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산와족의 무사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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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화 산와족의 무사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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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화 산와족의 무사 (4)
2022.06.19.
이름 모를 야산에 허름하게 지어진 움막집. 그곳으로 일단의 무리가 당도했다.
어른의 허리춤도 안 되는 작은아이 하나가 문 앞에서 겁에 질린 표정을 하고 있었다.
“누구세요?”
제대로 먹지 못해 핼쑥한 얼굴이 일행을 살폈다. 그러던 중 갑자기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낯익은 인물을 발견한 것이다.
“백아야!”
어른들의 등 뒤에서 소소가 등장하며 배시시 웃었다.
아는 얼굴을 보자 백아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소소 언니. 이 아저씨들은 누구야?”
소소가 어깨를 으쓱하며 자부심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언니가 백아 아버지 구해주려고 데려왔어.”
“정말?”
언제 울었냐는 듯 소소가 퉁퉁 부은 눈으로 해맑게 웃었다.
“응. 히히.”
그때 백아의 시선이 소무의 어깨 위로 향했다. 축 늘어져 있는 백상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걱정하지 말거라. 잠시 잠든 것뿐이니.”
소무가 백아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는 오두막 앞에 백상을 내려놓았다.
“빨리 일어나봐, 오라버니! 아버지 도와주러 왔대!”
흔들어도 일어날 기미가 없었다. 혈도를 눌렀으니 그럴 수밖에.
“좀 더 자게 두자꾸나. 아버지의 치료가 끝날 때까지만.”
백아는 어리둥절하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 아이를 향해 의무병들이 다가가 보따리 몇 개를 건네었다.
호기심이 생긴 소소가 먼저 하나를 풀어보았다. 간식 등의 먹거리와 생활하는 데 필요한 물품이 잔뜩 들어있었다.
“전병이다! 이거 먹어봤어?”
전병을 받아든 백아는 한 입 깨물더니 환한 미소를 지었다.
“헤헤. 맛있어 언니.”
신이 난 아이들을 뒤로한 채 소무와 모청이 움막으로 들어갔다.
끼기기긱-!
허름한 나무문이 열리고 내부의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가장 먼저 다가온 것은 무엇인가가 썩어가는 냄새였다. 그리고 짚단 위에 몸을 눕힌 채 죽어가는 한 중년인이 보인다.
“살릴 수 있겠습니까?”
생필신의라 불리는 모청조차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중년인의 이곳저곳을 짚어보며 상세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잠시 후. 그의 입이 달싹이며 어두운 음성을 토해냈다.
“썩은 부위를 도려내고, 온몸의 독기를 몰아내야 하네. 확률이 삼 할을 넘지 못하겠군.”
“무슨 수를 써도 힘들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도 삼 할의 가능성이 있다면 시도는 해볼 만하겠군요.”
“어쨌거나 실패할 확률이 더 높은 상황일세. 시작하기 전에 이자와 대화를 한번 나눠 보시겠는가?”
시름시름 앓고 있는 모습이 제정신이 아닌 듯 보였다. 아무리 봐도 대화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대화라니요?”
모청은 침통에서 두 개의 대침을 꺼냈다.
“독기에 막힌 진기의 흐름을 바꿔 대뇌에 전달한다면, 잠깐 정신이 돌아올 것일세.”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소무가 고개를 끄덕이자 두 개의 대침이 그의 이마와 목을 파고들었다.
푹-! 푸욱-!
약간의 시간이 더 지난 뒤 드디어 변화가 찾아왔다.
“끄으…….”
깨어난 중년인은 힘겹게 주변을 살폈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그의 머리맡에 앉아 있는 소무였다.
“누구……?”
“자네를 이렇게 만든 자를 벌써 잊었나 보군.”
옆에서 지켜보던 모청이 적지 않게 놀랐다. 하필이면 중년인의 팔을 잘라낸 인물이 바로 소무였다니.
사실 소무도 조금 전에야 알아챌 수 있었다. 바로 자신의 검술이 만들어낸 상흔임을. 장안성에서 벌어진 난전에서 쓰러트린 적장 중 한 명이 분명했다.
“모욕하지 말고…… 죽여라…….”
“이렇게 죽으면 자식들은 어찌할 생각인가.”
그 순간 중년인의 눈빛이 흔들렸다.
“내 아이들은 지금 어디 있지?”
힘겹게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기력이 없었다. 입을 여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러던 중 문 앞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딸의 웃음소리를 말이다.
그의 표정이 편안해지자 소무가 다시 말을 이었다.
“아들 녀석이 매일 새벽 약재를 도둑질하러 다니더군. 당신을 살려보겠다고 말이지.”
중년인의 눈시울이 갑자기 붉어졌다.
“우리 상이는 어디 있소? 이 못난 녀석이 시키지도 않은 일을…….”
그는 목이 메는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눈가로 물줄기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모청이 소무의 옆에서 목함을 뒤적거리며 말했다.
“아들은 문 앞에서 자고 있네. 수술을 받을 것인지 어서 결정하시게. 성공할 확률은 삼 할일세.”
어차피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이래죽나 저래죽나 마찬가지였으니. 하지만 그보다 먼저 의문이 떠올랐다.
“왜 날 살리려는 것이오……?”
소무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내 딸이 기를 쓰고 당신을 살리려고 해서 말이지.”
무슨 일인지 영문을 알 수 없었으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나를 살린다면 다시 당신들에게 검을 휘두를 수도 있소.”
“좋을 대로. 다시 죽이면 그뿐이니.”
살려놓고 다시 죽인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기막힐 노릇이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상대는 그럴 만한 능력이 있는 고수였다. 자신이 겪어봐서 알 수 있었다. 전장에서 단 삼 합도 버텨내질 못했으니.
회한에 찬 눈동자가 천정을 응시했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그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본디 금나라 출신이 아니오.”
휘나라의 근본은 금나라에 있다. 그리고 그곳 출신이 아니라는 것은 투항한 타국인이라는 것을 뜻한다.
소무는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놀라지 않았다.
“조금 전에서야 기억이 나더군. 내 짐작대로라면 산와족이겠지.”
“그걸 어찌 알았소?”
“당신의 아이가 내게 펼친 격투술을 보았네. 오래전 같은 격투술을 쓴 자를 만나본 적이 있지. 더군다나 약재에 대한 지식까지 해박하니 틀림없겠더군.”
횡산에 사는 산와(山訛)는 용맹한 소수민족으로 유명하다. 그동안 뛰어난 전사들을 많이 배출하였으며, 이따금 무림으로 나와 이름을 떨친 자들도 있었다.
중년인은 힘겹게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산와의 전사인 백약이라 하오. 살면서 당신과 같은 무인을 만나본 적이 없었소.”
“세상은 넓고 기인은 많은 법이지. 여하간 산와 또한 휘나라에 휩쓸려 전멸한 모양이로군. 그리고 자네는 그들에게 투항했고.”
“나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소. 산와의 마지막 남은 아이들을 지켜야만 했으니.”
“최후의 아이들이라……. 그렇다면 반드시 지켜야겠군. 그럼 나도 제안을 하나 하지.”
생기가 사라진 백약의 눈동자가 소무를 지그시 응시했다.
“아이들의 목숨을 보장해준다면 무엇이든 할 것이오.”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아이들은 우리가 보살펴주지. 만약 수술이 성공한다면 석 달만 우리 군단에서 잡일을 좀 도와줬으면 좋겠군. 요즘 일손이 부족해서 말이지. 이후에는 이곳을 떠나든 말든 상관하지 않겠네.”
“무슨 일을……?”
“경험이 있으니 우리 장군님의 업무를 좀 보좌해주는 것은 어떻겠는가.”
소무의 제안은 거침이 없었다. 이미 장양을 만나 말을 맞춰놓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남은 것은 그의 결정이었다.
“내가 그를 암살할 수도 있지 않소?”
소무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자는 죽었다 깨어나도 장군의 호위무사를 어찌할 수가 없을 테니.
“할 수 있다면.”
“그전에 나도 궁금한 것이 있소.”
“무엇이든지.”
“나를 이렇게 만든 당신은 누구요……?”
“충무교위 소무.”
백약이 참을 수 없다는 힘겹게 웃음을 뿜어냈다.
“당신이 사령관 테무르를 참살했다던 그 랑아대의 대장이란 말이오? 역시 짐작이 맞았어. 큭큭…….”
그의 눈빛에는 기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굴욕스러운 패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갑자기 백약의 눈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모청이 소무의 귓가에 다급히 속삭였다.
“시간이 없네. 속히 수술을 진행해야 함세.”
고개를 끄덕인 소무는 왼손을 내뻗었다. 단전에서 생성된 진기가 그의 손가락을 빠져나오며 문짝을 살며시 강타했다.
콰앙-!
문이 열리자 소소와 백아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아이. 소무가 손가락을 튕기자 무형의 기(氣)가 쏘아져 나오며 기절한 백상의 혈도를 강타했다.
푹-! 푸푹-!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니 인사는 해야겠지. 시간이 없으니 어서 들어오너라.”
어리둥절한 백상이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아버지였다. 오랫동안 의식이 없던 그가 힘겹게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무사한 것을 보니…… 다행이로구나…….”
백상은 한달음에 달려가 그를 잡고 울음을 터트렸다.
오열하는 그 모습에 백아가 옆에 쪼그려 앉아 같이 울기 시작했다.
“슬퍼하지 마라……. 우리 산와족은 함부로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말과는 달리 백약의 두 눈도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흐흑……. 아버지…….”
“만약 내가 잘못된다면…… 이분들을 따라가거라. 그리고…… 동생을 잘 지켜주거라.”
그 말을 끝으로 백약은 다시 정신을 잃고야 말았다.
서럽게 우는 백상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목숨 걸고 약재를 훔쳤을 정도로 효심 깊은 아이였다. 이들을 떼어놓아야 하는 소무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
“이제 다들 물러가거라. 수술에 방해가 될 수 있으니.”
백상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동생을 데리고 나왔다.
그리고 문 앞에서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고 있는 딸의 모습이 보였다. 소무가 품속에서 엽전 뭉치를 꺼내 아이에게 던져 보냈다.
“친구들 데리고 잠시 아랫마을에서 요기라도 하고 오거라.”
엽전 꾸러미를 받아든 소소는 그의 뜻을 단번에 알아챘다.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이들을 데리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 사이 의무병들이 깨끗한 물을 받아와 모청의 주위에 내려놓았다.
“우선 왼팔의 썩은 부분을 도려내야 하네.”
고개를 끄덕인 소무가 오른손을 활짝 펼쳤다. 그러자 구석을 뒹굴던 검 한 자루가 쏜살같이 날아와 감겼다.
그의 행동에 망설임은 없었다. 날카롭게 선 검기가 백약의 어깻죽지를 섬전처럼 스쳐 지나갔다.
서컥-!
동시에 그의 어깨 주위로 대침 십여 개가 쏜살같이 틀어박혔다. 순식간에 이루어진 지혈은 조금의 출혈도 허락하지 않았다.
“내공으로 그의 혈맥과 장기를 보호해주시게.”
그렇지 않아도 소무의 오른손은 이미 그의 단전에 붙어있었다. 소무와 모청은 의외로 호흡이 잘 맞았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모청의 손에는 가느다란 십여 개의 풀줄기가 움켜쥐어져 있었다.
“이것은 복화꽃의 줄기를 이용해 만든 도구일세. 날카롭지만 속은 텅 비어있지.”
날카롭게 세운 줄기가 백약의 몸 곳곳에 삽입되었다. 이어서 속이 빈 줄기의 구멍으로 희뿌연 액체가 주입되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치료법에 의무병들이 뒤에서 감탄 어린 표정으로 보좌했다.
모청의 양손에는 다시 작은 단도와 십여 개의 침이 움켜쥐어졌다. 그의 의술은 반시진이 지나도록 계속되었다. 능숙하게 움직이는 양손은 한 번도 멈추는 일이 없었다.
또다시 일다경이 지난 뒤. 모청의 손등이 주름 가득한 이마의 땀을 닦아내었다.
“어찌 되었습니까?”
“다행히 성공적으로 끝났네. 기혈이 좋아지고 있으니 머지않아 깨어날 것일세.”
“고생하셨습니다.”
소무와 모청은 움막의 밖으로 나와 맑은 공기를 마셨다.
“나는 죽어도 극락에 가기는 힘들겠구만.”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사람들의 타고난 운명을 자꾸 뒤바꿔 놓으니, 하늘이 어찌 좋아하겠는가.”
“저자가 어르신을 만난 것 또한 운명이겠지요.”
모청의 주름진 입가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뭐 그렇게도 되는군. 그러고 보니 랑아대의 출진이 오늘 밤이라고 들었네. 여기서 이러고 있어도 되겠는가?”
소무는 무심히 하늘을 한 번 바라보았다. 어느새 지평선 너머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언제든지 준비는 되어있습니다. 출발하기 전에 딸아이의 얼굴을 한 번 더 보고 싶지만, 포기해야겠군요.”
“허허허. 허허…….”
“왜 웃으십니까?”
“세상 그 누구보다 피비린내 가득한 삶을 살아온 인물이 바로 내 옆에 있네. 그런데 지금 그자가 누구보다 인간다워 보이니 어찌 재밌지 않겠는가.”
소무는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한 번 내저었다.
“잘못 보셨습니다. 저는 보기보다 냉정한 사람입니다.”
“내 다른 건 몰라도 사람 보는 눈만큼은 자신하네. 장군의 영향인가? 아니면 딸아이의 영향인가?”
소무는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
그간의 삶을 잠시 되돌아보았다. 무림을 종횡하던 시절 자신이 웃어본 날이 언제가 있었던가. 기억조차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습관처럼 미소를 머금고 있지 않은가.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 자신의 모습은 조금씩 달라져 가고 있었다.
생각을 정리한 소무는 노을을 바라보며 넌지시 답했다.
“이미 답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거기에 어르신도 포함해야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