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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화 별이 빛을 잃으면 (2) (141/250)


141화 별이 빛을 잃으면 (2)
2022.06.21.


유광세를 만난 소무는 곧바로 진지를 빠져 나왔다.

랑아대의 집결 장소로 이동하는 그는 표정이 별로 밝지 않았다. 별로 유쾌한 만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름 모를 야산의 중턱에 이르렀을 즈음이었다.

“크악!”

오십여 장 거리에서 들려온 작은 비명이었다.

소무의 신형이 유령처럼 늘어지며 그곳으로 다가갔다.

순식간에 도착한 장소에는 숨을 고르는 랑아대원이 보였다. 그의 검 끝은 휘나라의 병사를 관통하여 나무에 틀어박혀 있었다.

“수련이 부족한 모양이군. 고작 이런 녀석에게 지치다니.”

대원은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후, 깜짝이야. 인기척 좀 내고 오세요. 심장 멎는 줄 알았네.”

화산파 출신의 대원 청해였다.

소무는 의아한 얼굴로 주변을 살펴보았다. 이곳저곳에 고전한 흔적이 남아있었다. 랑아대에서도 최상위급 실력인 청해가 지칠 정도라니.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이놈이 특별공격대의 대장이었나?”

청해가 나무에 틀어박힌 검을 뽑아내며 말했다.

“이놈은 백인장이에요.”

백인장급이라면 부대장 정도의 위치일 터. 그렇다면 특공대의 대장은 따로 있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자칫 랑아대에서도 피해자가 나올 가능성이 있었다.

“한번 둘러봐야겠군.”

소무의 속마음을 눈치챈 청해가 그를 만류했다.

“걱정 안 해도 돼요. 대장 놈은 일광 형님이 맡는다고 했으니.”

“그럼 신경 안 써도 되겠군. 바로 집결 장소로 이동하지.”

소무와 청해는 함께 경공을 펼치며 이동했다. 장소는 삼백여 장이 떨어진 텅 빈 사찰이었다.

이미 대원 대부분이 집결을 마친 상태였다.

일각이 더 지난 후에서야 모두가 한자리에 모였다.

눈에 띄게 다친 부하는 없었지만, 일부는 다소 지친 모습이었다. 예상보다 적들의 무공이 만만치 않았던 모양이었다.

“모두 성공인가?”

대등한 인원수였기에 각각 한 명씩 맡아 상대하기로 했었다. 도망친 인물이 있는지 알아야 했다.

일광이 어깨의 근육을 풀어대며 답했다.

“당연한 거 아냐? 모두 죽였어. 근데 대장은 왜 벌써 돌아왔어?”

“역시나 말이 안 통해. 마지막으로 기회를 줬음에도 걷어차 버리더군.”

“끝까지 지휘권을 독차지하겠다는 말이지?”

“맞아. 오히려 우리도 자신의 지휘 아래 움직여야 한다더군.”

“미친놈이군. 그럼 이제 어쩔 생각이야?”

“당장은 개별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곧 행군이 재개될 테니 우리도 출발하지.”

소무는 랑아대를 이끌고 산길을 나아갔다. 은밀히 숨어 유광세가 이끄는 군단을 감시하면서 말이다.

목적은 양양성을 포위한 적군의 배후를 공격하는 것이다. 휘나라 또한 그것을 알고 있는지 필사적으로 저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랑아대의 참전 이후로 그들의 기만전술은 모두 수포가 되어갔다.

군단의 행군은 거침이 없어졌다.

이틀이 지나고 병사들의 피로가 다시 회복되고 있을 즈음이었다.

전면에서 휘나라의 결사대가 대열을 갖추어 길목을 틀어막고 있었다. 그들의 숫자는 천여 명에 육박했다.

유광세가 이끄는 오만 대군은 대열을 갖추며 전투를 준비했다. 그 모습을 랑아대가 야산 위에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다.

랑아대의 철두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시간을 벌려는 수작인가 본데요?”

소무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저 정도로는 어림도 없어. 뭔가 꿍꿍이가 있을지 모르니 좀 더 지켜보지.”

백여 마리의 검은 이리떼는 음지에서 그 모습을 구경했다. 용무군이 앞장서서 길목을 돌파하는 모습을 말이다.

결사대의 저지선은 생각보다 쉽게 뚫렸다. 전투가 벌어지자마자 아군이 일방적으로 승기를 휘어잡은 것이다.

적들을 학살하는 사마철의 용맹함은 무시무시할 정도였다.

“생각보다 아군의 기세가 대단한데요?”

전투는 일각도 안 되어 막바지로 치달았다. 휘나라의 결사대는 이미 도주를 시작하고 있었다.

소무가 눈빛을 빛내어 적들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의 시선은 적들의 신체에 각인된 작은 문양에 고정되어 있었다.

“뭔가 좀 이상하군.”

철두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도망치는 것이 뭐가 이상해요?”

“저들은 정규군이 아니다. 노예부대인 것 같군.”

“정규군을 결사대로 쓰기엔 아깝잖아요.”

“그런 뜻이 아니야. 노예부대는 죽더라도 퇴각하지 않는다. 가족들이 인질로 잡혀있기 때문이지.”

소무의 말대로 무엇인가가 이상했다.

이미 승리에 눈이 뒤집힌 아군은 그들을 정신없이 추격하고 있었다.

패배만 거듭했던 군단이었기에 모처럼 맛본 승리의 쾌감은 엄청났다.

“모조리 척살하라! 한 놈도 살려 보내지 않을 것이다!”

유광세조차 추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기를 일다경. 군단은 또다시 천여 명으로 구성된 다른 결사대를 마주했다.

이미 한 번 승리를 손쉽게 거머쥔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돌파하라!”

파도처럼 밀려드는 군세는 적진의 방어벽을 단숨에 뚫어버렸다. 그리고 어김없이 도주하는 휘나라의 결사대. 재차 그들을 추격하는 유광세는 극도의 흥분상태에 젖어갔다.

“누구도 우리의 앞을 막을 수 없다!”

그 모습을 멀찍이서 지켜보던 일광이 코웃음을 쳤다.

“미친…….”

이상기류를 감지한 소무가 대원 한 명을 지목했다. 화산파 출신이자 청해의 사형인 현정이었다.

“앞서가서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고 와.”

“예,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현정이 전면을 향해 쏜살같이 사라졌다.

소무가 다시 철두를 불러 뭔가를 속삭였다. 그가 고개를 끄덕인 것을 확인하고는 마지막 말을 전달했다.

“지금 내가 말한 것을 빨리 한백 부장에게 전해. 시간이 없다.”

“알겠습니다.”

현정과 철두가 사라지고, 나머지는 군단과 보폭을 함께하며 산속을 진군했다.

한편 네 부대의 적군을 연달아 격파한 유광세는 환희에 휩싸여 있었다.

“놓치지 마라!”

군단의 질주는 멈출 줄을 몰랐다.

추격은 한 시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백 명 이상을 잡아 죽인 유광세의 두 눈은 점차 광기로 물들어갔다.

그때 부장 남천이 다급히 그를 향해 다가갔다.

“장군, 이쪽은 막다른 길입니다!”

전면으로 가파른 산맥에 둘러싸인 분지가 보였다.

살아남은 휘나라 병사들은 천오백여 명. 더는 그들이 도망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하늘이 우릴 돕는구나! 추격을 멈추지 마라!”

일이 너무 순조롭게 풀렸기 때문일까? 돌연 이상함을 느낀 남천이 그를 만류했다.

“느낌이 좋지 않으니 이쯤에서 물러서는 것이 좋겠습니다.”

유광세가 눈을 부라리며 그를 밀쳐냈다.

“다 잡은 놈들을 앞에 두고 후퇴라니, 무슨 개소리야!”

“혹시 모르니 부대를 둘로 나누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고작 천오백 명의 병사를 섬멸하고자 병력을 모두 움직일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하지만 유광세의 생각은 달랐다. 모든 병사의 사기를 올려주기 위한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으니.

“너, 전투 끝나고 보자.”

그렇지 않아도 남천을 벼르고 있었던 유광세였다. 말을 마친 그는 병사들과 함께 돌진을 시작하고 있었다.

남천도 하는 수 없이 그를 따라 대열에 합류했다.

적군과 가까워질수록 남천의 불안감은 더해져만 갔다. 포위당한 적들의 얼굴을 보았기 때문이다. 학살당할 운명 앞에서도 그들은 태연했다. 분명 두려워하는 표정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병사들은 함성과 함께 돌진해 나갔다.

“우와아아!!!”

“와아아아아!!!”

그 순간 남천은 선두에 있던 유광세와 사마철이 흠칫하며 멈추는 것을 보았다. 무엇인가를 느끼고 당황하는 움직임이었다.

그때 어디선가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뒤를 돌아보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두두두두두-!!!

먼 곳에서부터 지면이 진동하며 희뿌연 연기가 일고 있었다.

“설마?”

휘나라의 기마부대였다.

더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적들은 자신들을 이곳으로 유인한 것이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이런 낭패가…….”

남천은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며 상황을 파악해보았다.

군단 전체가 이미 분지 안에 들어와 있었다. 반나절이나 뒤처진 보급부대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삼면이 십장 높이의 깎아지른 절벽이라 퇴로는 없었다. 앞에는 노예부대가, 뒤에는 기마부대가 돌진해 오고 있었다.

“모, 모두 멈추어라!”

남천의 고함에 뒤를 돌아본 병사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갔다.

기마대의 숫자는 대략 이천 정도쯤 되어 보였다. 많은 수는 아니었지만, 아군은 모두 보병이었기에 치명적인 상황이었다.

후미에서 기병들의 공격을 받는다면 진세가 단번에 와해될 게 분명했다.

당황한 유광세가 다시 후방으로 달려오며 소리쳤다.

“적들의 숫자는 아군의 일 할도 안 된다! 당황하지 말고 대열을 갖추어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쉬운 상황이 아니었다.

사마철이 다가오며 소리쳤다. 그의 손가락 끝이 노예부대를 가리켰다.

“제가 용무군을 이끌고 저들을 먼저 끝장내겠습니다. 장군께서 나머지를 지휘하여 기마대를 섬멸해주십시오.”

지금으로선 그것이 최선이었다. 큰 피해를 감수해야겠지만 이길 자신은 있었다.

유광세가 고개를 끄덕이며 뭐라 소리칠 찰나였다. 돌연 군단을 둘러싼 절벽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지며 꿈틀거렸다.

“화살 장전!!!”

절벽 위를 올려본 유광세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휘나라의 궁수들이 활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까마득하게 늘어선 그들의 숫자는 수천 명에 이르렀다. 작정하고 이곳에 함정을 파놓은 모양이었다.

더는 완벽할 수가 없는 포위망이었다.

부장 왕랑이 다급히 달려오며 소리쳤다.

“어찌해야 합니까?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장군!”

도무지 어찌할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하늘 높이 치솟았던 군단의 사기는 순식간에 곤두박질쳤다. 병사들은 당황하며 우왕좌왕했다.

“이런 빌어먹을…….”

그 순간 등 뒤에서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노예부대의 지휘관으로 짐작되는 인물이었다.

“하하핫! 지옥의 구덩이에 들어온 것을 환영한다!”

그가 대놓고 도발해왔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그때 절벽 위에서 궁수부대의 대장이 한 손을 올리며 소리쳤다.

“조준!!!”

유광세는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사색이 된 병사들은 겁에 질려 떨고 있었다. 이들을 이끌고서는 승리할 자신이 없었다.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기마대를 돌파하여 퇴각한다!”

남천이 다급히 달려와 그에게 소리쳤다.

“장군, 우리는 모두 보병입니다! 돌파에 성공한들 기마대로부터 어찌 도망칠 수 있겠습니까? 경공이 빠른 극소수의 병사만이 살아남을 것입니다!”

“그들이라도 살려야 하지 않겠느냐!”

“어찌 싸워보지도 않고…….”

유광세는 듣기 싫다는 듯 등을 돌리며 돌파를 준비했다.

남천은 한숨을 내쉬며 무심코 절벽 위를 바라보았다. 궁수부대의 대장이 발사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발사…….”

순간 남천의 두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발사 명령을 내리려던 그의 수급이 돌연 허공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보고서도 믿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이어서 궁수부대의 진형 곳곳에서 혈무(血霧)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그곳에선 어김없이 검은 이리가 궁수들을 사정없이 물어뜯고 있었다.

“소무 대장님이……?”

남천은 절벽 위를 둘러보며 전율했다.

소문으로만 들어보았던 랑아대의 무공은 상상을 초월했다. 궁수들은 제대로 저항도 못 하고 추풍낙엽처럼 쓰러져갔다.

격정에 차오른 남천이 밝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지원군이 왔다! 적들의 궁수부대가 무너지고 있다!!”

무너졌던 군단의 사기가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최악의 상황은 모면했지만, 아직 끝난 것은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휘나라의 기병들이 다가오고 있었으니.

“어서 방어진형을 갖추어라!!!”

병사들이 조금씩 용기를 내어 밀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예상치 못한 또 한 번의 기적이 일어났다.

어디선가 웅장한 뿔피리 소리가 뿜어져 나오며 분지 전체를 진동시켰다.

뿌우우웅-!!!

돌진하던 휘나라의 기병들이 속도를 줄이며 주춤거렸다. 한눈에 보아도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남천의 시선이 뿔피리가 들려오는 곳을 바라보았다.

새로운 기병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이곳을 향해 미친 듯이 다가오고 있었다. 무려 휘나라 기마대와 비슷한 수준의 규모였다.

두 갈래로 나뉜 기수들은 그들의 양쪽 측면을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기수들이 움켜쥔 깃발의 문양. 그것을 확인한 남천은 감정이 복받쳐 올라 눈물을 글썽였다. 장안의 기마대였기 때문이다.

근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한백 부장이었다.

남천은 어디선가 궁수들을 학살하고 있을 소무에게 마음속 깊이 경의를 표했다.

‘어찌 이런 미친 전술을…….’

지원군이 절묘한 상황에 도착했다는 것은 그가 적군의 유인책을 한발 앞서 눈치챘다는 것을 뜻한다.

만약 자신이었다면 매복을 알려 군단이 이곳으로 진입하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군단을 함정으로 들여보내는 것을 택했다.

노예부대를 포위한 유광세의 군단. 그리고 그들을 포위한 휘나라의 정규군. 그리고 또다시 그들을 포위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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