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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화 신녀와 마녀 (2) (124/250)


124화 신녀와 마녀 (2)
2022.06.04.


백묘진은 재빨리 좌우부터 둘러보았다.

다행히 자신을 이곳에 처넣었던 무관은 보이지 않았다.

‘그 자식이 오기 전에 빠져나가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도 쉽지 않았다. 개미 떼처럼 몰려드는 관군들이 모두 무공을 익힌 정예병들이었기 때문이다.

“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느새 나타난 진립 부장이 병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연환합궁진(聯環合弓陳)!!!”

다짜고짜 진법부터 펼치는 노련함이라니. 백묘진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방패를 움켜쥔 병사들이 전면으로 나서며, 틈새로 화살촉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행동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발사!!!”

사방에서 수백 발의 화살이 직사로 날아왔다.

파파파팟-!

이러한 수법 따위에 당할 백묘진이 아니었다.

지면을 박차고 떠오르자 발아래로 화살들이 교차하며 쏜살같이 지나갔다.

나아가던 화살들이 맞은편의 방패들을 두들겼다.

텅-! 터텅-! 터더덩-!

허공으로 떠오른 백묘진은 퇴로를 물색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강노 조준!!!”

진세의 후미에서 강노를 움켜쥔 일련의 병사들이 움직임을 보였다.

강노(剛弩). 이 강력한 쇠뇌는 절정고수의 호신강기를 꿰뚫을 정도로 위협적이다.

첫 발은 이미 장전되어있는 상태였다. 조준을 마친 이상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발사!!!”

오십여 개의 강노가 폭음을 뿜어냈다.

쾅-! 콰콰쾅-!!!

위력이 어찌나 강한지 강노병들이 발사와 함께 뒤로 나자빠졌다.

백묘진은 자신이 허공으로 떠오른 것이 실수임을 깨달았다.

그녀의 검이 다가오는 화살들을 정신없이 걷어내기 시작했다.

카캉-! 카카캉-!!!

극마라 말하기에 손색이 없는 움직임. 흔들리는 검 끝은 수십 개의 환영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허공에서 집중사격을 완벽히 막아내기엔 강노의 위력이 너무나도 강력했다.

파악-!

“크윽!”

그녀의 입술을 비집고 신음이 토해져 나왔다. 기어코 화살 한 대가 허벅지를 스쳐 지나가며 자상을 남긴 것이다.

고통에 신음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바닥에 내려선 그녀는 전면을 향해 질주했다. 정면돌파를 시도하려는 속셈이었다.

그녀와 방패병들의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졌다.

검 끝에서 거센 빛무리가 솟구쳐 나오며 출렁거렸다. 극강의 검기(劍氣)였다. 방패 따위가 막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거리가 오장 이내로 좁혀진 순간. 어디선가 또 한 번의 외침이 들려왔다.

“비격(飛擊)!!!”

외침과 동시에 병사들이 방패를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시야를 가리려는 목적이었다.

다급히 방패들을 갈라내었지만, 문제는 그 숫자가 너무나도 많다는 것이었다.

순차적으로 날아드는 방패들 때문에 시야가 확보되지 않았다.

백묘진은 짜증이 솟구쳐 올랐다.

“모두 죽여주마!!!”

그녀는 오히려 속도를 더욱 가속했다.

수십 개의 방패들을 쳐내고 목적지에 당도한 그 순간.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장창병들의 창진이었다.

길이가 일 장이 넘는 수백여 개의 장창이 자신을 향해 있었다. 다급히 경공을 멈추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진격(進擊)!!!”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창병들이 함성을 내지르며 마주 내달렸다.

“와아아아!!!”

“우와아아아!!!”

다가오는 장창들을 정신없이 잘라냈지만, 그 수가 너무나도 많았다.

기어코 몇 개의 창끝이 그녀의 호신강기를 강타했다.

쾅-! 콰콰쾅-!!!

“크으윽!”

연이은 충격에 기혈이 뒤틀리는 듯했다.

고작 병사들 따위한테 자신이 맥을 못 추고 있다니. 황당한 상황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녀가 뒷걸음질하자, 다시 궁수들의 화살 세례가 이어졌다.

퍄파파팟-!!!

화살을 쳐내는 백묘진은 미칠 지경이었다. 관군들의 훈련 정도가 상상을 초월했다.

자신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고난도의 전술. 보면서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놀라웠다.

주춤하는 사이 몰려든 병사들은 어느새 수천 명에 이르렀다.

‘이런 어이없는 죽음이라니.’

그냥 이대로 앉아서 죽어줄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치열한 전투는 계속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의 부상도 하나둘씩 늘어갔다.

병사들도 수십 명이 쓰러졌지만, 전체적인 수는 조금도 줄어 보이지 않았다. 관군은 최소한의 피해로 그녀를 말려 죽일 속셈이었다.

한식경이 지난 후.

체력이 거의 소진된 그녀는 거친 호흡을 연달아 내쉬었다.

“하악. 하악.”

일평생 이렇게까지 궁지에 몰려본 적이 없었다. 무기력함에 그녀의 정신이 조금씩 무너질 찰나였다.

그 순간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관군의 대열 후미에서 거센 소란이 일어난 것이다.

“적들이 나타났다!”

“후미를 조심해!”

군영의 한복판에서 난데없이 적군이라니. 어리둥절한 백묘진은 안광을 빛내어 그곳을 살펴보았다.

십여 명의 마인(魔人)들이 돌파를 시도하고 있었다. 자신을 구출하기 위해 온 교단의 지원군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 미리 숨어서 기회를 엿보다가 지금에서야 나타난 모양이었다.

“도우러 왔습니다!”

“조금만 버티십시오!”

개개인이 일류를 넘어서는 대단한 고수들이었다. 병사들이 다급히 막아보려 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촤아악-! 푸욱-!

“크윽!”

“크아악!”

송곳으로 뚫어 재끼듯 포위망에 구멍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무너져가는 진법의 틈을 향해 백묘진이 마주 내달렸다.

병사들의 얼굴에 분노와 아쉬움이 교차했다. 진법이 파훼된 이상, 저들을 막을 수 있는 부대는 랑아대가 유일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모두 출타 중인 상황이었다.

한 명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모두 비켜!!!”

어디선가 중후한 내공이 담긴 고함이 병사들의 귓가를 강타했다.

상체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거대한 사나이. 그가 병사들의 틈새를 비집고 난전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일, 일광 백부장님이 오셨다!”

“이제 됐어!”

의선당에 누워있다가 소란을 알아채고 달려온 것이다. 아직 상처가 완쾌되지는 않았지만, 싸울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들어 와? 오늘 다 뒈졌다고 생각해라.”

주먹을 움켜쥔 그의 전신에서 숨 막히는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든든한 일광의 모습에 병사들의 사기가 치솟았다. 소무 대장에 비교할 수는 없었지만, 병사들 사이에서 소문이 자자한 인물이었다.

마인들 중 일광의 존재를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백묘진이었다. 지친 몸으로 화경의 고수와 싸운다는 것은 엄두도 안 났다.

지원군과 조우한 그녀가 다급히 외쳤다.

“저 곰 같은 놈부터 막아!”

백묘진의 명령에 마인들이 일광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그 틈에 그녀는 홀로 도주를 감행했다.

다리의 상처가 화끈거려 경공을 펼치기가 쉽지 않았다. 당연히 속도가 빠를 수가 없었다.

“저, 저년이 도망친다!”

“반드시 잡아야 한다!”

수많은 관군이 썰물처럼 움직이며 다급히 추격을 개시했다.

다리를 절뚝이며 정신없이 도망치는 백묘진. 그녀는 어느새 군영을 빠져 나와 주작로를 달리고 있었다. 민가와 시장이 밀집한 방향이었다.

경공을 제대로 펼칠 수 없는 이상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대로를 벗어나 주민들이 몰려 있는 장소로 향했다.

그녀를 발견한 주민들이 화들짝 놀라며 주춤거렸다. 온몸에 피칠을 한 채 검을 움켜쥔 모습이 소름 돋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이거 놔요!”

백묘진의 손에 붙잡힌 주민들은 후방으로 내던져졌다.

“으아악!”

“모두 도망가요!”

그녀는 어느새 인파가 가장 많은 시장에 들어서고 있었다.

뒤쫓고 있는 병사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무턱대고 쫓는다면 주민들의 피해가 커질 것이 분명할 터. 장수 한 명이 다급히 소리쳤다.

“조 단위로 산개하여 시장을 봉쇄하라!”

병사들은 백 명이 한 조가 되어 넓은 포위망을 형성했다.

백묘진은 몹시 지친 상태였다. 쉬지 않고 무공을 전개한 터라 내력이 넉넉하지 못했으며, 무엇보다 다리의 부상이 문제였다.

그녀의 걸음은 시장 어딘가의 노점찻집에서 멈추었다. 화들짝 놀란 손님들이 도망치려 했지만 무의미한 행동이었다.

살기를 머금은 검 끝이 도망치는 손님들을 향해 휘둘려졌다.

그녀에겐 화풀이 대상이 필요했다.

푹-! 촤아악-!

“으악!”

“끄허억!”

끔찍한 장면을 지켜본 자들은 온몸이 얼어 붙어버렸다.

백묘진의 입가에서 잔인한 미소가 떠올랐다.

“모두 앉아. 도망치는 놈들부터 죽이겠다.”

감히 거역하려는 자가 없었다. 공포에 질린 손님들이 주춤주춤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그녀는 근처에 있는 의자에 걸터앉았다.

눈을 가늘게 뜬 모습이 마치 한 마리의 백사(白蛇)와 같아 보였다.

“홍화차(紅花茶) 한 잔 내오거라.”

주변으로 관군들이 몰려들어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었다. 군순포의 포수들까지 합류하며 인원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그런 상황에서 태연하게 앉아 차를 주문하는 모습이라니. 그 모습이 오히려 더 무서워 보였다.

찻집 주인은 손을 부들부들 떨며 홍화차를 준비했다. 그의 얼굴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여, 여기 있습니다.”

주인은 재빨리 그녀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조심스럽게 찻잔을 건네고 자리로 돌아가던 주인장. 어느 순간 그의 걸음이 멈추었다. 등 뒤에서 감정이 배제된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찻값은 받고 가야지.”

뒤를 돌아보니 은자 하나를 움켜쥔 그녀가 보였다. 그 모습은 그가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백묘진이 손가락을 튕기자 내력을 머금은 은자가 쏘아져 나갔다. 그것은 정확히 주인장의 이마를 강타했다.

콰앙-!

찻집의 주인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하지만 그녀는 눈길조차도 주지 않은 채 차를 음미했다.

잔인한 그녀의 모습에 포위한 병사들이 혀를 내둘렀다.

쉽게 공격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조금 전처럼 진법을 펼칠 공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찻집에 인질로 잡혀 있는 손님들까지.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차를 마시던 그녀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좋은 날이군. 오늘 나는 죽겠지. 하지만 너희는 몇 명이 죽을까.”

소름 돋는 말이었다.

병사들은 무기를 겨눌 뿐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일다경이 지난 후.

차를 다 마신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백 명. 누구든 가장 먼저 오는 놈부터 죽이겠다.”

그럴 능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감히 누가 먼저 앞으로 나서려 하겠는가. 병사들이 주춤하며 자세만 잡았다.

몇 걸음을 옮긴 백묘진이 비웃음을 머금었다.

“되돌아보니 지긋지긋한 세상이었다. 빨리 끝내고 싶으니 어서 오거라. 안 온다면 여기 있는 놈들부터 하나씩 죽이겠다.”

근처에서 홀로 앉아 떨고 있는 한 명의 젊은 여인. 그녀가 첫 번째 목표였다.

오늘 장사를 끝마치고 온 장신구 가게의 여주인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벌벌 떨며 빌었다.

“살, 살려주세요…….”

오늘 최대의 매출을 달성하여 모처럼 기분 좋게 비싼 차를 마시고 있었다. 운수가 좋은 날인 줄 알았더니 그 반대의 상황이었다. 이대로 허무하게 죽는 게 너무나 억울했다.

“나는 너를 죽인다고 하지 않았다. 왜 나한테 살려달라고 하는 것이냐.”

“제, 제발…….”

“제발 죽여달라는 말로 이해하지.”

검날이 탁상 위에 놓인 빈 찻잔을 강타했다.

타앙-!

허공으로 떠오른 찻잔이 그녀의 얼굴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곧이어 찻잔이 이마를 때리는 그 순간. 돌연 그녀의 전신에서 눈부신 섬광이 번뜩였다.

콰앙-!

빛이 사그라지며 뭉툭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진 광경에 모두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눈을 뻐끔거렸다. 한 여자아이가 머리 위로 소검(小劍)을 치켜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사람들을 괴롭혀요? 나빠요!”

백묘진은 어이가 없는지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믿을 수 없군. 이토록 어린 나이에 순간적인 검기 발출이 가능하다니. 재능이 아쉽지만, 이곳에서 나를 만난 것 또한 너의 운명이겠지.”

그때 백묘진은 병사들의 소곤거림을 들었다.

“소소잖아?”

“그 유명한 꼬마 장수……?”

“랑아대장님의 딸이야.”

“소소야, 위험하니 빨리 이쪽으로 와!”

랑아대의 대장이란 말을 똑똑히 들었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이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눈앞의 아이는 원수의 딸이나 마찬가지였다.

“하늘이 나를 돕는구나. 죽기 전에 복수할 기회를 만들어 주다니.”

그 순간 백묘진의 전신에서 거센 마기가 폭사되어 나왔다.

그것을 전면에서 마주하게 된 소소는 무서워졌다.

“다, 다가오지 마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물러서지 않는 것이 기개가 제법이구나. 역시 그 빌어먹을 놈의 딸이란 얘기인가.”

아버지를 욕하자 소소는 매우 화가 났다. 마치 성난 강아지처럼 미간을 좁히며 빽 하고 소리쳤다.

“우리 아버지 욕하지 마요, 못생긴 아줌마!!!”

난생처음 들어본 말이었다. 못생겼다는 것도 모자라 아줌마라니.

“오늘 정말이지…… 미쳐버리겠군.”

한 걸음씩 다가가는 그녀에게서 냉랭한 살기(殺氣)가 진동했다.

소소와의 거리가 이 장 이내로 가까워졌을 무렵이었다. 갑자기 백묘진의 걸음이 멈추었다. 등 뒤에서 묵직한 여인의 한마디를 들었기 때문이다.

“어이, 휘나라년.”

목소리를 듣는 순간 오한에 걸린 것처럼 소름이 돋았다. 화들짝 놀란 백묘진은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동시에 그녀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자신의 안면을 향해 검은 기류에 휩싸인 손바닥이 벼락같이 다가오고 있었다. 피할 수 없는 속도에 다급히 호신강기를 끌어올렸다.

쩌억-!

화끈거리는 통증에 반사적으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크헉!”

호신강기가 아니었다면 즉사했을 정도로 엄청난 위력이었다. 입술이 터지고 코에서 핏물이 흘러내렸지만,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눈앞에서 낯익은 인물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감히 누구보고 빌어먹을 놈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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