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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화 신녀와 마녀 (4) (126/250)


126화 신녀와 마녀 (4)
2022.06.06.


심문이 끝난 백묘진은 다시 장안성의 뇌옥에 투옥되었다.

연설화가 그녀의 혈도에 수십여 개의 침을 박아넣었다. 무공을 사용할 수 없도록 금제를 가한 것이다.

이제 탈옥은커녕 자결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혀를 깨문다고 한들 극마의 신체는 죽는 것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관군에게 남은 것은 섬서에 존재하는 마교의 완전 소탕이었다.

은밀하게 뿌리 내린 세 개의 지부.

가장 큰 곳은 소무가 병졸들을 이끌고 공격했다. 한 곳은 일광이 랑아대를 대동하고 떠났으며, 다른 한 곳은 무림맹이 맡기로 했다.

이틀이 지난 뒤.

임무를 마친 일광이 랑아대와 포졸들을 대동하고 군영에 나타났다. 뒤에는 포승줄에 묶인 십여 명의 마교도가 줄을 이었다.

먼저 일을 끝마친 소무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고들 했어. 우리 쪽 피해는?”

랑아대의 부대장 일광. 그가 가슴을 탕탕 두드리며 말했다.

“우리가 이런 찌끄래기들에게 당할 리가 없잖아?”

소무는 실소를 머금었다. 랑아대를 세 개의 지부 중 가장 약한 곳으로 보낸 것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자신이 의도했던 대로 크게 다친 자는 없어 보였다.

“근데 왜 이놈들밖에 못 잡아 왔어?”

“끝까지 저항하길래 어쩔 수 없이 보내줘야 했어.”

“어디로 보내?”

일광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저곳으로.”

놀랄 만한 일도 아니었다. 소무처럼 곤봉으로 때려잡을 수 있는 압도적인 무력이 있다면 모를까, 죽을 각오로 덤비는 적을 제압하기가 쉽지 않았을 테니.

“지부장은?”

“부하들과 함께 보내줬지. 쥐똥만 한 것이 끝까지 대들더라고.”

소무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부장을 그냥 죽여버린 것이 조금 안타까웠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일광의 손에 자비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이었다.

그때 소무의 시선이 일광의 등 뒤로 향했다.

“그 봇짐은 뭐야? 뭘 그렇게 가져왔지?”

일광이 시선을 회피하며 대답했다.

“별거 아니야. 시장에서 뭐 좀 샀어.”

의아한 일이었다. 술값이 아니라면 지출을 안 하는 그가 아니었던가.

소무가 수상하다는 듯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푹 쉬어. 먼 길 다녀와서 피곤할 테니.”

소무가 해산 명령을 내리자 대원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막사로 돌아가거나 곧바로 훈련장으로 가는 대원들도 있었다.

그런데 일광의 모습이 조금 수상했다. 커다란 봇짐을 움켜쥐고 궁성의 어딘가로 걸음을 옮기고 있지 않은가.

호기심이 생긴 소무가 은밀히 그의 뒤를 미행했다.

반각이 지난 뒤. 설화원의 담장 밑을 기웃거리는 일광의 뒷모습이 보였다.

‘일광이 이곳엔 무슨 일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마침 평화반 아이들이 설화원의 앞마당에 있었다. 친구들하고 놀고 있는 소소의 모습도 보였다.

일광이 작은 목소리로 조카를 불러냈다.

“소소야!”

귀가 밝은 소소가 기척을 눈치채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일광이 다가오라고 손짓을 보냈다.

둘은 벽을 사이에 두고 은밀히 무엇인가를 쏙닥거렸다.

잠시 후 소소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몸통보다 큰 봇짐을 넘겨받았다.

지켜보던 소무는 일광에게 감탄의 시선을 보냈다.

‘자신의 급료를 털어 아이들의 선물을 샀단 말인가? 일광에게 저렇게 따듯한 면이 있었다니…….’

그때였다. 잠시 후 소소가 낯익은 누군가를 대동하고 나타났다.

화사한 분홍빛 한복을 입은 다소곳한 여인. 평화반의 선생인 연초희였다.

얼굴이 붉어진 일광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와 한참을 얘기하고 있었다.

‘설마 일광이?’

상남자 같은 일광의 다른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재밌는 구경거리를 봤다는 듯 돌아가는 소무의 표정이 밝았다.

이곳까지 온 김에 궁성을 둘러보기로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곳곳의 체계가 눈에 띄게 잡혀가고 있었다.

마주치는 병사들마다 기립하며 인사를 건넸다. 뒷짐을 쥔 소무는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해서 나아갔다.

그러길 한 식경이 지났을 즈음이었다. 행정병 한 명이 헐레벌떡 다가와 기립했다.

“소무 대장님, 안녕하십니까?”

“음. 무슨 일이지?”

“장군께서 대장님을 지객당으로 모셔오라고 했습니다.”

지객당은 외부의 손님을 모시는 곳이다.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무림맹의 간부가 도착했군.”

행정병이 짐짓 놀라더니 앞장서며 말했다.

“알고 계셨습니까? 제가 모시겠습니다.”

지객당은 상대적으로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원래 궁성의 객당은 연못과 화원이 딸린 근사한 곳이었지만, 주민들의 관광 장소로 탈바꿈된 지 오래였다.

지금의 객당은 서재를 개조하여 만든 장소였기에 소박하고 볼품없는 장소였다.

모든 사람이 동등함을 강조하는 장양이었기에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는 손님이라고 특별대우를 하는 경우가 없었다.

경계를 서던 몇몇 병사가 재빨리 다가와 안내했다.

“오셨습니까, 대장님. 장군께서 바로 들어오시라고 하셨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소무는 곧바로 안으로 향했다.

기다란 탁상을 끼고 두 명의 인물이 마주 앉아 있었다.

무림맹의 백룡대를 이끄는 대주이자 무당제일검(武當第一劍) 무진. 그리고 또 한 명은 장양이었다.

소무가 들어서자 무진이 먼저 일어서서 깊은 포권을 건네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소무도 마주 포권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무진의 전음이 들려왔다.

- 과거는 함구하고 있으니 염려치 않으셔도 됩니다.

- 계속 그리해주시오. 나는 이제 일개 무관일 뿐이니.

허규를 통해 미리 입단속을 시켜놓은 것이 다행이었다.

자신이 검성이었다는 것이 소문나면, 피곤한 일은 둘째치더라도 전략적인 측면에서도 좋을 것이 없었다.

장양이 밝은 얼굴로 소무를 바라보았다.

“무림맹에서도 청강산에 뿌리내린 마교의 지부를 소탕했다고 하네. 허허. 이로써 이곳의 모든 마인들이 일거에 정리되었으니 참으로 기쁜 날일세.”

충분히 예상했던 결과였다. 하지만 진정한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이제 섬서 지역만 정리했을 뿐입니다. 우리가 먼저 칼을 뽑았으니, 놈들도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할 것입니다.”

“어찌 모르겠는가. 그렇지 않아도 각 지역의 절도사들에게 협조문을 보내놓았네. 당분간은 관군보다 무림 쪽이 걱정이로군.”

지켜보던 무진이 다시 한번 포권을 건네며 말했다.

“사실 관에서 개입해주었기에 저희도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산발적으로 보복성 공격이 우려되긴 하지만…… 지금처럼 조금만 도와주신다면 버틸 수 있을 것입니다.”

어지간한 무림 고수도 눈을 못 마주치는 자가 무당제일검 무진이었다.

그가 이토록 예를 갖추어 부탁하는 모습은 쉽게 볼 수 없는 일이다. 그만큼 무림맹의 상황이 열악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장양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같은 적을 둔 우리는 동지나 다름없습니다. 당연히 서로 협력해야지요.”

“장군께서 지원해주시니 든든합니다. 필요하신 일이 있다면 저희도 최대한 협력하겠습니다.”

이들의 담화는 일다경이 지나도록 계속되었다. 무림맹이 자존심을 한 수 접었기에 대화의 분위기는 밝을 수밖에 없었다.

섬서 군단과의 암묵적인 동맹.

그것은 무림맹이 간접적으로 검성의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필사적으로 장양을 구워삶으려는 것이리라.

무진의 속내를 짐작한 소무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관계는 없었다. 당장은 서로의 목적이 같은 상황이었으니.

잠시 후 대화가 끝나고 서로가 작별을 고했다.

“귀중한 시간 내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별말씀을. 그럼 또 뵙겠습니다.”

장양에게 인사를 건넨 무진은 다시 한번 소무에게 포권했다.

“모쪼록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의 말 속에 담긴 의미를 모를 소무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인사를 받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

“살펴 가시지요.”

지객당을 나선 장양과 소무는 함께 걸음을 옮겼다.

서로가 각자의 생각에 잠겨있었기에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잠시 후 소무가 침묵을 깨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며칠 있으면 과거제가 시작되겠군요.”

“음. 앞으로 닷새가 남았지. 많은 인재가 왔으면 좋겠구만.”

“타지 관리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물론 그렇겠지. 권한 밖의 일을 강제로 추진하는 것이니. 하지만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일세.”

“사상 최초로 남녀노소의 제한을 없앴으니 많은 인파가 몰려올 것입니다.”

“좋은 일이지 않은가. 나라를 위한 일이니, 결코 나이나 성별에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되네.”

소무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 과거제……. 저도 참가해야 합니까?”

장양이 껄껄대고 웃었다.

“허허허! 이미 실전에서 최고의 무력과 전술 능력을 입증했는데 그럴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그렇지 않아도 자네에게는 따로 부탁할 일이 있었네.”

“말씀하십시오.”

“무과시험의 심사위원이 되어 힘을 보태줄 수 있겠는가?”

그런 것이라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어려운 일도 아니었으니.

“알겠습니다. 맡겨주십시오.”

장양을 배웅한 소무는 랑아대의 막사로 돌아왔다.

특별한 일정이 없었기에 가부좌를 틀고 명상을 이어갔다.

해가 저물고 대원들이 하나둘씩 막사로 복귀하고 있었다.

그런데 무엇인가가 이상했다. 시간이 늦었음에도 소소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 명, 일광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다른 대원들에게 물어봐도 금시초문이었다.

‘얘가 도대체 어딜 간 거야?’

딸아이가 이렇게까지 늦은 적은 없었다.

막사 앞에서 서성이길 잠시 후. 드디어 기다리던 자들이 나타났다.

일광이 어깨 위에 소소를 올려놓고 펄쩍펄쩍 뛰어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평소의 그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무슨 일인지 무척 신이 나는 모양이었다.

“뭐가 그리 좋아?”

난데없는 인기척에 일광이 화들짝 놀라며 정지했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때 어깨 위에서 소소가 손을 흔들며 방긋 웃었다.

“아버지~”

“우리 딸, 뭐 하다 왔어?”

“삼촌이 친구들 선물 사 왔어요. 그래서 초희 선생님이 맛있는 거 사줬어요. 히히.”

“초희 선생님을 만났단 말이지? 일광 삼촌이랑.”

일광이 소소의 다리를 툭툭 두드렸다. 그러자 소소가 화들짝 놀라며 양손으로 입을 가렸다.

“아 맞다! 비밀인데…….”

“어휴…….”

얼굴이 붉어진 일광은 소소를 업고 막사 안으로 재빨리 들어갔다.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소무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심증이 어느 정도 확신으로 굳어졌기 때문이다.

‘나중에 상처받는 거 아닌지 모르겠군.’

아무리 보아도 일광은 여자가 호감을 느낄 관상이 아니었다. 초희와 같이 있는 모습이 마치 미인을 위협하는 야수가 연상될 정도였으니.

소무는 모처럼 별빛을 바라보며 감상에 젖어갔다.

그러던 중 어느 순간 그의 귀가 갑자기 쫑긋거렸다. 멀지 않은 곳에서 불쾌한 기운이 어렴풋이 감지되었기 때문이다.

‘기척을 숨긴 채 경공을 펼치는 놈이 있군.’

소무의 감각은 반경 오십 장 안의 바람결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발달해 있다.

지붕 위로 올라가서 재빨리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어렵지 않게 목표물을 포착할 수 있었다.

궁성의 지붕을 날아다니는 한 명의 괴인. 전신을 흑의로 감싼 그의 움직임은 최소한 일류를 넘어서는 수준이었다.

‘살수?’

불순한 의도로 침입한 것만큼은 확실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야심한 밤에 이렇게 나타날 리가 없었으니.

그리고 그가 향하는 방향은 다름 아닌 장양 장군의 집무실이었다.

‘부질없는 짓을 하고 있군.’

목표를 향해가는 그의 몸부림이 불쌍해 보였다. 장군의 호위무사가 누구인지 알았다면 감히 이런 짓을 할 리가 없었을 것이다.

‘어찌한다……. 굳이 내가 나설 필요도 없을 것 같은데?’

잠시 고민하던 소무는 그를 따라가 보는 것으로 결정했다. 연유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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