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3화 범이 내려간다 (5) (153/250)


153화 범이 내려간다 (5)
2022.07.03.


양주산 연설화의 거처.

그녀는 원두막에 앉아 소무와 함께 차를 마시고 있었다.

“산군이 소소를 자기 새끼로 생각하고 있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원두막을 둘러싸고 있는 넓은 꽃밭. 거대한 범이 소소와 뛰어노는 광경을 보며, 그녀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찻잔을 움켜쥔 소무가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불쌍한 영물이야. 눈앞에서 새끼들을 모두 잃었어……. 더군다나 마지막 한 마리는 자신이 직접 죽여야 했지.”

“그 정도면 사람이라도 정신이 멀쩡할 수 없을 텐데?”

“응. 그래서 소소에게 스스로 살아갈 이유를 부여한 것 같아.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었겠지.”

“어쨌거나 든든한 수호신이 생겼으니 좋은 일이네. 근데 얼굴이 왜 그렇게 어두워? 설마 저 짐승한테 딸을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거야?”

소무는 피식하고 웃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여하튼 저 녀석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야. 다행히 통제는 되고 있지만, 그냥 데리고 다닐 수도 없는 일이고.”

“확실히 저런 게 성내에 돌아다닌다면 사람들이 기절하겠군.”

“맞아. 무슨 좋은 방도가 없을까?”

설화는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찻잔을 내려놓았다.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해.”

얼굴이 밝아진 소무가 기대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역시 연매라면 해결책이 있을 줄 알았어.”

자리에서 일어선 설화는 거처로 향했다.

잠시 후 다시 돌아오는 그녀의 손에는 담요와 몇 가지 소품이 들려져 있었다.

“뭘 하려는 거야?”

다소곳이 앉은 설화는 여섯 개의 바늘을 동시에 뽑아 들었다. 그러더니 망설임 없이 담요에 수를 놓기 시작했다.

섬섬옥수에 들려진 바늘들은 마치 생명을 머금고 있는 듯했다.

“그냥 지켜보기나 해.”

능숙하게 움직이는 그녀의 손길은 거침이 없었다. 자수를 완성하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한 식경도 되지 않았다.

그것이 완성되자 소무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대단해. 확실히 가능성이 있겠어.”

“누구 작품인데? 당연하지.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해.”

그녀는 소품을 이용해 또다시 무엇인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천을 찢어서 이어 붙인 후 자수를 새겨넣기를 계속했다. 중원에서 제일가는 장인이라 해도 될 만큼 놀라운 솜씨였다.

소무는 턱을 괴고 그 모습을 흥미롭게 구경했다.

한 식경이 지나고 나서야 모든 작업이 완성되었다.

“이 정도면 된 것 같아.”

소무는 흡족한 표정으로 딸을 불렀다. 그러자 소소가 산군을 타고 슬금슬금 다가왔다.

“아버지, 왜요?”

“다롱이에게 줄 선물을 만들었어. 가까이 와 보거라.”

소소는 산군의 등 위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곧이어 설화가 펼쳐 들고 있는 담요를 보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너무 예뻐요. 히히히.”

담요에는 노란 병아리가 양쪽으로 새겨져 있었다. 가죽 끈을 매달아 머리에 껴서 착용한 후 허리에 묶는 구조였다.

보드라운 이것을 착용한다면 안장도 따로 필요 없을 터.

소무가 그것을 건네받아 산군의 머리에 씌우려 했다. 그러나 병아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일까? 산군이 슬슬 뒷걸음질 쳤다.

지켜보던 소소가 미간을 좁히며 소리쳤다.

“가만히 있어!”

거짓말같이 멈춰서는 산군. 그 모습을 보며 소무와 설화가 동시에 터지고야 말았다.

“하하! 이제 네 말을 아주 잘 듣는구나.”

병아리가 새겨진 안장을 착용하자 산군의 위엄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광대들이나 쓸 법한 동그란 모자와 알록달록한 목줄까지. 누가 이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고 범이라 할 수 있겠는가. 더는 맹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설화가 팔짱을 낀 채 소무를 슬쩍 바라보았다.

“이 정도면 만족해?”

“하하. 역시 연매가 최고라니까. 수고했어.”

평소 웃음이 많지 않은 소무였다. 모처럼 많이 웃게 되는 날이었다.

소소는 어느새 안장 위에 올라가 목줄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 모습이 제법 그럴싸해 보였다.

“다롱아, 달려!”

소소를 태운 산군은 넓은 분지를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그 모습을 소무와 설화가 나란히 서서 흐뭇한 미소로 지켜보았다.

“보기 좋아 보이네.”

고개를 끄덕인 소무는 무심히 설화를 바라보았다.

석양빛에 비추어진 그녀의 얼굴이 눈부시게 빛났다. 완벽한 비율의 이목구비와 앵두처럼 붉은 입술까지. 언제 보아도 흠을 찾아볼 수 없는 무결점의 미모였다.

그때 그녀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어왔다.

“왜 그렇게 쳐다봐?”

“음. 조만간 둘이 유람이나 한번 가지. 한수강을 따라서…….”

난데없이 유람이라니. 싫지는 않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수상했다. 평소의 그답지 않은 제안이었기 때문이다.

설화가 미심쩍은 눈초리로 캐물었다.

“나랑 둘이? 갑자기? 무슨 속셈이야?”

“수적들한테 볼일이 좀 있어서. 가는 길에 같이 구경도 하고 좋잖아.”

그동안 미뤄뒀던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연설화의 반응이 예상 밖이었다.

“흥, 그럼 그렇지. 혼자 실컷 다녀와.”

그녀는 토라진 표정으로 등을 돌려 주방으로 향했다.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은 소무는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뒤따랐다.

“쉽지 않군. 여인의 마음이란…….”

* * *

랑아대의 막사 뒤에 산군의 전용 우리가 만들어졌다. 이곳의 관리자는 소소였다.

산책 갈 때는 항시 소품을 착용하게 했다. 그래봐야 오전에 한 번 스승님을 만나러 양주산에 함께 다녀오는 것이 전부였다.

혹시라도 날뛰지 않을까 모두가 걱정했지만, 산군은 언제나 조용하고 차분했다. 소소와 함께 있지 않을 땐 멍하니 막사 뒤에서 웅크리고만 있을 뿐이었다.

“다롱아!”

소소의 인기척에 산군이 벌떡 일어섰다. 그르렁거리는 것이,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양동이를 움켜쥔 소소가 닭고기를 하나씩 던졌다.

거대한 입이 쩍 벌어지며 하나도 놓치지 않고 받아먹기 시작했다.

“언니 순찰 갔다 올게. 막사 잘 지키고 있어!”

산군은 멀어지는 소소의 뒷모습을 계속해서 응시했다.

소소가 한 번씩 뒤돌아볼 때마다 그르렁거리며 응답까지 하는 것이 아닌가.

그 모습을 먼 곳에서 소무가 지켜보고 있었다.

‘산군은 수컷인데……? 아무튼, 걱정은 안 해도 되겠군.’

며칠 자리를 비워야 하는 상황이었다. 여차해서 산군이 폭주라도 한다면 일광 외에는 막을 자가 없었다. 다행히 통제는 기대 이상으로 아주 잘되고 있었다.

소무는 궁성을 벗어나 성 밖으로 향했다.

무명옷에 죽립을 눌러 쓴 사복 차림으로 나왔다. 게다가 허리춤에는 한 자루의 검까지.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이 그를 통과시켜줄 리가 없었다.

“명패를 보여주시고, 무림인이라면 소속을 밝히시오.”

섬서에서만큼은 무림인이라 할지라도 신원이 확인되어야만 성문을 통과할 수 있다. 마교의 이름을 앞세운 휘나라의 첩자들을 색출하기 위해서였다.

소무는 죽립을 살며시 들어 올려 보였다. 그러자 얼굴을 알아본 병사들이 왼쪽 가슴에 주먹을 얹으며 소리쳤다.

“충(忠)!”

병사들은 그 어느 때보다 기합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섬서의 영웅이자 자신들의 우상이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수고들 해.”

병사들은 성문을 통과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기립했다.

“잘 다녀오십시오!”

소무는 어깨 위로 왼손을 들어 올리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왼손이 내려진 순간, 그는 이미 시야에 존재하지 않았다.

성내에서는 어지간하면 경공을 사용하지 않는다. 민간인들이 놀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문을 나선 이후부터는 얘기가 달랐다.

화살처럼 쏘아져 나가는 그의 신형은 남쪽으로 향했다.

바람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그의 뒤로 돌풍이 몰아쳤다.

그가 한 시진을 내달려 도착한 곳은 용유현의 나루터였다. 나루터에도 오십여 명의 관군이 포진하고 있었다. 한중성에 소속된 병사들이었다.

소무는 정박해 있는 상선으로 다가갔다.

선박 아래에서 적재 물품을 검사하는 세 명의 병사들. 그들에게 다가가 나직이 물었다.

“이곳의 책임자가 누구인가.”

병사들의 얼굴에 경계감이 떠올랐다. 죽립을 눌러쓴 채 검까지 착용하고 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누구시오?”

시선을 끌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렇기에 조용히 한마디를 내뱉었다.

“충무교위 소무.”

신원을 밝혔지만 이어지는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병사들의 얼굴에 노기가 서렸다.

난데없는 적개심에 소무는 어리둥절했다.

“충무교위 소무라…….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도 한 놈이 왔었지.”

“당장 체포해!”

소무는 다짜고짜 공격해오는 병사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가장 가까이 있던 병사가 목을 움켜쥐려는 듯 손가락을 뻗어왔다.

‘적나수로군.’

적나수(的拿手). 상대의 혈맥을 잡아 비트는 관군의 기술이다.

뒷짐을 쥔 소무는 슬며시 반보를 비켜섰다. 그러자 그를 낚아채려던 병사가 헛손질하며 휘청거렸다.

소무가 움켜쥔 검집이 그의 등을 툭 하고 건드렸다.

“적나수는 자신보다 강한 상대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자존심이 상한 병사들에게 소무의 말은 들리지도 않았다. 또 한 명의 병사가 그를 향해 앞발을 내지르고 있을 뿐이었다.

그 순간 소무의 상체가 뒤로 슬쩍 젖혀졌다. 그의 앞가슴으로 군화가 지나치며 먼지를 뿜어냈다.

파앗-!

관군의 격투기술 중 하나인 회륜각(回侖脚)이었다.

소무를 스쳐 지나간 군화는 각도를 틀며 다시 그의 머리를 노렸다. 그러나 초식을 마치기도 전에 소무는 이미 비켜서 있었다.

“공격과 방어는 동시에 해야 한다.”

훤히 드러나 보이는 옆구리. 그곳을 향해 검 손잡이가 콕 하고 찔렀다.

“윽!”

그 순간 소무의 고개가 옆으로 젖혀졌다. 기다렸다는 듯이 어깨 뒤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주먹. 그의 얼굴에 세찬 바람이 뿜어졌다.

파앙-!

“기습은 언제나 급소를 노리거라.”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의 검집이 먼저 움직였다.

어깨 뒤로 뻗어 나간 검집의 끝은 기습을 가한 병사의 인후에 닿아있었다. 그대로 꽂았으면 죽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병사들은 이제야 무엇인가 이상함을 느낀 듯했다. 긴장한 몰골로 섣불리 공격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 정체를 밝히시오.”

“조금 전에 말하지 않았는가.”

소무는 죽립을 벗으며 상선을 바라보았다.

재밌는 구경거리라도 생겼다는 듯, 상인들이 갑판에 달라붙어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상인들을 비집고 병사 한 명이 쏜살같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경공까지 펼치면서 말이다. 붉은 술이 달린 투구를 쓴 것으로 보아 이곳을 책임진 장교인 듯했다.

“비켜!”

길을 막고 있던 병사들이 황급히 좌우로 물러섰다.

틈새를 비집고 들어간 장교는 다짜고짜 소무를 공격했던 병사들을 걷어찼다.

콱-! 콰직-!

“크윽!”

“컥!”

위관급의 장교답게 그의 발차기는 일품이었다.

쓰러진 병사들을 뒤로한 채 그는 곧바로 소무를 향해 다가갔다. 그러고는 한쪽 무릎을 꿇고 양손을 모아 소리쳤다.

“교위님을 뵙습니다! 부하들이 결례를 범했으니 죽여주십시오!”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지켜보던 병사들이 화들짝 놀랐다. 갑판 위의 상인들도 웅성거렸다.

섬서 제일의 맹장이 직접 이곳에 나타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리고 그를 향해 병사들이 주먹과 발길질을 날린 것이다.

공격이 성공하진 못했지만, 참수를 당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의 하극상이었다.

“무슨 연유였던 거지?”

“죄송합니다. 최근 교위님을 사칭하는 놈이 있었기에 오해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고개를 한 번 끄덕인 소무는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일어서라는 의미였다. 이어서 쭈뼛쭈뼛 일어서는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위관답게 처세술이 뛰어나군.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 내가 보는 앞에서 먼저 제재를 가하다니.”

“그, 그게…….”

자신의 속내가 들켰기 때문일까? 장교는 당황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그를 지켜보던 소무의 입가가 작은 미소를 그렸다.

“애초에 명패부터 보여주지 않은 내 문제도 있겠지. 그러니 신경 쓸 것 없어.”

“무례를 용서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소무는 병사들이 넋을 놓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조금 부담스러웠다. 죽립을 다시 눌러쓰며 나직이 말했다.

“저 상선은 언제 출항하지?”

“적재화물의 검사가 끝나는 대로 떠날 것입니다. 원하신다면 바로 출항시키겠습니다.”

소무는 고개를 가로로 내저으며 선박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원칙대로 해. 하지만 조금은 서둘러 줬으면 좋겠군.”

그의 시선이 상단의 대표로 짐작되는 인물을 향해 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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