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구름에 가려진 달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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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화 구름에 가려진 달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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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화 구름에 가려진 달 (4)
2022.06.28.
한바탕 소란이 지나고 소강상태가 계속되었다. 양측 진영의 최강자들이 중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산속에 주둔한 지원군들도 지루한 시간을 계속 보내야만 했다.
그리고 다시 닷새가 지났다.
지휘 막사로 위관급 장교 한 명이 다급히 찾아들었다.
전술지도를 살펴보던 장수들이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인가?”
“저, 적군이 철수하고 있습니다!”
장수들이 환희에 휩싸이며 자리를 박찼다.
“뭐, 뭐라고?”
“그게 정말인가?”
입구 근처에 있던 장수 한 명이 막사 밖을 살피며 소리쳤다.
“하하핫! 놈들이 물러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해냈습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밖에서 병사들의 함성이 대지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우와아아!!!”
“와아아아아!!!”
기쁨이 묻어나는 승리의 함성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그러나 사마철의 얼굴에는 의심이 가득했다.
“놈들에게 속아선 안 됩니다. 전력도 우리보다 우세하거늘,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회군한다니요? 말이 되지 않습니다.”
상석에 앉아있는 악비가 깍지를 끼며 답했다.
“거짓 퇴각은 아닐 걸세.”
그는 마치 예상이라도 했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른 장수들은 의문이 가시질 않았다.
“무슨 이유가 있는 것입니까?”
“첫째는 심리적인 요인일세. 성에는 보급품이 당도했고, 후미에도 적을 두고 있으니 심적으로 부담스러운 상황이었겠지. 장기전으로 가면 오히려 놈들의 보급이 문제 될 수도 있고. 무엇보다…….”
악비가 은연중 소무를 한 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완안후이 자신이 짜놓은 판이 틀어지고 있기 때문일세. 전술가들은 불확실성 속에서 싸우는 것을 꺼리기 마련이지.”
소무가 고개를 끄덕이며 악비의 말을 덧붙여주었다.
“유리한 판세를 만들어 다시 침공해올 것입니다. 굳이 지금 무리해서 싸울 이유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때 부관 장헌이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여하간 적군이 회군하고 있으니, 놈들의 후미를 기습하여 피해를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악비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것을 예측하지 못할 만큼 호락호락한 자가 아닐세. 어디 한번 살펴보시게.”
막사 밖으로 나간 장수들이 회군하는 진형을 살폈다. 잠시 후 그들 중 한 명이 무엇인가를 눈치챈 듯 중얼거렸다.
“기병들을 여러 부대로 나누었군요.”
열 개의 부대로 나뉜 기마대는 각 부대당 삼천 정도 되어 보이는 규모였다.
악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했다.
“저 기마부대들이 번갈아 가며 본진의 측면과 후미를 호위할 걸세. 회군하는 적의 본진을 섣불리 건드렸다간, 도리어 기병들의 역공을 받게 될 것일세.”
“방법이 없는 것입니까?”
“호위 부대들을 먼저 격파하는 수밖에 없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그럴 역량이 있겠는가.”
아군의 기병은 고작 이천 기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보병들을 이끌고 기마대를 섬멸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후. 회군하는 놈들을 순순히 보내줘야 한다니…….”
“우리 또한 지금 무리해서 싸울 이유가 없네. 다음을 기약하세.”
묵묵히 지켜보던 소무가 악비에게 물었다.
“그럼 이제 어찌하실 계획입니까?”
“우리는 양양성에 며칠 머무른 이후 번성에 주둔할 것이네. 랑아대도 별다른 일이 없다면 이곳에서 며칠 쉬어가시게.”
“말씀은 고맙지만, 저희는 먼저 장안으로 회군하겠습니다.”
“자네에게 딸아이가 있다고 들었네. 빨리 가서 보고 싶은 모양이로구만.”
소무는 조용히 한 번 웃어 보였다.
“한세충 장군께 안부 전해주십시오.”
“허허. 그리하겠네. 자네도 돌아가거든 내 안부를 절도사께 전해주시게.”
“알겠습니다. 그럼 또 뵙지요.”
* * *
장안성으로 회군하는 랑아대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치열한 전투 없이도 포위된 양양성을 해방하는 것에 성공했다.
한 명의 사상자도 없이 맡은 임무를 완수한 것이다.
포획한 산군을 끌고 가느라 행군 속도는 빠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한백 부장의 기마대가 앞서 회군한 상황이었다.
일광이 뒤를 바라보며 대원들을 독려했다.
“거의 다 왔어! 도착하면 배를 채울 수 있으니까, 다들 조금만 힘내!”
뒤에서 대원들의 볼멘소리가 들려왔다.
“형님이 잡아놓고, 힘든 일은 왜 우리만 시켜요?”
“후. 정말 너무한 거 아니에요?”
꽁꽁 묶인 산군은 거대한 짐마차 위에 얹어져 있었다.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무시무시하고 거대한 영물이었다. 민간인들이 놀랄 수 있었기에 천으로 가려놓은 상태였다.
엄청난 무게에 마차의 바퀴는 진작에 부서져 버렸다. 그렇기에 그것을 대원들이 교대로 둘러메고 있었다.
“나는 부상자잖아. 다음에 이런 녀석 만나면 너희들이 잡아. 그럼 나 혼자 들고 갈 테니까.”
산군과 육탄전으로 싸운 일광은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너덜너덜해진 랑아대의 갑주와 발톱에 긁힌 상처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그것이 전부였다. 치명상은 단 하나도 없었다.
대원들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입만 삐죽 내밀고 있었다.
반시진이 더 지났을 때였다. 멀찍이 장안성의 성문이 보일 찰나, 돌연 어디선가 아름다운 선율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퉁소 소리잖아?”
“누가 여기서 퉁소 연주를?”
연주자의 마음을 대변해 주듯 기쁘고 신나는 음률이었다.
선두에서 걷던 소무가 위치를 확인하고는 미소를 머금었다.
전면으로 십여 장 거리의 작은 언덕 위. 그곳에서 딸아이가 퉁소를 불어대고 있었다.
“저기 소소예요!”
“하핫! 어찌 알고 나온 거야?”
조카를 발견한 대원들이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리고 소소 옆에 여인 한 명이 이곳을 지켜보고 있었다.
단아하게 틀어 올린 머리와 기품 있는 옷차림. 그녀는 소무를 지그시 응시하고 있었다.
얼떨결에 소소에게 끌려 나온 연설화였다.
“스승님, 같이 해요!”
“……응?”
“할아버지가 그랬어요. 여기서 음악을 들려주면 아버지하고 삼촌들이 좋아할 거랬어요. 히히히.”
병사들의 귀환을 환영하는 연주에 동참하라는 것이었다.
자신이 누구인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그러나 제자의 부탁을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 그럴까……?”
마지못한 연설화는 등 뒤에서 칠현금을 꺼내어 들었다.
다소곳이 앉은 그녀는 눈처럼 흰 양손을 살며시 내뻗었다. 그 순간 아름다운 선율이 경쾌한 퉁소 소리와 뒤섞이며, 병사들의 귀를 간지럽혔다.
행군의 피로가 단번에 사라져 버렸다. 마음뿐만 아니라 신체의 기운까지 북돋아 줄 정도로 대단한 연주였다. 모두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잠시 후 소소가 연주를 멈추고는 폴짝 뛰어가 안겼다.
“아버지! 나 보고 싶었어요?”
“매일 보고 싶었지. 우리 딸, 퉁소 실력이 많이 늘었는데?”
“더 듣고 싶어요?”
“응. 돌아가서 들어볼까?”
“헤헤. 좋아요! 근데 저건 소소 선물이에요?”
삼촌들이 거대한 무언가를 둘러메고 있었다. 천으로 가려진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반면 소무는 당황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엔 선물을 사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딸아이가 실망하는 얼굴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눈치챘어? 깜짝 선물이라, 나중에 줄 거야.”
산군을 어찌 선물로 준다는 말인가. 잡아먹힐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시간을 벌어놓고 적당한 것으로 사다줄 생각이었다.
품에 안긴 소소가 작은 팔로 아버지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히히. 그럴 줄 알았어요. 고마워요, 아버지~”
소무는 딸아이의 엉덩이를 두들기며 설화에게 다가갔다.
“고마워, 연매. 이런 환영 인사를 다 준비해주다니.”
평소의 그녀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렇기에 소무의 눈빛에는 감동까지 서려 있었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소무의 전신을 한 번 훑어보았다.
“다친 곳은 없는 모양이네.”
“그럼. 별일 없었지?”
설화는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양주산에 있을 테니, 저녁에 와. 좀 씻고.”
양주산은 그녀의 거처가 있는 곳이었다.
소무가 의미심장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따 보자고.”
* * *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한 비가 세상을 적셨다.
모처럼 내린 폭우는 밤이 되어도 계속되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렇기에 궁성의 곳곳은 한적하기만 했다.
텅 비어 있는 거리.
작은 그림자 하나가 폭우를 헤치고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도둑고양이처럼 검은 비옷을 입은 아이였다.
“내 선물.”
소소는 선물이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내일 준다고 했지만, 일각이 하루와도 같았다.
선물이 어느 방향으로 갔는지는 미리 파악해둔 상황이었다.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부피가 꽤 거대했다.
한참을 걷던 중 전면에서 낯익은 관원 한 명을 마주쳤다. 궁성 주변을 순시하고 있던 순관이었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소소? 비가 이렇게 내리는데 어딜 가는 거야? 아직 근무 시간 아니잖아?”
“저는 선물 찾으러 가요!”
자세히 보니 소소의 입이 귀까지 걸려있었다. 그 모습에 순관이 피식 웃었다.
“좋은가 보구나.”
“네. 너무 좋아요. 히힛.”
“빨리 다녀와. 감기 걸릴라.”
소소는 두 손을 모아 공손히 인사했다.
“네, 아저씨. 안녕히 계세요~”
군영 어딘가에 도착한 소소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디에 숨겼지?”
있을 만한 곳을 샅샅이 뒤져보았으나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한참이나 이곳저곳을 쑤석거리던 중 무엇인가를 찾아냈다.
궁병대의 훈련장에서 이십여 장이 떨어진 공터. 그곳에는 그동안 못 보던 거대한 천막이 설치되어 있었다. 게다가 곳곳에 포진한 보초병들까지.
폭우가 쏟아지는 마당에 철통같은 경계라니? 수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모습을 멀리서 살펴보던 소소는 히죽 웃었다.
“누가 내 선물 훔쳐갈까 봐 지키고 있어요?”
폭우 속에서 내뱉은 혼잣말이었다.
너무 궁금했기에 무엇인지만 살펴보기로 했다.
천막의 뒤쪽으로 은밀히 이동한 소소는 상체를 낮추고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작은 체구에 검은 비옷을 입고 있으니 경계병들도 눈치챌 수가 없었다.
목표지점에 도착한 소소는 천막을 살며시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 틈으로 작은 머리를 집어넣었다. 그 순간 숨 막히는 소리가 동시에 뿜어져 나왔다.
“헙!”
머리를 다시 빼낸 소소는 쏟아지는 비를 보며 두 눈을 끔벅였다.
“냥이가 엄청나게 크네.”
상상 이상으로 큰 고양이가 신기하기만 했다. 그림에서조차 범을 본 적이 없는 아이였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결심을 굳힌 소소는 다시 천막 안으로 기어서 들어갔다.
집채만 한 고양이는 사슬에 꽁꽁 묶여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눈을 감고 거친 숨을 몰아쉬는 것을 보니 많이 아픈 모양이었다.
“불쌍해…….”
소소는 허리춤에 양손을 얹고 주변을 왔다 갔다 했다.
그때 인기척에 산군의 한쪽 눈꺼풀이 살며시 올라갔다. 거대한 눈동자는 잠시 소소를 응시하더니 이내 다시 감아버렸다.
그 모습을 확인한 소소는 냉큼 달려가 머리맡에 쪼그려 앉았다.
앉아있는 소소보다 산군의 머리가 약간 더 커 보였다.
“일어났어? 많이 아파? 누가 때렸어?”
재잘대는 소리에 거대한 눈꺼풀이 다시 올라갔다. 피곤한 듯 반쯤 떠진 눈동자에는 귀찮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놈은 소소를 한 번 훑어보더니 다시 어딘가를 응시했다. 천막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바닥을 적시는 빗물이었다.
“목말랐어?”
마침 주변에 양동이 하나가 보였다. 그곳에 빗물을 가득 채워와 산군의 입에 가져다 대었다.
“어서 먹어봐, 냥이야.”
산군은 양동이를 멍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뭔가를 망설이는 듯했다.
잠시 후 거대한 혓바닥이 그곳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소소는 그 모습을 흐뭇한 미소로 지켜보았다. 그러더니 땅콩 같은 손가락으로 산군의 턱 밑을 쓰다듬었다.
“히히. 귀여워.”
양동이는 순식간에 비워졌다.
소소가 구석에서 다시 빗물을 채우며 물었다.
“이름이 뭐니?”
대답이 있을 리가 없었다.
아버지가 가져온 선물이니 직접 이름을 지어주고 싶었다.
턱을 괴고는 한참을 고민했다. 마침 떠오르는 단어 하나가 있었다.
“오늘은 비가 많이 오는 날이니…… 다롱이 할래?”
많을 다(多)와 비 올 롱(瀧)을 조합한 것이다.
직접 지은 이름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신이 난 듯 양동이를 들고 다가가는 발걸음이 무척 경쾌했다.
“다롱아, 어서 먹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