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3화 아군인가 적인가 (2) (133/250)


133화 아군인가 적인가 (2)
2022.06.13.


황제가 된다. 듣기만 해도 가슴 벅찬 말이었다.

유광세의 눈빛이 미세하게 변했다.

그것을 눈치챈 소무는 차분히 기다렸다.

예상대로 그는 내색하지 않고 전음을 보내왔다.

-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황위를 논하느냐?

예전 같았으면 황위를 거론하는 것만으로도 역도로 몰렸을 것이다. 그러나 황실이 몰살당한 지금은 그것이 죄가 되지 않는 시대였다.

-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서거한 폐하의 자리를 이어받을 자는 상장군밖에 없지 않습니까.

- 장양이 그리 말하더냐?

유광세는 은연중 장양을 아래로 보고 있었다. 벼락 승진으로 자신과 같은 품계까지 올라온 그를 내심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 장군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공백이 길어지면 나라가 혼란에 빠질 터이니 사대장군 중 하나가 나서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 나를 놀리는 것이라면 각오해야 할 것이다.

송나라의 초대 사대장군 중 남아있는 인물은 한세충과 유광세뿐이다. 악비는 파직당한 후 의용군이 되었으며, 장준은 이미 고인이 되었다. 따라서 소무의 말은 무척이나 솔깃한 내용이었다.

만약 절도사 장양이 자신에게 힘을 실어준다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었다.

-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온데 계속 이 자리에서 말씀드려야 하는지요?

주변에 보는 시선이 너무 많았다. 느긋하게 전음으로 대화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유광세의 얼굴에 의심이 남아있었지만, 호기심이 그것을 압도했다.

“모두 해산해! 그리고 너희들은 나를 따라오너라.”

그는 소무와 일광에게 손짓하며 등을 돌렸다. 자신의 막사로 데려가려는 의도였다.

용무대장 사마철이 다가와서 물었다.

“이 여인들은 어떻게 합니까?”

“모두 풀어줘.”

“예……?”

“풀어주라고. 지시가 있을 때까지 모두 대기해.”

평소의 상장군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사마철은 멍한 얼굴로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만을 바라보았다.

유광세는 이미 뒷짐을 지고 앞장서서 걷고 있었다.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게 마치 황제를 흉내는 듯했다.

잠시 후 막사에 도착하자 소무와 일광이 입을 떡하니 벌렸다.

비단과 상아 등 온갖 고가의 사치품이 입구에서부터 늘어서 있었다. 또한, 막사 안에는 재물 상자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미처 닫지 못한 상자 안에서는 금빛이 번뜩였다.

“일단 앉아서 얘기하지.”

유광세는 호피로 만든 의자에 등을 기대어 앉았다. 반쯤 드러눕다시피 앉은 모습이 거만하기 그지없었다.

화려한 탁상을 끼고 소무와 일광이 함께 자리했다. 그러자 유광세가 눈을 가늘게 뜨며 일광을 바라보았다. 이 자리에 함께 있어도 되냐고 눈치를 주는 것이리라.

소무가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그를 소개해주었다.

“랑아대의 부대장이자 절제도위 일광입니다. 믿을 수 있는 자이니 염려치 않으셔도 됩니다.”

유광세는 일광을 유심히 훑어보았다.

갈무리된 안광과 정기가 넘치는 매끄러운 눈빛. 의심할 여지가 없는 화경의 고수였다.

“황당하군. 고작 전령으로 군단의 최고 명장들을 보내다니.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도 한 명 찾아오긴 했지.”

“그를 만나보았습니까?”

“잠시 보긴 했지. 고집이 있는 녀석이었어. 편히 쉬다 잘 돌아갔는지 모르겠군.”

자신이 죽여 놓고 시치미를 떼는 모습이라니. 어이가 없었지만 그것을 따지는 것은 나중의 문제였다.

“그렇다면 저희가 왜 왔는지도 알겠군요.”

그 순간 유광세의 미간이 좁혀졌다.

“하나같이 말귀를 못 알아듣는군. 똑같은 얘기를 지껄이려면 그냥 돌아가.”

“제 얘기를 꼭 들으셔야 합니다.”

“이미 수차례 답변을 보냈을 텐데? 도대체 장양이 뭔데 나한테 출진하라 명령질이야!?”

분명 장양과 유광세의 출진은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출진을 강요하고 있으니 어찌 기분이 좋겠는가.

그러나 포위당한 양양성을 구원하기 위해선 반드시 유광세가 움직여야 했다.

“장군께서 황좌에 오르시려면 전공이 필요하실 겁니다. 만약 이번 전투에서 승리하신다면, 나라를 구한 영웅이 되어 백성들의 지지를 얻게 되실 겁니다.”

소문대로 유광세는 욕심이 많은 인물이었다. 황좌라는 말에 또다시 그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쉽게 넘어오지는 않았다.

“나를 바보로 알아? 장양이 뭐가 아쉬워서 나를 추대해?”

“황실은 몰살을 당했고 재상까지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나라가 사분오열되지 않으려면 누군가는 반드시 나서줘야 합니다. 한세충 장군은 정치에 관심이 없으니, 상장군 말고 그 누가 자격이 있겠습니까?”

유광세는 팔짱을 끼고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다. 아직도 의심을 거두지 않는 눈초리였다.

한 호흡이 더 지나고 나서 그의 입이 열렸다.

“……안서절도사도 그 자리를 노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장양을 지칭하는 호칭과 그의 어감이 조금 전보다 부드러워졌다.

소무는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품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권력에는 욕심이 없으신 분입니다. 오로지 나라의 안위만 생각하실 따름이지요. 여기 절도사께서 직접 작성한 서신을 가져왔습니다. 이번 전투를 승리로 이끄신다면 공식적으로 장군을 지지하겠다는 서약서입니다.”

유광세는 그것을 냉큼 건네받았다. 틀림없이 안서절도사의 직인이 날인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무를 수도 없다는 얘기이다.
내용을 확인하는 그의 표정에 야심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쉬움도 함께 말이다.

“대세를 읽을 줄 아는 자로군. 하지만 조건이 양양성의 지원이라니……. 쉽지가 않아.”

“무엇이 문제입니까?”

“완안후이의 군단이 그곳으로 합류했으니 이미 늦었어.”

휘나라의 대장군인 완안후이에게 대패를 당한 전력이 있는 유광세였다. 그래서인지 그의 목소리에서는 은연중 두려움이 느껴졌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가 출진을 망설이는 사이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는 것이다. 답답함이 치밀어 올랐지만 내색할 수가 없었다.

“적들의 병력이 어느 정도나 됩니까?”

“두 개의 연합군단이 한곳으로 모였으니, 최소한 이십만은 넘는다고 봐야겠지.”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휘나라의 주력부대 중 대부분이 집결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전쟁은 머릿수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물론 그게 문제가 아니야. 절대고수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부족하니 어떻게 해볼 수가 없어.”

“한세충 장군이 밀린다는 말입니까?”

한세충이 누구인가. 현경의 경지를 이룬 당대 최고의 맹장이었다.

소무도 직접 본 적이 있었기에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투지를 끌어오르게 만든 유일한 인물이 아니던가. 그런데도 유광세는 요지부동이었다.

“완안후이는 한세충이 상대한다고 쳐도, 그 외에 화경급이 얼마나 있는지 짐작조차 되질 않아. 절대고수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부족하다 이 말이야.”

“그들은 우리 군단에서 맡겠습니다. 절대고수의 불균형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유광세는 의자에 깊숙이 기댄 채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결론은 어렵지 않게 도출할 수 있었다.

정적을 깨고 그가 다시 말했다.

“너희 둘로는 어림도 없어.”

“섬서에서 이곳까지는 거리가 멀기에 많은 병력을 파견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최정예 병사들이 참전할 것입니다. 그들은 절대고수를 상대하기 위한 전문적인 훈련이 되어 있습니다.”

“아직 완안후이의 애완동물을 보지 못했으니 그런 자신감이 나올 테지. 직접 겪어보면 알게 될 거야. 내 장담하건대 그것으로도 부족해.”

뜬금없이 애완동물이라니. 수수께끼 같은 말이었기에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나중에 확인해보면 될 터.

소무는 호흡을 한 번 고른 후 최후의 수단을 꺼내 들었다.

“악비 장군이 이끄는 의용군도 우리와 함께할 것입니다.”

그 순간 유광세의 눈이 번뜩 떠졌다.

“정녕 그자까지 온단 말이냐?”

“어찌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병력은 얼마 없지만, 악비 또한 화경의 고수가 아니던가. 게다가 승전기록이 많은 뛰어난 전략가이기도 했다. 어쩌면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생겨나고 있었다.

유광세는 깍지를 낀 채 고심에 빠졌다.

그리고 반각이 지난 뒤 드디어 그의 입이 열렸다.

“열흘 후 출진하겠다. 반드시 약조는 지켜야 할 것이다.”

“물론입니다. 혼란에 빠진 이 나라를 다시 세울 수 있는 자는 오직 장군뿐이십니다.”

“그렇겠지. 나 말고 그 누가 자격이 있겠느냐.”

소무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품속에서 서신을 하나 더 꺼내었다.

“이것은 절도사께서 고심해서 짜낸 작전입니다. 참고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내가 움직일 것을 알고 철저히도 준비했군. 나중에 한번 읽어보겠네.”

유광세는 서신을 받아서 탁상 위에 올려놓았다.

관심 없는 척을 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관계는 없었다. 궁금해서라도 읽어보지 않을 수가 없을 테니.

“준비해야 할 것이 많으니 저희는 그만 물러가겠습니다.”

“다음엔 전장에서 보겠군.”

더는 이곳에 볼일이 없었다. 소무와 일광은 그에게 작별을 고하고 나왔다.

군영을 벗어나자마자 일광이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넘어왔을까?”

“물론. 이미 걸려들었어.”

일광은 웃음을 참을 수 없다는 듯 킥킥대며 말했다.

“큭큭. 가끔 대장은 사악한 구석이 있단 말이야. 그를 이렇게 이용할 생각을 하다니.”

“그놈 손에 무수히 많은 백성이 피눈물을 흘렸어.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해.”

“당연히 그래야지. 분수도 모르고 감히 황제 자리를 노려?”

“뭐……. 황제가 될 수도 있겠지. 전투가 끝나고도 살아있다면.”

목적을 달성한 만큼 발걸음이 가벼웠다. 이제 다시 장안으로 돌아가야 할 때였다.

이들이 펼치는 경공 속도는 올 때보다 곱절은 빨랐다. 그 모습이 마치 어둠을 가르는 두 줄기 빛살과도 같았다. 그들이 지나는 자리로 강풍이 휘몰아치며 비명을 토해내고 있었다.

속도가 더욱 올라가자 일광이 지치기 시작했다.

“대장, 왜 이렇게 급해?”

“나쁠 것 없잖아.”

“빨리 소소가 보고 싶은 거지? 아니면 딸의 스승이 보고 싶은 거야?”

그 순간 소무가 경공 속도를 늦추며 어깨를 맞추었다.

“어떻게 알았어?”

일광이 설화와의 관계를 눈치채고 있다니, 예상 밖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문제 될 것도 없었다.

“이쯤 되면 모르는 게 바보 아냐?”

“아직 소소는 몰라. 무턱대고 얘기하면 아이가 충격받을 수도 있어.”

“킥킥.”

“왜 웃어?”

“분명 좋아할 테니 빨리 날 잡으라고.”

“후……. 이번 전투가 끝나면 생각해 보려고 했어.”

“잘 생각했어, 대장. 근데 말이야. 빨리 보고 싶은 마음은 알겠는데, 정작 중요한 걸 잊고 있는 것 같은데?”

그 순간 소무의 경공이 급정지했다.

지금쯤이면 설화와 소소가 함께 선물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터. 급한 마음에 빈손으로 갈 뻔했다.

“이거 큰일 날 뻔했군.”

“쫓겨날 뻔한 거 내가 살려준 거야. 빨리 가자고. 나도 사야 할 게 있으니.”

둘은 방향을 틀어 인근 도시로 향했다. 각자 흩어진 후 약속된 장소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다.

한식경이 지난 후 소무의 어깨에는 작은 보따리가 걸려 있었다.

벚꽃이 새겨진 두 벌의 연두색 비단옷을 샀다. 설화와 소소가 맞춰서 입을 수 있는 한 쌍이었다. 스승과 제자가 같은 옷을 입고 수련하는 것을 상상하니 연신 흐뭇했다.

먼저 도착한 것은 소무였으나, 일광은 기다려도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묵묵히 기다리기를 반시진.

기어코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일광의 모습을 본 소무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뭘 그렇게 많이 샀어?”

그의 등 뒤로 엄청난 크기의 봇짐이 보였다. 마치 이삿짐이라고 해도 될 만큼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자는 들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설화원에 기부할 거야. 고아들이라 선물도 못 받아봤을 텐데……. 불쌍해서 원…….”

이 정도라면 급료를 모두 탕진하고, 모아놓은 자금까지 보탰을 것이다.

물론 좋은 의도로 샀겠지만, 분명 그것만이 이유는 아닐 터. 한편으로는 근심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초희 선생한테 환심 사려고 그러는 거지?“

소무의 말에 일광이 고개를 돌리며 대답을 회피했다. 그러더니 앞장서서 쌩하고 내달리며 소리쳤다.

“늦었어! 빨리 가자고, 대장!”

소무가 피식 웃으며 뒤로 따라붙었다.

“후후. 어쨌거나 아이들이 기뻐하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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