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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화 시장 교란자 (2) (155/250)


155화 시장 교란자 (2)
2022.07.05.


뱃머리에 우뚝 선 소무는 느긋하게 주변 경관을 구경했다.

양쪽으로는 깎아지른 벼랑이 마주 보고 있으며, 먼 곳으로 수려한 산봉이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한수강에서 가장 험준한 구간으로 알려진 운문협이었다.

이곳은 물살이 급하고, 여울이 많아 배가 다니는데 가장 위험한 구간이다.

배가 뒤집힐 듯 휘청거리자 수적들이 갑판을 부여잡고 몸을 가누기 시작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뱃머리를 바라보며 혀를 내둘렀다. 뒷짐을 쥔 소무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게 사람이야, 귀신이야?”

“이거 지금 우리가 실수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

마치 여우굴에 범을 데려가는 것 같은 느낌. 본능적인 불길함이 그들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그러나 이제는 돌이킬 수가 없었다.

“돛을 내려라!”

소무의 눈동자가 좌측의 어딘가로 향했다.

높게 솟은 두 개의 봉우리 사이에 드러난 낮은 분지. 그곳에 이십여 척의 함선이 정박해 있었다. 목적지에 당도한 것이다.

‘제법이군. 급류가 끝나는 지점에 터를 잡다니.’

급류를 끼고 만들어진 본거지는 적을 상대하기에도 유리하며, 도주하기에도 적합한 위치였다.

제법 전술을 아는 인물이었다. 이곳의 채주가 어떤 인물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소무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함선 한 척을 먼저 보냈으니, 고수들이 몰려나와 뭍에서부터 방어를 준비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이곳에는 고요만이 감돌았다.

오히려 같은 함선에 타고 있던 수적들이 더욱 당황했다.

“다들 어디 간 거야?”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야?”

수적들이 갑판 위에 달라붙어 고개를 갸우뚱했다.

모든 곳이 평상시와 다름없이 평온하기만 했다. 무슨 연유인지는 본채로 가보면 알게 될 터.

소무는 뱃머리에서 날아올라 뭍으로 내려섰다. 길은 하나뿐이었으니 안내 따위는 필요 없었다.

좌우로 갈대가 우거진 숲길이 꼬불꼬불 이어져 있었다.

삼백여 장을 전진할 동안 한 명의 수적도 마주칠 수 없었다.

깊숙이 들어가자 질퍽한 숲길이 끝나며 넓은 분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전각 하나를 중심으로 수십여 채의 작은 전각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곳에 대열을 갖추어 늘어선 수백 명의 수적들. 그들 중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다가와 나직이 말했다.

“채주께서 기다리시니 어서 들어가 보십시오.”

고개를 한 번 끄덕인 소무는 중앙의 전각을 향해 걸었다.

목적지에 당도하자 문이 저절로 열렸다.

끼이익-!

호피로 장식된 탁상을 끼고 한 사내가 앉아있었다.

백의 장삼에 정리된 머리칼, 단정된 수염까지. 수적들의 수장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외모였다.

그리고 또 하나. 한계를 짐작할 수 없는 심연 같은 기운이 그의 전신을 은은히 감싸고 있었다.

“연화차(姸花茶)입니다. 맛이 괜찮으니 한번 들어보시지요.”

채주가 맞은편의 찻잔에 차를 채워 넣었다.

마주 앉은 소무는 망설임 없이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괜찮군.”

“어찌 의심하지 않고 마시는 것이오?”

“알고 있지 않소. 그 어떠한 독을 풀었다고 한들 나를 어찌할 수 없음을.”

화경의 경지에 접어들면 만독불침(萬毒不侵)의 체질을 가지게 된다. 하물며 섬서 제일의 맹장이 그 단계를 이루지 못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채주가 그것을 간과하고 일을 벌일 리가 없었다.

“물론 잘 알고 있소. 랑아대의 대장 귀검추혼(鬼劍追魂) 소무.”

“귀검추혼……?”

“무림인들이 당신을 그리 부르더이다. 검을 귀신같이 다룬다고 하여 붙여놓은 별명이겠지요.”

“그런 것 따위는 관심 없소.”

소무는 품속에서 명패를 꺼내어 탁상 위에 올려놓았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그것을 확인한 채주는 오히려 미소를 머금었다.

“대담하시군요. 혼자서 이곳을 토벌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필요하다면.”

“협상하러 오셨다는 말로 들리는군요.”

그 순간 채주가 손가락을 한 번 튕겨냈다. 그러자 탁상 위에 있던 그의 찻잔이 날아올랐다. 일반인이 맞는다면 두개골이 으깨질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소무는 미동조차 없었다. 단지 지그시 응시하고만 있을 뿐이었다. 자신이 뿜어낸 무형의 강기가 찻잔을 감싸는 것을.

찻잔은 그의 얼굴 한 치 앞에서 정지했다.

“잔기술을 용납하는 것은 한 번뿐이오.”

허공을 맴돌던 찻잔은 다시 천천히 주인의 자리로 돌아갔다.

“역시나 짐작했던 대로군요. 우리가 왜 관에 협조하여 휘나라와 싸웠을 것 같습니까? 빼앗긴 함선들을 되찾기 위해? 후후. 그건 핑계였습니다. 모두 당신 때문이었을 뿐.”

죽립 아래로 감춰진 소무의 얼굴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나를 뒷조사했다는 말로 들리는군.”

“용강수로채의 운명과 직결되는 문제였기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결론은?”

채주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찻잔을 움켜쥐었다.

“나는 검성과 싸울 만큼 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정체를 이미 파악하고 알고 있었다. 서로가 구면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소무는 한숨을 내쉬고는 죽립을 벗어버렸다. 오히려 얘기가 빨라질 테니 나쁠 것도 없었다.

“추혼이검(追魂利劍) 적운. 패력문에 있던 당신이 용강수로채의 채주가 되었을 줄은 상상도 못 했군.”

패력문은 약 칠 년 전에 강호에서 지워진 이름이다.

중도 성향의 문파 중에서는 살문과 함께 세력이 가장 막강했지만, 정체불명의 세력에게 멸문을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적운은 패력문의 제일 고수였던 자였다.

“검성께서 저를 기억해주시니 영광입니다.”

“어찌 된 일이오? 패력문이 멸문을 당했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렇다 해도 당신이 고작 수적질이나 하고 있다니.”

적운은 씁쓸한 미소로 찻잔을 비웠다.

“문파가 습격을 당했을 당시 저 혼자만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혼자서 복수를 꿈꾼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지요. 세력을 만들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용강수로채를 접수한 것이군. 패력문을 습격했던 상대는?”

“영교라는 집단이었습니다. 지금은 신마교의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지요.”

소무는 피식하고 웃었다.

“무림맹도 그들을 어찌하지 못하고 있는 마당이오. 수적들의 수준으로는 어림도 없소.”

“분하지만 인정합니다. 하지만 수상전이라면…….”

“그들은 바보가 아니오. 게다가 뒤에는 휘나라가 있는데 감당할 수 있겠소?”

“……물론 힘들겠지요.”

용강수로채의 채주에게 이러한 사연이 있을 줄 어찌 알았겠는가. 예상외로 일이 쉽게 풀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은 용강수로채를 군단의 수군으로 편입시키기 위함이었소. 목적이 같으니 함께하는 것이 어떻소?”

적운은 이미 예상하였다는 듯 놀라지 않았다.

“얼마 전 한중의 병사들과 함께 적국에 맞서 수상전을 치렀지요. 당시 우리의 가슴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습니다. 하지만…….”

소무는 그가 바라는 것이 있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조건이 있다? 원하는 것을 말씀해보시오. 수군을 공짜로 얻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으니.”

“부하들이 정식 관군으로서 합당한 녹봉과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렇지 않다면 제가 명령한다고 한들 모두 흩어지고 말 것입니다.”

“약조하겠소. 이미 그러려고 했던 부분이니. 그런데 표정이 별로 안 좋아 보이는 것 같소.”

“…….”

소무는 이미 그의 속내를 짐작하고 있었다.

무림인은 본디 관군을 하찮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마음은 수락하였지만,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는 것이리라.

“세상이 변했으니 자긍심을 가지시오. 패력문과 함께 멸문당한 살문, 그곳의 문주도 우리와 함께하고 있으니. 지금은 절도사의 호위무사를 하고 있소.”

“살왕이 말입니까? 어찌 그자가 겨우 호위무사를…….”

전설적인 살수인 그가 자존심을 팽개치고 일개 호위무사를 하고 있다니? 검성에 이어 살왕까지, 쟁쟁했던 무림 출신의 고수들이 뭉치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강호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의 설렘과도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선 소무는 얼굴이 상기된 적운에게 마지막 말을 남겼다.

“차 잘 마셨소. 마음이 정리되는 대로 장안으로 올라오시오. 절도사께서 당신을 만나보고 싶어 하시니.”

* * *

랑아대의 막사.

모처럼 이곳에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나라의 명절을 맞아 하루 동안 모든 훈련소가 폐쇄되었다. 관원들도 대부분 하루 동안의 짧은 휴가를 받은 상황이었다.

소소는 앞으로 드러누워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시시덕거리는 삼촌들의 모습을 말이다. 다리를 올렸다 내렸다 하는 게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곳곳이 시끌벅적했다.

어느 순간 붓대를 움직이던 소소의 손이 멈추었다. 삼촌들의 대화 중에 흥미로운 내용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너 우리 대장님이 만나시는 분 알지?”

“한 번 봤어. 그렇게 도도하고 아리따운 여인을 말주변도 없는 대장님이 어떻게 꼬셨나 몰라.”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알고 보니 무림의 절대고수였대.”

“이제 알았어? 너만 모르고 있던 거야.”

“빌어먹을. 랑아대에서 나 혼자 따돌림 당하고 있었나 보네. 그나저나 혼인은 언제 하신대?”

“모아놓은 돈이 있어야 하지. 딸 선물 사주랴, 설화원에 기부하랴. 한 푼도 없을걸?”

누워서 그림을 그리던 소소가 벌떡 일어섰다. 그러더니 뒤쪽으로 가서 자신의 개인 상자를 열어보았다.

옷가지를 들어 올리자 엄청난 양의 엽전이 숨겨져 있었다. 그동안 받은 녹봉들. 그리고 모아놓았던 용돈이었다.

무엇인가를 고민하던 소소는 상자를 다시 닫았다.

그때 일광이 막사 안으로 들어오며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하하핫!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일광 형님, 무슨 일이에요?”

“전장에 가보니 은자 시세가 엄청나게 올랐어. 미리 바꿔놓길 잘했다니까?”

전장(錢莊)은 엽전과 지폐를 교환해주거나, 은자나 금자로 바꿔주는 환전기관이다.

몇몇 대원이 동시에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들도 급료를 은자로 환전해놓았던 모양이었다.

옆에 있던 청해가 물었다.

“얼마나 올랐는데요?”

“오늘 하루만 거의 이십 냥이 올랐어.”

은밀히 듣고 있던 소소는 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하루 만에 이십 냥이라니. 탕후루 열 개는 사 먹을 수 있는 돈이었다.

“일광 삼촌! 은자 한 개에 얼마예요?”

기분이 좋은 일광은 소소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엽전 이백삼십 냥. 너도 돈이 모이는 대로 빨리 바꿔놔. 계속 오르고 있어.”

“내일도 올라요?”

“그야 당연하지! 황실이 없어진 뒤로 나라에서 은자 생산이 중단되었대. 앞으로 두 배는 더 오를 거라더라.”

소소는 다시 관물대로 달려가 개인 상자를 열었다. 그러고는 엽전을 모두 꺼내 얼마나 모였는지 세기 시작했다.

지켜보던 삼촌들이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와~ 언제 이렇게 많이 모았대?”

“우리 소소, 부자인데?”

엽전 세는 것을 지켜보던 일광이 은근슬쩍 자신의 두 냥을 밀어 넣었다.

잠시 뒤 소소가 엽전 더미를 부둥켜안고 기뻐했다.

“이백삼십 냥!”

공교롭게도 은자 하나의 가격과 딱 맞아 떨어졌다. 물론 일광이 두 냥을 몰래 보태줬기 때문이었다.

소소는 엽전을 가죽 주머니에 가득 담았다. 허리에 묶으니 참외 같은 배에 혹이 달린 듯했다.

일광은 자신이 좋은 정보를 알려줬다는 듯 연신 뿌듯한 표정이었다.

“지금 가서 바꾸려고?”

“빨리 가야 해요. 더 오르면 어떡해요?”

“청운표국 옆에 붙어 있는 태웅방으로 가봐.”

태웅방은 중원에서 가장 큰 전장이다.

중원 전체의 거래 중 절반 이상이 이곳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중에 본점을 두고 있고, 최근엔 장안에도 지부를 설립한 상태였다.

“다녀오겠습니다~”

마음이 급한 소소는 한달음에 태웅방으로 달려갔다.

최근 시세가 요동치고 있었기 때문인지 입구에서부터 손님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반 시진이 지나서야 드디어 소소의 차례가 당도했다. 가죽 주머니를 풀어 눈높이에 이르는 탁상에 엽전을 쏟아냈다.

“아저씨, 은자 한 개 주세요!”

점원이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심부름을 왔구나? 이게 다 얼마니?”

“이백삼십 냥이요!”

“이거 어쩌지? 지금은 이백삼십일 냥이야.”

일광이 올 때까지만 해도 이백삼십 냥이었다. 그새 또 오른 모양이었다.

하루에 가격 변동이 최대 일 할이었으니 상한선의 가격이었다.

어쨌거나 한 냥이 부족했다. 소소의 얼굴이 순식간에 울상으로 변해갔다.

“히잉. 한 냥이 부족해요…….”

“미안하구나, 아가야. 어쩔 수가 없겠구나.”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소소는 품속에서 비상식량을 꺼내 들었다. 아침에 할아버지의 집무실에서 들려서 가져온 당과였다.

“아저씨, 이거 먹어봤어요? 한 냥에 저한테 살래요?”

점원은 참지 못하고 낄낄대고 웃었다. 그러더니 자신의 주머니에서 동전 한 닢을 꺼내어 탁상 위에 올려놓았다.

“당과는 네가 먹거라. 아저씨를 웃겨준 대가로 한 닢 보태주마.”

“히히히.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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