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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화 신녀와 마녀 (5) (127/250)


127화 신녀와 마녀 (5)
2022.06.07.


날이 어둑한 깊은 밤이었지만 장양의 집무실은 여전히 밝았다. 오늘 처리하지 못한 일들이 산더미였기 때문이다.

책상 위에 수북이 쌓인 서류뭉치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장양은 두 눈에 힘을 주며 붓대를 멈추지 않았다.

쏟아지는 잠을 이기기 위해 졸린 눈을 비비고 있을 찰나였다. 돌연 집무실의 문이 서서히 열렸다.

끼기기긱-!

어리둥절한 장양이 문 앞을 바라보았다.

복면을 뒤집어쓴 괴인이 단도를 움켜쥐고 서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완벽한 살수의 모습이었다.

“자신감이 대단하군. 문 앞에 호위병도 두고 있지 않다니.”

적대감이 서린 음성. 좋은 의도로 찾아온 것이 아님이 확실했다.

장양은 어딘가를 바라보며 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냥 놔두시게.”

괴인은 어리둥절하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이곳에는 둘 외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무엇을 놔두라는 거지?”

“허허. 아무것도 아닐세.”

괴인은 어이가 없다는 듯 멍한 눈빛으로 다가갔다.

“미쳤군. 죽음을 목전에 두고 웃음이 나오다니.”

“마지막이라면 웃으면서 가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헌데 잠시만 기다려줬으면 좋겠군.”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지금 하던 일을 멈춘다면 억울한 일을 당할 사람들이 있네. 그 사람들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그러니 잠시만 기다려 주시게.”

단도를 움켜쥔 살수는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집어삼켰다.

“어이가 없군. 내가 기다려 주리라 생각하나?”

장양은 다시 서류를 바라보며 붓대를 잡았다.

“이곳에 온 순간부터 망설였지 않은가. 그렇지 않았다면 바로 공격부터 했을 테지.”

“망설인 것이 아니다. 내가 죽일 인물이 어떤 자인지 궁금했을 뿐.”

장양은 옅은 미소를 머금으며 하던 일을 계속했다.

“그럼 수락한 것으로 알고 있겠네.”

당찬 모습에 황당함을 금할 수 없었다.

“시간을 끌려는 수작이로군.”

“이 시각에 시간을 끈다고 하여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말을 하는 와중에도 장양은 끊임없이 서류에 뭔가를 적어 넣고 있었다. 그 모습에 살수가 조금씩 호기심을 느꼈다.

“잠시 기다려 주지. 말 그대로 네가 지금 죽으면 억울해질 사람들이 있을 테니.”

장양의 얼굴에 인자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자네는 우리 송나라 사람이로군.”

살수의 눈빛이 일순간 흔들리는 것으로 보아 당황하는 듯했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니 상관없겠지. 그걸 어찌 알았느냐?”

“은연중 사천성의 방언을 사용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자네의 신발 말일세. 나라에서 무관들에게 보내주는 보급품이로군.”

살수는 입을 꾹 닫았다.

장양은 침묵 속에 하던 일을 서둘렀다.

지루한 시간이 계속되자 살수가 맞은편의 의자에 걸터앉았다. 어차피 잡아놓은 물고기가 아니던가.

그러기를 무려 한 시진이나 지났다.

눈을 비벼가며 쉬지 않고 일하는 모습에 살수는 내심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어느 순간 정적을 깨고 살수가 말했다.

“과거제 시행을 그만두시오.”

“왜 그래야 하는가.”

“관리의 임명은 오직 황제의 권한으로 진행되어야 하오. 절도사가 임의대로 과거제를 시행한다면 나라의 근간이 뒤흔들릴 것이오.”

살수는 어느새 말을 높이고 있었다.

그의 목적은 과거제를 중단시키려는 것임이 분명해 보였다. 장양을 죽여서라도 말이다.

장양의 반응은 무덤덤하기만 했다.

“나라의 전란으로 인재의 등용이 몇 년째 중단되었네. 황실까지 와해되었으니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테지. 그렇다면 장차 이 나라를 어떤 자들이 이끌어간단 말인가.”

“장군이 먼저 시작한다면, 다른 절도사들도 무분별하게 관리를 임명하게 될 것이오.”

붓대를 움직이는 장양의 손은 한순간도 멈추지 않았다.

“나라에 유능한 자가 많이 임명된다면 좋은 일이지. 만약 전공과 능력이 없는 자가 인맥으로 관직을 받았다면 자연스럽게 도태될 것이네. 무능한 자가 다른 관리들의 시기와 분노를 어찌 감당하겠는가. 그리고 그 책임에 대한 화살은 누구에게 돌아가겠는가? 그들을 임명한 절도사겠지. 그러니 자네의 걱정처럼 무분별하게 일을 벌이려는 자는 없을 걸세.”

살수는 여전히 인정할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관료가 많아진다면 나라가 혼란에 빠질 것이 자명하지 않소? 죽고 싶지 않다면 당장 멈추시오.”

“나는 정치나 하는 고위급 관료를 뽑으려는 것이 아닐세. 전선에서 일할 유능한 실무 관리들을 모집하는 것일 뿐. 자네가 생각하는 만큼 악영향은 없을 것이네.”

살수의 눈동자에 어렴풋이 살기(殺氣)가 맺혔다.

“오늘 피를 봐야만 멈추겠구려.”

“어찌 그리 무서운 말을 하시는가. 죽지 않으려면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겠구만.”

“그만둘 생각이 있다는 말이오?”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이니, 우선 이것부터 마치고 같이 의논해보세.”

뭔가 미심쩍긴 했지만 좀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장양이 집무에 열중하자 실내가 정적에 휩싸였다. 수북이 쌓인 서류가 워낙 많았기에 끝이 없었다.

한 식경이 흐른 뒤.

돌연 장양이 하던 일을 멈추고 탁상 위에 깍지를 꼈다.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제 다 끝난 것이오?”

“아직일세. 지금 것은 조금 고민이 필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네.”

“무슨 일인지 물어봐도 되겠소?”

장양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태평촌에서 어느 몹쓸 놈이 여자아이를 강간한 사건이 일어났네. 이것은 아이의 어미가 보내온 간청서이지. 용의자를 잡았지만, 증언하기로 한 목격자가 행방불명되어 처벌할 수가 없는 상황일세.”

살수는 화가 나는지 두 눈이 이글거렸다.

“목격자까지 있었던 걸 보니 정황상 범인이 확실하지 않소?”

“내 생각도 같네. 용의자는 과거에도 몇 번의 미수사건이 있었다고 하더군.”

“그럼 고민할 게 뭐가 있소. 당장에 처형하면 될 것을.”

“나라에 법이 있거늘 어찌 마구잡이로 죽일 수 있겠는가. 증거가 없으니 형벌을 내릴 수 없는 상황이네.”

“그럼 놈은 어찌 되는 거요?”

“아마도 곧 풀려나겠지.”

“정의를 위해서라도 그런 놈은 반드시 처리해야 하오. 그렇지 않으면 또 다른 피해자가 나올 것이오.”

“관에서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네.”

“이런 빌어먹을…….”

살수는 분하다는 듯 주먹을 움켜쥐고 부르르 떨었다.

그때였다.

장양이 들고 있던 서신을 휙 놓치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것은 정확하게 살수의 앞에 떨어졌다.

“이런. 미끄러졌군. 그것 좀 집어 주겠는가.”

무심코 서신을 움켜쥔 살수. 그의 두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용의자가 갇혀 있는 장소와 이름 등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살수는 그것을 머릿속에 확실하게 각인시켜 놓았다. 그를 죽여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을 때,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설마 일부러 내 앞에 흘린 것이오? 내가 이놈을 죽일 수 있도록?”

장양은 대답하지 않고 다시 집무를 보는 데 열중했다.

축시(丑時)가 지나도록 지루한 시간은 계속됐다. 살수도 지겨워졌는지 어느 순간부터는 왼팔로 턱을 괴고 응시했다.

“방금 그 서신은 왜 한쪽으로 빼놓은 것이오?”

“노모를 봉양하는 아이가 관아의 식량을 도둑질하려다 붙잡힌 모양일세. 노모가 선처를 베풀어달라고 보내온 서신일세.”

“그것참 겁 없는 녀석이 아니오? 관아를 털려고 하다니.”

“전시에 전쟁물자를 훔치려 했으니, 아이라 할지라도 국법에 따라 처형을 당하겠지. 그리고 노모는 굶어 죽을 테고…….”

“다 먹고 살려고 했던 일이지 않소. 불쌍한 가족인데 용서해주면 안 되는 것이오?”

“법에 예외를 둔다면 그 누가 지키려 할 것이며, 어찌 나라의 기강이 유지될 수 있겠는가.”

살수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그 아이가 처형되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시오?”

장양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눈시울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목이 메는지 헛기침을 몇 번 하고 나서야 힘겹게 말했다.

“아직도 이곳에 굶주리는 자들이 있다니 모두 내 책임이네……. 내가 이 불쌍한 아이를 도둑질하게 만든 장본인이니 죗값을 대신 받아야겠지. 내가 바로 이 사건의 죄인일세…….”

“뭘 그렇게까지……. 그럼 절도사가 관의 식량을 훔치면 어찌 되오?”

“관아로 가보면 알게 되겠지. 이 노인에게 곤장을 때리든, 벌금형을 내리든 판관이 결정할 문제이지 않겠는가. 그래도 자수하는 것이니 참작은 해줬으면 좋겠구만.”

어느새 살수의 눈빛에 서려 있던 살기가 모두 사라져버렸다. 대신 그 자리엔 경외심이 들어차고 있었다.

“난 타지 사람이라 소문을 믿지 않았소. 하지만 이제는 섬서의 백성들이 왜 장군을 좋아하는지 알 것 같소.”

장양은 쓴웃음을 머금으며 하던 일을 계속했다.

“그만큼 보답해주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네.”

“헌데 왜 절도사나 되는 분이 직접 이런 것들을 살피고 있는 것이오? 어느 절도사는 여인들을 끼고 온종일 술만 퍼마시고 있던데?”

“말하지 않았는가. 섬서에는 관리들이 부족하다고 말일세. 나까지 손을 놓는다면 이 억울한 자들은 누가 살펴 줄 수 있겠나.”

“기존에 있던 관리들은 다 어디 간 것이오?”

“전쟁이 열세이니 관직을 버리고 도망친 관리들이 한둘이었겠는가. 그리고 용감하게 싸우다 죽은 관원들을 어찌 보충할 수 있었겠는가.”

살수는 할 말이 없어졌는지 입을 닫았다. 묵묵히 장양의 집무를 지켜보기를 계속했다.

어느새 탁상 위에 있던 서류들이 모두 정리되는 순간이었다.

“이제 다 끝난 것이오?”

장양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는 탁상 밑의 구석에서 상자 하나를 꺼내어 들었다. 그곳에도 수백 장의 서신이 가득 차 있었다.

“그, 그건 무엇이오?”

“황실이 사라진 이후, 섬서에서 발생하는 모든 세금과 물자 관리는 이곳에서 진행되고 있지. 지금부터는 재무와 경영에 관련된 업무일세.”

“그, 그걸 왜 장군이 직접 챙기는 것이오?”

“말하지 않았는가. 문관들이 부족하다고. 조금만 기다리시게. 이것만 마저 끝내고, 과거제를 중단하고 어떻게 할지 같이 의논해보세.”

살수는 기가 질린다는 듯 두 눈을 부르르 떨었다.

깊은 고민에 빠진 듯 심각한 눈빛으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러길 잠시 후.

결정을 내린 듯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과거제든 뭐든 마음대로 하시오.”

“왜 갑자기 마음이 변하였는가? 나와 같이 의논하기로 하지 않았는가.”

복면 속에 감춰진 살수의 얼굴이 피식하고 웃었다.

“장군의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내가 틀린 것 같소. 무엇보다 그 일이 끝나기 전에 일출이 먼저 올 것 같소만.”

날이 밝으면 이곳을 무사히 빠져나갈 자신이 없었다. 그가 등을 돌리자 장양이 넌지시 말했다.

“나는 자네가 누구인지 모르네. 하지만 나라를 위한 마음과 정의로운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고 있지. 괜찮다면 나와 함께 일해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살수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등 뒤로 답했다.

“솔깃하지만 이러한 모습으로는 사양하겠소. 지금은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으니…….”

“허허. 잘 알겠네. 인연이 있다면 또 보겠지. 무료한 밤에 함께할 수 있어서 즐거웠네.”

집무실을 나선 살수는 은밀히 지붕 위로 올라섰다.

야밤에도 궁성의 경계망이 철통같았기에 조금의 방심도 허용할 수 없었다.

좌우를 살피던 그는 내심 다짐하고 있었다.

‘과거제라……. 만약 막겠다는 놈이 있다면 내가 죽여버릴 것이다.’

타앗-!

새처럼 날아오른 그는 건너편의 전각에 살며시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 순간. 살수는 기절할 듯이 놀랐다. 자신의 바로 옆에 누군가가 기다렸다는 듯이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헙!”

조금도 기척을 눈치챌 수 없었다.

당황한 살수는 단도를 휘두르려 했지만, 시도조차 불가능했다. 상대가 자신의 손목을 낚아채는 것조차 볼 수 없었다.

“괜찮으니 당황하지 마.”

어리둥절한 살수는 상대의 모습을 살폈다. 소문으로만 익히 들어왔던 인상착의. 무위를 짐작할 수 없는 경지로 보아 확실했다.

“라, 랑아대장……?”

“군단의 경계망을 뚫고 이곳까지 접근하다니. 재주가 놀랍군.”

살수는 선공을 날려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어차피 쓸데없는 몸부림인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상대가 아니었다. 한 가지 의문인 점은 상대의 표정과 말투에 적개심이 안 보인다는 것이었다.

“죽일 작정이라면 망설이지 말고 그리 해주시오. 비참한 죽음은 사양하고 싶으니.”

소무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의 입에서는 예상과는 전혀 다른 말이 흘러나왔다.

“밤새 장군님의 말동무를 해주느라 고생 많았겠군. 출출할 텐데 나랑 시장에서 장국이라도 한 그릇 하고 가는 것이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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