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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화 신녀와 마녀 (3) (125/250)


125화 신녀와 마녀 (3)
2022.06.05.


백묘진은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마교에서 함께 활동하던 시절 자신보다 서열이 몇 단계나 위에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녀가 설마 이곳에 나타날 줄 어찌 상상했겠는가.

“옥화신녀……?”

연설화는 대답 대신 양손을 연달아 내뻗었다. 반사적으로 백묘진의 검이 움직이며 방어 동작을 개시했다.

쾅-! 콰콰쾅-!!!

순식간에 자세가 무너진 백묘진은 참담한 심정이었다. 몸이 멀쩡했어도 감당하기 힘든 상대였다. 지치고 다친 상태에서는 어림도 없었다.

얼마 가지 못해 검은 기류에 휩싸인 손바닥이 그녀의 가슴을 강타했다.

쩌엉-!

“크헉!”

단번에 호신강기를 파괴하며 들어오는 일격. 백묘진은 숨이 턱하고 막혀왔다.

연설화의 절기 중 하나인 흑룡신장(黑龍神掌)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것은 일방적인 응징이었다.

설화의 양팔이 허공을 휘저으며 환영을 그렸다. 마치 천 개의 손을 가진 천수관음(千手觀音)이 현신한 듯했다.

자세가 무너진 백묘진은 정신없이 두들겨 맞기 시작했다.

쩌억-! 쩌저저적-!!!

양손을 수십여 번이나 내지르고 나서야 설화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그 순간 동공이 풀린 백묘진의 모습이 드러났다. 처참한 몰골의 그녀는 다리가 풀리며 무너져 내렸다.

설화의 손이 쓰러지는 백묘진의 머리채를 낚아챘다.

“용케 지금까지 살아있었네. 마교를 배신하고 휘나라에 붙어먹었나? 아니면 애초부터 그쪽 출신이었던가?”

“죽, 죽여라…….”

“내 질문에 대답부터.”

“끄윽……. 내가 말할 것 같아?”

살며시 상체를 숙인 설화는 그녀의 눈을 마주 바라보았다.

“나 옥화신녀야.”

어찌 모르겠는가. 쟁취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반드시 이루는 인물이었다. 독하기로 따지면 자신은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너 또한…… 마교에는 충성하지 않았잖아…….”

설화의 얼굴이 서늘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의 웃음을 마주한 백묘진은 점차 공포에 젖어갔다.

“알고 있었네? 멸문해버린 기존의 마교 따위는 관심 없고. 지금 마교의 이름을 내세워 활동하는 영교에 대해 아는 대로 말해줘야겠어. 이곳 섬서에 지부가 몇 개나 있지?”

“쉽게 알아낼 수 없을 거야.”

“과연 그럴까?”

연설화가 허리춤에서 몇 개의 대침을 꺼냈다. 그러자 백묘진이 화들짝 놀라며 더듬거렸다.

“뭐, 뭐 하려는 거지?”

“자세한 건 가서 얘기하자.”

이곳에는 보는 눈이 너무나 많았다. 여유롭게 심문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설화는 그녀의 혈도 곳곳에 대침을 박아넣었다. 내기의 흐름을 막아 무공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푹-! 푸욱-!

“끄아악!”

백묘진은 고통스럽다는 듯 몸부림쳤다. 잠시 후 경련을 일으키던 그녀의 움직임이 정지했다. 정신을 잃은 것이다.

설화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천여 명이 넘는 관군들이 포위를 풀지 않고 있었다.

조금 전 벌어진 일이 믿기지 않는지 모두가 멍한 표정이었다. 그토록 애먹었던 천검마녀를 개 패듯이 제압했으니 그럴 수밖에.

관군의 장교 중 하나가 정신을 차리며 소리쳤다.

“저, 정체를 밝히시오!”

목소리에는 약간의 적대감이 서려 있었다.

설화가 사용한 흑룡신장 또한 마공이었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너희들의 적이 아니니 물러서라.”

병사들은 요지부동이었다. 경계감을 늦추지 않은 채 각자의 무기를 움켜쥐었다.

“관에서 허가받지 못한 자는 마공의 사용이 금지되었소. 그러니 순순히 따라와서 조사를 받는다면 별일 없을 것이오.”

마공의 사용까지 금지하다니. 금시초문이었으며, 사상 처음으로 있는 일이었다. 섬서에 있는 모든 마인들을 소탕하려고 작정한 모양이었다.

병사들은 본분에 충실할 뿐이지만, 이렇게 끌려가는 것은 그녀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물러서라 했다.”

연설화가 오른손을 들어 올리자 수십여 개의 비침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이어서 손을 내젓자 비침들이 병사들을 향해 비산했다.

파파파파팟-!

빛살처럼 늘어지는 비침의 속도는 병사들이 피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크윽!”

“헉!”

“큭!”

가장 지척에 자리한 이십여 명의 병사들이 비틀거렸다.

“엄살 부리지 마. 방금 것은 경고일 뿐이니.”

어리둥절한 병사들은 서로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비침들은 정확히 병사들의 투구에 틀어박혀 있었다.

만약 급소를 향했다면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것이 분명할 터. 거리에 숨 막히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병사들이 당황하며 장교를 향해 물었다.

“보, 보통이 아닙니다.”

“어떻게 할까요?”

같은 극마일지라도 급이 있는 법이다. 천감마녀를 상대할 때와는 느껴지는 압박감이 달랐다.

그들이 망설이는 사이, 한 아이가 앞으로 나섰다.

“우리 스승님이에요!”

안면이 있는 몇몇 병사가 다급히 손짓했다.

“빨리 이쪽으로 오너라!”

“거기 있으면 위험해!”

“소, 소소야 빨리!”

소소는 괜찮다는 듯 설화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아저씨들, 괜찮아요. 우리 스승님은 좋은 사람이에요.”

관군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소소의 스승이 극강의 마공을 익힌 절대고수였다니. 그때 병사들을 헤집고 누군가가 등장했다.

“너희들, 그분 건드리면 소무 대장님한테 다 뒈진다. 사고 치지 말고 다들 물러서.”

어느새 군영의 상황을 정리하고 돌아온 일광이었다.

소무의 이름이 나오자 병사들의 태도가 변했다.

설화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에서 적대감이 감쪽같이 증발했다. 모든 병사가 우러러보는 군단의 영웅. 그의 지인을 향해 누가 감히 검을 겨누겠는가. 랑아대의 부대장이 직접 말했으니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모두 무기를 내려라!”

병사들이 경계를 풀며 무기를 거두었다.

분위기가 바뀌자 소소가 머리 위로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일광 삼촌!”

병사들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간 일광이 소소를 안아 들었다.

“요 녀석! 뭐 하고 있었어?”

일광이 조카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긁었다.

소소는 까르륵 웃으며 자지러지더니, 다시 울상을 지었다.

“흐잉. 내 옷…….”

그렇지 않아도 새로 산 옷이었다. 피로 얼룩진 손가락으로 만지니 걱정이 될 수밖에.

“안 묻었어. 손에 묻은 피는 아까 다 말랐다고.”

소소를 안아 든 일광은 설화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

“데려가십시오. 뒤는 제가 알아서 정리하겠습니다.”

설화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기절한 백묘진의 옷깃을 부여잡았다.

그녀는 연초희의 친언니이기도 했다. 일광이 최대한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작별을 고했다.

그 순간 백묘진이 깨어났다. 곧이어 자신이 연설화에게 끌려가고 있음을 눈치채고 다급히 소리쳤다.

“과, 관군이 왜 보고만 있는 것이냐? 나를 잡아가거라! 어서!”

얼굴이 퉁퉁 불어터진 채 발악하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일 정도였다. 그녀를 바라보던 병사들은 비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마치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일광이 병사들을 향해 손짓했다.

“몇 명은 남아서 정리하고, 나머지는 다들 철수해.”

그때였다. 한 여인이 다급히 다가왔다. 정확히는 일광의 팔에 안겨있는 소소를 향했다. 선물을 샀던 장신구 상점의 여주인이었다.

소소가 배시시 웃으며 반겼다.

“언니~ 괜찮아요?”

“고, 고맙다, 아가야. 덕분에 살았어.”

여인은 자신의 목에서 반짝이는 목걸이를 빼냈다. 그러고는 소소의 목에 걸어주었다.

“제 선물이에요?”

“응. 목숨을 빚졌으니 언니도 선물을 하나 줘야 마음이 편하겠구나.”

“헤헤. 고맙습니다~”

소소는 신이 나는지 연신 싱글벙글했다.

장신구 상인이 사라지고 난 직후, 어디선가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소소가 큰 보상을 받았구나. 남을 돕는 일에는 언제나 보상이 따르는 법이지. 그것이 목걸이가 되었든, 따듯한 마음이 되었든.”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어느새 소무가 도착하여 뒷짐을 지고 있었다. 그가 이곳에 도착한 것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었다.

“아버지!”

일광의 가슴팍에서 소소가 날아올랐다.

그러더니 소무의 품속으로 옮겨타 목을 끌어안았다.

“어이쿠. 새 옷을 입으니 선녀 같구나.”

“히히힛. 정말요? 나 예뻐요?”

“그럼. 세상에서 제일 예쁘지.”

소소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 스승님이 예뻐요? 소소가 예뻐요?”

당황한 소무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설화가 없는 것을 확인한 이후에서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소…… 소소가 예쁘지.”

입이 귓가에 걸린 소소는 품속에서 주섬주섬 무엇인가를 꺼냈다.

“히히. 이건 소소의 마음이에요!”

붉은 술이 달린 옥패로 검을 장식할 때 쓰는 장신구였다.

태어나서 딸에게 처음으로 받아본 선물이 아니던가. 소무의 입가가 흐뭇한 미소를 그렸다.

“역시 아버지 생각해주는 건 우리 소소밖에 없구나?”

“네~ 제가 최고예요?”

“그럼! 세상에서 제일이지.”

기분이 좋아진 소무는 딸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길 잠시 후.

멀지 않은 곳에서 백부장 한 명이 헐레벌떡 다가왔다.

뇌옥의 감시를 책임진 장교였다. 그는 다짜고짜 소무의 앞에 무릎을 꿇고 울부짖었다.

“죽여주십시오. 제가 포로들의 감시를 소홀히 하여 이 사단이 발생하였습니다……. 크흑…….”

소무는 고개를 한 번 내저었다.

“그녀가 매음공을 익히고 있었다더군. 혹시 몰라서 바로 달려왔는데 한발 늦었어. 근데 왜 우는 것이지?”

“제 부하들은 잘못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제 책임이오니, 저를 벌하여 주십시오.”

포로가 탈출하였으니 그곳을 책임진 장교와 병사들은 문책을 피하기 힘들 터. 군법에 회부될 게 분명한 상황이었다.

소무는 품에 안긴 딸아이의 등을 쓰다듬으며 백부장의 상태를 살폈다.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으며, 갑옷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복부에 검상을 입었군.”

“별거 아닙니다…….”

“지혈은 했지만, 고통이 대단할 터인데?”

“먼저 죽어간 제 부하들을 생각하면…… 이 정도 상처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뭔가 착각하고 있군.”

백부장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올려보았다.

“예……?”

“용감하게 싸운 것도 모자라, 부하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 군단이 그렇게까지 사리 분별을 못 한다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

소무는 다시 걸음을 옮기며 그를 천천히 지나쳤다.

“자네의 행동은 다른 병사들의 귀감이 되었으니 오히려 상을 받아야 마땅해. 내 장군님께 따로 말해두지.”

“대, 대장님…….”

“그리고 자네의 실책이 아니야. 그렇게 따지면 애초에 무공을 전폐시켜놓지 않은 내 책임이겠지. 여하간 빨리 가서 상처나 치료해. 그러다 정말 죽어.”

백부장은 멀어져가는 소무의 뒷모습을 보며 눈물을 쏟아냈다. 잠시 후 그의 등 뒤를 향해 진심으로 머리를 조아렸다.

* * *

백묘진은 양주산에 있는 연설화의 거처로 끌려갔다.

끝까지 버티겠다는 각오를 다졌지만, 입을 여는 데는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암자 뒤편의 풀밭.

나무 의자에 몸을 기댄 설화는 지그시 아래를 응시했다. 무릎을 꿇고 있는 백발의 마녀가 죽음을 원하고 있었다.

“이제 좀 죽여줘…….”

“그러게 처음부터 얘기했으면 좋았잖아.”

많은 정보를 얻어낼 수 있었다. 무려 섬서에만 세 개의 지부가 더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위치까지도 말이다. 이제는 소탕만 남은 상황이었다.

설화가 고개를 돌려 우측을 바라보았다.

나무에 기대어 팔짱을 낀 소무. 그가 심문을 넘겨받았다.

“휘나라 황제. 아니, 너희들의 교주는 지금 어디 있지?”

“나도 몰라. 그분은 직접 대면한 적이 없어.”

“지부장인 너조차?”

“알현 권한을 가진 자는 극소수에 불과해. 나 따위는 어림도 없어.”

그 순간 설화의 전면으로 십여 개의 비침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지금부터 네가 좀 더 쓸모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할 거야.”

그것을 확인한 백묘진이 다급히 말을 이어갔다.

“머지않아 개봉으로 천도한다고 했어.”

소무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왜 하필 개봉이지?”

“원래는 장안으로 오려고 했지만, 너희들이 먼저 선수를 쳤잖아.”

장안을 제외한다면 중원에서 가장 큰 황궁이 개봉에 있었다. 게다가 중원의 중심부에 있기에 통치에도 유리한 위치였다.

“오히려 잘되었군.”

“뭐가 잘되었다는 말이지?”

“이곳에서 낙양을 점령하면 바로 개봉이다. 그만큼 가까워진다는 얘기이고. 죽을 자리를 제 발로 찾아와주니 기뻐해야 할 일이지.”

백묘진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터트렸다.

“큭큭큭.”

“뭐가 웃겨?”

“아직 잘 모르니 그런 소리가 나오겠지. 그분이 직접 움직인다면 너희들이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해? 때가 되면 절망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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