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5화 구름에 가려진 달 (1) (145/250)


145화 구름에 가려진 달 (1)
2022.06.25.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인 양양성은 오직 서쪽에서만 공격이 가능하다. 서문 또한 산이 인접해있으니, 이보다 방어에 더 적합한 요새가 어디에 있겠는가.

게다가 한수강과 이어진 천연 해자는 배를 타지 않고서는 건널 수 없을 정도로 폭이 넓다.

중원에서 제일가는 천혜의 요충지. 난공불락이라 불리는 이 양양성이 지금 흔들리고 있었다.

휘나라는 수백 척의 함선을 해자에 늘어놓아 다리를 만들었다.

해자를 건너 진격하는 병사들은 이십오만 군세 중 십만에 육박했다.

그들이 이렇게 무리해서 맹공을 퍼붓는 이유는, 본진의 후미로 양양성을 구원하기 위한 송나라의 지원군이 당도했기 때문이다.

지원군은 산속에 매복하여 공격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몇몇 지휘관들이 모여 심각한 표정으로 전황을 살펴보고 있었다.

“성이 곧 함락될 것 같습니다. 당장 출진하여 도와야 합니다.”

황제를 시해하고 악비에게 몸을 의탁한 황유 장군이었다. 성질이 급한 그는 언월도를 움켜쥔 채 안절부절못했다.

악비가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우리를 꾀어내려는 유인책일세. 적의 진형을 잘 보시게.”

지휘관들이 적진의 형세를 살폈다.

본진에 남아 이쪽을 향해 포진한 십오만 병력들. 그들의 배치가 조금 이상했다.

장수들 중에서 가장 먼저 반응한 인물은 소무였다.

“기병들이 이쪽을 향해 좌우로 전진배치되어 있군요. 게다가 중진의 보병들이 바구니처럼 진을 치고 있으니, 마치 범이 아가리를 벌린 모습입니다.”

악비가 어두운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보셨네. 호아섬멸진(虎牙殲滅陣)을 여기서 볼 줄은 생각지도 못했군. 우리가 먼저 공격한다면 싸우기도 전에 포위당하고 말 걸세. 휘나라의 대장군 완안후이라……. 듣던 대로 만만치 않은 인물이군.”

적군은 군단을 나누어 지원군의 발목을 묶는 한편, 공성전을 함께 수행하고 있었다.

어지간한 전략가가 아니라면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소무의 생각도 악비와 다르지 않았다.

“병력 차이는 물론 병사들의 수준 또한 우리보다 뛰어납니다. 게다가 저런 진법까지 펼쳐놓고 있으니, 무턱대고 공격하다간 전멸입니다.”

“차라리 먼저 공격을 와준다면 좋겠군. 산속에서 각개 격파라도 해볼 수 있으니. 하지만 완안후이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 듯하네.”

“분명 성을 함락할 때까지 저렇게 버티고만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빈틈이 없는 진형이었다.

모두가 생각에 잠긴 듯 동시에 침묵을 지켰다.

그러길 잠시 후.

묵묵히 자리하고 있던 일광이 어딘가를 가리키며 물었다.

“근데 저 짐승은 뭡니까?”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적진의 가장 후미에 설치된 야전 막사. 그곳의 귀퉁이에 거대한 범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었다.

일반적인 범보다 족히 두 배는 더 커 보였다. 게다가 터질 듯 솟아오른 근육은 일격에 바위를 깨부술 것처럼 위협적이었다.

상장군의 휘하에 있던 장수들은 뭔가를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들 중 누군가가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

“미친 영물입니다. 회남 전투에서 저놈에게 당한 병사가 수백이 넘습니다. 당시 포로들을 심문해 알아보았는데, 태산을 지배했던 산군이라고 합니다.”

소무의 얼굴에 흥미로운 표정이 떠올랐다. 유광세가 완안후이의 애완동물을 언급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정도의 영물이라면 지능이 꽤 높을 것입니다. 왜 자연을 벗어나 휘나라의 편에서 싸우는 것입니까?”

“휘나라에서 새끼를 인질로 잡고 있다고 합니다.”

사연을 듣게 되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소무의 음성에 미약한 살기가 묻어났다.

“놈들의 악행이 선을 넘었군요. 인간사를 넘어 자연의 순리까지 해하고 있으니,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악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물론 그리될 걸세. 허나 지금은 우리 코가 석 자로군.”

몇몇 장수들이 악비의 손가락을 따라 적진 너머로 보이는 성벽을 관찰했다. 하지만 화경을 넘어선 초인들만이 그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죽기 살기로 방어하고 있는 성벽 위의 병사들. 나름대로 잘 막아내고 있는 듯 보였으나 실상은 전혀 달랐다.

화살이 거의 소진된 듯 궁수들은 공격을 머뭇거렸으며, 방어를 위해 준비된 수성병기는 대부분 손실되어 있었다.

적들의 공격이 매일같이 계속되고 있었으니 이상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그 난전의 와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장수가 하나 있었다.

성벽의 중앙에서 홀로 무쌍을 선보이는 인물. 그가 지나는 자리마다 적병들이 성벽 아래로 우수수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단 한 번의 일격으로 공성병기를 파괴하는가 하면, 장교급이 보이면 귀신같이 찾아가 단칼에 목을 베기 일쑤였다.

그 모습에 악비의 부관 장헌이 감탄하며 중얼거렸다.

“한세충 장군이로군요. 저게 바로 현경의 무력이라니…….”

한편 한세충을 바라보는 악비의 시선에는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진회에게 모함당하던 자신을 끝까지 변호해줬던 막역지교였기 때문이다.

악전고투하는 그의 모습이 안쓰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 친구가 없었다면 어찌 양양이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전쟁은 혼자만의 힘으로는 결코 승리할 수가 없네. 오늘은 버틸 수 있겠지만 풍전등화 같아 보이는군.”

그때 묵묵히 지켜보던 소무가 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랑아대를 이끌고 수성을 지원해보겠습니다.”

예상과 달리 악비는 일거에 제안을 거절했다.

“허락할 수 없네. 아무리 자네의 부대가 정예라 한들, 수십만 병력을 돌파하여 성내로 진입하는 것은 너무 무모한 일일세.”

악비의 말은 과장됨이 없었다.

휘나라의 대장군이자 현경의 고수 완안후이. 만약 그가 직접 나선다면 자칫 랑아대 전체가 전멸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기마대가 교란으로 적들의 시선을 잠시 끌어줄 수 있다면, 한번 시도해볼 만한 가치는 있습니다.”

악비는 잠시 침묵에 잠겼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은밀히 소무에게 전음을 보냈다.

- 완안후이는 무력만큼이나 지략이 뛰어난 인물이네. 빈틈이 없는 인물이지. 하지만 지금 그의 계산에 들어있지 않은 것이 단 하나 있네. 그것은 바로 자네의 존재일세.

소무는 의아한 표정으로 악비를 바라보았다.

침묵을 유지하는 그에게 다시 전음이 들려왔다.

- 부디 기회가 올 때까지 본연의 무위를 드러내지 마시게. 우리가 가진 비장의 무기를 지금 노출할 필요는 없지 않겠나.

짐작대로 그는 자신의 무위를 파악하고 있었다.

과거 장양과 함께 악비를 처음 만났던 그날, 그가 자신의 몸속에 진기를 주입해봤던 일 때문이리라.

소무는 묵묵히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였다. 그러자 악비가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육성으로 말했다.

“만약 보급 작전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상황이 좀 바뀔 걸세. 쉽지는 않겠지만, 일이 잘 풀린다면 무엇이든 기회가 생길 것이네. 그러니 조금만 더 기다려보세.”

* * *

밤에는 시야가 좁아 해자를 건너는 것이 어렵다. 역시나 날이 어둑해지자 성을 공격하던 병사들이 물러가기 시작했다.

매일같이 반복되던 일이었다.

성벽 위를 지키던 병사들은 진이 빠졌는지 털썩 주저앉았다.

기쁨의 함성을 내지를 만도 하건만 병사들의 얼굴은 어둡기만 했다. 날이 밝는 대로 다시 공격이 시작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성벽의 중앙 위에 높게 솟은 적루.

그곳에선 한 장수가 맹수 같은 눈으로 성 밖을 살피고 있었다.

적아가 뒤섞인 채 산더미 같이 쌓인 시체들. 그리고 본진으로 돌아가는 적들의 뒷모습을 말이다.

“장군, 식사를 좀 가져왔습니다.”

한세충의 고개가 슬며시 우측으로 향했다.

부관 염충이 피와 흙이 뒤범벅된 꾀죄죄한 몰골로 주먹밥 하나를 움켜쥐고 있었다.

“나는 괜찮으니 병사들이나 더 나눠주게.”

“……이미 모두 먹었습니다. 이건 분명 장군의 몫입니다.”

한세충은 뒷짐을 지고 다시 먼 곳을 바라보았다.

“자네와 내가 함께한 지가 얼마나 되었는가…….”

“이십일 년입니다.”

“세월이 흘러도 변하는 것이 없군.”

“무엇이…… 말입니까?”

“거짓말을 잘 못하는 성격 말일세. 군량이 모두 떨어진 것을 진작 알고 있었네. 그 밥 한 덩이가 우리 군단의 마지막 식량이지 않은가.”

“…….”

염충은 주먹밥을 움켜쥔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왠지 모를 서러움에 눈물이 맺혔기 때문이다. 그런 모습을 장군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 한세충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동안 나름 잘 버텼군. 할 만큼 했으니 슬퍼하지 마시게.”

“화살이 모두 떨어졌습니다. 내일은 막아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훗날을 위해 혼자서라도 탈출하십시오. 장군님의 무력이시라면…….”

한세충이 소리 없이 웃었다.

“부하들을 버리고 나 혼자 도망치라는 말인가? 설령 그런다 한들 어디로 간단 말인가. 양양 방어선이 뚫리면 나라 전체가 무너지고 말 걸세.”

“……지원군은 결국 안 오는 것입니까?”

“이미 도착해있네. 완안후이가 발목을 잡고 있으니 움직일 수가 없는 것일 뿐. 아무래도 내일 전투가 마지막이 되겠군.”

“함께할 수 있으니 영광입니다.”

한세충의 손이 염충의 어깨를 다독였다.

“오늘 우리 병력이 얼마나 살아남았는가.”

“일만 오천쯤 될 겁니다.”

총병력이 사만에 이르렀던 군단이었다.

유리한 위치에서 싸웠음에도 이제는 절반도 채 남지 않았다. 한세충의 직속 정예부대인 천무군(天武軍)까지도 말이다.

장수들의 머릿수와 병사들의 수준 차이 때문이었다.

일 년 가까이 버텨낸 것이 오히려 대단한 일이었다.

“내 평생 한 가지 여한이 있다면…… 병사들에게 마지막 가는 길 배불리 밥 한 끼 먹여줄 수 없다는 것이네.”

“모두들…… 이해할 것입니다.”

염충은 어색한 미소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러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다시 홀로 남겨진 한세충은 달빛을 응시했다. 최후의 전투를 다짐하면서 말이다.

그러기를 일다경이 지났다.

돌연 사라졌단 염충이 헐레벌떡 되돌아오고 있었다. 눈물범벅이 된 채로 말이다.

“자, 장군!”

“확실히 죽을 때가 되었나 보군.”

한세충이 의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부관이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은 이십일 년의 세월 동안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도, 도착했습니다! 드디어 도착했습니다!”

“무엇이 말인가?”

경공까지 펼치며 허겁지겁 달려온 염충이 울먹이며 소리쳤다.

“보급선이 도착했단 말입니다!”

“보급선이라니?”

한세충은 어리둥절했다. 이미 삼백 척이 넘는 적 함대가 한수강에서 포위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국의 어떠한 군단에서도 그들을 격파할 수 있는 수군이 없다는 것을.

그런데 염충의 표정이 너무나도 진지했다.

“한중에서 출발한 지원군이랍니다! 적 함대를 모두 궤멸시키고 지금 당도하였다고 합니다!”

“한중이라면…… 장양 장군의 군단이?”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한세충이 지면을 박찼다.

벼락처럼 쏘아져 나간 그의 신형이 성벽을 타고 북문을 향했다.

성벽에 쪼그려 자고 있던 병사들이 강풍에 놀라 깨어났다.

순식간에 북문 근처의 성벽에 도착한 한세충은 격정에 차올랐다. 절망이 가득 찬 어둠 속에서 빛을 만난 심정이었다.

식량과 화살 따위의 보급품들이 성내로 옮겨지고 있었다. 그중에는 소형 투석기인 오십여 대의 선풍포까지 보였다.

그때 한세충의 시야에 정신없이 성벽을 뛰어다니는 한 무장이 보였다.

고함을 내지르는 인물의 정체는 부관 염충이었다.

“이 녀석들, 당장 일어나지 못할까!!! 밥 먹을 시간이다!!!”

기진맥진하여 졸고 있던 병사들이 어리둥절하며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머지않아 보급부대가 당도한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적들이 물러갈 때도 조용했던 병사들이었다. 그랬던 병사들이 목청이 터질 듯한 열기를 동시에 뿜어냈다.

“우와아아아!!!”

“와아아아아아!!!”

거센 열기의 함성이 양양성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휘나라의 본진에서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뜨거웠다.

그리고 산속에 포진한 또 다른 지원군단까지도 그 함성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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