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별이 빛을 잃으면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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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화 별이 빛을 잃으면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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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화 별이 빛을 잃으면 (5)
2022.06.24.
소소와 장기를 두던 백약은 화들짝 놀랐다.
하나밖에 없는 그의 손이 장기알을 움켜쥔 채 정지했다.
‘저 농부가 절도사 장양이었다고……?’
어느새 농부는 자신의 책상에 앉아 전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책상 위에 수북이 쌓인 서류들. 한쪽 구석에 놓인 고풍스러운 인장까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자신은 지금 절도사의 집무실에서 꼬마와 장기를 두고 있었다.
“아저씨 차례예요. 장기 두는 사람 어디 갔어요? 히히.”
전령이 찾아오든 말든 소소의 관심사는 아니었다. 그리고 백약의 속내도 말이다.
“그, 그게…… 장군이시라니……?”
절도사가 농부의 모습을 하고 있을 줄 어찌 예상했겠는가. 그리고 그의 정체를 안 이상, 태연하게 장기를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장기알을 아무 곳에나 내려놓았다. 그러자 소소가 히죽 웃으며 재빨리 차(車)를 집었다.
“우리 할아버지가 장군이라서 놀랐어요? 그럼 또 놀라게 해줄게요. 장군!”
장기에서 상대방의 왕(王)을 궁지에 몰아넣었을 때 장군이라 외친다.
장양이 은근슬쩍 장기판을 훑어보며 말했다.
“퇴로가 남아 있는데 벌써 포기하긴 이르지 않은가. 계속해보시게.”
소소가 고개를 휙 돌리며 장양에게 소리쳤다.
“할아버지, 알려주면 안 돼요!”
훈수를 두지 말라는 의미였다. 그 모습이 귀여웠는지 장양이 껄껄대고 웃었다.
“허허허. 오냐.”
멋쩍어진 백약은 소소와 장기를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을 뒤로한 채 전령이 들어왔다.
랑아대의 대원 송화였다. 그는 소소에게 눈인사를 하고는 장양의 책상 앞에 기립했다.
“보고드리겠습니다, 장군!”
송화에게 전황을 듣는 장양은 표정이 한층 더 밝아졌다.
보고가 끝나자 그의 웃음이 집무실에 가득 찼다.
“허허헛. 정말 악비 장군이 유광세를 잡고 사령관이 되었단 말이냐?”
원래의 계획은 소무와 일광이 상장군을 암살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악비를 앉히기로 했었다. 그런데 도중에 계획을 변경한 모양이었다.
“예, 저도 목격했습니다. 상장군이 죽은 후 오히려 군단의 사기가 더욱 올라갔습니다.”
“암, 그렇겠지. 어찌 유광세 따위가 그에게 비교될 수 있겠는가.”
병사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대장군이었다. 한 가지 단점이라면 성격이 너무 올곧은 나머지 융통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를 이번 계획에 끌어들이기 위해 한참이나 설득해야만 했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전투가 시작되었을지 모르니.”
장양이 흡족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서둘러 전장으로 돌아가려는 것을 보니, 전우들이 걱정되는 모양이로군. 자네와 같은 병사가 내 휘하에 있어 영광이네.”
“과, 과분한 칭찬이십니다.”
어쩔 줄 모르던 송화는 인사를 건넨 후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장양의 시선이 다시 장기판으로 향했다.
예상과는 달리 소소가 승리를 거머쥐고 있었다. 백약의 정신이 다른 곳에 팔려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히히히. 제가 이겼어요, 할아버지!”
“우리 소소의 실력이 갈수록 느는구나.”
집무실을 뛰어다니던 소소는 문 앞에서 방긋 웃었다.
“히힛. 저는 이만 가볼게요! 스승님이 기다려요.”
“그래. 또 놀러 오너라.”
소소가 사라지자 실내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백약이 의아한 표정으로 일어섰다.
“저는 적장이지 않습니까? 제 앞에서 전황을 보고받아도 괜찮은 것인지요?”
“적장이라……. 지금은 아니지 않은가.”
“저를 어찌 믿고…….”
“자식들을 바라보는 자네의 눈빛을 보니 알겠더군. 그간 아이들을 위해 싸웠던 것임을. 그러니 더는 걱정하지 않네.”
백약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잠시 뒤 그의 시선이 전술지도로 향했다.
“전황은 방금 들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휘나라의 대장군인 완안후이가 지휘하는 이상, 쉽지 않을 것입니다. 휘하에 있는 다섯 명의 오룡상장(五龍上將) 또한 모두 화경급입니다. 게다가 다른 군단들도 참전했으니…….”
오룡상장의 이름은 처음 접한 정보였다.
연합군단임을 고려하면 얼마나 많은 고수가 있을지 짐작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게다가 압도적인 병력 차이는 어떻게 뒤집을 방법이 없었다.
예상보다 적들의 전력이 너무나 막강했다. 그러나 장양은 아군의 장수들을 굳게 믿고 있었다.
“우리 쪽에서도 뛰어난 장수들이 많이 참전했네.”
“소무 대장도 말입니까?”
“물론일세. 하지만 자네 말대로라면 쉽지 않은 싸움이 되겠군.”
자신의 팔을 잘라낸 장본인. 직접 몸으로 겪어본 그의 무위에 대해선 잘 알고 있었다.
“그자가 함께한다니 조금은 희망이 보이는군요. 하지만 전투가 금방 끝나진 않을 것입니다. 어떻게든 고립된 성내에 보급을 하지 못한다면 결국 안에서부터 무너질 것입니다.”
“자네 말이 맞네. 그리고 그것 또한 준비해놓은 바가 있지. 궁금하면 어서 앉아보시게.”
백약은 망설임 없이 걸어가 장양의 맞은편에 앉았다.
얼굴이 상기된 그는 이미 마음이 굳어져 있었다. 이곳에서 함께하는 것으로 말이다.
* * *
한수강의 상류에서부터 오십여 척의 함선이 물살을 가르고 있었다.
융극선(戎克船)으로 가장 보편화된 전함이며, 개조된 선수에는 충각이 달려있었다. 세 개의 기본 돛에 추가로 두 개의 보조 돛까지. 추격과 도주에 특화된 용강수로채의 함선들이었다.
대장선의 선미에는 백의 장삼을 입은 중년인이 뒷짐을 지고 있었다.
그의 뒤로 수염이 덥수룩한 부하가 다가왔다.
“채주님, 정찰선에서 신호가 왔습니다. 오백여 장 앞에 적함들이 포진해 있다고 합니다.”
“이미 알고 있다. 계속 전진하라.”
빛나는 채주의 안광은 이미 그곳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일각이 지나자 휘나라의 함대가 모두의 시야에 들어왔다. 삼백 척이 넘는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그런데도 채주의 얼굴은 평온하기만 했다.
양측 함선의 거리가 이백여 장까지 가까워지자, 채주가 오른손을 올려 몇 번을 휘저었다. 그러자 돛대 위에 대기하고 있던 부하 한 명이 명령기를 흔들었다.
“일자진(一字陣)을 펼쳐라!”
오십여 척의 함선이 속도를 줄이며 길게 늘어서기 시작했다.
진형이 완성되자 함선들이 닻을 내렸다.
그때 관군의 수장으로 보이는 인물이 채주에게 다가갔다. 한중성에서 출진한 장양의 부관 양연정이었다.
“바람을 등지고 있으니, 속도를 올려 기습하는 것이 유리하지 않소? 닻을 내리라니…….”
“적함의 수가 너무 많으니, 전술 없이는 이길 수 없을 것입니다.”
양연정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함선마다 관군과 수적들이 함께 뒤섞여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있는 진귀한 광경이었다.
“나는 해상전의 경험이 없으니 채주께서 모든 지휘를 맡아주시오.”
“믿고 맡겨주셔서 고맙습니다.”
서로의 대치상태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일반적인 해상전은 활 싸움으로 시작되어 백병전으로 끝난다.
아군의 함대가 멈추자 적함들이 선수를 틀며 돛을 올렸다. 압도적인 병력으로 밀고 들어오려는 듯 보인다.
어마어마한 적함의 숫자에 양연정은 손에 땀을 쥐었다.
양측의 거리는 계속해서 가까워졌다. 그리고 백여 장까지 좁혀졌을 무렵, 채주의 입이 나직이 열렸다.
“회전하라.”
신호를 보내는 선원이 명령기를 흔들며 소리쳤다.
“닻을 올려라!!! 선미 앞으로!!!”
오십여 척의 함선이 제자리에서 방향을 선회하기 시작했다.
배의 뒷면은 장갑이 약하기 때문에 충격에 취약하다. 그렇기에 도주할 때나 내리는 명령이지만 지금은 달랐다.
선수와 선미가 뒤바뀌는 순간 비장의 무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선풍포(旋風砲). 한중의 군영에서 가져온 관군의 초소형 투석기였다.
적들은 이것을 눈치챌 수가 없었다. 설마 용강수로채의 전함에 관군의 신무기가 장착될 줄 누가 예상했겠는가.
선미로 이동한 채주와 양연정은 때를 기다렸다.
“관군의 기술을 못 믿는 것은 아니지만, 이걸로 함선을 부수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장안성의 성벽을 부수기에는 무리였지만, 목재로 만들어진 함선 따위는 우습게 박살 낼 것이오.”
게다가 지금은 위력이 더욱 개량되어 있었다. 화약을 이용해서 만든 탄환이었기에 양연정도 내심 결과가 궁금했다.
“그럼 한번 지켜봅시다.”
하늘 높이 올라간 채주의 오른손이 적함을 향했다. 그것을 확인한 선원이 힘차게 외쳤다.
“발사준비!”
신호와 동시에 횃불을 움켜쥔 병사가 탄환에 불을 붙였다. 그 순간 다시 한번 발사 명령이 떨어졌다.
“발사하라!!!”
모든 함선에서 선풍포의 지렛대가 솟구쳐 올랐다.
투콱-! 콱-! 콰콰콱-!
오십여 대의 함선이 거센 굉음을 토해냈다. 힘차게 솟아오른 불덩이들은 다가오는 적함을 향해 거침없이 다가갔다.
콰앙-! 콰콰쾅-!!!
우렛소리와 함께 파괴된 함선의 파편들이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탄환에 맞은 함선은 폭발을 일으키며 바닥까지 꿰뚫려 버렸다. 단 한 발이라도 적중당한다면 그대로 침몰이었다.
적중된 함선은 삼 할도 되지 않았지만, 그것이면 충분했다. 첫 번째 사격은 거리를 재기 위한 시험 사격이었으니.
당황한 적 함대는 속도를 더욱 높이기 시작했다.
그때 아군의 대장선이 다시 한번 명령을 내렸다.
“돛을 올려라!”
오십 척의 함선이 바람을 거스르며 도주하듯 천천히 움직였다. 아니 그렇게 보였다. 선풍포가 다음 사격을 개시하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발사!!!”
투쾅-! 콰콰콰쾅-!!!
또다시 날아오른 탄환들은 다시 이십여 척의 적함을 침몰시키고야 말았다.
약이 바짝 오른 적함들이 뒤에서 화살을 날려댔지만 어림도 없었다. 활로 투석기의 사정거리를 어찌 따라잡을 수 있겠는가.
허공을 가르는 화살들은 모조리 수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 모습을 확인한 수적들이 갑판에 매달려 적들을 조롱했다.
“하하하!”
“푸하핫! 맛이 어떠냐!”
“계속 쏴봐, 이 쥐새끼들아!”
추격전은 반 시진이 지나도록 계속되었다. 그러나 거리는 조금도 좁혀지지 않았다. 그사이 선풍포는 대당 십수 발의 발사를 마친 상태였다.
적들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함선을 절반이나 잃고 나서야 그들이 배를 회전하기 시작했다. 추격을 포기한 모양이었다.
그 순간 용강수로채의 대장선에 명령기가 올라왔다.
“선수 앞으로!”
이번에는 아군의 함선들이 방향을 틀며 그들의 뒤를 잡았다.
투석기의 탄환은 곡사로 날아가기에 배의 뒤쪽에서도 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발사!!!”
투콱-! 콰콰콰쾅-!
계속해서 날아오르는 선풍포의 탄환들. 그것들은 적함들을 사정없이 파괴했다.
휘나라의 수군들은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함선 간의 간격을 최대한 벌리는 것뿐이었다.
적함들이 넓게 분산하자 투석기의 명중률이 급격히 감소해버렸다.
지켜보던 양연정이 장창을 움켜쥐며 말했다.
“드디어 적군의 대장선이 홀로 남겨진 것 같소.”
“예.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습니다.”
아직도 적함의 숫자가 아군보다 두 배나 많았지만 불리할 것은 없었다. 선풍포를 피해 흩어진 적함들은 이미 진형이 와해되었기 때문이다.
채주가 육성으로 함선들을 다그쳤다.
“전속력으로 돌진한다!!! 모조리 깨부숴라!!!”
쩌렁쩌렁 울리는 그의 고함에는 막대한 내력이 담겨 있었다.
잠시 뒤 함선마다 두 개의 보조 돛이 솟구쳐 올랐다.
속도를 높이며 뒤쫓는 용강수로채의 전함들. 화들짝 놀란 휘나라의 함선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궁수들만 다급히 갑판으로 몰려들며 화살을 쏘아댔다.
파파파팟-!!!
화살들이 날아오며 돌진을 저지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방패를 움켜쥔 관군들이 갑판으로 늘어섰다.
텅-! 터터텅-!
화살 대부분이 방패벽에 가로막혀 튕겨 날아갔다.
게다가 화살을 날려대는 적함은 전체의 일 할도 되지 않았다. 거의 모든 함선이 진형을 이탈하여 우왕좌왕했다.
그 모습을 확인한 채주가 고함을 내질렀다.
“충파(衝破) 준비!!!”
충파는 선수 아래에 튀어나온 충각으로 적함을 들이받는 전술이다.
관군과 수적들이 갑판을 부여잡았다.
용강수로채의 대장선은 정확히 적함의 대장선을 마주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두 함선의 거리가 이십 장 이내로 좁혀진 순간이었다.
채주가 양연정을 슬쩍 한 번 바라보았다.
“그럼 먼저 출발하겠습니다. 전투가 끝나고 뵙지요.”
외마디와 함께 채주의 신형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오 장을 날아 강물 위에 내려선 그는 수면을 밟고 벼락처럼 내달렸다. 물수제비처럼 수상비를 펼치는 모습에 양연정은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짐작은 했지만, 역시나 화경이었군.”
전란 때문에 관에서도 신경을 못 썼다고는 하나, 수적들 치고는 전력이 너무나도 막강했다.
군단의 수군으로 편입시킬 수 없다면 결국엔 토벌해야 할 대상들이었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근심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채주는 어느새 수면 위를 박차고 휘나라의 대장선에 홀로 난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일렬로 길게 늘어선 용강수로채의 함선들이 적함들을 들이받기 시작했다.
쾅-! 콰콰쾅-!!!
적함의 선원들이 그 충격에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크윽!”
“컥!”
적들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충각으로 측면을 맞은 적함은 단번에 두 쪽으로 갈라지며 침몰했다.
무려 수십여 척의 함선을 완파하고 나서야 충파가 멈추었다.
그때 뱃머리에 우뚝 선 양연정이 도약을 준비하며 소리쳤다.
“한중의 병사들이여, 백병전을 준비하라!! 연위병의 무서움을 보여주어라!!!”
연위병(連衛兵)은 군단의 첫 번째 모병 기수들에게 부여된 명예로운 호칭이다. 랑아대와 같은 입대 동기로 하나같이 최정예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함선마다 각기 삼십 명씩 나눠 타고 있었다.
쏜살같은 움직임으로 적함을 향해 뛰어드는 연위병들. 그들의 모습은 뒤따르는 수적들에게 깊은 인상을 각인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