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별이 빛을 잃으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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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화 별이 빛을 잃으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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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화 별이 빛을 잃으면 (1)
2022.06.20.
말고삐를 움켜쥔 유광세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만 군세를 이끌고 출진한 그는 대열의 중심에 있었다.
목적지는 한세충이 수성전을 벌이고 있는 양양성이다. 지금은 문향촌을 지나고 있었다.
“이 마을에 진지를 구축하고 하루 쉬었다 가지.”
부장 왕랑이 말을 몰고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했다.
“장군, 아직 이 마을에는 주민들이 남아있습니다.”
오만 명의 병사를 수용하기에도 비좁은 마을이다. 주민들을 끼고 진지를 구축하는 것은 어림도 없었다.
하지만 유광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명령을 내렸다.
“모두 쫓아내.”
“……예?”
“목숨 걸고 자기들을 지켜주러 왔는데 하룻밤 정도는 괜찮잖아? 오히려 영광으로 알고 고마워해야지.”
왕랑은 그의 말에 항명할 자신이 없었다. 불같은 성질을 건드렸다가 장을 치른 부장들이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약탈 명령을 내리지는 않았다는 점이 의외라 할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왕랑의 주도하에 병사들이 주민들을 쫓아내기 시작했다. 날벼락을 맞은 촌민들은 분통을 터트리며 마을을 나갈 수밖에 없었다.
민가를 끼고 진지 구축을 완료하자 어느덧 해가 저물었다.
유광세가 머무르는 곳은 마을 중앙에 세워진 화려한 야전 막사였다.
그는 막사 안에 앉아 찻잔을 움켜쥐었다. 얼굴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흥분이 떠올라 있었다. 마치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표정이었다.
“황제라……. 안서절도사가 나를 밀어준다면 못할 것도 없지.”
자아도취에 한참 빠져있을 무렵이었다. 갑자기 막사 밖이 소란스러워지며, 곳곳에서 뿔피리가 울렸다.
“적이다!”
“적들이 침입했다!”
“모두 전투를 준비하라!”
재빨리 막사 밖으로 뛰쳐나온 유광세는 주변을 살폈다.
마을 밖 풀숲 위로 휘나라의 깃발 수십 개가 펄럭이고 있었다. 아직 어느 곳에서도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호들갑 떨지 마라!”
유광세의 호통에 근처에 있던 남천 부장이 다가왔다.
“장군, 적들의 기습입니다!”
그 순간 유광세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그의 오른손이 사라졌다 싶더니 어느새 남천의 투구를 후려치고 있었다.
빠각-!
“크윽!”
투구를 움켜쥔 채 비틀거리는 그에게 호통이 이어졌다.
“부장이라는 놈이 고작 이딴 기만술도 못 알아봐!?”
정신을 차린 남천은 휘나라의 깃발들을 집중해서 살펴보았다. 제자리에서 펄럭이기만 할 뿐, 조금의 움직임도 없었다.
“죄, 죄송합니다…….”
“저쪽은 신경 쓰지 말고 다른 곳의 방비를 강화해!”
“예, 장군!”
남천이 사라지고 유광세는 다시 막사로 향했다.
‘성동격서 또한 아니다. 단지 우리에게 보내는 경고였단 말인가? 미친놈들.’
아군의 진지 근처에 깃발을 꽂고 사라지다니. 적들의 정확한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날이 완전히 저물고 병사들이 잠에 들 무렵이었다. 그때 또 한 번의 소란이 찾아왔다.
꽝-! 꽝-! 꽝-!
진군을 알리는 북소리였다. 이번엔 유광세도 느낌이 안 좋았는지 자신의 창을 움켜쥐고 뛰쳐나갔다.
이미 병사들은 모두 기상하여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모두 대열을 갖추어라!”
모두가 무기를 움켜쥐며 방어진형을 형성했다. 병사들은 잠이 모두 달아나버렸다.
그런데 무엇인가가 부자연스러웠다. 아무리 기다려도 북소리만 들려올 뿐, 적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닌가.
근처에 있던 왕랑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상합니다. 저들이 굳이 북까지 치면서 기습을 알릴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이미 유광세도 눈치챈 부분이었다.
화경의 눈동자가 안광을 빛내며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무리 살펴봐도 대규모의 적군은 보이지 않았다. 또다시 기만술에 농락당한 것이었다.
이글거리는 유광세의 시선이 한 장수를 향했다. 군단의 정예부대인 용무군을 이끄는 사마철이었다.
“저 빌어먹을 놈들을 모두 쓸어버려.”
고개를 한 번 끄덕인 사마철이 쏜살같이 내달렸다. 군단의 제일 맹장답게 가히 전광석화 같은 몸놀림이었다.
그가 사라지고 난 뒤 유광세가 또 한 명의 부장을 지목했다. 첨병대를 이끄는 한상 부장이었다.
“너 이리 안 와?”
그가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얼굴이 사색이 된 한상이 상장군을 향해 쭈뼛쭈뼛 다가갔다. 곧이어 유광세의 앞발이 그의 앞가슴을 강타했다.
콰직-!
“크윽!”
한상은 한 바퀴를 구르고 나서야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휘하 병사들 앞에서 망신을 당했지만 흔한 일인 듯, 이상하게 보는 자가 없었다.
“넌 대체 뭐 하는 새끼야!? 저딴 놈들이 이곳까지 침투하는 것도 못 막아?”
“죄, 죄송합니다, 장군.”
씩씩대는 유광세는 그에게 한참이나 호통을 쳤다.
그러길 잠시 후. 공격을 나갔던 사마철이 다시 복귀해왔다. 손아귀에는 숨을 헐떡이는 적병 한 명이 붙잡혀 있었다. 온몸에 진흙을 바르고, 풀과 나뭇가지로 위장한 모습이었다.
“놈들이 사방으로 도주하는 터에 겨우 이놈만 잡을 수 있었습니다.”
유광세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그가 고작 한 명만을 붙잡았다니.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놈들의 경공이 그리 빨랐단 말인가?”
“하나같이 일류를 넘는 수준이었습니다. 우리 용무군의 병사들보다 뛰어납니다.”
그가 자신이 이끄는 정예부대를 낮춰 말하고 있었다. 분했지만 적들의 수준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휘나라의 특공대인가 보군. 이놈을 심문해서 모든 것을 불게 해.”
“알겠습니다.”
사마철이 기절한 적병을 이끌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유광세도 등을 돌리며 막사로 들어갔다.
소란은 점차 사그라졌다. 하지만 이미 잠이 확 달아나버린 병사들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야만 했다.
다음 날 아침.
군단이 다시 행군을 개시했다.
길이 넓다 한들 오만 군세가 진형을 유지하며 이동할 수는 없는 법이다. 뱀처럼 길게 늘어선 병사들은 쉼 없이 걸었다.
정찰을 강화했지만, 넓어진 측면까지 모두 감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열이 우측으로 산비탈을 낀 협곡에 접어들 무렵. 중심부에 있던 유광세의 고개가 우측 위로 향했다. 예리한 그의 감각이 무엇인가 부자연스러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저곳으로 첨병을 보내거라.”
“예, 장군.”
명을 받든 한상이 첨병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을 시점이었다. 그러나 매복해 있던 휘나라의 병사들이 한발 빨랐다.
산비탈 위에서 누군가의 명령 소리가 울려 펴졌다.
“발사하라!!!”
팟-! 파파팟-!
직사로 쏘아진 화살들이 행군하는 병사들을 사정없이 꿰뚫기 시작했다.
푹-! 푸푸푹-!
“크윽!”
“크헉!
순식간에 백여 명의 병사들이 쓰러지자 왕랑 부장이 말을 타고 다니며 외쳤다.
“당황하지 말고 응사하라!”
궁수들이 시위를 당겼지만, 적들이 나무 뒤에 숨어있었기에 조준조차 쉽지가 않았다.
분노한 유광세가 근처의 병사에게서 장창 하나를 뺏어 들었다.
“이 쥐새끼들이 감히!”
그의 손아귀를 빠져나간 장창이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바람을 찢으며 회전하는 창에는 적지 않은 내력이 담겨있었다.
쐐에에엑-!
창끝이 나무를 꿰뚫으며 한 명의 적병을 관통했다.
쿠웅-!
“모두 쓸어버려!”
사마철이 병사들을 이끌고 산비탈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이 움직일 무렵, 적들은 이미 사방으로 도주하고 있었다.
지켜보던 유광세는 분한 나머지 두 손을 부르르 떨었다.
적들의 수가 많지 않았기에 피해는 크지 않았다. 문제는 병사들의 사기가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느새 되돌아온 사마철이 울분을 토해내며 말했다.
“고작 백여 명밖에 안 되는 놈들이었습니다.”
백 명에게 오만 군세가 휘둘리고 있었으니 미쳐버릴 노릇이었다.
“용무군을 보내 모두 잡아! 끝까지 쫓으란 말이야!”
“추격하는 즉시 흩어져 도주하는 터라 쉽지 않습니다. 섣불리 쫓다간 오히려 용무군이 각개격파 당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용무대장 혼자 이리저리 움직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군단의 제일 맹장이 본진을 멀리 벗어나는 것 또한 위험요소였으니.
“후. 정말 돌아버리겠군.”
“우리에게 놈들보다 더 강한 특공대가 있다면 모를까, 잡을 방도가 없습니다.”
유광세는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이마에 손을 얹고 한숨을 내쉬었다. 적들의 공격은 가랑비에 불가했지만, 그것이 계속되자 여간 성가시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경계를 강화하고 이곳을 신속히 빠져나간다.”
“예, 장군.”
군단이 다시 행군을 개시했다. 그리고 휘나라의 기습은 어김없이 계속되었다. 조금의 빈틈이라도 보인다면 어김없이 다가와 화살을 날리고 도망쳤다.
그나마 낮에는 버틸 만한 정도였다. 밤이 찾아오면 곳곳에서 뿔피리를 불거나 불을 지르고 도망치기 일쑤였으니, 계속되는 그들의 기만에 군단 전체가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사태가 이쯤 되자 병사들의 피로가 극에 달하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퀭한 눈빛을 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보다 못한 남천 부장이 상장군의 막사를 찾았다.
“장군, 병사들이 이틀이 지나도록 한숨도 못 잤습니다. 이대로 가면 군단 전체가 무너질 것입니다.”
그것을 그가 어찌 모르겠는가. 문제는 아무리 고심해도 방법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유광세는 지금 극도로 예민해져 있었다. 참고 있던 짜증이 폭발하고야 말았다.
“그럼 가서 해결책을 찾아와!!!”
탁상 위의 전술지도를 움켜쥔 그는 남천을 향해 던져버렸다. 무의식중에 내공까지 실어 보낸 공격이었다.
남천은 반사적으로 상체를 비틀었다.
콰앙-!
“피해!?”
억울했던 남천은 양손이 부르르 떨렸다. 그 또한 예민해져 있었기에 그만 감정을 조절하지 못했다.
“제가 왜 맞아야 합니까? 한숨도 못 자고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유광세는 어이가 없었는지 헛웃음을 내뱉었다.
평생을 관에 있으면서 감히 자신에게 대든 인물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들 중 지금까지 살아있는 인물은 한 명도 없었다.
“너 지금 뭐라고 했어.”
그 순간 남천은 어젯밤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머리를 맞은 기억이 떠올랐다. 자신도 모르게 머리가 핑하고 도는 것이 느껴졌다. 더는 눈에 뵈는 게 없었다. 맞아 죽더라도 이판사판이었다.
“그럼 제가 방법을 찾아오면 되겠습니까?”
유광세의 한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명분 없이 부장을 때려죽이면 군단의 사기가 저하될 우려가 있었다. 고맙게도 스스로 빌미를 만들어 주었으니 오히려 환영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마침 화풀이 대상이 필요했던 터였으니.
“좋다. 한 시진을 주지.”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모습이 섬뜩해 보였다.
웃음 속에 내포된 살기를 남천이 모를 리가 없었다. 고개를 한 번 숙여 보인 그는 말없이 장군의 막사를 나왔다.
속은 후련했지만, 정신이 들고 보니 후회부터 밀려들었다.
‘내가 어쩌자고 그런 짓을.’
이미 칼은 뽑았고, 돌이킬 수가 없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어깨가 축 처진 그는 힘없는 발걸음으로 정처 없이 진영을 떠돌았다. 한 시진 뒤 유광세에게 맞아 죽을 자신의 운명을 생각하면서 말이다.
“후…….”
한숨을 내쉬고 있을 찰나. 돌연 남천의 시야에 낯익은 인물 한 명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뒷짐을 쥔 채 위관급 장교를 따라 장군의 막사로 향하고 있었다.
‘저자는……?’
남천은 생각할 것도 없이 한달음에 그곳으로 달려갔다. 이어서 다짜고짜 장교에게 물었다.
“지금 어디로 가는 것인가?”
“이분은 장안에서 병력을 이끌고 오신 교위십니다. 장군이 계신 곳으로 안내해달라고 하셔서…….”
남천이 재빨리 장교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지금부터 내가 안내하겠네. 피곤해 보이는데 돌아가서 좀 쉬시게.”
“감사합니다, 부장님.”
이곳에 막 도착한 소무였다. 작전을 의논하기 위해 유광세를 만나러 가던 참이었다.
소무의 얼굴에는 의아함이 떠올라 있었다.
“우리는 구면이로군.”
남천의 품계는 소무보다 두 단계는 더 낮았다. 그가 고개를 살며시 숙여 보이며 답했다.
“예. 제가 한중에 전령으로 찾아갔을 때 뵈었지요.”
“근데 안색이 별로 안 좋아 보이는군. 무슨 일이 있었지?”
“사실은 그게…….”
남천은 그간 있었던 일을 모두 설명했다. 휘나라의 기만술부터 조금 전 있었던 일까지 모두 털어놨다. 어차피 눈앞의 인물이 마지막 희망이었으니 숨길 이유가 없었다.
소무는 이해한다는 듯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렇게 된 것이로군. 그런 상황에선 나라도 참지 못했겠지.”
“휴. 염치는 없지만 좀 도와주실 수 있겠는지요?”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듯 소무의 고개가 바로 끄덕여졌다.
“그리하지. 나도 자네에게 부탁할 일이 하나 있으니.”
“여기까지 온 이상 못 할 것이 없습니다. 무엇이든 말씀만 하십시오.”
소무는 작은 목소리로 무엇인가를 설명했다. 그리고 그것을 듣는 남천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해갔다.
반각이 흐른 뒤. 남천의 얼굴은 오히려 한층 더 밝아져 있었다.
“오히려 제가 고마워해야 할 부탁이로군요. 반드시 그리하겠습니다.”
“그럼 계약 성립이로군. 이제 장군의 막사로 안내해주시겠는가?”
“허나 지금 바로 그곳으로 가시면……?”
소무의 시선이 잠시 하늘을 향했다. 시간을 가늠해 보고는 나직이 말했다.
“지금쯤이면 내 부하들이 움직이기 시작했겠군. 장군에겐 자네의 부탁을 받아 도와준 것으로 하지.”
“교위님의 부하라면…… 랑아대가 이미 움직였다는 말입니까?”
소무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휘나라의 기만전술은 우리도 파악하고 있었지. 어찌 더 두고 볼 수 있었겠는가.”
섬서의 특공대인 랑아대의 소문은 남천도 알고 있었다. 그들이 직접 휘나라의 특공대를 상대한다고 한다.
희망이 생겨났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고맙습니다. 하지만 부하들을 돕지 않으셔도 되겠는지요? 보통 놈들이 아닙니다.”
“후후. 우리 랑아대의 녀석들도 보통은 아니야.”
소무의 말에서 자신감을 느꼈던 것일까? 남천의 얼굴에서 불안감이 점차 사그라졌다.
“그럼 대장님만 믿고 제 모든 걸 걸어보겠습니다.”
남천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잠시 떠올랐다가 이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