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범이 내려간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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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화 범이 내려간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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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화 범이 내려간다 (3)
2022.07.01.
양미촌(陽眉村). 장안성에서부터 서쪽으로 오십 리 거리에 있는 촌락의 이름이다.
기이하게도 이 작은 마을은 전쟁의 여파가 별로 미치지 않은 듯 보인다. 하나같이 멀쩡한 가옥과 농작물들. 약탈의 흔적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한 여자아이가 마을 입구로 이어진 대로를 살랑거리면서 걷고 있었다.
잠시 후 아이는 전면에서 봇짐을 지고 다가오는 한 중년인을 마주쳤다.
“아저씨, 여기 천야방이 어디에 있어요?”
중년인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걸 네가 왜 묻는 것이냐?”
“심부름 왔어요. 헤헤.”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마을 안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기 가장 큰 전각이 보이지? 저곳으로 가 보거라.”
“고맙습니다~”
목적지는 마을 중앙에 있는 장원이었다.
촌락에 있기에는 그 규모가 조금 어색했다. 앞마당에는 십여 대의 수레와 나무 상자들이 쌓여있었다.
소소는 망설임 없이 바로 달려갔다.
문 앞에서 장한 한 명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허리춤에 대도를 차고서 말이다.
촌락의 전각에 보초병이라니.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장한이 인상을 구기며 손가락을 휘저었다.
“이곳에서 알짱거리지 말고 다른 곳으로 가서 놀아.”
전각 입구에 매달린 현판을 보니 목적지가 분명했다.
소소가 큰 눈을 끔벅이며 말했다.
“황 노사! 황 노사가 어딨어요?”
“쪼그만 게 어디서 단주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느냐?”
“심부름을 왔거든요. 꼭 전할 말이 있어요!”
“누가 너한테 심부름을 시켜?”
소소는 백묘진에게 들었던 암구호를 떠올렸다.
“백련화가 보내서 왔어요.”
장한은 짐짓 놀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잠시 기다리고 있거라.”
안으로 사라졌던 그는 반각이 지난 뒤 다시 나타났다.
“따라오너라.”
뒤를 따르는 소소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십여 명의 사내들이 탁상에 늘어앉아 무엇인가를 적거나 분류하고 있었다.
“여기는 뭐 하는 곳이에요?”
“상단이야.”
“거짓말이죠? 나는 다 알아요.”
“네까짓 게 뭘 알아? 조용히 따라오기나 해.”
입을 꾹 다문 소소는 장한을 따라 이 층으로 올라갔다. 문을 앞에 두고 그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들어가거라.”
문을 열고 들어간 소소는 주변을 연신 두리번거렸다. 화폭들과 조각상 등 온갖 진귀한 물품들이 전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안쪽. 화려하게 장식된 탁상을 끼고 한 노인이 붓대를 움켜쥐고 있었다.
그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붓을 움직이며 말했다.
“정녕 그분의 전언을 가져왔다는 게 사실이더냐? 어찌 너 같은 꼬맹이가 그 일을 맡았단 말이냐?”
“정말이에요. 황 노사를 만나서 꼭 전해야 한다고 했어요.”
소소는 백묘진에게 전달받은 말들을 또박또박 얘기했다. 그 말을 듣는 황 노사는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잠시 후 황 노사의 고개가 서서히 들어 올려졌다. 자글자글한 주름 사이로 드러난 안광이 서늘한 기운을 머금었다.
그때였다.
날카롭게 선 붓대가 노인의 손아귀를 벗어나 소소를 향해 직선으로 쏘아져 나갔다.
파앗-!
소소를 시험하기라도 하려는 듯 정확히 옆구리의 작은 틈새로 향했다.
굉장한 솜씨였지만 소소의 눈에는 너무나도 느리게 보였다.
작은 손이 단번에 그것을 낚아채 버렸다.
터업-!
붓대를 움켜쥔 소소는 왼쪽 손바닥으로 각을 재며 히죽 웃었다.
연설화에게 배운 마교 최강의 암기술. 마화비전의 준비동작이었다.
“히히. 이제 제 차례예요?”
“무, 무슨……?”
황 노사는 심장이 멎는 듯했다. 소소가 던진 붓대가 반월을 그리더니, 정확히 자신의 관자놀이를 향해 쏜살같이 다가오고 있었다.
황 노사는 피할 수 없음을 직감하고 두 눈을 부릅떴다. 순간적으로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이어서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눈앞에서 목격했다. 관자놀이에 박히려던 붓대가 다시 기이한 각도로 방향을 튼 것이다.
콰앙-!
한쪽 벽면을 절반이나 파고 들어간 붓대는 손잡이만 보였다. 최소한 일 갑자 이상의 내공이 있어야만 가능한 위력이었다.
황 노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새 그의 표정과 태도는 백팔십도 돌변해 있었다.
“반로환동하신 본국의 고수셨구려. 진작 말씀하시지 그랬습니까?”
황 노사의 말은 존대로 바뀌어 있었다.
아직도 마음이 진정 되지 않는지, 떨리는 손으로 뒤쪽의 진열대를 뒤적거렸다. 그러고는 쌍룡(雙龍)이 조각된 작은 목함을 꺼내어 소소에게 건네었다.
“뇌절환의 지속시간은 한 시진입니다. 그 안에 일을 마치셔야 합니다.”
소소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더는 이곳에 볼일이 없었다. 임무를 마친 소소는 목함을 들고 밖으로 걸어 나왔다.
얼마 걷지 않아 이십여 장 거리의 작은 언덕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마치 신호를 보내듯 한쪽 눈을 찡그려 보이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언덕에서부터 일단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매복하여 지켜보고 있던 랑아대였다.
소무의 뒤로는 삼십여 명의 대원들이 늘어서 있었다.
“상단으로 위장한 휘나라의 첩자들이다. 모두 체포해서 압송해.”
“예, 대장님!”
포승줄을 움켜쥔 대원들은 경쟁이라도 하듯 동시에 뛰쳐나갔다. 굳이 무기를 뽑아 들 필요도 없었다.
소무는 대원들을 뒤로한 채 다시 딸의 뒤를 쫓아 나아갔다.
마음이 급한 소소는 목함을 들고 장안의 궁성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한 식경 뒤 뇌옥의 입구.
소소를 확인한 보초병들이 바로 길을 열어주었다. 이미 소무에게 언질을 받았기에 행동에 망설임이 없었다.
“어서 들어가 봐.”
“네. 금방 나올게요!”
소소는 바로 백묘진이 갇혀 있는 감옥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가부좌를 틀고 두 눈을 감고 있었다. 기척만으로도 상황을 알아챈 듯, 눈을 감은 채로 물어왔다.
“성공했어?”
“네. 어서 먹어봐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지?”
“네, 기억하고 있어요.”
소소는 쇠창살의 틈새로 뇌절환을 밀어 넣었다. 그것을 받아든 백묘진은 망설임 없이 삼켜버렸다.
진기의 흐름이 막혀있기 때문일까? 극마의 신체는 뇌절환의 기운을 전혀 밀어내질 못했다. 효과는 생각보다 금세 나타났다.
풀썩-!
쓰러진 백묘진의 호흡과 심장박동이 서서히 멈췄다. 동시에 온몸의 체온이 급격히 떨어지며 싸늘하게 식어갔다.
이와 비슷한 수법으로는 무림의 귀식대법(龜息大法)이 있다.
소소가 회심의 표정을 지으며 소리쳤다.
“아버지!”
뇌옥의 입구 방향에서 소무가 뒷짐을 쥔 채 걸어왔다. 그의 뒤를 간수들이 기립하며 뒤따르고 있었다.
“수고했어. 어서 서두르자꾸나.”
* * *
장안성에서 십 리가 떨어진 오솔길이었다. 그곳에서 병사 두 명이 시체가 담긴 수레를 끌고 있었다.
인적이 드문 곳에 이르자 그들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이쯤이면 된 것 같아.”
“어서 가자고. 깨어나기 전에.”
병사들이 수레를 내려놓고 재빨리 사라졌다. 그러자 왼쪽 풀숲에서 작은 인영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길가로 나온 소소는 수레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그렇게 멀뚱멀뚱 서 있기를 한 식경이 지났다.
기다림에 지쳐 하품하고 있을 때였다.
“잘 해치웠겠지?”
수레에서 백묘진이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네. 잘 처리했어요.”
“어린 게 제법 똘똘하구나.”
“고맙습니다~”
수레에서 내려선 백묘진은 뒷짐을 지며 말했다.
“수고했다. 이제 가 보거라.”
소소가 토끼처럼 큰 눈을 끔벅이며 물었다.
“네? 어디를요?”
“내가 짐승 새끼나 찾으러 다닐 정도로 한가한 사람인 줄 알았더냐.”
소소는 멍한 얼굴로 백묘진을 잠시 바라보았다.
잠시 후 상황 파악이 끝난 듯 미간이 급격히 좁혀졌다. 역시나 아버지가 말한 그대로였다.
“날 속였어요?”
“속은 네가 바보지. 어서 꺼져.”
소소의 허리춤에서 검이 뽑혀 나왔다. 날이 없는 장난감 같은 소검이었다.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던 백묘진이 코웃음을 쳤다.
“내 몸 상태가 이렇다 한들 너 하나를 당해낼 수 없을 줄 아느냐. 기특한 일을 했기에 특별히 살려주는 것이다. 그러니 어서 내 눈앞에서 사라져. 마음 변하기 전에.”
백묘진은 진기의 흐름이 막혀 무공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런데도 극마의 신체 능력과 자신의 경험을 믿고 있었다. 단지 불필요한 싸움을 피하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었다.
“그럼 다롱이한테 혼나볼래요?”
다롱이가 산군을 지칭하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놈이 이곳에 있을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게다가 자존심 강한 영물이 아이의 말을 들을 리도 없었다.
백묘진의 전신에서 은은한 살기(殺氣)가 풍겨 나왔다.
“한 번만 더 나를 기만하려 든다면 후회하게 해주겠다. 그리고 콩알만 한 게 어디서 눈알을 치켜떠?”
“씨이…….”
소소는 매우 화가 났다. 자신을 속이고 조롱하기까지 하다니.
“자신이 있으면 들어오너라. 하지만 그 검을 휘두르는 순간 너는 죽는다.”
소소는 애초부터 공격할 생각이 없었다. 숨어서 지켜보고 있는 든든한 지원군이 둘이나 있었다.
기분이 몹시 불쾌했지만, 아버지가 지시한 대로 움직여야 했다.
“다롱아, 도와줘!”
어리둥절한 백묘진은 소소가 쳐다보는 곳을 슬쩍 바라보았다.
오솔길의 좌측으로 빼곡히 자리한 숲속. 그곳을 주시하던 그녀는 얼음이 된 것처럼 온몸이 정지했다.
어둠 속에서 두 개의 빛이 번뜩이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 희번덕이는 맹수의 눈빛이었다.
“서, 설마?”
검을 다시 갈무리한 소소는 허리춤에 양손을 얹었다.
“아줌마, 이제 큰일 났어요.”
숲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범 한 마리. 기이할 정도로 거대한 덩치는 보는 것만으로 기가 질릴 정도였다.
게다가 영롱한 보석처럼 번뜩이는 붉은 눈까지. 자신이 기억하던 산군의 모습이 분명했다.
“산, 산군이 왜 여기에…….”
산군은 백묘진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갔다. 그르렁거리며 날카롭게 선 이빨을 드러내면서 말이다.
세 마리의 새끼 중 두 마리가 살해당했던 그날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그녀를 기억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백묘진은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몸 상태가 정상이었더라도 승부를 자신할 수 없는 영물이었다. 지금의 상황은 처형대 앞에 목을 들이밀고 있는 것과도 같았다.
그녀의 입에서 공포에 질린 음성이 다급히 쏟아져 나왔다.
“나, 나는 네 새끼를 죽이지 않았다. 내가 아니다!”
백묘진의 코앞에 우뚝 선 산군은 소소를 쓱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마치 물어뜯어도 되느냐고 묻는 듯했다.
소소는 산군에게 다가가 등 위로 기어오르며 물었다.
“그럼 우리 안내해줄 거예요?”
“무, 물론이다! 당장 새끼가 붙잡혀 있는 곳으로 안내해주겠다.”
산군의 머리 위로 기어 올라간 소소가 귀를 붙잡으며 속삭였다.
“다롱아, 들었지? 히히. 우리 데려다준대.”
그 말을 알아들었던 것일까? 산군이 거대한 앞발 하나를 슬며시 들어 올렸다.
그 모습을 보며 백묘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녀는 다시 기겁하고야 말았다. 산군이 앞발을 올린 이유는 백묘진을 후려치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크아아앙-!!!
분노에 찬 산군의 포효. 동시에 거대한 발바닥이 그녀의 하체를 향해 벼락처럼 다가갔다.
무공을 금제 당한 몸으로는 피할 수 있는 여력이 없었다.
콰앙-!
“크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백묘진의 신형이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풍차처럼 십여 바퀴를 회전하면서 말이다.
눈이 뒤집힌 그녀는 산군의 허리 위에 떨어지며 축 늘어졌다.
털썩-!
목덜미에 타고 있던 소소가 고개를 쓱 돌리며 말했다.
“나쁜 짓을 해서 벌 받은 거예요. 이제 거짓말 안 할 거죠?”
“이런 씨…….”
백묘진은 입에서 튀어나오는 욕지거리를 간신이 참아냈다. 우선은 살아남는 것이 가장 중요했으니.
“네? 뭐라고 했어요? 못 들었어요.”
“아무것도…… 아니다.”
“헤헤. 어느 쪽으로 가야 해요?”
기운이 모두 빠진 백묘진은 힘겹게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우선 국경부터 넘어야 하니 동쪽으로만 계속 가거라.”
소소가 상체를 숙여 손가락으로 산군에게 방향을 알려주었다. 그 순간 거대한 네 발이 지면을 박찼다.
중원에서 가장 강한 영물로 알려진 범이었다. 전력으로 달리는 산군의 속도는 화경의 수준을 월등히 넘어서고 있었다. 마음이 급한 듯 질주에 거침이 없었다.
산군의 목덜미에 올라탄 소소는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거센 바람 때문에 눈을 게슴츠레 뜨고는 연신 싱글벙글했다.
그러나 쥐 죽은 듯이 매달린 백묘진은 심정이 착잡했다.
‘엉뚱한 곳으로 안내한다면 이 짐승 새끼가 날 찢어 죽이겠지. 하지만 도착한다고 한들…….’
걱정하는 부분은 따로 있었지만, 차마 발설할 수 없었다.
어차피 도착하면 알게 될 터. 그녀의 얼굴에는 근심이 지워지지를 않았다.
그리고 산군의 후미로 삼십여 장 거리. 그곳에는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뒤따르는 그림자 하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