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구름에 가려진 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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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화 구름에 가려진 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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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화 구름에 가려진 달 (3)
2022.06.27.
병사들을 뒤로한 채 양국 최강의 장수들이 뒤섞였다. 그야말로 초월자들의 싸움이었다.
적아 할 것 없이 모두가 행동을 멈춘 채 짙은 운무를 주시했다. 그곳에선 뇌우가 몰아치듯 눈부신 섬광만이 계속해서 번뜩이고 있었다.
운무 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폭풍에 병사들이 뒷걸음질 치며 거리를 벌렸다.
그 안에서 지금 어떤 싸움이 전개되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승부였다.
“후…….”
한숨을 내쉰 일광은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불합리한 싸움이었다. 상대는 완안후이와 오룡상장으로 도합 여섯이었다. 반면 아군은 소무와 한세충 둘뿐이지 않은가.
무엇보다 온몸이 근질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은밀히 주변을 살폈다.
좌우에는 운무를 살피느라 정신이 팔린 악비와 사마철이 보인다. 마치 자신들이 그 안에서 싸우는 것처럼 호흡까지 멈추고 있었다.
전면에서 길을 가로막은 휘나라 장수들과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돌파하고자 한다면 지금이 기회였다. 결심을 굳힌 그는 심호흡을 들이켰다.
‘기다려 대장. 일광이 지금 도우러 간다.’
그 순간 일광이 지면을 박차며 돌파를 시도했다.
타앗-!
거대한 체구에도 불구하고 전광석화처럼 날쌘 속도는 경이로울 정도였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가로막고 있던 적들이 당황했다.
“막아!”
“어딜!”
일광을 향해 두 자루의 검이 다가갔지만, 이미 한발 늦고야 말았다.
미끄러지듯 사이를 통과한 일광은 이미 운무를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그를 뒤쫓으려던 휘나라의 장수들은 이내 포기했다. 악비와 사마철이 전면에서 공격 태세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목적지의 코앞까지 당도한 일광.
그는 돌연 눈앞으로 다가오는 거대한 앞발을 목격하고야 말았다. 그것이 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양팔로 교차하여 방어했다.
콰앙-!
무엇인가가 엄청난 괴력으로 그를 후려쳐버렸다.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진 일광은 두 바퀴를 구르고 나서야 일어설 수 있었다.
그의 앞에는 거대한 범 한 마리가 찢어진 두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완안후이의 애완동물이라 불리는 영물. 태산을 지배했던 산군이었다.
일광은 몹시 분노했다. 랑아대의 부대장이 고작 짐승 따위에게 기습을 당하다니. 인정할 수가 없었다.
“이런 X팔. 넌 이제 뒈졌어.”
소무를 도와야겠다는 생각도 잠시. 눈앞의 산군부터 때려잡아야겠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화르륵-!
붉은빛이 감도는 강기가 그의 두 주먹을 감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산군이 이빨을 드러내며 상체를 낮추었다.
“그 이빨, 오늘 다 뽑아주마.”
그 순간 마주 보던 둘이 동시에 지면을 박찼다.
일광의 주먹과 산군의 앞발이 서로를 향해 맹공을 퍼붓기 시작했다.
콰쾅-! 콰콰콰쾅-!!!
마치 두 마리의 짐승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 같았다.
둘의 싸움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고 있을 시점이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자들이 이내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운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일광과 산군의 싸움도 궁금했지만, 지금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현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싸움. 모두의 운명을 결정지을 격전이 벌써 끝난 듯했다.
요란스럽게 번쩍이던 짙은 운무는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만이 가득했다.
이 싸움에서 승리한 진영이 앞으로의 전쟁에서 승기를 잡게 될 것이다.
모두가 호흡을 멈추고 결과를 기다렸다. 일광과 산군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스르르르륵-!
드디어 운무가 걷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금씩 드러나는 광경은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모두가 할 말을 잃고야 말았다.
“크윽…….”
가장 먼저 모습을 내비친 자는 오룡상장 중 한 명이었다. 비틀거리며 신음하는 그는 왼팔이 깨끗이 절단되어 있었다.
“저, 저럴 수가…….”
“어찌 저런…….”
오룡상장 중 두 명은 바닥에 싸늘하게 식어있었으며, 나머지 두 명도 상처를 움켜쥔 채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이어서 또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진만인적 한세충. 그의 모습을 본 순간 성벽 위에서 탄식의 물결이 일렁거렸다.
“자, 장군!”
“아, 안 돼…….”
그의 왼쪽 복부를 비집고 나온 검날이 햇빛에 번뜩였다.
주인을 잃은 검이 복부를 관통하여 고정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우뚝 서 있는 그는 신음은커녕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잠시 후 나머지 두 명도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있는 소무. 내상을 입은 듯 그의 입가로 한줄기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와 마주 보고 있는 자, 완안후이의 상태도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갈라진 갑주의 틈새로 갈비뼈가 드러나 보이는 검상을 입고 있었다.
그야말로 양패구상이었다.
누가 이겼다고 말할 수도 없는 싸움이었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그때 완안후이가 소무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오늘은 이쯤 하는 것이 어떻겠나. 계속한다면 저자는 죽을 것이다.”
“……그리고 너 또한 죽게 되겠지.”
완안후이가 한숨을 내쉬며 검을 움켜쥐었다.
“굳이 오늘 이곳에서 끝장을 볼 필요가 있겠는가?”
소무 또한 내상이 적지 않았다. 진기가 뒤틀려 초식의 전개조차 힘들 정도였다. 그런데도 이 중에서는 상태가 가장 양호한 수준이라 할 수 있었다.
완안후이를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지만, 그리한다면 한세충의 목숨은 장담할 수가 없었다.
호흡은 멀쩡해 보여도 그의 상세는 지금 매우 위급했다.
이윽고 결심을 굳힌 소무가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였다.
“다음 만남을 고대하지.”
소무가 등을 돌리자 완안후이가 그를 불러 세웠다.
“잠깐.”
걸음을 멈춘 소무가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동안 우리 휘나라의 군단이 어이없게 패배했던 몇 번의 전투가 있었지. 이제야 이유를 알 것 같군. 내가 네 존재를 알게 된 이상, 앞으로는 쉽지 않을 것이다.”
“뭔가 착각하고 있군. 나 혼자만의 힘으로 이룬 승리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본질을 깨닫지 못하는 이상, 너희는 몇 번이고 참혹한 패배를 맛보게 될 것이다.”
“그럴 수도 있겠지. 어쨌거나 정말 탐이 나는 인재로군. 혹시 우리와 함께해볼 생각은 없겠나? 무엇을 요구하든 원하는 모든 것을 약속해주겠다.”
소무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짐승들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 따위는 없다. 너희들이 이 땅에 저지른 악행들,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해주지. 기대해도 좋아.”
대답은 들을 필요도 없었다. 그 말을 끝으로 소무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한세충에게 다가간 소무는 그를 부축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장양 장군의 인복이 부럽군. 고맙다는 인사는 나중에 따로 하겠네.”
힘겹게 한마디를 내뱉은 그는 어딘가를 향해 터벅터벅 걸었다.
복부에 검 한 자루를 꽂고 걷는 모습이 비장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가 멈춰선 곳에는 부관 염충의 시신이 있었다.
한세충은 조심스럽게 그를 두 손으로 안아 들었다.
함께한 시간이 적지 않았다. 부관이기에 앞서 언제나 자신의 옆을 지켜준 사내였다. 처참해진 몰골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미어졌다.
“이 친구야. 그렇게 큰소리를 치더니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어서 눈을 뜨시게. 마지막은 나와 함께하겠다고 맹세하지 않았는가.”
성문을 향해 걸어가는 그의 두 눈에 작은 물기가 맺혔다.
누구보다 강인한 어깨를 가진 남자가 아니던가. 오늘따라 그의 어깨가 무척 수척해 보였다.
그를 따라 걷는 휘하 부장들도 어두운 안색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한편 소무도 아군의 진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 순간만큼은 그의 앞길을 막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휘나라의 병사들도 그가 지나갈 수 있도록 양쪽으로 길을 터주었다.
악비와 사마철이 다가와 그의 양쪽을 지켰다.
“고생 많았네. 자네가 해낼 줄 알았어.”
“어서 빨리 올라갑시다. 내상부터 다스려야겠소.”
고개를 한 번 끄덕인 소무가 어딘가를 향해 소리쳤다.
“일광!”
산군과 정신없이 싸우느라, 일광은 상황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알지 못했다. 고작 범 따위에게 고전하는 자신이 믿기지 않을 따름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자신을 제외한 모든 아군이 본진으로 복귀하고 있었다. 적진에서 혼자 이러고 있을 틈이 없었다.
“이제 좀 떨어져!”
벼락처럼 나아가는 일광의 주먹이 산군의 머리를 강타했다.
꽈앙-!
어지간한 공격에는 끄떡도 안 하는 영물이었다.
놈이 잠시 충격에 빠진 사이 일광도 후퇴를 개시했다. 다음을 기약하면서 말이다.
“나도 같이 가!”
그는 망설임 없이 본진이 있는 산을 향해 질주했다. 그리고 목적지를 코앞에 둔 순간, 상상도 못 할 일이 벌어졌다.
“뭐, 뭐야?”
산군이 홀로 뒤쫓아오고 있었다. 아군의 본진까지 말이다.
그런데 놈의 눈빛이 조금 이상했다. 마치 자신을 죽여달라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지 않은가. 일반적인 동물이 가질 수 없는 슬픔이 가득한 눈동자였다.
그러나 일광이 알 바가 아니었다.
“하. 이런 미친 짐승이 있나.”
산속에서 일광과 산군이 또다시 난타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가 입고 있던 갑주는 이미 걸레가 된 지 오래였다. 양팔에도 할퀴어진 자국이 셀 수 없이 각인되고 있었다.
보다 못한 사마철이 지원하기 위해 다가갔지만 일광이 그것을 거부했다.
“아무도 돕지 마소! 내 오늘 이놈과 끝장을 봐야겠으니.”
사마철이 황당한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그때 소무가 한쪽 구석에서 가부좌를 틀며 말했다.
“신경 쓰실 것 없소. 본디 짐승들끼리 싸울 땐 서열 정리가 끝날 때까지 방관하는 것이 상책이니.”
태산의 지배자 산군. 놈과 관련된 이야기는 민간에도 퍼져 있었다. 모두가 전설로만 치부했지만 말이다.
휘나라에 붙잡힌 새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인간 세상의 전투에 끼어든 영물이다.
슬픔에 잠긴 산군의 눈이 안쓰러워 보였다. 울부짖는 포효에서는 감출 수 없는 괴로움이 느껴졌다.
아마도 일광을 통해 답답한 마음을 분출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홀로 돌진해 온 것을 보니 휘나라에서도 통제가 제대로 안 되는 모양이었다.
‘새끼를 향한 부모의 마음이 짐승이라고 어찌 다르겠는가.’
한숨을 내쉰 소무는 내상부터 다스리기 시작했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부분은 산군이 아니었다. 가부좌를 틀고 운기조식에 접어들어 갔다.
뒤틀린 진기를 풀어내는 한편 조금 전의 싸움을 되뇌었다.
무림에서도 이렇게까지 처절하게 싸워본 기억이 없었다. 합을 맞춘 오룡상장도 대단했지만, 완안후이의 무공은 상상 이상이었다.
‘내가 조금만 늦었어도 한세충 장군은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여덟 명이 뒤엉켜 싸운 초인들의 전투. 그것은 그동안 멈춰있던 무인(武人)의 심장을 다시 뛰도록 만들었다.
‘완안후이……. 단둘이 붙는다면 이길 수 있을까?’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런 그를 굴복시키고 휘나라를 세운 황제는 또 얼마나 강하단 말인가. 무림을 벗어난 이후 처음으로 맞수를 만난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소무의 피를 끓게 했다.
‘그러고 보니 너무 오랫동안 검을 놓고 있었군.’
그가 다시 검을 잡는다는 의미. 그것은 수련과 정진을 의미했다.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 다시 검을 잡아야만 했다. 기회가 생기는 대로 말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혈색이 차츰 돌아오고 있었다. 내상을 완벽히 치료하려면 며칠은 더 걸릴 것이리라.
급한 조치를 마칠 즈음이었다.
쿠웅-!
거대한 무엇인가가 쓰러지는 소리였다.
소무가 눈을 뜨자 예상했던 결과가 드러났다. 피투성이가 된 일광이 쓰러진 산군을 질질 끌고 본진으로 다가왔다.
집채만 한 범을 코앞에서 본 병사들은 놀란 얼굴로 웅성거렸다.
지휘관들도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몰려들었다.
“짐승 따위가 감히 이 일광님에게 대들다니.”
소무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너도 죽다 살아난 것 같은데?”
“대장도 한번 붙어보면 알아. 미친 짐승에게 걸리면 어찌 되는지.”
온몸이 축 늘어진 산군은 눈동자만 끔벅이고 있었다.
어느새 다가온 악비가 놈의 전신을 훑어보며 말했다.
“고통스러워하고 있으니, 어서 목숨을 끊어 주시게.”
고개를 끄덕인 일광이 산군의 머리맡에 우뚝 섰다.
치켜든 그의 주먹으로 거센 기(氣)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파산권(破山拳)의 초식 중 하나인 폭렬신격(爆裂迅擊)이었다.
그가 주먹을 내리칠 찰나 소무가 왼쪽 손바닥을 내밀었다.
“잠깐.”
“……왜?”
잠시 머뭇거리던 소무가 악비를 향해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이놈을 우리 군영으로 데려가고 싶습니다.”
악비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장안까지 말인가? 이런 영물은 사람이 길들일 수 있는 짐승이 아닐세.”
“그래도 이대로 죽이기엔 좀 아깝군요.”
“음. 자네 부대의 장수가 잡았으니, 뜻대로 하시게.”
“고맙습니다.”
소무는 랑아대를 불러 무엇인가를 지시했다.
잠시 후 대원들이 밧줄을 하나씩 움켜쥐고는 산군의 전신을 꽁꽁 묶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