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별이 빛을 잃으면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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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화 별이 빛을 잃으면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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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화 별이 빛을 잃으면 (4)
2022.06.23.
“이것들이 전부 돌았나…….”
그동안 찍소리도 못하던 부하들이 단체로 하극상을 벌일 줄이야.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이제 유광세가 의지할 수 있는 자는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용무군을 이끄는 군단 제일의 맹장 사마철. 그는 자리에 앉아 경직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할지 고심하는 표정이었다.
그것을 눈치챈 소무가 먼저 그에게 전음을 보냈다.
- 빛을 잃은 별은 떨어지는 법이오. 부디 잘 판단하시길 바라겠소. 한 번의 선택이 그대의 목숨을 좌우할 것이니.
사마철은 재빨리 상황을 분석해보았다.
모두가 합심하여 상장군을 탄핵하려고 작정했다. 발톱을 드러낸 이상, 한쪽이 죽어야만 끝날 터. 자신도 어느 편에 설 것인지 선택해야 했다.
무위의 한계를 알 수 없는 소무와 그의 부하인 일광, 그리고 악비까지. 자신이 유광세를 지지한다고 한들 당해낼 수 있는 전력이 아니었다.
계산이 끝난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중얼거렸다.
“일평생 부와 권력은 넘치도록 얻었지만, 부하들의 마음만은 얻지 못하셨구려. 우리 인연은 여기까지인 것 같소, 장군.”
마지막으로 믿었던 사마철까지 자신을 저버리다니. 유광세는 지금의 상황을 결코 인정할 수가 없었다.
“너희들은 지금 반역을 하려는 것이다! 내가 바로 나라의 상장군이다!!!”
악에 받쳐 소리치던 그는 소무의 전음을 들을 수 있었다.
- 추밀원사도 그리 말했지. 죽기 직전에 말이야.
유광세의 두 눈이 파르르 떨렸다.
행방불명이 되어 사라진 추밀원사 장준. 자신과 함께 사대장군 중 하나로 추앙받던 인물이다. 그를 자신이 죽였다고 시인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네, 네놈이 감히 장…….”
유광세는 말을 끝마칠 수 없었다. 소무의 오른발이 그의 앞가슴을 향해 쑤셔박혔기 때문이다.
벼락처럼 빠른 공격은 피할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였다. 양팔을 교차하여 막는 것이 고작이었다.
콰앙-!
“큭!”
외마디 신음과 함께 유광세의 신형이 뒤로 주르륵 밀려 나갔다. 야전막사를 찢으며 뚫고 나간 그는 무지막지한 괴력에 당황했다.
그때 묵묵히 지켜보던 일광이 주먹을 내지르며 막사의 천막을 날려버렸다.
난데없는 소란에 병사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소무는 터벅터벅 움직이며 유광세를 향해 다가갔다.
“그간 네놈 때문에 얼마나 많은 자가 피눈물을 흘렸는가. 자국의 백성들을 약탈하라고 명령을 내리는 자가 어찌 상장군이란 말인가. 무능한 네놈 때문에 죽은 병사들은 무엇으로 보상하겠는가. 이제 그 죗값을 치를 시간이다.”
유광세는 숨이 턱하고 막혀왔다.
화경인 그가 기세에 짓눌리는 것은 처음 겪는 일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 순간 그에게 마지막 기회가 찾아왔다.
“괜찮다면 나에게 양보해주지 않겠는가.”
어느새 창을 움켜쥐고 다가온 악비였다.
소무는 망설임 없이 옆으로 물러섰다. 오히려 내심 그가 바라던 바였다. 악비가 그의 군단을 얻기 위해서는 무위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장양과 함께 계획했던 작전이었다. 중간에 조금 변경한 부분이 있었지만 말이다.
“네가 날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은가?”
유광세는 말을 하는 와중에도 주변을 살폈다. 도주할 궁리를 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빠져나갈 구멍은 없었다. 일광과 사마철이 퇴로를 막아섰기 때문이다.
그때 악비가 솔깃한 제안을 해왔다.
“이긴 자가 연합군의 지휘권을 갖는다. 그러나 패자는 죽는다.”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다.
목숨을 건 결투. 이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유광세는 몰려든 병사들을 둘러보았다. 부장들이 모두 반기를 든 이상 자신의 명령이 통하지 않을 터. 병사들에게 여론전을 펼쳐서라도 확실히 해둬야 했다.
“모두 들어라! 지금부터 나와 이 반역자가 결투를 벌일 것이다! 이유를 불문하고 승자가 연합군의 사령관이 될 것이다!”
유광세가 이긴다면 탄핵은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병사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며, 명분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악비의 얼굴에는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었다. 단지 왼발을 한 번 튕겼을 뿐이었다. 그러자 바닥을 구르는 한 자루의 창이 유광세의 가슴 위로 날아들었다.
창을 건네받은 유광세는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 순간 악비의 창끝이 그의 심장을 겨누었다.
“악가창법을 받아낼 자신이 있겠느냐.”
“많이 물러졌군, 악비. 방금 결정은 실수한 것이다.”
지켜보던 모두가 물러서며 거리를 벌렸다.
병사들이 상기된 얼굴로 웅성거렸다.
악비가 실제로 역모를 꾀했다고 믿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의 눈빛은 하나같이 악비를 응원하고 있었다.
* * *
장안성의 궁성을 한 중년인이 놀란 얼굴로 활보하고 있었다.
외팔이에 절뚝거리는 발걸음, 상체를 둘둘 말고 있는 붕대까지. 한눈에 보아도 병상에서 막 일어난 모습이었다.
‘대체 이곳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란 말인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휘나라의 장수 백약이었다.
곳곳을 둘러보는 그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백성들의 울부짖음이 끊이질 않았던 궁성이 아니었던가.
그저 성주가 바뀌었을 뿐이거늘, 전혀 다른 세상이 되어있었다.
밝은 얼굴로 궁성을 산책하는 연인들. 노점 찻집에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는 자들과 콧노래를 부르는 상인까지. 그의 입에서 탄성이 절로 터져 나왔다.
“그저 성의 주인만 바뀌었을 뿐이거늘, 어찌…….”
두리번거리던 그는 오른손에 쥐고 있던 종이를 살펴보았다. 의무병이 자신의 거처에서 건네주고 간 약도였다.
곧이어 그의 발걸음이 웅장한 의선당의 전각 앞에서 멈춰섰다.
“이곳은 황제의 집무실로 지어진 전각이 아니던가……. 설마 이곳이 의원이라고……?”
무려 백여 명이 넘는 의무병들. 그리고 관군과 민간인이 뒤엉켜 진료받는 모습은 상상조차 못 해본 광경이었다.
한식경이 지나고 백약은 다시 의선당에서 걸어 나왔다. 하나뿐인 오른손에는 약재 한 첩이 들려져 있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그간 자신이 알던 세상의 질서가 완전히 뒤틀려 있었기 때문이다.
절뚝거리며 돌아가던 그는 누군가가 다가옴을 느꼈다.
“의선당에 왔으면 나를 보고 가야지, 어찌 그냥 가시는가.”
백발이 무성한 노인 한 명이 다가오고 있었다. 의료부대의 모청 대장이었다.
“산와족은 은혜를 잊지 않습니다. 반드시 보답할 것입니다.”
“누가 보답 받겠다고 자네를 살린 줄 아는가? 소소가 기를 쓰고 자네를 살리려고 해서 도와준 것뿐일세.”
자신이 거처에 누워있을 때 놀러 왔던 아이의 이름이었다.
백약은 모청을 향해 머리를 깊이 숙여 보였다.
“신세를 졌습니다.”
“이제야 살려낸 보람이 조금 있구만. 그러고 보니 자네는 이곳이 처음이겠군. 주인이 바뀐 뒤로는 말일세.”
“예. 저도 성의 주인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절도사 장양. 그의 이름은 휘나라에서도 유명합니다.”
“잘못 알고 있군. 이곳의 주인은 장군님이 아니라 바로 백성들일세. 직접 보면서도 모르겠는가?”
“휘나라 황제의 궁궐을 재건하기 위해 백성들의 노역으로 지은 궁성임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조금 혼란스럽습니다.”
“무엇이 말인가?”
“송나라의 황제가 후계도 없이 죽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절도사가 이곳에서는 왕이나 다름이 없지요. 세상에는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지배자의 위엄이 무너지게 된다면 어찌 백성들을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궐을 백성들이 차지하다니…….”
그때였다. 대답은 그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백성은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섬겨야 할 대상일세. 백성이 없다면 어찌 황제가 있고 나라가 있겠는가.”
나이 든 농부가 인자한 얼굴로 다가오고 있었다. 일을 막 끝내고 온 듯 그의 하의는 허벅지까지 접혀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손을 붙잡고 있는 한 여자아이. 농사일을 함께 도운 듯 히죽 웃는 얼굴에 진흙이 잔뜩 묻어 있었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이제 안 아파요?”
공교롭게도 자신이 아는 아이였다. 이곳에서 소소를 만날 줄이야. 백약의 얼굴에도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고맙구나. 덕분에 이제는 걸을 수도 있게 되었단다.”
그때 모청이 딴청을 피우며 등을 돌렸다.
“허허. 나는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가봐야겠군.”
모청이 사라지자 농부가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이끌었다.
“그럼 자네 말이 맞는지 같이 한번 확인해보세.”
백약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상대가 평범한 농부가 아님을 단번에 눈치챘다. 무공 고수와는 다른 느낌의 범상치 않은 기도. 그것은 마치 바다를 마주하는 것과 같은 신비로움이었다.
그는 농부와 소소의 뒤를 따라 묵묵히 이곳저곳을 거닐었다.
많은 곳이 바뀌어 있었다. 어느 곳을 가나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북적였다. 모든 곳에는 생명이 넘쳐났으며, 따듯함이 느껴졌다.
‘모두가 행복해 보이는군. 어찌 이렇게 변할 수가……. 나는 지금껏 휘나라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온갖 감정이 뒤섞인 회환의 한숨이 그의 입에서 뿜어져 나왔다.
그들의 발걸음은 궁성에서 가장 거대한 전각 앞에서 멈추었다. 섬서의 고아들을 보육하기 위해 마련된 설화원이었다.
세 명은 멀찍이서 담장 너머로 그곳을 구경했다. 이백여 명의 아이들이 앞마당에 나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때 까치발로 담장에 매달린 소소가 손가락을 내뻗었다.
“백상이랑 백아가 저기 있어요!”
아이들의 모습을 확인한 백약은 두 눈이 부르르 떨렸다. 곧이어 그는 참지 못하고 울컥하고야 말았다.
밤마다 약재를 훔쳐오던 어린 아들과 언제나 굶주려 있던 딸아이. 그랬던 자식들이 그 어느 때보다 밝게 웃고 있었다.
농부가 상황을 눈치채고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다행이구만. 처음인 것 같은데 친구들과 잘 어울리고 있으니.”
“지금껏 제 아이들이 저렇게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허허. 그렇다면 오늘은 자네에게 정말 기쁜 날이겠군. 축하함세.”
“그리 말씀해주시니 고맙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저렇게 많은 아이들이…….”
“모두 전란 중에 부모를 잃은 고아들일세. 오늘로써 모두 일천다섯 명이지. 이곳에는 최대 천이백 명의 아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이 갖추어져 있네.”
“어찌 아이들의 숫자를…….”
농부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자네가 말하는 질서를 실천하려면 저 아이들을 모두 이 궁성에서 쫓아내야겠지. 헌데 이곳이 아니라면 수용할 곳이 없는데, 어찌하면 좋겠는가.”
백약은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얼굴이 붉어진 그는 죽어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마음에 담아두지 마시게. 허허.”
“아까 말씀하신 대로, 제겐 오늘이 가장 기쁜 날입니다. 하늘에 있는 저 고아들의 부모들도 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이곳의 성주가 정말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그 말은 동의할 수 없군. 어찌 그자 혼자만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결과겠는가. 훌륭한 인재들이 함께하였기에 가능한 일들이지.”
“어찌 되었든 그분을 직접 한번 만나보고 싶군요.”
“그리할 수 있을 걸세. 아무튼 우린 이쯤에서 물러나는 게 좋겠군.”
“예…….”
백약 또한 즐겁게 노는 아이들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농부를 향해 묵례하며 작별을 건네었다. 볼일을 모두 마쳤기에 거처로 돌아가기 위함이었다.
“저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약재 한 첩을 쥐고 절뚝거리며 멀어지는 모습이 애처로워 보였다.
그의 뒷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던 소소가 냉큼 소리쳤다.
“아저씨!”
“……응?”
“장기 둘 줄 알아요? 저는 할아버지랑 장기 두러 갈 건데, 같이 갈래요? 히힛.”
어차피 홀로 거처에 돌아가 봐야 할 일도 없었다. 병사들의 감시 속에 누워있는 것이 고작일 테니. 장기는 그의 심심함을 달래줄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었다.
백약은 은근슬쩍 농부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장기라……. 알긴 안다만…… 그래도 될까……?”
“허허. 괜찮으면 같이 가시게.”
얼떨결에 합류하게 된 백약은 궁성 외곽의 작은 전각으로 따라 들어갔다.
장기가 시작되자 안에서는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한식경이 지난 뒤 농부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이번 판은 내가 이긴 것 같구나.”
“히잉. 할아버지 너무해요~”
“허허허. 네 말대로 마(馬)와 상(象) 하나씩 양보해주지 않았더냐. 그럼 이번에는 저 아저씨와 한번 붙어 보거라.”
다시 한 식경이 지났을 즈음이었다. 돌연 전각 앞으로 누군가 다가와 외쳤다.
“장군! 소무 대장님의 전보가 도착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