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6화 구름에 가려진 달 (2) (146/250)


146화 구름에 가려진 달 (2)
2022.06.26.


죽어가던 양양성이 다시 생명의 기운을 머금었다.

모처럼 배를 채운 병사들은 움직임이 달라졌다.

궁수들은 보급받은 화살을 성벽 곳곳에 진열했다.

이틀 전 해체되었던 강노부대도 다시 성벽 위에 배치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

한중에서 개발된 신무기가 있었다. 용강수로채의 함선에서 해체한 선풍포였다. 이 소형투석기는 성벽 위에서도 사용할 수 있다.

“발사하라!!!”

오십 대의 투석기들이 굉음을 토해냈다.

사선으로 쏘아진 포탄들이 해자에 정박해 있는 함선들을 사정없이 부숴댔다.

콰쾅-!! 콰콰쾅-!!!

해자를 건널 수 있게 다리 역할을 하는 함선들이었다. 날이 밝기 전에 대부분 부숴놓을 심산이리라.

성벽 위에서 내리꽂는 탄환의 위력은 상상 이상으로 강했다. 단 한 방이라도 맞는다면 바닥까지 꿰뚫리며 침몰할 것이었다.

그 광경을 휘나라의 지휘관들이 허탈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동안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역시나 날이 밝아도 더는 공격이 개시되지 않았다.

양측 모두 닷새가 지나도록 움직임이 없었다.

먼저 공격하는 쪽이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대치가 계속되던 중 휘나라의 진영에서 움직임이 나타났다. 붉은 갑주를 입은 한 장수가 성문을 향해 다가온 것이다.

양측의 중간 지점에 우뚝 선 그가 거센 고성을 내질렀다.

“내가 바로 휘나라의 야율극이다! 누가 내 검을 받아볼 용기가 있느냐!”

성벽 위의 병사들이 술렁거렸다.

적루에도 장수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한세충의 뒤로 일곱 명의 부장들이 다가와 기립했다. 그들 중 한 명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미친놈인가 봅니다. 무시하십시오, 장군.”

한세충의 반응은 달랐다.

화경급의 장수가 제 발로 찾아오다니. 가소롭다는 듯 그의 한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감히 내 앞에서 일기토를 걸어오다니. 죽고 싶어 안달이 난 모양이군.”

부장 중 한 명이 그를 만류했다.

“수상합니다. 무엇인가 간계가 있을지 모르니 응할 필요가 없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한세충이 성 밖을 향해 외쳤다.

“네 놈 따위가 어디서 경거망동 나서느냐! 완안후이를 데려오너라! 그럼 내가 친히 상대해 줄 것이다!”

야율극이 크게 웃으며 답했다.

“하하하! 내가 무서운 것이 아니더냐? 양양이 바로 겁쟁이들의 소굴인 모양이로구나!”

한세충이 자신의 창을 잡아당기며 꽉 움켜쥐었다. 그 모습을 본 부장들이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장군, 참으십시오.”

“저딴 놈에게 휘둘릴 필요가 없습니다.”

한세충은 고개를 내저었다.

이 기회에 적장의 수를 줄여 균형을 맞추고 싶었다. 난전이 벌어질 때마다 자신들이 밀렸던 핵심적인 이유였기 때문이다.

“흔들리는 적군의 사기를 무너트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지금이 아니라면 전세를 역전할 방법이 없어.”

그때 부관 염충이 구겸창(鉤鎌槍)을 움켜쥐고 다가왔다.

“개 잡는데 소 잡는 칼을 쓸 필요는 없습니다. 장군의 상대는 따로 있으니, 저놈은 제가 맡겠습니다.”

그를 지그시 바라보던 한세충이 말없이 웃었다. 어젯밤 주먹밥을 움켜쥐고 눈물을 흘리던 모습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래도 엄연히 자신의 휘하에서 가장 뛰어난 용장이었다.

“자신 있어 보이는군.”

“저런 녀석쯤은 한 손으로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 군단의 위용을 보여주어라.”

“예, 장군!”

잠시 후 성문이 열리며 염충이 빠져 나왔다. 그 모습에 성벽 위의 병사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우와아아!!!”

“힘내세요, 부관님!”

“내시처럼 생긴 저놈을 꼭 쓰러트려 주세요!”

평소 병사들에게 자상한 노장이었다. 그렇기에 인기가 대단했다.

그는 어깨 위로 왼손을 한번 올려 보이며 답을 대신했다.

염충과 야율극이 마주보며 서로의 무기를 겨눴다.

화경급의 장수들이 뒤엉켜 싸우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다. 양측 진영은 손에 땀을 쥔 채 침묵에 잠겼다.

야율극의 무기는 쌍검이었다. 양손에 검을 움켜쥔 그가 자세를 잡으며 소리쳤다.

“와라!”

염충이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구겸창을 내리깔았다.

“지랄하고 있네. 네가 먼저 들어와.”

“방금 그 말, 후회하게 해주겠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야율극의 발이 지면을 박차는 듯 보였다. 그 순간 어느새 다가간 쌍검이 염충의 목을 가르고 있었다.

그러나 염충도 만만치 않았다. 그의 신형이 좌측으로 미끄러지며 야율극의 측면을 공격했다.

콰앙-!

일합을 마주한 그들은 서로 한 발자국씩 물러섰다.

그리고 자석처럼 다시 맞붙은 그들은 서로에게 맹공을 퍼붓기 시작했다.

일기토는 순식간에 오십여 합을 넘어서고 있었다.

양쪽 진영의 병사들은 서로의 장수를 목청이 찢어질 듯 응원했다.

그들의 모습은 산 위에 주둔한 지원군도 지켜보고 있었다. 높은 고지대에 있었기에 그 모습이 아주 잘 보였다.

남천 부장이 감탄 어린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둘 다 대단하군요. 막상막하입니다.”

용무대장 사마철이 고개를 한 번 내저으며 말했다.

“내가 볼 땐 우리 쪽 장수가 좀 더 우세한 듯싶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염충이 본격적으로 우세를 점했다. 야율극의 손발이 조금씩 꼬여가기 시작했다.

잠시 후 야율극의 옆구리에서 약간의 핏줄기가 뿜어져 나오며 지면을 적셨다. 구겸창의 날이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그 순간 지켜보던 장수들이 동시에 환호성을 내질렀다. 소무를 제외하고 말이다.

“와아앗!”

“암, 그렇지!”

“정말 대단해!”

그때 일광이 의아한 표정으로 소무를 바라보았다.

“대장, 표정이 왜 그래? 설마 우리 편이 지길 바랐던 건 아니지?”

“그럴 리가 없잖아. 뭔가 부자연스러워서.”

“대체 뭐가?”

분명 야율극이 일방적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공격이 이어질 때마다 그는 사정없이 뒷걸음질 쳤다. 쓰러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하고 위태롭기만 했다. 그럴수록 지켜보던 소무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져 갔다.

“저 녀석, 아무래도 일부러 본진으로 유인하는 거 같아.”

그러고 보니 무엇인가 이상했다.

합을 마주칠 때마다 물러서는 야율극의 모습이 조금 수상해 보였다.

염충은 마무리를 짓기 위해 더욱 악착같이 달려들고 있었다.

일광이 야율극을 바라보며 두 눈을 부라렸다.

“그럼 조금 전의 일격도 저 새끼가 일부러 맞아줬단 말이야?”

“어디까지나 그럴 확률이 있다는 얘기지.”

소무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성벽 위에서 북이 마구 울리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쿵-!

“갑자기 왜 북을 치고 난리야?”

“한세충 장군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군. 장수를 본진으로 불러들일 때 쓰는 신호야.”

조금만 더 몰아붙이면 야율극의 숨통을 끊을 수 있을 터였다. 정신없이 싸우던 염충은 조금 아쉬운 모양이었다.

그는 잠시 퇴각하길 망설이는 듯했다.

그때 소무는 야율극이 허리춤에서 무엇인가를 꺼내는 것을 보았다.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푸숙-! 푸슈슉-!

“……연막탄?”

살수들. 그리고 마교에서나 사용하는 수법이었다.

야율극과 염충의 주변으로 짙은 운무가 순식간에 번져나갔다. 그것은 휘나라의 본진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 모습에 지켜보던 아군 장수들이 당황했다.

“뭐 하자는 거야!?”

“도대체 무슨 짓거리야?”

희뿌연 운무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단지 그 속에서 무엇인가 격돌하는 소리가 몇 번 들려왔을 뿐이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더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정적만이 계속해서 흘렀다.

모두가 침묵을 지킨 채 결과를 기다렸다.

반각이 지난 후.

짙게 내리깔린 운무가 서서히 걷혀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훤히 드러난 광경에 모두가 놀란 눈을 부릅떴다.

일평생 나라를 위해 무기를 들었던 용장 염충. 무안절도사 한세충을 보필하며 많은 업적을 남긴 영웅이었다.

그런 그가 차디찬 바닥에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온몸이 난자된 채로 말이다.

꿰뚫리고, 짓이겨진 무수한 상흔들. 눈을 뜨고는 지켜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몰골이었다.

시신의 옆에는 쌍검을 움켜쥔 야율극이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지켜보던 모두가 충격에 휩싸였다.

“다 죽어가던 놈이 무슨 개수작을…….”

“저 비겁한 새끼,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소무는 묵묵히 휘나라의 본진을 살펴보고 있었다. 이윽고 본진 어디에선가 무엇인가를 발견하고야 말았다.

은빛 갑주를 입은 다섯 명의 장수들. 하나같이 화경의 기세가 느껴지는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무기에 작은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어떤 상황인지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그들이 운무 속으로 들어가 집단으로 염충을 살해하고 나온 것이리라.

그때 야율극이 쌍검을 치켜들며 성벽을 바라보았다.

“하하하! 고작 이딴 녀석이 내 상대가 될 수 있을 줄 알았더냐!? 그럼 누가 또 내 검을 받아보겠느냐!”

야율극의 발이 널브러진 염충의 얼굴을 짓밟았다.

꾸욱-!

그때였다.

돌연 성벽 위에서 엄청난 굉음이 전장을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악!!!”

얼굴이 잔뜩 일그러진 한세충이었다.

그가 육성으로 뿜어낸 기세가 광풍을 만들어내며 삼백 장 이상을 뻗어 나갔다.

그 모습을 마주한 야율극은 움찔했다.

그리고 그 순간 한세충이 성벽 위에서 날아올랐다.

“그 발 치우지 못할까!!!”

지독한 살기가 전장을 지배했다. 먼 거리에서 지켜보던 소무조차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분노의 화신. 지금 그의 모습은 그것으로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이십 년 이상 자신을 보필해온 부관이 영문도 모른 채 잔혹하게 죽었다. 어찌 태연할 수가 있겠는가.

한세충을 마주 보던 야율극은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꼈다. 뒷걸음질 치던 그는 허리춤에서 재빨리 한 움큼의 구슬을 꺼냈다.

푸슉-! 푸슈슉-!!!

그의 주변으로 다시 운무가 차올랐지만, 한세충은 망설임 없이 파고 들어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희뿌연 운무. 그것은 마치 뇌전을 머금은 먹구름처럼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쩌엉-! 쩌저정-!

지켜보던 모두가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그 누구도 말을 내뱉을 수가 없었다.

전투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단발마가 울려 펴졌다.

“크학!”

짙게 깔린 운무를 뚫고 팔 하나가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누구의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어서 무엇인가가 또다시 하늘 높이 솟구쳐 올랐다. 놀랍게도 그것은 야율극의 수급이었다.

그런데 무엇인가가 이상했다. 야율극이 죽었음에도 격돌하는 소리가 계속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내시처럼 생긴 새끼, 방금 죽지 않았어?”

“그럼 지금 장군이 누구랑 싸우는 거야?”

어느 순간 운무 속에서 엄청난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꽈아아아앙-!!!

그리고 그 순간.

다섯 개의 그림자가 동시에 운무 밖으로 튕겨져 나왔다.

비틀거리며 자세를 고쳐잡고 있는 다섯 명의 장수들. 그들은 하나같이 용무늬가 음각된 은빛갑주를 입고 있었다. 완안후이의 최측근 장수들인 오룡상장(五龍上將)이었다.

성벽 위에서 그 모습을 확인한 병사들은 크게 분노했다.

“설마 일기토에서 다섯 명이 공격했던 거야!?”

“저 비겁한 놈들이…….”

“부관님을 다섯이서 잘도…….”

곳곳에서 분노의 물결이 일렁였다.

오룡상장이 다시 운무 속으로 파고들자, 성벽 위의 부장들은 눈이 뒤집혔다.

“저 새끼들이 어디서 개수작을!”

“장군을 구하라!”

송나라 역사상 최강의 무장이라 알려진 인물이었다. 한세충이 쓰러진다면 어차피 양양성도 끝장이었다.

부장들이 성벽 위에서 밧줄을 잡고 도약하기 시작했다. 적루의 깃대를 묶어놓은 밧줄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움직임 또한 휘나라의 예상 범주 안에 있던 행동이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휘나라의 본진에서 여섯 명의 장수가 쏜살같이 튀어나와 가로막았다.

“너희들이 나설 자리가 아니다. 목숨을 재촉하고 싶지 않다면 방해하지 마라.”

가로막은 장수들은 여섯 명으로 같은 머릿수였다. 한눈에 보아도 양측이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전력이었다.

한세충의 휘하 부장들은 안절부절못했다.

잠시 후 그들은 적장들의 뒤로 누군가가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야생마처럼 허리까지 흩날리는 검은 머리칼. 그리고 갑주 위에 붉은 피풍의를 걸친 인물. 휘나라의 대장군 완안후이였다.

그는 숨 막히는 기세를 내뿜으며 운무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공성전이 시작된 이래 그가 처음으로 움직임을 개시한 것이다.

이제는 한세충이 아무리 날고 긴다 한들 버텨낼 수 있는 전력이 아니었다.

“끝이다…….”

“이, 이 천하의 죽일 놈들…….”

부장들의 눈이 절망으로 물들어갈 즈음이었다. 누군가가 적장들의 뒤쪽 어딘가를 향해 손가락을 내뻗었다.

“저, 저곳을 보십시오!”

휘나라의 본진 근처에 우뚝 솟은 산이었다. 그곳에서부터 일단의 장수들이 미친 듯이 내려오고 있었다. 가로막는 병사들을 마구 베어 넘기면서 말이다.

“지원군입니다!”

“아군 장수들이 왔습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그들 또한 얼마 가지 못해 벽에 가로막히고야 말았다. 십여 명에 이르는 장수들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거기다가 금빛 갑주를 걸친 병사들이 개떼처럼 몰려들고 있었다. 완인후이의 친위부대였다.

“빌어먹을!”

그때였다. 돌연 그곳에서 거대한 폭음 소리가 터져 나오며 지면을 뒤흔들었다.

콰아앙-!!!

십여 명의 병사들이 동시에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 순간 휘청거리는 휘나라 장수들의 틈새를 비집고 한 줄기 빛살이 돌파에 성공했다.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듯한 움직임. 그 모습은 마치 양 떼 사이를 파고드는 한 마리의 사자와도 같았다.

병사들이 사방에서 달려들고 있었지만 어림도 없었다. 앞을 가로막은 자는 누구든 갈대처럼 쓰러져나갈 뿐이었다. 한세충에게도 뒤지지 않을 가공스러운 기세였다.

검 한 자루를 움켜쥔 그자는 정확히 전장의 소용돌이가 된 운무로 향했다.

“누, 누구지?”

“본국에 저런 장수가 있었습니까?”

1658263152443.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