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아군인가 적인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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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화 아군인가 적인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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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화 아군인가 적인가 (1)
2022.06.12.
호북성 무안현. 유광세 군단이 진지를 구축한 곳이다. 전쟁이 한창인 양양성까지는 이틀이면 당도하는 거리였다.
소무와 일광은 군영 입구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기를 이미 한식경이 지났다.
인내심이 바닥난 일광이 연신 씩씩댔다.
“이 새끼들, 전령이 왔으면 빨리 안내해줘야 할 거 아냐? 손님들을 밖에 세워둬?”
“진정해. 소란 피워 좋을 것 없으니.”
“후……. 이 오합지졸 같은 놈들을 그냥 콱.”
곳곳에 보이는 병사들의 모습이 어설프기 그지없었다.
정보에 의하면 이곳의 병력은 오만에 이른다. 섬서의 총 병력보다 두 배나 많았지만, 질적인 수준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훈련은 제대로 되고 있는지 모르겠군. 대체 지금까지 뭐한 건지…….”
유광세가 이끌던 본래의 십오만 군세는 완안후이의 군단에 대패를 당했다. 그 여파로 안휘성이 단숨에 돌파당하고 도성이 함락당했으며, 한세충이 방어하던 양양성까지 완벽한 포위를 당하고야 말았다.
이후 유광세는 반격을 한답시고 다시 병사를 소집했지만, 몇 달이 지나도록 출진을 미루는 상황이었다.
무려 반시진이 지나고 나서야 행정병 한 명이 다가왔다.
“두 분은 저를 따라오십시오.”
소무의 얼굴에 다소 불편함이 떠올랐다. 설마 말단 행정병이 마중 나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유광세가 자신들을 얼마나 하찮게 여기는지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러나 눈앞의 행정병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소무와 일광은 묵묵히 그를 따라 걸었다.
그러기를 일각 후.
일광의 표정이 점차 심상치 않게 변했다. 사령관의 막사가 있을 중심부가 아니라 모퉁이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어디 가는 거야? 왜 이쪽으로 안내해?”
행정병이 일광을 슬쩍 한 번 바라보았다.
그는 여차하면 한 대 칠 것처럼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장군께서 지금 업무가 좀 바쁘시니, 잠시 머무를 곳을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일광이 한마디를 쏘아붙이려다가 꾹 눌러 참았다.
“얼마나 더 가야 해?”
행정병의 걸음이 머지않아 멈추었다. 그의 앞에는 허름한 야전 막사 하나가 우두커니 있었다.
“다 왔습니다. 잠시 이곳에서 대기해 주십시오.”
어차피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소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막사의 문을 열었다.
“그리하지.”
행정병은 뒤도 안 돌아보고 재빨리 사라졌다. 일광의 얼굴이 워낙 무서웠기 때문이다.
허름해 보이는 외형이었지만, 내부는 제법 그럴싸하게 갖춰져 있었다.
작은 탁상과 두 개의 의자, 게다가 목재침상까지. 잠시 머무르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침상 위에 누운 소무는 머리 뒤로 깍지를 꼈다. 어차피 남는 것은 시간뿐이었다.
일광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우리 대장 팔자가 아주 좋으시구만. 이런대서 낮잠이라니.”
“너도 좀 쉬어둬. 아마도 오래 기다려야 할 거야.”
일광은 의자에 앉아 팔짱을 꼈다.
“설마? 여기서 또 기다리게 하겠어?”
소무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반나절이 지나고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음에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일광의 인내심은 점차 바닥을 드러냈다.
“이 새끼들, 미친 거 아니야?”
“아무래도 만나주지 않을 생각인 것 같군.”
일광도 어느새 목재침상 위에 누워있었다.
“대체 뭘 하고 있기에?”
소무는 대답 대신 천장을 지그시 응시했다. 깊은 생각에 잠겨 한동안 말이 없었다.
어느 순간 그의 입이 나직한 한마디를 뱉어냈다.
“불쌍하군.”
“누가?”
“먼저 이곳에 왔던 우리 전령 말이야.”
무관들인 자신들도 무시를 당하는데, 그가 이곳에서 얼마나 고초를 겪었을지 상상도 안 될 정도였다.
일광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보다 더 시달렸을 거야. 결국엔 유광세를 만나서 한마디를 했겠지. 그러다 살해당한 것이고.”
“그런 것 같아. 어떤 면에서는 적군보다 더 악랄한 놈이군.”
“그나저나 어떻게 할 거야? 이대로 가면 만나지도 못하고 복귀하게 생겼는데?”
“방법을 찾아야겠지. 계속 여기서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어.”
일광이 다시 무어라 대답할 찰나였다. 누워있던 소무가 돌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왜 그래?”
어리둥절하던 일광도 곧 기척을 느끼고는 입을 다물었다. 밖에서 어렴풋이 여인들의 비명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막사 문을 열고 영문을 살폈다.
이곳에서 삼십여 장이 떨어진 길목이었다. 은빛 어린갑(漁鱗甲)으로 무장한 일단의 병사들이 보였다. 상장군 직속의 정예부대로 알려진 용무군(龍武軍)이었다.
백여 명의 용무군이 수십여 명의 여인들을 강제로 끌고 가고 있었다.
“사, 살려주세요…….”
“놓아주세요, 제발……. 집에 어머니가 혼자 계세요.”
병사들의 어깨에는 봇짐까지 걸려있었다. 어떤 상황인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알 만했다.
지켜보던 일광이 황당한 표정으로 물었다.
“우리 백성들이잖아?”
“그런 것 같군. 적군에게 쓸 힘도 부족할 마당에 자국을 향해 이런 짓을 벌이고 있었다니. 그것도 정예부대로 말이야.”
과거 연합군단에 파견 나갔을 당시 랑아대도 약탈을 지시받은 적이 있었다. 물론 모두 대피시켰지만 말이다.
“그냥 보고만 있을 거야?”
소무 또한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무턱대고 나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 우리가 나서면 계획이 모두 틀어질 거야.”
“이런 개……. 휴.”
일광은 터져 나오는 욕을 겨우 참아내고 있었다.
그때 여인의 비명이 터져나왔다.
“꺄악!”
병사 한 명이 여인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쓸데없는 저항하지 말고, 죽고 싶지 않으면 순순히 따라와.”
쓰러진 여인은 머리채를 붙잡힌 채 끌려갔다.
지켜보던 일광은 양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소무만 아니었다면 진작에 뛰쳐나갔을 기세였다.
“대장……. 저놈들 표정 보여? 계획이 뭔지는 알겠는데. 지금 안 구하면 늦어.”
병사들은 하나같이 음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것이 뭘 의미하는지는 너무나도 분명했다.
소무의 눈빛이 지그시 가라앉았다.
‘어쩔 수 없는 희생이란 있을 수 없다. 이러한 희생을 묵인하면서 어찌 좋은 세상을 만든단 말인가.’
고요하게 가라앉은 그의 시선이 주변을 살폈다.
곳곳에 포진해 있는 일반 병사들은 수가 아무리 많아도 상관이 없었다.
섬서의 병사들은 초인을 상대하기 위한 훈련을 받지만, 이곳은 그렇지 않았다. 그나마 위협이 될 만한 부대는 눈앞의 용무군 정도였다.
용무대장이 화경에 이른 인물로 알려져 있으나 이곳에는 없었다. 나머지는 랑아대원들보다 한참이나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아무래도 계획을 조금 변경해야 할 것 같군.”
일광의 얼굴에 잔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잘 생각했어, 대장. 일단 구하고 봐야지.”
“하지만 죽이는 것은 안 돼.”
군영 한복판에서 한 명도 죽이지 않고 여인들을 구해낸다니. 다소 황당한 요구였지만, 이것저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일광이 기다렸다는 듯이 용무군을 향해 뛰쳐나갔다.
소무는 뒷짐을 쥔 채 일광의 뒤를 따라 거닐었다. 그의 걸음걸이는 느긋하기만 했다.
“그 손 놔라. 손모가지 뽑히기 싫으면.”
여인의 머리채를 붙잡고 가던 병사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쌍심지를 치켜뜬 거대한 체구의 관원을 보았다. 그리고 종육품을 상징하는 절제도위의 관복을.
기분이 다소 불쾌했지만, 자신보다 품계가 높았기에 함부로 말할 수는 없었다.
“누구시오?”
일광은 답변 대신 사자와 같은 눈알을 부라렸다.
“관군으로서 자국의 백성들을 지켜주지 못할망정 뭐하는 개짓거리야!”
난데없는 고함에 병사들이 움찔거렸다.
잠시 정적 끝에 장교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방금 그 말에 책임질 수 있소?”
목소리에서는 자신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눈치채지 못했다. 상대가 랑아대의 부대장이자 화경의 고수임을.
일광이 그를 향해 몇 걸음을 다가갔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손을 내뻗어 장교의 목을 틀어쥐었다. 눈으로는 쫓을 수 없는 가공스러운 속도였다.
“켁…….”
용무군의 부대장이었다.
아무리 방심했다지만 그가 저항조차 못 하고 당하다니. 모두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때 일광이 틀어쥔 장교를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잘 못 들었어. 다시 한번 말해봐.”
“켁……. 상, 상장군의 명…….”
장교는 말을 끝마칠 수 없었다. 일광이 손아귀에 더욱 힘을 주었기 때문이다.
장교의 얼굴에 핏대가 곤두서며 붉게 달아올랐다.
휘하 병사들도 더는 지켜볼 수가 없었다.
용무군 소속 병사들이 일광을 둘러싸며 포위하기 시작했다.
“너는 빨리 가서 대장님을 불러와!”
누군가가 소리치자 병사 한 명이 재빨리 어딘가로 사라졌다.
한눈에 보아도 상대의 무위가 심상치 않았다. 화경에 이른 고수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뭐해!? 계속 구경만 하고 있을 거야?”
일광이 도발했지만 그들은 쉽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무턱대고 전투를 벌인다면 치명적인 결과가 나올 것이 분명할 터. 용무군은 일광을 포위한 채 계속해서 시간을 끌었다. 대장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소무가 유도한 일이기도 했다.
반각이 지난 후.
군영의 어디에선가 이질적인 기의 파동이 느껴졌다.
한줄기 그림자가 벼락처럼 다가와 일광의 등 뒤에서 빛살을 뿜어내고 있었다.
난데없는 기습은 일광조차 간담을 서늘하게 할 정도였다. 그가 다급히 등 뒤로 방어 동작을 개시하는 순간이었다.
콰앙-!
돌진하던 그림자가 거센 폭음과 함께 후방으로 주르륵 밀려났다. 그리고 그곳에선 한 인영이 비틀거리고 있었다. 용무군을 이끄는 대장이자 군단의 제일 맹장인 사마철이었다.
그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섬서의 랑아대장이로군.”
단 일합으로 상대의 정체를 짐작해내었다. 그가 아니라면 자신의 공격이 이렇게 막힐 수가 없었을 테니.
소무는 사마철과 일광의 사이에서 뒷짐을 지고 있었다.
“계속하고 싶으면 와보시오. 하지만 다음 공격 때는 나도 반격을 가할 것이오.”
사마철은 손목이 찌릿한지 돌려대며 풀고 있었다.
자신이 압도적으로 밀린 사실이 지금도 믿기질 않았다. 확실한 건 자신 혼자서는 대적할 수 없는 상대란 것이었다.
“이곳에 있는 모든 병사를 다 상대할 생각이시오?”
“저 여인들을 보내주지 않는다면.”
“상장군의 명령으로 진행하고 있는 일이거늘, 뒷감당을 어찌하시려 하오?”
“그럼 상장군께 보고하면 되지 않소. 어차피 우리도 그분을 만나러 온 전령이니.”
사마철은 한숨을 내쉬었다. 상장군이 오지 않고서는 사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이미 보고가 들어갔으니 잠시 후면 당도할 것이오. 하지만 그분의 심기를 건드린 이상 각오하시는 게 좋을 것이오.”
이 모든 건 소무가 의도한 상황이었다.
서로가 경계감을 유지한 채 대치 상태가 계속 이어졌다.
그러기를 일다경이 지났다.
주변을 둘러싸고 포위하던 병사들이 좌우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기다리던 인물이 당도한 것이다.
화려한 금빛 갑주를 두른 상장군 유광세가 정예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송나라의 사대장군 중 하나인 그 또한 화경의 고수로 알려져 있다. 걸음걸이에서는 패기가 넘치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놈들……. 감히 이곳이 어디라고.”
그는 이를 뿌드득 갈아대며 소무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고 정확히 한 걸음 앞에서 멈추었다.
소무가 먼저 양손을 모으며 말했다.
“안서절도사의 전령으로 온 충무교위 소무입니다.”
무표정한 얼굴의 소무는 당당히 자신을 소개했다. 그 모습에 유광세의 인상이 급격히 일그러졌다.
그때였다.
돌연 그의 손바닥이 전광석화처럼 움직이며 소무의 얼굴을 후려쳐갔다. 나무를 꺾어버릴 만큼 강인한 내력을 머금은 일격이었다.
공격이 코앞까지 다가온 순간 소무의 상체가 흔들렸다.
촤아악-!
손아귀가 내뿜은 바람이 소무의 얼굴로 뿜어졌다.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해낸 것이다. 그것이 유광세의 눈에는 운이 좋았던 것으로 느껴졌다.
“피해?”
독기가 잔뜩 오른 유광세는 앞발을 들어 올렸다. 내공이 가득 실린 발바닥이 복부를 향해 쏜살같이 다가왔다. 소무는 피하지 않고 양손을 교차하여 받아냈다.
콰직-!
둔탁한 소음과 함께 소무가 뒤로 한 걸음을 물러섰다. 그 순간 유광세의 인상이 악귀처럼 일그러져갔다. 자신이 마치 우롱당한 듯한 기분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네놈들은 오늘 이곳에서 죽는다.”
“노기를 거두십시오. 저들의 약탈을 훼방놓은 것은 모두 장군님을 위해서였습니다.”
“무슨 개 같은 소리야?”
주변을 흩어본 소무는 유광세를 향해 전음을 보냈다.
- 장군님은 나라의 황제가 되실 분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지금부터는 덕망을 챙기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