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별이 빛을 잃으면 (3)
(142/250)
142화 별이 빛을 잃으면 (3)
(142/250)
142화 별이 빛을 잃으면 (3)
2022.06.22.
전장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역전되었다.
절벽 위의 궁수들은 랑아대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와해되어갔다. 노예부대 또한 사마철이 이끄는 용무군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남은 것은 휘나라의 기마부대. 그들의 상황이 가장 절망적이었다.
“돌격하라!!!”
어느새 태세를 전환하여 군단을 지휘하던 유광세였다.
보병들이 기마대를 향해 마주 돌진하는 모습은 쉽게 볼 수 없는 일이다. 믿고 있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휘나라의 기마대는 속도를 늦추며 당황했다. 돌발 상황에 갈피를 못 잡는 것이리라. 전면에서는 수만 명의 보병이, 측면과 후미에서는 한백 부장의 기마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의 대장은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우리가 바로 위대한 초원의 전사들이다!! 지금부터 최후의 돌격을 시작할 것이다!!!”
휘나라에 흡수당한 몽골의 기마대 중 하나인 듯했다.
명령이 내려지자 기수들의 눈빛이 변했다. 앉아서 죽을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기수들의 창끝이 보병들을 향했다.
그때 의기양양해진 유광세가 병사들을 제치며 선두로 나섰다.
“돌격하라! 멈추는 놈은 목을 벨 것이다!”
기마대의 기세가 대단했지만, 화경의 눈에는 가소로울 뿐이었다.
유광세가 지면을 박차고 떠올랐다. 그의 신형이 기수들의 사이를 폭풍처럼 회전하며 지나쳤다.
써컹-!!!
보기 좋게 네 명의 기수를 쓰러트렸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잠시 후 기수들의 창이 마주 오는 보병들을 꿰뚫기 시작했다.
쾅-! 콰콰쾅-!!!
창에 찔리고, 말 머리에 부딪혀 쓰러진 병사가 천여 명을 넘어섰다.
선두의 보병들을 쓰러트린 대가로 기마대는 속도를 잃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것은 힘과 생명을 다한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들의 뒤를 향해 다른 기수들이 돌격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섬서를 통틀어 경험과 나이가 가장 많은 노장, 한백 부장의 얼굴에 자리한 한줄기 자상이 꿈틀거렸다.
“지금부터 최강의 기마대를 가려보자!!!”
선두에서 창을 휘두르는 한백의 창술은 일품이었다.
소무의 도움으로 수련하게 된 마교의 진격멸혼창(進擊滅魂槍). 그것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창끝에 서린 서늘한 창기(槍氣)가 모든 것을 갈라내고 있었다.
서걱-! 서컹-!
한백의 창이 휘둘러질 때마다 어김없이 기수들이 쓰러졌다. 적진을 파고드는 그의 용맹함에 부하들은 전의가 불타올랐다.
후미를 공격당하는 휘나라의 기수들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전면에서도 보병들이 개떼처럼 밀려들고 있었다.
“크윽!”
“크허억!”
휘나라의 기수들이 내지르는 처절한 비명이 분지를 뒤흔들었다.
전투라 부를 수조차 없는 싸움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야말로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대장이 유광세의 창에 꿰뚫리는 순간, 기수들의 의지는 무너져 내렸다.
그때 부장급의 기수가 다급히 소리쳤다.
“투항하겠소! 공격을 멈추시오!”
이미 휘나라에 한 번 투항했던 전사들이다. 두 번은 못 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무의미한 개죽음을 피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러나 유광세는 그것을 받아줄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피를 뒤집어쓴 그가 야차 같은 미소로 소리쳤다.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그의 목소리를 확인한 기수들은 최후의 항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전세가 완전히 기울자 한백이 말머리를 돌렸다. 퇴각 신호와 함께 말이다.
“우리는 물러난다!”
지원군으로 왔던 기마대가 썰물 빠지듯 전장을 이탈했다.
그 모습을 확인한 유광세가 고래고래 소리를 내질렀다.
“아직 전투가 끝나지도 않았거늘 어딜 가는 것이냐! 끝까지 싸우거라!”
한백 부장은 그의 명령을 무시했다. 그의 임무는 여기까지였기 때문이다. 소무와 미리 말을 맞추었던 부분이었다.
이미 전세가 완전히 기울었기에 달라질 것은 없었다. 유광세는 다시 기수들을 쓰러트리는 것에 집중했다.
그리고 휘나라의 궁수들이 진을 치고 있던 절벽 위. 그곳의 상황도 마무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숫자가 아무리 많은들 원거리 병과가 랑아대의 상대가 될 수는 없었다. 살아서 도망친 궁수들의 숫자는 이 할을 넘지 못했다.
한식경이 더 지난 뒤, 승리의 함성이 분지를 뒤흔들었다. 지원군들은 이미 어딘가로 자취를 감춘 이후였다.
승리의 장소에서 십여 리가 떨어진 어느 들판.
그곳에선 소무와 한백 부장이 재회하고 있었다.
“우리 쪽의 피해는 없는 것 같군요. 고생하셨습니다.”
소무의 품계가 한 단계 더 높았지만, 한백의 경력을 고려해 존대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한백은 불편하다는 듯 고개를 푹 숙여 보였다. 그는 뼛속까지 무관이었다.
“랑아대에서 정보를 제때 전달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소무의 시선이 양양성이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여하튼 휘나라의 요격부대들은 모두 섬멸한 것 같습니다. 더는 진군을 방해하는 적이 없을 터이니 목적지에서 만나지요.”
“알겠습니다.”
랑아대의 이동속도는 기마부대보다 더 빨랐다. 먼저 가서 상황을 살펴볼 요령이었다.
이곳에서부터 양양성까지는 반나절이면 도착한다.
랑아대는 목적지를 향해 직선으로 질주했다.
경공으로 산을 가로지르고, 어지간한 강은 수상비를 펼쳐 건넜다.
보폭을 맞추어 달리던 중 현정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대장님, 마지막에 왜 우리 기마대가 먼저 철수한 것입니까?”
“돌파력을 잃은 기마대는 창병들이 포위 섬멸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고요?”
소무는 현정을 한 번 바라보고는 피식 웃었다.
“눈치 하난 빠른 녀석이군. 전투가 끝나면 빠져나올 수가 없어.”
“상장군이 우리 병력을 가로챈다는 말인가요?”
목초지가 부족한 송나라는 기병이 굉장히 귀했다.
군침을 흘릴 만한 장안의 기마대를 돌려보내지 않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의 군단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어찌 예측할 수 있겠는가. 불확실성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최근에는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다더군. 잠시 좀 쉬었다 가지.”
대원들이 모여 앉아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였다.
그들의 머리 위로 백여 마리의 새떼가 대열을 맞추어 지나가고 있었다. 그 모습에 대원 한 명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대장님, 저 새들 모습이 꼭 우리 같지 않아요?”
“후후. 그런 것도 같군. 새들은 무리를 지어 이동하면 혼자 나는 것보다 칠 할을 더 멀리 갈 수 있다. 서로의 의지를 복돋아주기 때문이지.”
소무의 말에 대원들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시선을 모았다.
“정말입니까?”
“하하. 그런 이유가 있었군요.”
소무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서로를 믿어라. 그리고 지켜라. 단 한 명의 죽음도 허락하지 않겠다.”
어느새 날이 어둑해지며 은은한 달빛이 내리깔리기 시작했다.
도착한 곳은 양양성에서 삼십여 리가 떨어진 토산이었다. 그곳에는 이미 대기하고 있는 다른 부대가 있었다.
날카로운 눈빛을 지닌 삼천여 명의 전사들. 그리고 강인한 인상의 무장 한 명이 뒷짐을 쥔 채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잠시 후 소무를 발견한 악비의 표정이 밝아졌다.
“오셨는가, 소무 대장. 먼 길 오시느라 수고했네.”
“아닙니다. 예정보다 빨리 오셨군요.”
“마음이 급해서 말이지. 여하간 수고하셨네. 장군은 어찌 지내시는가?”
악비와 장양은 같은 사부 밑에서 배운 사형제 지간이다. 사제의 안위부터 찾는 그의 모습에서 깊은 애틋함이 느껴졌다.
“장안에 머무르고 계십니다. 누구보다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지요.”
“허허. 여전하구만.”
소무가 양양성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물었다.
“전황은 좀 어떻습니까?”
그의 표정이 다시금 어두워졌다. 먼저 도착한 악비는 이미 정찰을 마친 상태였다.
“놈들의 공격이 거세졌네.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끝장을 보려는 수작이겠지.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로우니 서둘러야 하네.”
“상장군의 군단이 도착하면 바로 시작해야겠습니다.”
“언제 당도하겠는가?”
“진군 속도로 보아 내일 중에는 도착할 것입니다.”
악비는 한숨을 내쉬며 그를 막사로 이끌었다.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군. 괜찮다면 차나 한잔하지. 모처럼 만났으니 서로 할 얘기가 많지 않겠는가.”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상장군의 본대가 당도하기 전까진 공격을 시작할 수 없었다.
그를 기다리는 모두의 마음은 점차 초조해졌다. 하루가 지나고 다시 밤이 어두워졌지만, 올 기미가 안 보였기 때문이다.
상장군은 다시 이틀이 지난 이후에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오만 명의 병사들이 도착하자 토산이 가득 메워졌다.
이제는 머뭇거릴 시간조차 없었다. 연합군의 무관들이 야전지휘소에 모였다.
소무는 일광을 대동하여 참석했다.
악비는 부관 장헌과 황제를 시해하고 합류한 황유 장군을 데리고 참석했다.
모여든 참석자는 총 열다섯 명. 이중 다섯을 제외한 모든 무관이 유광세의 휘하 장수들이었다.
“오랜만이오, 악비 장군. 아니 이제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구려.”
의용군의 대장이기 이전에 역모죄로 낙인찍힌 신분이었다. 유광세가 비아냥거리는 이유는 연합군단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서였다.
악비는 신경 안 쓴다는 듯 전술지도를 바라보며 말했다.
“편한 대로 부르시오. 그런 것을 따지고 있을 시간이 없으니. 양양성이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로우니 바로 공격을 개시해
야 하오.”
의자에 등을 기댄 유광세는 느긋한 표정이었다.
“언제 공격을 할지는 내가 결정할 것이오.”
이미 휘나라의 결사대를 몇 번이나 격퇴한 그는 자신감이 넘쳐나고 있었다. 자칫 전멸할 뻔했던 기억은 모두 잊은 듯했다.
“그럼 상장군의 생각을 말씀해주시오.”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 전황부터 살펴보는 것이 우선이지 않소. 내일 정찰부터 하고 작전을 계획하겠소. 병사들도 좀 쉬어야 하고.”
“내일까지 기다릴 수가 없소. 더는 시간을 지체한다면 시기를 놓칠 것이오.”
악비가 정찰 보고서를 들이밀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반년 이상을 버틴 양양성이 오늘 무너진다? 나를 바보로 아는군.”
그는 오늘 병력을 움직이지 않겠다는 의지가 확고했다. 더는 말이 통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이상할 것도 없었다. 어차피 예상한 대로 흘러가고 있었으니.
악비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눈빛이 돌변했다. 굳어진 표정에서 맹수와도 같은 기세가 피어올랐다.
이어서 그가 내뱉은 말에 모두가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소무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지금부터…… 연합군은 내가 지휘하겠다.”
유광세가 인상을 구기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관직까지 박탈당한 반역자가 어디서 입을 함부로 놀리느냐! 네가 정녕 미친 모양이로구나!”
야전지휘소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모두가 숨을 죽이며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나는 미치지 않았다. 양양성이 무너지면 나라 전체가 무너질 것이다. 그런데도 느긋하게 내일 정찰을 하겠다고? 누가 미친 것 같은가. 더는 너의 손에 병사들의 목숨을 맡기지 않겠다.”
유광세는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누구 마음대로? 당장 네놈을 이곳에서 체포할 수도 있다.”
이곳에 있는 장수 중 대다수가 자신의 수하였다. 더군다나 용무대장 사마철도 함께 있었다.
유광세는 자신감이 넘쳐났다. 악비의 다음 말을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과연 너의 부하들도 같은 생각일까?”
주위를 둘러보던 유광세는 뭔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대다수의 부하들이 자신의 시선을 회피하고 있지 않은가.
그 순간 더욱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악비 장군께서는 이미 휘나라를 상대로 여러 번의 승리를 거둔 전례가 있습니다. 저희를 이끌어주신다니 영광입니다.”
유광세의 휘하 부장인 남천이었다.
“이놈이 감히!”
눈이 뒤집힌 유광세는 남천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주먹이 강기에 휩싸인 것으로 보아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었다.
콰앙-!
둔탁한 소음이 지휘 막사를 울렸다.
“크윽!”
신음을 내뱉은 자는 오히려 유광세 자신이었다.
그는 한 걸음을 물러서며 미간을 좁혔다. 남천의 옆에서 주먹을 내뻗고 있는 소무를 보았기 때문이다.
주먹에서 적지 않은 통증이 느껴졌지만, 그보다 분노가 먼저 앞섰다.
“이것들이 정말…….”
그때 소무가 남천과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한 번 끄떡여 보였다. 자신이 부탁한 일을 훌륭히 이행했기 때문이다.
그때 왕랑 부장이 상기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서며 소리쳤다.
“저도 남천 부장의 말에 동의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시작이었다.
유광세의 휘하 부장들이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소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어젯밤 휘하 병사들이 보는 앞에서 저를 폭행하셨지요.”
“저도 더는 장군을 모실 수 없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