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시장 교란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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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화 시장 교란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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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화 시장 교란자 (1)
2022.07.04.
“괜찮으시면 배에 좀 얻어 탈 수 있겠습니까?”
상단의 단주는 붉은 비단옷을 입고 있는 젊은 여성이었다.
호전적인 뱃사람들을 능숙하게 부릴 만큼 수완이 대단한 그녀는, 소무를 향해 눈웃음까지 보내며 재빨리 승낙했다. 손해 볼 것이 없다는 계산이 나왔기 때문이다.
“호호. 오히려 저희가 영광입니다. 그런데 어디까지 가시는지요?”
“그냥 바람이나 쐬고자 함이니, 적당한 곳에 이르면 알아서 내리겠습니다.”
절도사 장양과 함께 신성처럼 떠오르는 인물이었다. 섬서에서만큼은 어딜 가나 화젯거리나 되는 유명인사가 아니던가. 그가 한가하게 유람이나 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
내심 목적이 궁금했지만 캐물을 수도 없는 노릇.
“편하신 대로 하십시오. 그럼 정식으로 제 소개를 하겠습니다. 화평상단의 단주 여희입니다.”
소무도 양손을 모으며 화답했다.
“안서절도사 휘하의 무관 소무입니다.”
여희의 얼굴이 한층 더 밝아졌다.
사람을 상대하는 상단의 단주답게 그녀의 눈썰미는 보통이 아니었다. 적어도 상대에게 불순한 의도가 없다는 것은 단숨에 눈치챌 정도로 말이다.
“하선하실 때까지 편히 지내시면 됩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시다면 무엇이든 말씀만 하십시오.”
“고맙습니다.”
그녀와 인사를 마친 소무는 선수 쪽으로 나아갔다.
뱃사람들이 곳곳을 뛰어다니며 출항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닻을 올려라!”
항해사의 고함과 함께 배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원하고 기분 좋은 바람이 소무의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모처럼 바람을 쐬며 여유를 즐기는 것이 얼마 만이던가. 기분이 한결 편안해지며 정신이 맑아졌다.
출발한 지 두 시진이 지났을 즈음이었다.
상단주 여희가 은근슬쩍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아시다시피 저희 상단의 본거지는 한중에 있습니다. 예전부터 꼭 한번 뵙고 싶었답니다. 지금은 장안에 머무르고 계시지요?”
소무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
“한중을 지키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우셨다고 들었습니다. 언젠가 고맙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었습니다.”
“녹을 먹는 관군으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니, 담아두지 마십시오.”
여희는 고개를 가로로 내저으며 반보를 더 다가왔다.
“관에서 민간을 위해 많은 일을 하고 계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한중을 중원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로 만든 것도 모자라, 장안의 경제도 빠르게 회복되고 있지요.”
“절도사께서 품으신 첫 번째 목표는 굶주린 자들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여희는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저희 상단에서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말씀해주십시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심 그녀의 속내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상단은 이윤을 최우선으로 두는 것이 원칙 아닌지요?”
“절도사께서는 우리 한중의 백성들에게 아버지와도 같은 분이십니다. 지금도 상단의 수익금 중 이 할을 관에 헌납하고 있답니다.”
상단의 이름을 내걸고 거짓을 고할 리는 없을 것이다.
그녀의 말에서 분명한 진심이 느껴졌다. 그것이 소무의 마음을 움직인 것일까? 죽립에 감춰진 그의 입가가 옅은 미소를 그렸다.
“조만간 군단에서 거래할 상단들을 모집할 것입니다. 제가 추천서를 한 장 써드릴 테니 한번 지원해 보십시오.”
“거래라면 어떤……?”
“군단의 보급물자 조달과 전리품 매각을 위임할 것입니다.”
그동안 전장에서 수거한 적군의 무기나 방패 따위의 전리품 재고가 넘칠 정도로 많았다.
금속은 용해하여 다시 재활용이 가능한 값비싼 원자재로 분류된다. 마침 그것을 처리해줄 능숙한 상단을 모집할 참이었다. 보급물자의 조달 또한 자체적으로 진행하자니 곳곳에서 낭비가 많았다.
여희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그, 그것이 정말입니까?”
절도사 직속의 정오품 무관이 직접 작성해준 추천서. 그것이라면 틀림없이 우선협상권을 갖게 될 터. 상단의 규모를 키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나 마찬가지였다.
“화평상단뿐 아니라 나라에 공헌도가 높은 상단들은 좀 더 나은 대우를 받게 될 것입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소무는 선실로 들어가 추천서 한 장을 작성해주었다. 거래의 성사 여부는 그녀의 재량에 의해 결정될 일이었다.
“추천서가 있다고 한들 상단의 능력이 부족하다면 탈락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없습니다. 그럼 다음번엔 궁성에서 뵙겠군요.”
자신감이 대단했다. 어쩌면 이러한 상황은 그녀가 의도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아무려면 어떠한가. 서로가 손해 볼 것이 없는 일이었으니.
선실에서 그녀와 차를 마시고 있을 때쯤이었다. 갑자기 갑판이 소란스러워졌다.
잠시 후 갑판장이 들어와 보고했다.
“단주님, 용강수로채 놈들입니다.”
순간적으로 소무의 눈빛이 반짝였다. 무엇인가가 이상했기 때문이다. 수적을 만났음에도 갑판장의 얼굴이 너무나 평온하지 않은가.
상단주인 여희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금의 상황이 무척이나 익숙한 듯 보였다.
그녀는 선실 어딘가에서 가죽 주머니를 꺼내어 갑판장에게 건네려고 했다.
지켜보던 소무가 그녀의 손을 감싸며 제지했다.
“이게 무엇입니까?”
여희가 의아하다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통행료입니다. 내지 않으면 통과할 수 없으니까요.”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아무래도 관행처럼 여기는 모양이었다.
“언제부터 통행세를 내왔던 것입니까?”
“이 년쯤 되었습니다. 관에서 일부러 묵인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군요.”
과거 황제가 남하할 때 한수 유역의 군함들을 모두 징발했다.
그것은 이곳의 수적을 더욱 성장시켜주는 결과를 초래하고야 말았다. 적군을 막아내기도 벅찬 관군이 함선을 새로 건조하여 수적을 토벌할 여력이 어디 있었겠는가.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지금 이 순간부터 통행료는 없습니다.”
수적들과의 담판. 그것이 소무가 상선에 탑승한 이유였다.
그가 일어서려 하자 여희가 화들짝 놀라며 만류했다.
“뭐, 뭘 하시려는 겁니까?”
“관원이 수적을 만났는데 어찌 두고 볼 수만 있겠소.”
여희는 다급해졌다. 혼자서 뭘 어쩌겠다는 말인가.
아무리 맹장이라 소문난 인물이지만 무리라고 생각했다. 만약 수적들의 심기를 건드렸다간, 그 피해를 고스란히 상단이 입게 될 터.
“저희는 괜찮으니 제발 고정하십시오. 혼자서 어찌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녀의 만류도 잠시. 소무는 이미 선실 밖으로 나서고 있었다.
“그럼 다음에 뵙지요.”
그의 뒷모습을 갑판장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단주님. 이제 우린 망했습니다.”
여희도 머리가 지끈 아프다는 듯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래도 저분이 쉽게 당하진 않을 거야. 무슨 생각이 있겠지.”
“그냥 미친 것 같은데요? 함선이 세 척입니다. 용강수로채의 수적들은 모두 무공까지 익혔다고요. 무슨 수로 혼자서 상대합니까?”
상인들은 강함의 척도를 알지 못한다. 그저 귀동냥으로 듣는 것이 대부분이었으니.
“어서 나가봐야겠어.”
여희와 갑판장이 선실 밖으로 나왔다.
세 대의 함선이 관문처럼 길을 막고 있었다. 돛대에는 용강수로채를 상징하는 깃발이 보였다.
“통행료를 내든가 뒈지든가! 일각 주겠다!”
갑판 위에 수적들이 늘어서서 활을 움켜쥐고 있었다. 굳이 조준할 필요도 없다는 듯 완벽히 방심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들의 눈빛은 빨리 통행료나 내고 꺼지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때 중앙에 있던 함선이 다가와 갑판을 붙였다. 그러고는 나무판자로 다리를 놓았다.
쿠웅-!
머리에 두건을 눌러쓴 수적 한 명이 박도를 움켜쥐고 성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순간 반대편에 죽립을 눌러쓴 검객이 길을 막아섰다.
“넌 뭐야?”
퍼억-!
다짜고짜 소무의 앞발이 그의 가슴을 강타했다. 아니 그런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을 제대로 본 사람이 없었으니.
“크윽!”
붕 떠오른 수적은 자신이 타고 왔던 배로 날아가 데굴데굴 굴렀다.
동시에 수적들이 상단주인 여희를 향해 소리쳤다.
“감히 무사를 고용해?”
“한번 해보자는 거지?”
“너넨 오늘 전부 죽었다고 생각해라!”
여희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갔다. 갑판장이 어두운 표정으로 그녀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단주님, 이제는 돌이킬 수가 없겠습니다. 저분께서 쓰러지는 순간 바로 배를 돌리겠습니다.”
“……소용없어. 우리 배는 저들보다 느려.”
“화물과 보급품을 모두 버린다면 약간의 가능성은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절망에 빠진 눈으로 소무를 응시했다.
그때 갑판에 서 있던 그의 신형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그러더니 무려 오 장을 날아 건너편의 배에 사뿐히 착지해버렸다.
새처럼 가벼운 몸놀림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여희의 얼굴에 일말의 기대가 피어올랐다.
“너, 저런 거 본 적 있어?”
“저도 말로만 들어봤습니다. 무림의 고수 뭐 그런 거요.”
“그럼 저것도 들어본 적이 있어?”
입을 떡하니 벌린 갑판장은 금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렸다. 수적 한 명이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 목을 움켜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도 그의 몸에 손을 대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저 일 장 거리에서 소무가 한 손을 내뻗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소리쳤다.
“고작 한 명이다! 당황하지 말고 한 번에 덮쳐!”
소무를 포위한 삼십여 명의 수적들. 박도를 움켜쥔 그들이 동시에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화평상단의 선원들이 숨을 죽인 채 지켜보았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면서도 알 수가 없었다. 단지 경쾌한 타격음이 폭풍처럼 몰아치고 있을 뿐이었다.
동시에 하나둘씩 허공으로 떠오르는 수적들. 그들의 입에서 숨 막히는 비명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큭!”
“크헉!”
눈 깜짝할 사이, 함선 위의 모든 수적이 대짜로 드러누워 있었다. 그중에서 크게 다친 자는 없어 보였다. 무슨 이유인지 소무가 손속에 사정을 두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쯤 되자 돕기 위해 다가가던 두 척의 함선이 동시에 정지했다. 지원한다고 한들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화평상단의 갑판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우, 우리 편이 이긴 것 같은데요?”
그냥 이긴 정도가 아니었다. 그야말로 일방적인 응징이었다.
잠시 뒤 용강수로채의 함선 세 척은 서로 무엇인가를 주고받더니 뱃머리를 돌려 시야에서 멀어져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여희가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한중에 복귀하면 지금 본 모든 것들을 상인조합에 알려줘. 어쩌면 앞으로는 정말 통행료를 내지 않아도 될지 모르겠어.”
* * *
한편 용강수로채의 함선으로 옮겨 탄 소무는 뱃머리에서 뒷짐을 지고 있었다.
그의 뒤로 얼굴이 불어터진 수적들이 뻘쭘한 모습으로 기웃거렸다. 아직도 충격이 가시지 않은 듯했다.
선장으로 보이는 자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우린 관군을 도와 휘나라의 수군을 격파하기까지 했습니다. 이거 너무한 것 아닙니까?”
“그렇기에 너희들이 지금도 멀쩡히 살아있는 것이다. 나라가 혼란에 빠진 틈을 노려 백성들의 재산을 강탈해온 죗값을 어찌 그것만으로 갚을 수 있겠더냐.”
“그럼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네가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소무는 입을 닫고는 계속해서 먼 곳을 응시했다.
선장이 한숨을 내쉬며 등을 돌렸다. 얻어맞은 우측 어깨가 저리는지 왼손으로 붙잡고 빙빙 돌려댔다.
그때 부하 중 한 명이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본채로 데려가실 겁니까?”
“어차피 한 명이야. 지가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한들 그곳에서 뭘 어쩌겠어? 어리석게도 죽을 자리에 스스로 가고 싶다고 하니 고마운 일이
“하긴, 채주님을 만난다면 뼈도 추리지 못할 것입니다.”
“당연하지. 도착하기만 하면 이 수모를 되돌려줄 것이다.”
잠시 후 세 척의 함선 중 한 대가 먼저 앞질러 나가기 시작했다. 본채가 대비할 수 있도록 미리 정보를 전하기 위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