운 일이겠지만.”

“알고 보면 무공의 원리는 모두 똑같아. 조합하여 변형시키는 것쯤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 원로들이 나선다면 금방 해결될 거야.”

확실히 그럴듯한 말이었다. 떠오르는 희망만큼 가라앉았던 식욕 또한 같이 솟구쳐 올랐다.

허규는 다시 젓가락을 움켜쥐었다.

“알겠네. 일단 이것부터 먹고 방주님을 만나봐야겠군.”

“천천히 먹어. 나도 오늘은 급한 일이 없으니.”

허규는 고개를 끄덕이며 먹는 것에 집중했다. 그러던 중 무엇인가가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잡아온 지부장이 천검마녀였다고 했었지?”

“맞아. 자세한 건 오늘 저녁에 심문해서 불게 할 거야.”

“부디 확실하게 묶어놓았길 바라네.”

“아무도 못 빠져나가. 군단의 뇌옥에 가둬놨으니. 근데 왜?”

“매음공(魅淫攻)을 극성까지 익힌 년이니 잘 감시해야 해.”

매음공. 상대를 유혹하여 영혼을 홀리는 마공을 말한다. 익히는 방법이 워낙 까다로워 경지에 이른 자가 드물었다. 소무도 직접 본 적은 없었다.

“매음공을?”

“어차피 자네한테는 통하지 않을 테니 숨겼나 보군. 그래도 군단의 뇌옥이라니 안심일세. 아무리 날고 기는 년이라도 그곳에서 탈출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 * *

장안성의 시장이 다시 문을 열었다.

한중의 부호들과 상인들이 투자를 시작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궁성을 구경하기 위해 타지에서 몰려든 인파까지. 거리에는 노점과 보따리상들이 넘쳐났다. 이곳은 마치 전쟁이 끝난 것 같은 분위기였다.

연설화의 시선이 좌측 아래로 향했다.

“맛있어?”

소소는 탕후루를 움켜쥐고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 싱글벙글 보조개가 피는 것을 보니, 신이 나는 모양이었다.

“맛있어요! 스승님하고 같이 나와서 너무 좋아요. 히히히.”

시장에서 노란색 한복을 사서 입혀주었다. 게다가 새 신발까지 신겨주었으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나도 소소와 함께 나오니 즐겁구나. 또 하고 싶은 게 있다면 말해 보거라.”

“음…….”

소소는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오늘 스승님이 돈을 많이 쓴 걸 아는 모양이었다.

“괜찮으니 어서 말해봐.”

우물쭈물하던 소소가 얼굴을 붉히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 아버지 선물이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 설화의 얼굴에 자상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럼 이제 같이 아버지 선물을 사러 가볼까?”

작은 손을 이끌고 장신구 가게를 찾아서 이동했다. 멀지 않은 곳에 노점 하나가 보였다.

젊은 여주인이 환한 미소를 머금으며 반겼다.

“어쩜 모녀가 이리 똑 닮았나요? 엄마를 닮아서 그런지 아이가 너무 예뻐요.”

갑자기 치고 들어오는 말에 설화가 잠시 당황했다. 그때 소소가 고개를 올리며 방긋 웃어 보였다.

“헤헤. 언니도 예뻐요.”

조카 같은 아이가 언니라 불러주다니. 상점의 여주인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고맙구나, 얘야. 뭐 사러 왔니?”

“우리 아버지 선물이요!”

“호호. 한번 골라 보거라.”

가판대 위에 머리를 들이민 소소는 큰 눈을 끔뻑이며 두리번거렸다.

병아리 같은 모습을 보고 있자니 설화도 마음이 흐뭇해졌다.

“마음에 드는 게 있어?”

한참을 헤집던 소소는 두 개의 장신구를 집어 들었다. 영롱한 빛깔을 내는 옥패에 붉은 술이 매달려 있는 물품이었다. 한눈에 보아도 비싸 보였다.

“이거 얼마예요?”

상점 주인이 피식 웃었다.

쪼그만 게 가격을 물어보니 너무 귀여웠기 때문이다. 갖고는 싶은데 비쌀까 봐 걱정하는 눈치였다.

설화도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마음을 진정시킨 그녀는 옥패를 살펴보며 말했다.

“이건 유소(流蘇)라 불리는 장신구란다. 검의 손잡이를 장식하는 용도이지. 홍옥으로 만들어졌으며, 두 개가 한 쌍이로구나. 연(聯)이란 문자가 각인되어 있으니 아끼는 두 사람이 나눠 갖는 징표의 의미도 있단다.”

젊은 여주인이 감탄하며 손뼉을 부딪쳤다.

“안목이 대단하세요. 호호. 어찌 그렇게 잘 아시는지.”

소소는 두 개의 패를 붙여보았다. 완벽한 형태를 이루는 모습이 일품이었다.

붙였다 뗐다 연신 반복하는 모습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설화도 마음을 정한 듯 돈주머니를 움켜쥐며 말했다.

“이걸로 구매하지요.”

상점 주인은 잠시 고민했다. 가판대에서 가장 비싼 물품이었으니 흥정에 대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안목을 가진 인물에게 바가지를 씌울 수도 없는 법.

“좋은 선택이세요. 두 개를 모두 구매하시면 은자 세 냥입니다.”

실제의 가치는 은자 두 냥에 불과하다. 적당히 흥정을 하다가 정가에 팔 계획이었지만, 설화는 물품의 가격을 한 푼도 깎지 않았다.

“여기 있습니다.”

은자를 건네받은 여주인은 의외라는 듯 짐짓 놀라는 모습이었다.

“대고객이신데 다른 장신구를 몇 개 더 얹어 드리겠습니다. 한번 골라보세요~.”

연설화는 옅은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한 번 내저었다.

“아이가 소중한 사람에게 주는 첫 번째 선물입니다. 그렇기에 가치를 훼손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설화는 망설임 없이 소소의 손을 잡고 등을 돌렸다. 기품있게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에 여주인은 뭔가에 홀린 듯 눈을 떼지 못했다.

“또, 또 오세요!”

소소가 뒤를 돌아보며 해맑게 웃었다.

“알았어요, 언니~”

두 개의 유소를 움켜쥔 소소는 입이 귓가에 걸려있었다.

“좋은 모양이구나.”

“마음에 들어요. 헤헤.”

“사랑하는 이에게 무엇인가를 해준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지. 장신구의 가치는 중요하지 않단다. 거기에 담긴 소소의 마음이 아버지를 기쁘게 하겠구나.”

“히힛. 그럼 스승님도 기뻐할 거예요?”

“......응?”

그 순간 소소가 유소 한 개를 내밀었다.

“이건 스승님 거!”

설화는 당황하면서도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소소가 가지려고 고른 거 아니었어……?”

“아니에요~ 이거, 스승님 주려고 산 거예요. 히히.”

얼떨결에 받아든 설화는 어리둥절했다.

‘설마 얘가 알고서 이걸 고른 건 아니겠지……?’

비록 자신의 돈으로 산 것이긴 하지만,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의미까지 담겨 있는 선물이 아니던가.

잠시 후 거리를 걷던 둘에게 흥밋거리가 생겼다.

“우리 저거 볼래요?”

많은 인파가 모여 깔깔대는 모습이 아이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그곳에는 광대들이 나와 연극을 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중 한 명은 장양 장군을 흉내 내고 있었다. 그자의 주위로 휘나라 병사들이 빙빙 돌며 칼춤을 추고 있다.

그때 어느 순간 낯익은 복장의 누군가가 나타나자 병사들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연설화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저기 아버지도 있구나.”

랑아대장인 소무의 복장을 한 인물이 연극의 주인공이었다. 그 모습을 발견한 소소가 배꼽을 잡고 웃기 시작했다.

* * *

“아아악!”

장안성의 지하 뇌옥에 앙칼진 비명이 울려 펴졌다.

백발만큼이나 흰 피부를 가지고 있는 여인. 천검마녀 백묘진이었다.

근처에서 경계를 서던 병사 한 명이 재빨리 다가갔다.

“무슨 일이야?”

손발이 묶인 그녀는 쇠창살 안에서 몸을 비비 꼬았다.

“배가…… 갑자기 배가 너무 아파요…….”

울먹이는 백묘진의 눈가에 물기가 차오르고 있었다. 도저히 마공을 익힌 자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어디서 개수작을…….”

“제 눈을 한 번 봐주세요.”

무심코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던 병사는 온몸이 정지했다. 소용돌이에 빠져드는 느낌에 머리가 핑 돌았다.

그러길 잠시 후. 갑자기 병사의 눈빛이 돌변했다. 그 순간 백묘진이 회심의 표정을 지었다.

“어서 문을 열어라.”

매음공에 당한 병사는 저항할 수 없었다. 내공이 약할수록 더욱 쉽게 말려드는 악랄한 마공이었다.

어디론가 사라졌던 병사는 잠시 후 열쇠꾸러미를 가지고 다시 나타났다.

끼기긱-!

수감실의 문이 활짝 열렸다.

뭔가에 홀린 듯 병사는 백묘진을 지그시 응시했다.

그녀의 손목이 앞으로 내밀어졌다.

“어서 풀어.”

딸그락-!

양손이 드디어 속박에서 벗어났다. 그 순간 희뿌연 손가락이 병사의 인후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푸욱-!

병사가 쓰러지고 있었으나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검은 기류를 머금은 그녀의 손아귀가 발목을 속박한 족쇄를 끊어냈다.

철컥-!

병사의 허리춤에서 검을 회수한 그녀는 수감실을 나섰다.

“버러지 같은 것들이 감히 날 체포해?”

자신이 고작 관군에게 체포당해 끌려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얼굴에는 치욕스럽다는 표정이 가득했다.

통로로 나온 그녀는 기척을 죽인 채 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우선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러나 그녀의 행동은 다른 죄수들의 이목을 끌 수밖에 없었다.

“지, 지부장님!”

“여기입니다!”

“빨리 꺼내주십시오!”

곳곳에 갇혀 있던 부하들이 애타게 그녀를 불렀다.

백묘진의 미간이 급격히 좁혀졌다.

“이런 병신들이……. 지금 같이 죽자는 거야?”

소란스러움으로 인해 그녀의 탈주는 금세 발각되고야 말았다. 뇌옥을 관리하던 병사들은 난리가 났다.

“타, 탈옥이다!”

“어서 지원군을 요청해!”

삐이익-!!!

곳곳에서 호각이 울렸다.

동시에 수십여 명의 병사들이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렇게 즉각적이고 체계적인 움직임이라니. 하나같이 훈련이 잘된 병사들이었다.

백묘진은 짜증이 솟구쳐 올랐다. 부하들을 한 번 노려본 그녀는 홀로 탈주를 개시했다.

병사들은 곳곳의 통로를 틀어막은 채 진법을 펼치며 대항했다. 그러나 그들만으로 극마의 고수를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화살처럼 쏘아져 나간 그녀가 병사들의 앞에서 짧게 도약했다. 동시에 검 끝에서 십여 가닥의 빛살이 전면으로 흩뿌려졌다.

콰콰콰쾅-!!!

둔탁한 폭음이 폭풍우처럼 메아리쳤다.

“크윽!”

“크악!”

일격에 네 명이 나가떨어지자, 나머지 병사들이 잠시 주춤거렸다.

머뭇거릴 틈이 없었다. 백묘진은 그들의 틈새를 비집고 돌파를 시도했다.

“비켜!”

몸을 사리지 않고 끈질기게 막아서는 병사들. 예상과 다른 반응에 그녀는 당황했다. 게다가 십부장들은 자신의 일합을 버티기까지 할 정도로 노련했다.

‘관군의 수준이 어떻게 이 정도까지………….’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고야 말았다. 우여곡절 끝에 출구를 마주하게 된 그녀는 이를 뿌드득 갈았다.

이미 탈옥은 반쯤 성공했다고 확신했다. 출구 밖으로 나서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말이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황당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관군들이 사방에서 벌떼처럼 달려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추 보아도 수백여 명은 족히 넘어 보였다. 그리고 그 수는 지금도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고 있었다.

몇몇 장수들이 병사들을 지휘하며 포위망을 좁혀왔다.

“반드시 잡아라!”

“저 마녀를 잡는 자에겐 큰 포상이 주어질 것이다!”

백묘진은 이를 악다물며 검을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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